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라라비/201803] 전재산 날린 택배 대리점장 / 이정호

by 철폐연대 posted Mar 12,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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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정규직, 길에서 만나다

전재산 날린 택배 대리점장

이정호 (뉴스타파 객원기자)

 

82년생 양재혁 씨(36)는 서울 마포구에서 태어나 금천구 시흥동에서 자랐다. 2001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호프집 알바를 시작으로 PC방, 오락실에서 일하다가 돈벌이가 된다는 얘길 듣고 울산으로 내려가 한동안 건설일용직으로 일했다. 전남 여수로 옮겨 멸치잡이 배를 타다가 군에 입대했다.

제대 후인 2008년, 양씨는 안정적인 일을 찾아서 옐로우캡 택배 일을 시작했다. 처음엔 운전이 서툴러 애를 먹었다. 첫 달 수입이 160만 원이었지만 차량 대여비 20만 원과 보험료와 수수료를 떼고 나니 손에 80만 원이 들어왔다. 아침 7시부터 밤 12시까지 일했는데 최저임금에 겨우 턱걸이하는 돈을 쥐고선 ‘이 짓을 계속하는 게 맞는지’ 고민했다. PC방에서 편히 앉아서 일해도 한 달에 120만 원은 벌었는데 죽도록 일하고도 수입은 더 떨어졌으니.

오기가 생겨 일을 계속했다. 그러나 양씨가 처음 맡은 구로1동은 서민 아파트만 즐비해 수익이 생길 수 없는 곳이었다. 택배는 물건 배달해주는 것만으론 절대 돈을 벌 수 없다. 중간 중간에 배달할 물건도 받아 와야만 수익이 생긴다. 두 번째로 맡은 구로5동은 애경백화점이 있어 약간의 영업만 하면 백화점이 전국으로 보내는 물량을 받을 수 있었다. 한 3년 착실하게 일한 끝에 돈을 제법 모았다. 그러나 택배 본사와 대리점의 갈등 때문에 일이 끊겼다.

   

양씨는 2014년 KGB택배 금천점에 기사로 들어가 다시 일을 시작했다. 2년 뒤 2016년 본사가 대리점장을 해보라고 권했다. 양씨는 전재산 2억 원을 투자해 그해 12월부터 KGB택배 금천지점장이 됐다. 1억 원으로 본사에 보증금 3천만 원을 주고 나머지는 가맹비 지급을 위해 준비했다. 나머지 1억 원은 상하차 분류장 마련에 들어갔다. 금천구는 서울이라 임대료가 너무 비싸 광명시에 보증금 4천만 원에 월 300만 원을 주고 670평의 땅을 임대했다. 공터에 자갈을 깔고 1개 80만 원씩 하는 몽골텐트 10동을 사고 1,500만 원짜리 컨베이어 벨트와 팔레트를 사서 배달물량 처리할 상하차 분류시설을 갖췄다. 비가 올 때도 작업이 가능하도록 조치했다. 컨테이너 2동을 사서 사무실도 만들었다.

 

양씨는 함께 일할 택배기사 18명을 모아 2016년 12월 1일 KGB택배 본사와 2018년 7월 30일까지 20개월짜리 위수탁계약을 체결하고 금천지점장이 됐다. 영업망을 뚫고 기사들과 손발을 맞추며 어느 정도 일을 할 만해진 2017년 2월쯤, KG로지스택배가 KGB택배를 인수한다는 신문기사를 봤지만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성실히 일했으니 별 일 없을 걸로 봤다. KBG택배 본사 게시판에 인수합병 후 대리점 병합지역은 3월 중으로 평가를 거쳐 4월 1일부터 통합운영하겠다는 공지가 떴다.

 

임신 소식 다음날 해지통보

평가를 기다리던 양씨는 2017년 3월 7일 본사 직원 2명의 방문을 받았다. 본사 과장은 그날 양씨에게 “내일부터 계약 해지된다”고 일방통보했다. 10년 가까운 결혼생활에도 아이 낳기가 두려웠던 아내가 영업망이 안정되는 걸 보고 임신한 사실을 양씨에게 말한 다음 날이었다.

이렇게 양씨는 전재산을 투자한 지 석 달 만에 모든 걸 잃었다. 본사가 말한 엄정한 평가 같은 건 없었다. 어느 날 불쑥 찾아와 내일부터 일하지 말라는 통보만 받았다. 양씨와 함께 일하던 택배기사 18명 중 7명은 옆 대리점으로 떠났고, 양씨와 5명의 기사는 다른 택배회사로 옮겼고, 3명의 기사는 실업자가 됐다. 나머지 3명의 기사는 아예 업계를 떠났다.

양씨는 2017년 3월 ‘KG로지스·KGB택배 불공정 인수합병 대책위원회’(이하 대책위)를 구성하고 소송에 들어갔다. 100여 대리점장과 1천여 택배기사가 피해를 봤다. 대책위를 구성하자 KGB를 인수한 KG로지스가 일부 점장과 기사 들을 흡수해줬지만 양씨처럼 억울하게 계약 해지된 대리점장 66명은 2017년 6월 ‘부당한 대리점 계약해지’라며 본사를 고소했다.

대책위는 본사 회장이 다니던 교회 앞 집회를 시작으로 2017년 10월부터는 세종시에 있는 공정거래위원회 앞에서 집회를 이어가고 있다. 시간이 지나자 생업 때문에 하나둘 이탈하기 시작했다. 양씨도 다른 택배회사에서 기사로 생계를 이어가면서 공정위 결정을 기다리는데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더라”고 했다.

집회 도중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도 만났지만 공정위는 아직도 묵묵부답이다. 대신 공정위는 2017년 8월 언론을 통해 “양사 합병 과정과 관련된 전반적 서류를 제출 받아 불공정행위가 있었는지 검토 중”이라고 했다. KG로지스는 절차대로 진행해 문제가 없었다며 다만 통폐합 과정에서 대리점장들의 감성적인 부분까지 감안하지 못한 건 아쉽다는 입장이다.

KG로지스는 KGB택배 인수합병으로 시너지 효과를 내 성공적이라고 자평했지만, KG그룹은 2017년 10월 KG로지스를 다시 대리점 연합법인인 ‘유엘’에 단돈 1천만 원에 매각했다. 이를 두고 업계에선 KG로지스와 KGB택배의 합병이 사실상 실패한 셈이라는 평가다. KG로지스는 인수합병으로 몸집을 키운 대표적인 기업이다. 2008년 KG케미칼이 옐로우캡을 인수하며 설립한 KG옐로우캡이 KG로지스의 전신이다.

 

업계는 호황인데 기사 노동환경은 추락

우리나라 택배업은 1992년 한진그룹의 ‘파발마’를 시작으로 1993년 대한통운, 1994년 현대, 1999년 택배나라(CJ GLS의 전신), 2000년 우체국택배 등으로 확대되어 현재 16개사가 영업 중이다. 1997년 기업활동 규제완화 조치의 일환으로 화물자동차운수사업법이 제정돼 업종구분이 폐지되고 화물사업자 기준만 충족하면 허가없이도 누구나 소화물 택배가 가능해지자 2000년대 초엔 200여 택배업체가 난립하기도 했다.

택배시장은 해마다 10% 이상 급성장했다. 1998년 처리물량 5,795만 개에 전체 매출 2,196억 원에 불과했던 택배시장은 2016년 처리물량 20억 개를 넘어섰고 매출은 5조 원에 육박할 만큼 커졌다. 인구 1인당 연간 택배이용 건수도 2014년 31.4회로 일본을 제치고 세계 1위로 올라섰다. 이제 택배는 한국에선 필수 생활밀착형 서비스가 됐다.

반면 시장의 호황과 달리 택배기사들의 노동환경은 점차 나빠지고 있다. 2000년대 초까지 택배기사는 꽤 괜찮은 일자리였지만, 평균단가가 계속 떨어져 지금은 더 많은 물량을 소화하려고 주 6일 동안 하루 13시간 이상 장시간 노동하는 나쁜 일자리로 전락했다. 택배회사와 대리점, 택배기사로 이어지는 삼각고용에 따른 중간착취도 문제다.

1997년 택배 1박스 당 4,732원하던 평균단가는 2000년 3,500원으로 떨어졌고 2016년엔 2,173원으로 계속 추락하고 있다. 업계의 과당경쟁이 낳은 비극이다. 박스 1개 배달에 소비자가 2,500원을 내면 본사가 1,700원을 가져가고, 남은 800원을 대리점과 기사가 나눠 가지는 구조다. 기사는 800원에서 부가세 80원, 소득세(3.3%) 26원, 대리점 수수료(5%) 40원을 떼고 나면 654원 정도를 가져간다.

택배기사는 아침 7시에 상하차 분류장으로 출근해 3~4시간 분류와 적재작업을 마치고, 8시간 동안 차를 몰고 배송에 나선다. 송장처리에 1~2시간을 사용하고 점심식사와 잠깐의 휴식에 1시간을 사용하면 하루에 13시간을 일한다. 2016년 택배연대노조 조사에 따르면 택배기사들의 주당 노동시간은 77시간으로 집배원보다 훨씬 길다. 기사들은 분류작업에 불만이 많다. 3시간가량 무보수로 분류작업을 하는데 업무 시작부터 상당한 시간이 걸리는 데다 체력소모도 심해 늘 불만이다. 기사들은 분류는 대리점 몫인데 기사들에게 강요한다고 생각한다.

앞서 KG로지스‧KGB택배 인수합병 사례처럼 제 살 깎아먹는 과열된 경쟁을, 서비스 질의 경쟁으로 전환하지 않으면 한국의 택배시장 자체가 붕괴될 위험에 직면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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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월 설 명절을 앞두고 국회 의원회관 1층에 쌓인 택배선물들. 국회의원들은 택배기사들의 노동권 보장을 위한 법안 처리는 미루면서도 택배기사들이 날라다주는 선물은 꼬박꼬박 챙긴다. 이들은 김영란법 같은 건 안중에도 없어 보인다. [출처: 이정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