[질라라비/201801] 단결·연대·투쟁, 당연한 결론과 과제에 대한 이야기 / 엄진령

by 철폐연대 posted Jan 10,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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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결·연대·투쟁, 당연한 결론과 과제에 대한 이야기

- 2017년 철폐연대 기획사업에 대한 소고

엄진령 (전국불안정노동철폐연대 상임집행위원)

 

 

2 2017.12.9. 노동자수다회 '비정규직 모여라' [출처 철폐연대].jpg

사진 2017.12.9. 노동자수다회 '비정규직 모여라' [출처: 철폐연대]

 

박근혜 정권 퇴진을 위해 촛불을 들기 시작한 지 1년이 되었다. 그리고 곳곳에서 그 1년, 광장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행사들이 열렸다. 하지만 노동자들이 바라는 평등세상은 아직 광장을 맞지 못한 것처럼, 여전히 목동 열병합발전소 저 높은 굴뚝에 자본과 보수정권에 저항하는 노동자들이 올라 있고, 바로 12월 차가운 눈발이 날릴 때까지 여의도 광고탑에는 특수고용, 건설기계 노동자의 권리보장을 요구하며 고공농성이 이어졌다. 그리고 여전히 거리의 투쟁을 이어가는 수많은 노동자들이 있다. 광화문을 가득 메웠던 민주주의의 열망을 만들어낸 것은 불평등하고 공정하지 못한 사회, 내일이 불안한 사회, 오늘의 고통이 참기 힘든 지경에 이른 민중들의 삶이었지만, 광장의 외침은 불안정한 삶과 일터로 내몰린 노동자의 목소리가 되지는 못했다. 그래서 2017년 한 해 동안, 철폐연대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목소리를 적극적으로 세상으로 내보내기 위해 움직였다. 비정규직의 목소리를 모아 새 정부의 정책이 혹여나 노동자를 외면하는 것이 되지 않도록, 또 비정규직 문제를 이용하는 것이 되지 않도록 하고자 했고, 이러한 취지에 바꿈·세상을바꾸는꿈, 공익인권법재단 공감, 예술인소셜유니온, 알바노조, 청년전태일 등이 응답했다.

 

첫 활동은 대선 대응이었다. 대선 시기 ‘#나의비정규직공약’이라는 명칭으로 비정규직 노동자의 요구를 설문조사 및 노동자·시민 집담회를 통해 수렴하였다. 모두 329명이 참가해 416개의 요구를 수렴하였고, 이를 대선후보들에게 제기하고 각 후보캠프의 답변을 통해 후보들의 비정규직 문제에 대한 인식과 정책을 확인하였다. 현재 정부를 운영하고 있는 당시 문재인 후보뿐만 아니라 대다수 후보들이 비정규직 문제에 대해 중요하게 생각하고 개선을 위한 방안들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비정규직 문제에 대한 이해 자체는 상당히 결여되어 있었다. 노동자들은 비정규직이라는 고용형태 자체가 차별의 근원이며, 노동자의 권리를 박탈하고, 착취를 강화하는 것이기에 철폐를 이야기하는데, 정치권의 처방은 비정규직이라는 고용형태는 불가피하다는 전제에서 출발하는 것이었다. 이로 인해 노동자들의 요구와 정치권의 공약이 설사 문구는 같더라도 그 속에 담은 내용은 천지 차이였고, 그 문구를 실현하는 정책집행의 과정은 당연히 비정규직 문제에 대한 제대로 된 접근이 되지 못한다. 그리고 새 정부 6개월이 지난 지금 우리는 그를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있다.

 

이후 하반기에는 소규모의 집담회를 두 차례 진행했고, 각 집담회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모아내는 것으로 진행되었다. “당신의 출근길은 안녕하십니까?” 라는 제목으로 진행된 집담회에서는 IT업종에 종사하는 여성노동자, 예술인 비정규직 노동자, 비정규직 교수, 조교로 일하고 있는 노동자, KTX 승무 노동자가 참가하여 자신들의 일과 권리를 보장하지 않는 불안정한 고용실태, 그리고 투쟁에 대한 이야기까지를 함께 나누었다. “비정규직법은 왜 악법인가” 라는 제목으로 진행된 두 번째 집담회는 비정규직법 개정만을 언급하고 있는 새 정부에 대응해 비정규직법으로 인해 직접 피해를 당한 노동자들이 직접 악법의 실체를 밝히는 자리였다. 2000년 파견법 시행 2년을 맞아 대량해고가 벌어졌던 방송사의 파견노동자, 2007년 기간제법 시행 이후 2년이 되자 집단해고되어 투쟁에 나섰던 KBS 무기계약직 노동자, 2007년 불법파견에 맞서 투쟁했던 코스콤 투쟁 당사자, 그리고 비정규직법에 의해 평생 비정규직의 삶을 강요당하고 있는 비정규교수, 학교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참가했다.

 

그리고 열 달에 걸친 긴긴 사업의 마무리로 새 정부의 비정규직 정책을 평가하는 토론회를 12월 9일 개최하였다. “할 말 있는 노동자들의 수다회 - 비정규직, 모여라” 라는 외침에 50여 명의 노동자들이 모였다. 예술인 비정규직, 기간제 교사, 돌봄교사, 비정규교수, KTX와 인천공항의 간접고용 노동자들, 셔틀버스와 대리운전 노동자, 외주출판노동자 등 특수고용 노동자들, 국가인권위원회와 KBS 그리고 서울지하철의 무기계약직 노동자, 요양보호사들, 마지막으로 손해배상소송으로 고통 받고 있는 노동자들까지 정말 다양한 노동자들이 모였다. 정부의 관련 정책이 아예 없는 영역부터, 정책은 있지만 정책에서 배제된 노동자들, 정부의 비정규직 정책으로 인해 오히려 고용이 더 왜곡될 지경에 처한 노동자들까지 함께 모여 자신들의 이야기를 공유하고, 정부의 정책에 대해 함께 평가했다. 정책이 달라져야 할 부분에 대해 의견도 제시했다. 이날 10점 만점으로 진행된 정부 정책에 대한 당사자 평가 결과, 정부의 각 영역 정책들은 모두 2점대에서 3점대 수준의 낮은 점수밖에 받지 못했다. 정권 초기부터 공공부문에서부터 비정규직을 없애나가겠다고 호언했던 정부이지만, 노동자들은 여전히 차별과 고용불안, 심지어는 손배소로 인한 생계의 위협에 고스란히 놓여있었다.

   

누군가는 어떻게 모든 사람의 요구를 다 충족할 수 있는가라고 생각할 수 있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요구가 높고, 너무 근본적인 해결책만 요구해서 정부의 정책이 성에 차지 않는 것이라고 여길 수도 있다. 그러나 지금 정부는 명백하게 약속을 지키지 않고 있고, 선전에만 급급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비정규직의 현실을 개선하겠다면 기존의 정책에서는 한 발 더 나아가려는 노력이 필요한데, 여전히 비정규직으로 살아가야 할 이들과 극소수 고용형태의 개선이라는 혜택을 받을 수 있는 노동자들을 분리한다. 그리고 혜택이라는 것도 사실 혜택이 아니다. 노동자로서의 권리를 보장하는 것이 아니라 사업자이지만 고용보험에 임의로 가입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것이 예술인 노동에 대한 정책이고, 노동3권을 보장하겠다고 했지만 여전히 업종을 분리해서 노조를 허가하고 있는 것이 특수고용 정책이고, 요양보호사와 같은 사회서비스 노동자들이 기대하는 사회서비스 공단은 선언만 있고 내용은 없다. 게다가 간접고용 노동자들에 대해서는 자회사를 통해서 고용한다는 또 다른 간접고용을 개선책으로 내세우니 파리바게뜨와 같은 민간기업에서도 불법파견 문제를 합자회사를 통해 해결하겠다는 꼼수를 부리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니 정부의 선언만을 듣는 이들에게는 세상이 달라지는 것 같지만, 당사자들에게는 너무도 문제가 많은 정책들인 것이다.

 

보다 중요한 것은 현재 정책의 문제점들이 아니다. 이러한 노동자들의 의견을 들을 자세를 현재의 정부가 취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우리의 기획사업은 시작부터 마무리까지, 비정규직 노동자의 목소리를 세상에 내보내겠다는 것이었고, 그 목소리를 들어야 할 이들에게 전달되도록 하고, 그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의 힘은 미약하여 정부는 선택적으로 귀를 열고, 비정규직 문제 해결에 반대하는 목소리에 비중을 실어 사회 주체들 간의 입장을 고려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비정규직 문제 해결은 그간 부당하게 권리를 박탈해 온 노동자들의 권리를 회복하는 것이어야 하는데, 오히려 그 회복의 과정이 특혜성 혜택으로 둔갑하고, 정부는 책임을 회피하고 있다. 열 달에 걸쳐 모여진 소중한 목소리들이 아깝기만 한 시간들이 이어지고, 질문은 다시 반복된다. “우리의 목소리가 들리나요?” 

 

그래서 우리는 다시 단결과 연대, 투쟁을 이야기한다. 정부에도 바라는 것이 많지만, 그 역시 스스로의 힘으로 쟁취해 나가지 않으면 오래가지 못한다. 그를 위해 더 많이 조직하고, 다른 노동자들의 투쟁에 더 폭넓게 함께하며, 우리 모두의 힘을 키워나가야 우리의 목소리를 제대로 듣게 할 수 있음을 안다. 노동조합 조직률 10% 이하, 비정규직 조직률 2% 이하라는 수치는 노동조합만의 권리 수준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이 땅의 모든 노동으로 살아가는 이들의 권리와 직접 맞닿아 있는 문제이며, 지금 노동조합을 갖지 못한 더 많은 수의 노동자들이 고통을 호소하고 있는 현실의 원인이기도 하다. ‘#나의비정규직공약’에서부터 수다회까지, 열 달의 시간 끝에 얻은 ‘단결, 연대, 투쟁’이라는 결론은 여전히 개별로 존재하는 노동자들에게는 낯설고 먼 단어들일 수 있다. 그 낯설음의 거리를 좁혀 나가는 것을 우리의 몫으로 다시금 확인하며 2017년의 기획사업을 마감한다. 여전히 우리가 가진 힘의 크기는 작지만, 끈질기게 하나하나의 목소리가 모여 세상을 바꿀 큰 바람으로 불기를 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