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라라비/202011] 예술은 직업이 아닌가? 우리도 노동자다! / 이종승

by 철폐연대 posted Nov 10,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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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동네 2%

 

예술은 직업이 아닌가? 우리도 노동자다!

 

이종승 • 공연예술인노동조합 위원장

 

 

 

“왜 연극관련 협회는 많은데 여태껏 노조는 안 만들어졌을까요?”

“왜? 노조가 필요해? 그럼 네가 한 번 만들어봐.”

“제가요? 제가 어떻게 만들어요….”

 

연극을 하는 한 선배와 나누었던 대화 내용이다.

스무 살이던 1993년 아동극을 전문으로 하는 ‘극단 예일’에서 연극을 시작해 돈 떨어지면 직장을 다니다 다시 연극 무대를 찾곤 했다. 그러다 공부하겠다고 대학과 대학원을 다닌 기간을 빼면 나도 전업으로 연극만 한 시기는 20년이나 될까….

 

 

‘가만히 있으라’는 강요된 침묵에 맞서

 

2014년 4월 16일. 지방대학에 수업하러 가는 날 아침이었다. ‘전원 구조’ 속보를 보고 지나쳤던 뉴스는 저녁 무렵 수업을 마치고 나오면서 날벼락 같은 소식으로 뒤바뀌었다. 아침 뉴스는 오보였고, TV 화면에서는 구조 장면 대신 세월호가 바닷속 깊은 심연으로 빠져드는 중계 영상만 반복되었다.

그날의 충격을 도저히 잊을 수가 없었다. 뭘 어찌 해야 할지 몰라 한동안 무기력한 상태로 지냈던 것 같다.

그러던 중 시민연극 강사 일로 나간 마로니에 공원에서 ‘가만히 있으라’ 퍼포먼스를 하는 연극인들을 마주했다. 광화문광장에는 주말마다 촛불을 켜고 추모와 다짐에 나선 시민들이 가득했다.

그렇다. 가만히 앉아 이렇게 탄식만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수천, 수만 개의 촛불이 일렁이는 그곳으로 나도 함께 달려 나갔다. 부랴부랴 연극인들을 모집해 추모현수막을 내걸고, 플래시몹을 하면서 ‘진상규명’을 외쳤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싶었다. 광화문광장에서 문화예술인들이 펼치는 추모예술제 연장전延長戰에 함께했다.

뒤이어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는 연대 단식 농성천막 지킴이를 5일간 하게 되었다. 그동안 꽤 많은 연극인들이 농성천막을 방문했고,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많은 이들이 4.16 세월호 참사의 진상규명을 요구하며 함께하고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우리도 노조가 필요하지 않을까?

 

문득 세월호 유가족들의 곁을 지키는 수많은 이들을 보면서, 우리 역시 동료애와 한 인간으로서, 국민으로서 기본적 권리를 요구하고 찾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주변 동료들을 만나면서 “우리도 노조가 필요하지 않을까?”, “이제는 연극인들도, 예술가들도 노조를 통해서 권리를 말하고 처우 개선을 해야 하지 않겠냐”며 떠들어댔다.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만, 나는 아직…”이라며 조금 더 시간이 지난 후에 고민해 보겠다는 사람들, “그런데 우리의 사용자는 누구냐”며 어려움을 토로하는 사람들, 미운 털 박혀 출연 섭외가 막히면 어쩌나 걱정하는 사람들…. 여러 이유로 노동조합 활동을 꺼리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다가 연극인 팟캐스트 ‘바쿠스다방’에 초대되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생겼다. 팟캐스트 방송에서 그간 품고 있었던 노동조합에 대한 생각과 필요성을 꺼냈더니, 드디어 내 이야기에 귀를 솔깃하며 공감을 표하는 동료를 만나게 되었다. “그럼 우리가 직접 한 번 만들어보자!” 의기투합했지만 정작 어디서부터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랐다. 일단 노조 활동을 하고 있고 노조에 대해 잘 알 법한 문화활동가나 기획자들과 만나 2년 정도 스터디를 하기로 했다. 원숭이가 되지 않기 위해(^^;) 우리는 열심히 책을 파고들었다.

 

하지만, 막상 노조를 언제 발족할 것인지, 발기인은 어떻게 모을 것인지 걱정과 의문 투성이였다. 과거에 배우들이 노조를 만들려고 했다가 연출가들이 절대 출연을 안 시키겠다고 으름장을 놓아 무산되었던 경험을 되풀이하지 않을 수 있을까?

노조 활동이 연극 현장에서 낙인과 굴레로 작용할까봐 모두들 주저하던 그 때, 선배 연극인들이 선뜻 힘을 보태주셨다. 한 선배님께서 “후배들은 우리보다 좀 더 나은 환경에서 작업해야지!”라며 선배그룹에 제안하고 발기인 모집에 나서주셨고, 극단 대표, 연출, 배우 선배님들도 큰 힘이 되었다. 노조 출범 준비를 위해 1년 치 조합비를 쾌척한 선배 연극인들 덕분에 마침내 2017년 3월 27일 공연예술인 노동조합을 창립할 수 있었다. 이후 4월 27일 공연예술인 노동조합은 서울시로부터 설립신고증을 받았다.

 

3 우리 동네 2%_공연예술인노조01.jpg

2017.3.27. 공연예술인 노동조합 창립식 모습. [출처: 공연예술인 노동조합]

 

<공연예술인 노동조합 창립선언문>

 

 

“당신이 위태로우면 예술이 위태롭고 사회가 위태롭습니다.”

 

- 우리는 공연예술인 노동조합 창립을 선언한다.

- 우리는 예술노동을 하는 노동자임을 선언한다.

 

예술인의 예술활동은 작품을 통해 사회적 의식과 문화를 만드는 공공적인 창조활동이다. 예술인은 불특정 다수를 상대로, 심지어 다음 세대를 위해서까지 노동한다. 즉, 예술인은 자신이 속한 사회와 고용관계를 맺고 그 사회 존립의 토대인 공공적 가치를 만드는 예술노동을 하는 노동자다.

하지만 우리가 속한 사회에서 예술인들의 현실은 어떠한가? 정의롭지 못한 작업환경에서 울분을 삭이며 일하고, 법적으로 명시된 최저임금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임금을 받으며 장시간 연습과 공연을 하고, 예술활동 외의 아르바이트를 해야만 ‘밥은 먹고 예술하기’가 가능하다. 예술이 위태롭다. 공공적 가치생산을 위협받고 있는 사회가 위태롭다.

지난 겨울, 우리는 국가와 국민을 농락한 권력이 오로지 주권자 국민의 힘을 통해 무력화 된 것을 목도했다. 다른 권력에게 기대지 않고 오직 국민 스스로의 단결된 힘으로 행동했을 때만 정의의 실현과 스스로의 권리찾기가 가능하다는 것을 확인했다.

이에 우리는 위기에 빠져있는 예술인들의 법적지위의 확보와 보편적 복지를 통한 존립 자체를 인정받기 위해 공연예술인 노동조합 창립을 선언한다. 우리 공연예술인노조는 앞으로 사회적 재부를 생산하는 예술노동자의 단결을 통한 스스로의 권리 찾기를 시작할 것을 천명하며 아래와 같이 선언한다.

 

하나, 우리는 예술노동을 하는 모든 예술노동자의 권리를 찾기 위해 투쟁한다.

하나, 우리는 지금 이 순간에도 예술혼을 불태우고 있을 예술인의 보편적 복지와 열악한 제작환경 개선을 위해 투쟁한다.

하나, 우리는 예술노동자로서의 자긍심을 높이고 예술이 갖는 가치를 전 사회적으로 공유하기 위해 투쟁한다.

하나, 우리는 더 큰 변화를 위해 각각의 문화예술계 노조들과의 사회적 연대를 위해 앞장선다.

 

위 선언을 실현할 공연예술인 노동조합 3대 권리운동을 펼치고자 한다.

 

1. 예술인 최저 임금제도 운동.

2. 기본소득법 실시 운동.

3. 기초 공연예술 진흥법 입법운동.

 

춥고 어두웠던 겨울을 밀어내고 봄을 맞았지만 진정 푸른 봄은 아직 오지 않았다. 우리의 푸른 봄을 예술노동자 스스로의 힘으로 맞을 것이다.

 

 

2017년 3월 27일 공연예술인 노동조합

 

코로나19 직격탄 맞은 공연예술노동자

 

연극인을 주축으로 출범했음에도 노동조합 명칭을 ‘공연예술인 노동조합’으로 정한 까닭이 있다. 연극의 경계도 무너지고 있고, 복합공연과 마임, 거리극, 무용, 특히 전통예술 쪽은 기댈 곳이 없다는 생각에 비슷한 일을 하는 공연예술 관련 종사자들을 대상으로 하자는 취지였다. 여전히 연극 쪽 조합원이 다수이긴 하지만, 앞으로 다양한 공연예술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이 가입했으면 하는 기대를 갖고 있다.

현재 코로나19 바이러스로 인해 한국사회 전체가 힘든 상황이지만, 공연예술 쪽은 정말 재난특별업종으로 지정해야 할 만큼 상황이 어렵다.

공연계 스스로 방역수칙을 만들어가며 어떻게든 공연을 이어가려던 사람들에게 8.15 광복절 집회로 인한 감염자 증가, 거리두기 2단계, 집합금지, 극장폐쇄 조치 등으로 일을 하지 못하는 상황이 되었고, 생활비를 벌어들일 직장이 없으니 생계에 바로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었다.

정부 지원정책이 나왔지만 많은 예술노동자들이 재난지원금 대상에서 배제되었다. 대부분의 영세 극단대표나 부수입으로 활동하는 예술강사들은 고용보험에 가입돼 있다는 이유만으로 낮은 소득에도 불구하고 재난지원금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예술노동자가 예술로 생계를 이어가면 직업으로 인정하고 노동에 대해 적정보수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직업분류코드도 없이 ‘기타’로 표시되거나 무직으로 처리되고, 최저시급도 못 받는 예술노동자가 부지기수다.

예술노동자의 아이디어와 노동이 제대로 인정되어야 한다. 그래서 예술인고용보험도 시행을 앞두고 있는 것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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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9.19. “우리는 예술노동자다!” 문화예술인 노동자선언 [출처: 문화예술노동연대]

 

 

공연예술인도 노동자다!

 

현재 공연예술인노동조합의 조합원은 160여 명 정도이다. 이는 국내 공연 관련 활동 인원의 1%에도 못 미치는 수치이다. 그러나 조합원이 꾸준히 늘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조합원이 늘어가는 것은 우리의 인식이 조금씩 바뀌어 가고 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앞으로 조합원이 더 확대될 것이란 희망을 갖고 공연예술인노동조합은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한편, ‘예술노동자는 어떤 사명감이나 자부심만으로 삶을 영위하는 특별한 직업’이라는 세간의 인식이 기본적 권리를 박탈당한 채 살아야 하는 이유가 될 수는 없다. 우리 사회는 여전히 예술을 노동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그저 자기가 좋아서 하는 취미나 특기활동 정도로 인식하는 사람들이 많은 게 현실이다. 예술인고용보험 도입을 필두로 4대 보험 가입, 예술인의 안전한 창작환경을 위한 ‘예술인 기본소득’ 도입 등이 정말 절실하다.

 

예술은 한국사회와 개개인의 문화 발전, 정서 함양이라는 공익성과 공공성을 갖고 있으며, 예술노동자들은 이것을 항상 염두에 두고 작업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무언가 특별한 대접을 바라는 것이 아니다. 인간이라면 마땅히 누려야 할 보편적이고 필수적인 권리를 예술노동자에게도 보장해달라는 것이다. 전국의 수많은 예술 관련 대학의 졸업생들이 예술을 직업으로 인정받지 못해 어떻게 살아갈지 막막한 세상이 더 이상 아니었으면 한다. 이것이 예술분야 직업분류코드를 지속적으로 요구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예술 활동도 노동이고 예술가도 노동자다. 좀 더 안정적인 창작활동을 할 수 있는 제도가 만들어지길 바라며 노동의 적정보상 체계가 마련되길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