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라라비/201901] 반월시화, 오래된 공단의 새로운 노동조합들 / 정현철

by 철폐연대 posted Jan 07,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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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안정 노동자 조직화를 위한 전략과 실천

 

반월시화, 오래된 공단의 새로운 노동조합들

정현철 (민주노총 안산지부 부의장)

 

 

공장문을 열고 들어가면 새로운 세상이 펼쳐진다. 이 세상은 바깥세상과는 뚜렷이 구별되는 완전히 다른 세상이다. 이곳은 사장이 왕이고 법이다. 공장 밖에서 적용되는 법과 원칙은 통하지 않는다. 사장이 정해놓은 룰에 따라 움직이고, 사장의 말 한마디에 모든 것이 결정된다. 그래서 모두 사장의 입만 쳐다보고 있다. 공장에서 가장 흔하게 듣는 말 중 하나는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라’다. 맘에 들지 않으면 그만두라고 한다.

올해 초 최저임금 문제로 온 나라가 시끌벅적할 때에도, 반월시화공단은 조용했다. 많은 공장들은 ‘소리소문 없이’ 상여금을 기본급화하였다. 600% 하던 상여금 중 300%를 기본급화하여 최저임금으로 맞추고 임금을 동결하였다. 그대로 두었더라면 월 21만 원 정도의 임금이 인상되었을 터였다. 하지만 회사가 들이미는 취업규칙 변경 서명판에 울며 겨자 먹기로 사인할 수밖에 없다. 서명 거부는 곧 해고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반월시화공단 95% 노동자는 하루도 빠지지 않고 반복되는 ‘회사가 어렵다’는 말에, 불안감과 공포감에 시달리며 살아간다. 그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 팩트 체크해 볼 엄두도 못 낸다. 반월시화공단의 노동조합 조직률은 5% 수준이다. 전국 평균의 절반도 안 된다. 이 낮은 조직률이 공장과 세상을 더욱 딴 세상으로 만들었다. 온갖 갑질이 판쳐도 눈 꼭 감고 참고 살아간다. 일하다 다쳐서 며칠 쉬겠다고 하면 곱지 않은 시선으로 “나와서 청소라도 하라”고 한다. 그나마 정규직이어서 잘리지 않는 거라는 협박이 곁들여진다. 파견직은 일하다 다치면 바로 잘린다. 출산‧육아휴직을 하겠다고 하면 “새로운 관행이 만들어져서 안 된다”고 단박에 거절당한다. 법보다 위에 회사의 질서와 관행이 있는 것이다. 잔업이라도 뺄라치면 선임-반장-직장-공장장-생산본부장으로 이어지는 결재라인을 통과해야 한다. 공장 밖의 세상은 촛불항쟁 이후 많이 바뀌었다고 하지만, 공장 안은 변화를 찾기 힘들다. 역시 민주주의는 공장 문 앞에서 멈추는가 싶다.

 

1998년 IMF 이후부터 2016년 촛불항쟁 전까지는 반월시화공단에서 노조 만들기가 하늘의 별따기만큼 힘든 시절이었다. IMF 이후 숨죽여 있던 노동자들은 2000년 들어 분출하기 시작했다. 2000년 한 해에만 10개의 사업장에서 노동조합이 만들어졌다. 하지만 거센 탄압에 좌절해야 했다. 대표적인 사업장이 최초로 공격적 직장폐쇄를 단행했던 동아공업투쟁이다. 또한 노조를 인정하느니 폐업을 해버린 거도산업 투쟁도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리고 2003년 노동자변호사 출신 노무현 정부의 첫 공권력 투입사업장은 시화공단의 작은 회사인 금창공업이었다. 민주정부(김대중 정부) 이후 없어진 줄 알았던 관계기관대책회의(시흥시 국회의원, 시흥시장, 시흥시 상공회의소 회장, 시흥경찰서장, 안산노동부지청장 등)가 부활했고, 관계기관대책회의 다음날 새벽 농성 중이던 조합원들은 용역깡패의 침탈을 받아야 했다. 이에 항의하는 집회를 하고 해산을 하자 경찰은 기다렸다는 듯이 공권력을 투입하여 지도부 등을 연행‧구속하였다.

2006년에도 신규노조의 바람이 불었다. 대양금속, 승림카본, 건화 등의 사업장에서 노조가 생겼다. 대양금속은 용역깡패 투입, 직장폐쇄, 사업장 이전 등 종합탄압세트를 받고 사라졌으며, 승림카본은 직장폐쇄 3번이라는 진기록을 남겼다. 2009년 인지컨트롤스 투쟁은 복수노조가 새로운 탄압방식으로 사용되었고, 파카한일유압은 정리해고와 복수노조를 통한 노조탄압의 사례를 만들었다. 2014년 만들어진 오스람은 공장 청산이라는 극단적 방식으로 노조를 정리했다.

이런 시절에도 노조를 만들겠다는 사람들은 꾸역꾸역 생겨났다. 금속노조 노동연구원이 2014년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2000년부터 2013년까지 새롭게 조직된 노조는 201개 사업장이었으나, 2014년까지 남아있는 곳은 100곳이었다. 그렇게 만들고 깨지기를 반복하였다. 성공보다 실패의 확률이 높은 시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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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진분회 출투 [출처: 필자]

 

그러나 노동자들은 시대의 흐름과 변화를 더디지만, 민감하게 포착했다. 2015년 오스람투쟁 이후 숨죽였던 노동자들이 서서히 기지개를 켜기 시작했다. 광신판지분회, 금토일산업지회, 대창지회, 유진분회, 한국와이퍼분회, 현대위아안산지회, 한국환경개발지회, 에스티팜지회, 시화패션칼라조합지회. 2016년 하반기부터 올해까지 반월시화공단에 새롭게 생기거나 조직 전환한 민주노총 사업장들이다. 폭발적이라고 할 수는 없어도, 지난 10여 년간 생긴 노조보다 훨씬 많은 노조가 지난 2년 사이에 생겨났다. 무엇보다 인상적인 것은 대부분 큰 갈등 없이 노조가 안착되었다는 것이다.

회사는 대체로 노조를 인정하는 분위기였다. 이는 촛불항쟁이 가져다 준 사회적 힘이라고 생각한다. 지난 시기 자본의 가장 큰 힘은 사실 국가권력이었다. 정부가 뒷배를 봐주니 인정사정없이 노조를 두들겨 팼다. 회사의 폭력을 노동부와 경찰은 모른 체 하거나 공범자로 가담했다. 사장은 “우리 회사만 노조 생기는 것이 억울하다”고 했다. 그렇게 노조파괴 공작이 자행되었다. 수많은 노동자들이 피 흘리며 노조를 지켜내려고 몸부림 쳤다.

하지만 시대가 바뀌니 사장들의 태도도 바뀌었다. 노조가 생긴 것이 불안하고 분하지만 대체로 어쩔 수 없는 일로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노조 설립 후 처음 노사가 만나는 상견례 자리에서 한 대표이사는 “우리 규모의 회사에서 노조가 늦게 생긴 편”이라고 노조를 인정했다. 다른 사업장의 대표이사도 “노조를 인정한다. 서로 협력하자”고 했다. 노조가 만들어지면 주동자를 색출해서 무슨 수를 써서든 해고하고, 교섭 자체를 거부하던 태도에 비하면 격세지감을 느끼게 한다. 한편 노동조합도 회사의 상황을 고려하여 요구안을 만들고 합리적인 수준에서 교섭을 진행하는 등 회사를 대하는 태도가 훨씬 유연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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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와이퍼분회 [출처: 필자]

 

2016년 이후 반월시화공단의 노조 조직화 성공률은 100%에 달한다. 하지만 아직 멀었다. 반월시화공단의 노조 조직률은 여전히 우리나라 평균 노조 조직률의 절반 수준이다. 그리고 공공부문이나 서비스부문의 폭발적 조직화 흐름에 비하면 미미한 수준이다. 물 들어왔을 때 노 저으라는 말이 있듯이 지금은 노조 조직률을 높이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더구나 문재인 정부의 노동정책이 전반적으로 우경화 흐름을 타면서 지금의 환경도 깨질까 우려스럽다. 분위기가 변하기 전에 하나라도 더 많은 사업장에서 노조를 만들어야 하는 시기인 것이다.

2016년 이후 만들어진 노동조합은 상담에 의해 만들어진 사업장이 대부분이다. 공단의 조직률을 획기적으로 높여내기 위해서는 상담에 의한 수공업적인 방식을 탈피하여 보다 전략적인 접근이 필요하고, 그런 문제의식만큼 다양한 시도들이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한 시도 중 하나가 2013년부터 진행된 안산의 ‘파견노동’ 사업이었다. 파견노동 문제를 지역사회에 폭로하여 의제화하고 파견노동자를 조직하기 위한 시도였다. 소위 ‘의제를 통한 조직화’ 방식이었다. 하지만 실패였다. 세상 어려운 일이 파견노동자를 조직하는 것이었다. 의제는 남고 조직화는 죽었다. 이 투쟁으로 반월시화공단은 파견천국(?)으로 낙인찍혔고, 파견문제 해결이 지역의 주요 의제로 부상했다.

올해부터는 업종 조직화를 시도하고 있다. 유난히 조직률이 낮은 전기전자업종 노동자들을 조직해보고자 팀을 꾸렸다. 3년을 목표로 잡고 사업을 진행 중이다. 이러저러한 시행착오를 격고 있는 중이다. 아직 사업 초기라 평가를 하기는 어렵다.

   

개별조합원 사업도 진행하고 있다. 2008년 지역일반노조에서 ‘1,000원 조합원 사업’을 시도한 적이 있다. 조합비 1,000원만 내면 매월 노동동향 및 법률소식을 담은 노조 소식지를 보내주고, 무료로 노동상담도 진행해주는 서비스를 제공하겠다고 대대적인 홍보를 하였으나 2명 가입 받는데 그쳤다.

그 이후 좀더 조직적으로 개별조합원 사업을 진행한 곳이 경기금속지역지회의 안산시흥일반분회다. 문턱이 낮은 지역의 동아리(여행, 영화, 주말농장 등)로 사람들을 모으고, 관계가 형성된 노동자들 중 지역 노동교실이나 노동대학을 통해 의식이 성장한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일반분회)에 가입하는 순환사이클을 만들었다. 일반분회 조합원들은 현장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사협의회 등 여러 가지 활동을 벌이면서 현장활동가로 성장해갔다. 그 중 올해 두 군데 사업장에서 노조를 설립하게 되었다. 두 사업장의 노조설립 과정에서 일반분회 조합원들의 활동은 빛났다. ‘서당개 삼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는 말이 괜히 생겨난 게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경기금속지역지회는 2020년 시화공단지회로 분화할 계획이다. 지역에 기반한 공단노조를 만들려고 한다. 공단의 노동현실에 기반한 노조 조직화 사업과 조직화 모델을 만들어 보려는 것이다. 하지만 아직 완결적 구조는 아니다. 2019년 한 해 동안 열심히 토론하고 소통하면서 명실상부한 ‘지역공단노조’를 만들어 갈 계획이다. 반월시화공단의 특성에 맞는 새로운 조직화 모델과 수공업적 방식을 탈피한 전략적인 조직화를 통해 조직률을 획기적으로 높여내는 것이 필요한 시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