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라라비/202310] 진재연 엔딩크레딧 집행위원장 / 안명희

by 철폐연대 posted Oct 18,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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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장 속으로

   

 

진재연 엔딩크레딧 집행위원장

 

 

“방송 비정규직 운동은 계속된다”

 

 

인터뷰·정리 안명희 • 전국불안정노동철폐연대 상임집행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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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재연 엔딩크레딧 집행위원장. [출처: 미디어오늘]

 


 

제60회 방송의 날 행사가 열렸던 9월 1일, 지상파 방송사 간부들과 관계 부처 공무원들이 모여 기념식을 하던 이날에 정작 방송을 만드는 사람들은 없었다. 그래서 방송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활동가들이 모여 방송의 날을 ‘방송을 만드는 사람들의 날’로 호명하며 방송현장의 부당하고 열악한 노동의 ‘엔딩’을 외쳤다. 이어서 비정규직 백화점의 대명사가 된 방송현장을 바꿔 내고, 방송 비정규직의 노동권을 보장받기 위한 싸움을 하기 위해 ‘엔딩크레딧’을 출범시켰다.

이렇게 CJB청주방송 故이재학PD 대책위를 시작으로 엔딩크레딧에 이르기까지 방송 비정규직 운동을 함께해 온 활동가, 법률가들이 있고, 그 중심에 진재연 동지가 있다.

 

 

방송을 만드는 사람들의 이름, 엔딩크레딧

 

 

Q. 지난 9월 1일, 엔딩크레딧이 출범했습니다. 어떤 문제의식이 있었는지, 준비는 어땠는지 궁금합니다.

A. 최근 몇 년 동안 근로자지위확인소송이나 해고 후 부당해고 구제신청 등을 하면서 방송사와 싸우는 사람들이 늘어났어요. 노동자성 인정 사례들이 쌓이면서 성과도 있었지만 개별적인 법률대응만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고민이 있었어요.

집단적인 싸움을 조직해야 한다, 방송사의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문제의식을 가진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모였어요. 작년부터 토론회를 진행하고, 모임을 하면서 계속 논의를 해 왔습니다. 올해 6월 8일 ‘방송 비정규직 노동자성 판결의 의미와 사측의 대응’ 토론회에서 방송 비정규직 운동의 구심이 되는 단체를 만들자는 제안이 있었고, 그 자리에 함께했던 방송 노동자, 활동가, 법률가들이 의기투합해 본격적인 준비를 했어요.

소송을 하는 개인들은 외롭고 힘든 상황에 처해 있고, 방송사들은 더욱 교묘하고 악랄한 방법으로 노동자들을 차별하고 고립시키는 상황 속에서 흩어져 있는 힘들을 모아 내고, 그러한 집단적인 힘이 방송사를 향하도록 해 보자는 것이었죠.

그러한 생각을 기반으로 이야기를 진행하면서, 당사자들이 주체가 되는 조직을 만들어 보자, 법제도의 틀을 넘어서기 위한 방법을 찾아보자고 했고 여전히 어려운 문제지만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Q. “당사자들이 주체가 되는 조직”이라고 했는데요. 좀 더 설명해 주신다면?

A. 최근 수년간 방송 비정규직 관련 이슈가 사회화되었지만 그 과정에서 방송현장에서 일하는 당사자들이 직접 운동을 만들지는 못한 한계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활동가나 법률가들이 대신 말하거나 행동하는 것이 아닌, 방송 노동자들이 직접 방송현장의 문제를 드러내고 해결하고 방송사와 싸울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 나가려고 합니다.

 

Q. 단체명으로 좀 생소하긴 한데요. ‘엔딩크레딧’이라는 이름에 담긴 의미가 있을 것 같습니다.

A. 엔딩크레딧은 미디어 콘텐츠 맨 뒤에 제작한 사람들의 이름이 올라가는 것을 말하죠. 단체명을 결정할 때 15개 정도의 후보가 있었는데요. 현장 노동자분들이 엔딩크레딧으로 하자고 하셨어요. 열악한 방송현장에서 일하며 지치지만 딱 한 번 보람을 느낄 때가 엔딩크레딧에 본인의 이름이 올라갈 때라고 했고, 그 이름을 보고 주변에서 반응이 올 때 뿌듯하다고 하시더라고요. 어떤 분은 ‘연극이 끝난 후’라는 노래를 말씀하시면서 무대가 끝난 뒤의 스태프들의 모습과 마음을 담은 말이면 좋겠다고 하셨어요. 화려한 조명을 받지는 않지만 묵묵히 자신의 일을 하는 방송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해 나가고 싶은 우리의 마음을 담은 이름이에요.

 

Q. 엔딩크레딧이 함께하고자 하는 이들은 누구일까요? 누구와 함께하느냐가 단체의 정체성을 보여 주는 것이 아닐까 싶어서요.

A. 방송현장 절반 이상이 비정규직 프리랜서들이고, 그들이 없으면 방송제작이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방송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주류이고, 방송현장의 주인공이라는 점을 잊지 않았으면 해요. 엔딩크레딧은 방송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주체가 되고, 자신감을 가지고 방송현장의 문제에 대해 발언하고 행동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보자는 것입니다. 계약형태, 분야, 직군에 상관없이 많은 방송 노동자들과 함께하고 싶습니다. 또한 방송현장의 비정규직 문제, 열악한 노동환경 문제 등에 관심 있는 활동가, 법률가, 연구자들도 환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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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6.08. ‘방송 비정규직 노동자성 판결의 의미와 사측의 대응’ 토론회에서 

방송 비정규직 운동 단체를 만들자고 제안되었다. [출처: 철폐연대]

 

 

방송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Q. 방송 비정규직의 노동환경은 어떠한가요?

A. 방송 비정규직들은 여전히도 불합리한 계약을 체결한 경우가 많습니다. 프리랜서의 비율은 점점 늘어 가고, 불법파견 문제도 심각합니다. 드라마의 경우 턴키계약(팀계약) 하는 사례가 여전히 많아서 대부분의 방송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근로기준법 등 노동자로서의 기본권리를 보장받지 못한 채 일하고 있습니다. 서면계약 없이 구두계약으로 일을 시작하는 경우도 많고요.

또한 장시간 노동, 저임금, 안전사고, 일터 괴롭힘 문제도 심각합니다. 엔딩크레딧이 출범할 때 실태조사를 진행했는데 괴롭힘이 일반 직장인의 2배 이상이었어요. 대다수의 방송 노동자들은 자신의 일을 좋아하면서도 노동환경이 너무 열악하니 얼마나 오래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말합니다. 안정적인 삶에 대한 보장이 없다는 것도 방송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걱정하는 부분이기도 하고요. 

 

Q. 최근 방송 콘텐츠가 주목받고 있는데요. 방송 시장의 규모 변화에도 방송 비정규직의 열악한 노동상황에는 변화가 없는 건가요?

A. K-드라마, K-콘텐츠가 세계적으로 인기를 끌고 있지만, 방송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삶은 더욱 열악해지고 있습니다. 한국 문화콘텐츠의 경제적 가치에 대해 언급되고, ‘오징어 게임’의 성공에 대해 다양한 방면에서 회자되지만, 최근 오징어 게임 시즌2 단역 배우들의 출연료는 오르지 않았다고 합니다. 콘텐츠의 성공이 실제로 대다수 노동자에게 끼치는 영향은 거의 없고, 다수의 비정규직 프리랜서 노동자들은 저임금 구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어요. K-콘텐츠의 강점으로 ‘가성비’가 자주 언급되는데, 싼 제작비로 짧은 시간에 좋은 콘텐츠를 만들어 내는 곳이 한국이라는 거죠. 실제로 미국에서 1년에 12편 만드는 드라마가 한국에서는 3개월이면 제작 가능하다는 것을 경쟁력으로 내세웁니다. 한국의 방송산업이 비정규직을 착취해서 굴러가고 있다는 것을 모두가 인정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Q. 현재 방송 비정규직에 있어서 가장 핵심적인 문제는 무엇일까요?

A. 근로 실질에 맞는 계약서 작성과 노동에 대한 정당한 보상인 것 같아요. 엔딩크레딧에서 올해 하반기에 중요한 사업으로 설정하고 있는 것이 계약과 관련된 것인데요.

방송사들의 고용현황을 보면 프리랜서 계약형태가 계속 증가하고 있어요. 하지만 실제로 프리랜서인 경우보다 방송사의 지휘·감독하에 일하는 ‘무늬만 프리랜서’들이 훨씬 많습니다. 이들에 대해 근로기준법을 적용하고, 근로계약서를 작성하도록 하는 게 매우 중요합니다. 대다수의 프리랜서들이 노동법의 사각지대에 있으면서 권리를 박탈당하고 있어요.

또한 간접고용 노동자들 경우 근로계약서를 쓰기는 하지만, 파견(용역)업체와 계약을 맺죠. 최근 광주MBC를 상대로 직접고용을 요구하며 소송을 진행 중인 노동자 8명의 경우 하청업체인 동광개발과 1년 단위 계약을 반복하고, 정규직과의 차별을 감내하며 십여 년을 일해 왔어요. 동광개발은 방송과 관련된 아무런 전문 지식도 없고 실제 광주MBC의 지시를 받으며 일했지만 직접고용을 맺지 않아 생기는 문제들이 있는 것이죠. 이들은 광주MBC와 동광개발이 어떤 계약을 맺었는지도 알 수가 없어요.

또한 드라마 스태프들의 경우 턴키계약을 많이 맺고 있습니다. 턴키계약은 감독급(팀장) 스태프가 제작사로부터 용역비를 통째로 받아 팀원들에게 나눠 주는 형식인데요. 감독급 스태프가 형식적으로 사용자가 되는 것이죠. 그러니 스태프들이 부당한 일을 당해도 방송사나 제작사에 문제를 제기할 수가 없어요. 드라마 스태프들이 방송사 제작사와 개별계약 맺을 수 있는 환경도 매우 시급한 과제입니다.

방송 노동자들이 근로기준법의 적용을 받고, 방송사 제작사와 직접, 개별, 근로계약서를 작성할 수 있도록 다방면의 고민이 필요할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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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9.01. 방송을 만드는 사람들의 이름 ‘엔딩크레딧’ 출범 기자회견. [출처: 엔딩크레딧]

 

 

 

방송 비정규직 운동에 대해서

 

 

Q. 방송 비정규직들이 정부와 국회를 바라보고, 소송을 통한 문제해결을 꾀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을 것 같습니다.

A. 방송 비정규직 운동이라는 게 대중적이고 광범위하게 만들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개인적으로 할 수 있는 방법을 찾다 보니 그런 것 같아요. 오랜 시간 개별화된 상태로 일했고, 현장 변화에 대한 기대를 갖기가 어려운 마음도 있을 것 같고요. 소송은 매우 끈질기게 진행하시지만 엔딩크레딧과 같은 단체와 소통하거나 다른 사람들과 교류, 연대하는 것은 꺼리시는 분들도 많은 것 같아 안타까울 때가 있어요.

개별적인 소송과 정부·국회에 기대는 방식이 아니라, 현장에서 집단적인 힘을 만들고 투쟁하려면 조직화가 필요한데 이도 쉽지는 않습니다. 현장 조직화와 투쟁이 어려운 건, 우선 경직된 현장의 문제가 있겠죠. 인맥을 통해 알음알음 채용을 하고, 부당한 상황에 대해 문제제기하면 소문이 나고 일자리를 잃게 된다는 두려움이 매우 큽니다. ‘떠날 결심’, ‘그만둘 결심’을 하지 않고서는 어렵다는 거지요.

 

Q. 그렇더라도 분명 운동의 성과는 있지 않을까요?

A. 조금씩 변하고 있다는 게 성과라면 성과입니다. 방송현장의 악명 높은 초장시간 노동 문제도 꽤 오랜 시간 문제제기해 왔고, 나아지는 것을 체감한다는 말씀을 현장에서 해 주시고요. 얼마 전 방송스태프지부 5주년 행사에서 한 조합원이 5년 전 우리의 요구가 ‘잠 좀 자자’, ‘밥 좀 먹자’였다면 이제는 아니라면서, 그동안 좋아진 것들이 있다고 하시더라고요. 느리지만 천천히 달라지고 있으니, 계속하다 보면 더 성과가 나겠죠. 

 

Q. 방송 비정규직 운동을 하면서 맞닥뜨린 현실적인 문제가 있을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언론노조, 정규직 노조에 대한 이야기를 빼놓을 수는 없을 것 같은데요.

A. 온갖 사회 정의를 이야기하는 방송사가 내부 비정규직 문제에 대해서는 철저히 외면하고, 우리 사회 비정규직 문제의 심각성을 다루면서 그 방송을 만드는 비정규직을 해고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 씁쓸합니다. 공영방송 투쟁을 했던 언론노조 조합원들, 그리고 그들이 사장이 된 상황에서도 변하지 않았던 현실을 보았죠. 비정규직 노동자가 소송 등을 통해 노동자성을 인정받고 오랜 시간 투쟁해서 현장에 들어가려고 해도 정규직 노동조합의 조합원들이 반대해서 힘들어지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최근 A방송사의 경우도 그렇고, 오히려 회사는 의지가 있는데도 정규직들이 반대하기도 하죠.

방송사가 정규직과 비정규직을 구별 짓고 위계를 고착화하는데, 정규직들이 이러한 신분제를 유지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아요. 그런 면에서 방송사와 정규직 노동조합이 공모하고 있다고 볼 수 있고요. 언론노조 산하의 방송사 본부/지부에서 비정규직들을 절대 조합원으로 받지 않는 것도 문제인데, 몇 년간의 소송을 통해 정규직이 되어야만 그때 조합원이 될 수 있어요. B방송사의 경우도 소송을 시작하는 초반에 정규직 노조의 도움을 요청하며 조합원 가입을 타진하기도 했지만 거부했고요. 물론 노조 내부 절차를 이유로 대기는 했죠.

정규직 노동조합이 비정규직들과 함께 싸울 수 있는 방법을 찾기보다 사측과 다르지 않은 모습을 보일 때 안타깝죠. 물론 함께 고민하는 분들이 없는 건 아니고, 정규직과의 연대는 놓칠 수 없는 지점이기에 방법을 찾아 나가야겠죠. 

 

Q. 방송사를 직접 타격하기 위해서는 어떤 방법이 필요할까요?

A. 방송사가 비정규직들에 대한 고용 책임이 있다는 것을 사회적으로 알려내야 합니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교묘하고 악랄하게 탄압하는 방송사는 사회문제와 정의를 말할 자격이 없다는 사회적 인식 확산이 필요해요.

그리고 방송 노동자들의 힘을 모아 노동조합을 중심으로 교섭하고, 투쟁해야 합니다. 일단은 당사자들의 힘을 모으는 것이 중요하고요. 노조법상 단체교섭이 아니라도 방송사를 문제해결의 장으로 끌어내는 노력이 필요할 것 같아요.

방송 비정규직이 자기의 요구를 가지고 직접 교섭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봐요. 당장은 어렵더라도 계속 상상하고 법제도의 변화까지 끌어오도록 해야겠죠. 노조법 개정과도 맞닿아 있는데요. 한국방송연기자노동조합의 경우 각 방송사와 교섭하고 있는데, 최근 넷플릭스 등 OTT는 직접 교섭대상이 아니라고 책임을 회피하고 있어요. 노조법이 개정되면 실질적인 사용자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게 되겠죠.

   

 

방송 비정규직 활동가로 살아가기

 

 

Q. 오랫동안 방송 노동자 운동, 방송 비정규직 운동을 해 오셨는데요. 계속할 수 있는 힘은 어디서 비롯된 걸까요?

A. 할 일이 많아서요.(웃음) 현장에 계속 문제가 생기고 있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함께 고민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방송 비정규직 문제가 사회적으로 공론화되는 과정이 있었어요. 그리고 소송, 진정 등을 통해 힘겹게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싸움을 하는 노동자들을 만나 왔고요. 그런 모든 과정들이 이 운동을 지속하게 하는 힘인 것 같아요. 

 

Q. 앞으로 어떤 활동을 해 나가고 싶으세요?

A. 방송현장의 노동자들과 함께 방송 비정규직 운동의 전망을 함께 토론하고 만들어 가고 싶어요. 많은 현장 노동자들을 만나고 싶고, 우리의 힘과 연대가 방송사의 책임을 물어 변화를 이끌어내고 싶습니다. 엔딩크레딧이 그 역할을 하고, 해야 할 텐데. 방송 노동자들의 정보과 경험을 공유하고 현안을 해결하며 계약형태나 직군과 상관없이 모두가 모일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가고 싶어요. 

 

Q. 마지막으로 지금까지 함께해 온 동지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요? 철폐연대에 대해서도요.

A. 엔딩크레딧에 함께하고 있는 동지들을 만난 건 저한테 너무도 큰 행운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정말 고맙고, 고마운 마음을 많이 표현하고 싶어요. 철폐연대는 비정규직 운동의 방향을 제시하고 고민을 던져 주는 나침반 같은 곳이에요. 고민이 있을 때, 생각을 정리해야 할 때, <노동 교과서>를 펼쳐 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