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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쟁/이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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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장

 

노가다? 건설노동자!

김호중 건설노조 경기중서부건설지부 사무국장

 

 

건설노조 경기중서부건설지부는 형틀목수와 철근 직종을 중심으로 건설현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로 구성된 노동조합이다. 이곳에서 김호중 동지는 현재 사무국장으로 일을 하고 있다. 2004년 경기서부건설노조 위원장과 2005년 건설연맹 토목건축협의회 의장을 거쳐 2009년 건설노조 수석부위원장을 역임했다. 2004년과 2007년 두 차례 노조활동 과정에서 구속되기도 했다. 2006년에는 ‘건설노조 공안탄압 중단과 ILO권고안 이행’을 내걸고 올림픽대교 75m 상공에서 44일을 투쟁했다. 2003년부터 불어닥친 건설노조에 대한 공안탄압은 건설노조 간부 117명을 구속시켰고, 노동조합 활동을 전방위로 압박했다. 한동안 잠잠했던 공안당국의 탄압은 2006년 다시 한 번 불어 닥쳤고, 당시 토목건축협의회 의장이었던 김호중 동지는 75m 올림픽대교에 올라 노동조합과 동지들을 지켜내고자 했다.

김호중 동지의 건설노조 활동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어 내기 위한 투쟁의 연속이었다. 2000년 전국 최초 원청사와의 단체협약 체결, 2002년 일요휴무 투쟁, 2007년 안산시흥지역 목수총파업, 2017년 중앙임‧단협 쟁취 등 많은 이들이 가능하겠냐고 의문을 제기할 때 “일단 한 번 해보자”며 노동자들을 조직했고, 누구보다 부지런히 움직였다. 일용직 건설노가다가 무슨 노동조합이냐고 했을 때도 그 가능성을 의심하지 않았다. 건설노동자를 조직하면서 “해보고 싶은 건 다 해봤다”는 김호중 동지는 여전히 매일 새벽 5시면 일어나 현장을 챙기고, 조합원들과 부대끼며 더 나은 건설노동자의 삶을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다. 3월 9일, 안산역에 위치한 경기중서부건설노조 사무실에서 김호중 동지를 만났다.

 

인터뷰 및 정리: 이미숙 (철폐연대 상임집행위원)

 

 

4 김호중.jpg

 

 

블랙리스트 때문에 바뀐 꿈

 

경기중서부건설지부의 전신이었던 안산지역건설노동조합은 1993년 9월에 만들어졌습니다. 그런데 처음부터 잘 되진 않았어요. 노조가 만들어지고 3개월 만에 집행부 사이 내분으로 반쪽이 됐죠. 그때 저는 현장에서 일용직으로 일하고 있었는데, 아는 형님이 “노동조합이 어려우니까 와서 일 좀 도와주라”고 하더라고요. 그걸 계기로 건설노조에서의 활동이 시작되었고, 햇수로 28년이 됐습니다.

사실 저는 1990년에 노동조합 활동이 하고 싶어서 반월공단에 들어갔어요. 그런데 처음 들어간 공장에서 들어가자마자 노동조합이 만들어졌고, 투쟁에 결합하게 되었죠. 당시는 노조가 만들어지면 바로 파업하고 점거농성하고 하던 시기여서 그렇게 투쟁했습니다. 그 투쟁은 승리했어요. 그런데 나중에 사측이 가만있질 않았죠. 결국 얼마 안 가서 노조는 깨지고 함께 투쟁했던 사람들과 저는 해고가 됐고, 블랙리스트에 올라갔습니다. 당시 반월공단에는 총무부서장협의회라는 게 있었어요. 거기 블랙리스트에 한 번 올라가면 공단 안에서 일하기는 사실상 힘든 시절이었습니다.

취직이 힘들어지니까 건설 일용직을 전전하기 시작했고, 그러면서도 최대한 공장에 들어가보려고 했는데 잘 안됐어요. 어찌어찌해서 공장에 들어가면 얼마 안 있어서 잘리는 일이 반복됐고, 그때마다 다시 건설 일용직을 전전하면서 점차 건설일이 본업이 되어 갔습니다. 90년대 초반은 많은 활동가들이 노동운동에 희망이 없다며 떠나던 시기였어요. 그럼에도 자본에 부역하지 않고 살기 위해서는 노동자로 살아야한다고 생각했고, 힘들지만 버텨냈던 것 같아요. 그렇게 3년 정도를 보내다가 건설노조에 오게 되었습니다. 건설노조 일을 함께해보자고 제안했던 분들은 당시 반월공단에서 파업을 함께하고 해고되었던 형님들이에요. 당시 건설노조를 만들었던 주축들이죠.

 

 

노동조합, 우리도 해볼 만하다

 

초기에서는 노동조합 활동이라는 것이 체불임금이나 산재신청 같은 일에 진정서 써주는 게 대부분이었죠. 그리고 조합원들을 대상으로 컴퓨터교육이나 제관학교, 친목회, 일자리나누기 등도 했고요. 그러다가 1997년 IMF가 터졌죠. 건설현장에 일자리가 대거 없어졌고, 실업자가 급격히 늘어났습니다. 서울역 노숙자의 대부분이 건설노동자였다는 말도 있었습니다. 그 시점에 실업자운동을 했죠. 건설노동자에게 공공근로(보도블록 교체, 숲 가꾸기 사업 등)를 배정해달라는 투쟁을 정부나 안산시를 상대로 했습니다. 그 힘을 바탕으로 현장도 조금씩 살아나기 시작했죠. 그렇게 IMF가 서서히 지나고 현장이 조금씩 생기던 시기에 노조 내부의 조직 구성에도 변화를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안산지역건설노동조합은 용접·제관 등 플랜트분야 노동자들이 주축이었는데요, 형틀목수나 철근 등 토목건축 분야의 중요한 직종을 조직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고민이었죠. 그렇게 직종별 모임이 생기기 시작했고, 본격적으로 토목건축 직종의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의 한 축으로 등장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2000년 초반, 지금까지 꿈도 꾸지 못했던 단체협약을 맺기 시작했고, 함께하는 조직가들도 늘어나기 시작했어요. 동시에 체불투쟁이나 산재인정투쟁도 활발하게 이뤄지면서 건설노동자도 단결하면 뭐든지 가능하다는 것을 점점 더 깨닫게 되었죠. ‘한 번 해볼 만하다’는 자신감이 들어 안산을 넘어 경기중서부지역으로 조직을 확대해 나갔고, 우리도 일요일은 쉬어보자며 ‘일요휴무 쟁취투쟁’까지 쭉 치고 나갔습니다. 그렇게 점차 노동조합은 틀을 갖추고 안정화 단계에 접어들었습니다.

 

 

공안탄압, 투쟁으로 돌파하자

 

건설노동자들이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고 자꾸 힘이 커지니까 건설자본과 정부는 불안했나 봐요. 그냥 내버려두지 않았죠. 2003년부터 건설노조를 향한 대대적인 공안당국의 탄압이 진행됩니다. 단체협약 체결 요구가 ‘공갈협박’이 되었고, 노조 전임자 임금 요구가 ‘금품갈취’가 되었죠. 그 탄압에 맞서 289일간의 명동성당 농성도 하고 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현장을 조직하고 투쟁으로 돌파하는 거라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대구 지역 총파업투쟁을 지원하고, 경기 용인 동백지구 투쟁에 함께하는 등 자본과 정권에 무릎 꿇지 않는 투쟁들을 줄기차게 해왔죠.

2007년에는 안산시흥 지역 목수총파업을 조직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건설일용노동자가 총파업을 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도 제기했고, 불가능하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결국 해냈습니다. 사실 2007년 총파업은 절박함이었어요. 공안탄압을 통해 건설노조가 파괴되고 있었고, 노조 내 활동가들에게는 ‘이렇게 공갈협박 금품갈취범으로 마냥 파괴될 수 없다’는 절박함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공안당국에 맞서기 위해서는 더 큰 투쟁을 조직할 필요가 있었고, 그렇게 2007년 안산시흥 지역 형틀목수총파업을 만들어냈습니다. 투쟁은 승리했고, 우리는 여전히 이곳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해냈습니다.

그런데 그 투쟁은 지속가능성까지를 염두에 두지 못했던 아쉬움이 있었어요. 안산 지역이라는 한계 속에서 투쟁의 성과는 지속성이 떨어졌죠. 투쟁에서 승리하고 바로 주변 지역으로 투쟁을 확장해 나갔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던 겁니다. 그런데 이때는 이미 노조 내 활동가들의 상태는 너무도 지쳐있었어요. 투쟁은 승리했지만 그 승리를 딛고 한걸음 더 전진할 힘이 없었던 거죠. 많은 활동가들이 떠나는 것을 선택하기도 했습니다. 정치경제적 정세도 힘들기는 마찬가지였죠. 2008년부터 이명박‧박근혜 정권이 이어지면서 노조에 대한 탄압이 지속됐습니다. 건설현장 일거리가 대폭 줄어들면서 건설노동자 내부에도 경쟁이 격화됐죠. 그 사이에 신규 노동력은 현장에 들어오지 않고, 그 빈틈을 이주노동자들이 채워나갔습니다. 그러면서 건설노조 내 투쟁의 동력도 급격히 소실되었습니다.

 

 

고용안정투쟁, 다시 살아나는 노동조합

 

그렇게 조합원이 2백여 명까지 떨어지면서 한동안 침체기를 걷던 지부는 2012년을 기점으로 점점 조직화되면서 3천여 명으로 폭발적으로 증가하게 됩니다. 조직을 복원하기 위해 가장 중요하게 설정했던 목표는 바로 고용안정투쟁이었어요.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건설노동자에게 고용안정은 매우 중요한 문제죠. 그래서 임금인상투쟁과 더불어 고용안정투쟁은 건설노조의 가장 큰 목표일 수밖에 없습니다. 중요한 지점은 다단계 하도급 방식이 아닌, 조합원으로 구성된 팀을 건설사가 직접 고용하게 하는 투쟁이었습니다. 이는 조합원 증가의 주된 원인이 되었고, 지금도 꾸준하게 진행되고 있는 중요한 노동조합 활동입니다.

대부분의 건설현장은 조합원이 들어가면 아예 처음부터 고용을 거부하거나, 조합원인 걸 알게 되는 순간 해고를 했어요. 그래서 처음에는 조합원인 걸 숨기고 현장에 들어가서 일을 하다가 어느 정도 때가 되면 임금인상 요구도 하고 노동조건 개선 요구도 하면서 투쟁을 본격화하는 방식으로 활동을 했습니다. 2012년 이전에는 해고투쟁도 강고하게 했죠. 누군가 해고되면 한 명도 해고투쟁에서 이탈하면 안 된다는 생각으로 모두가 일손을 놓고 천막농성을 하고, 집회를 하고, 그렇게 투쟁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방식의 투쟁은 장기적으로 투쟁의 동력을 떨어뜨리게 되더라고요. 모두 일손을 놓고 결사항전하는 해고투쟁에서 새벽집회는 같이 하더라도 천막은 돌아가면서 지키는 투쟁으로 전환했죠. 그러자 조합원들이 해고에 대해 두려워하지 않게 되더라고요. 고용안정은 과거에도 현재도 여전히 우리가 지켜내야 할 핵심적 투쟁 과제일 수밖에 없습니다.

 

 

건설노조의 새로운 역사, 중앙임‧단협 체결

 

건설현장은 여러 단계의 하도급으로 이뤄져 있고, ‘오야지’ 중심으로 팀을 이뤄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일하기 때문에 서로 제 살 깎아먹기 식으로 임금을 하락시키죠. 이 구조에서 임금인상이나 고용안정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노동조합은 건설사를 상대로 조합원들을 직고용하라는 투쟁을 전개했고, 실제 많은 현장에 조합원 직고용팀이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건설현장에서의 만악의 근원은 다단계하도급이에요. 건설업에서 하도급은 불법인데, 역설적이게도 다단계하도급이 가장 많은 곳이 건설현장입니다. 이를 뛰어넘는 것을 상상했고, 그것이 바로 직고용 투쟁이었죠. 그렇게 조합원이 들어간 현장마다 단체협약을 꾸준히 맺어왔고, 노동조건도 빠르게 상승했습니다.

그런데 건설현장은 하루에도 수백 개가 세워지고 수백 개가 사라집니다. 당연히 현장별 단체협약을 맺고 투쟁을 하는 것도 무한반복이 될 수밖에 없었죠. 그래서 2017년 건설노조는 사상 최초로, 전문건설업체를 상대로 한 중앙임‧단협을 체결하게 됩니다. 중앙임‧단협을 체결했다는 것은 전국 건설노동자의 노동조건이 일정 정도 동일해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노동자들의 임금이 동일해지고, 노동조건이 동일해진다는 것은 아주 큰 변화입니다. 더 이상 더 높은 임금을 찾아 전국을 떠돌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말하죠. 그리고 매번 반복되던 현장별 교섭으로 시쳇말로 1년 내내 투쟁해야 했던 어려움을 조금이나마 벗어날 수 있게 된 겁니다. 물론 아직도 투쟁은 일상적으로 반복되고 있지만, 예전보다는 나아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가장 많은 이주조합원, 그럼에도 여전히 뜨거운 감자

 

우리 지부는 다른 노조에 비해 이주조합원이 많습니다. 한때는 이주조합원 비율이 30%까지 오른 적도 있었죠. 2009년 광명 삼환투쟁, 2010년 군포 당동투쟁 등 이주노동자와 함께 투쟁해서 승리한 사례도 있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투쟁의 시기에 이주노동자 문제는 갈등의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여기에는 자본의 이간질이 존재합니다. 현재 형틀목수의 임금은 22만 원입니다. 그런데 미등록 이주노동자의 임금은 12만 원 정도에 불과합니다. 건설자본은 당연히 값싸게 착취할 수 있는 이주노동자들 쓰려고 하겠죠. 특히 우리 노조의 직접고용 요구를 거부하는 현장에는 어김없이 건설자본이 이주노동자를 끌어들입니다. 핵심은 건설현장에서 이주노동자가 일을 못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투쟁하는 동안은 대체인력으로 일하지 말 것과 저임금으로는 일하지 말자는 요구입니다. 그럼에도 그것이 이주노동자들 배제하는 것처럼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사실 이주노동자 입장에서는 자신들이 어렵게 구한 일자린데, 노조가 와서 일을 못하게 하니 억울한 일일 수밖에 없죠. 노조가 잘못하고 있는 거 맞습니다. 이주노동자를 향한 투쟁이 아니라 자본을 향한 투쟁의 방식을 찾아야 하는데 아직 찾지 못한 것도 사실이고요. 하지만 방법을 찾아야지요. 모두가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요.

 

 

연대의 경험, 더 큰 연대를 낳다

 

노동조합이 해야 할 많은 일 중에 연대활동은 간과해서는 안 될 중요한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 지부는 일상적 연대투쟁뿐만 아니라 ‘지역연대기금’이라고 해서 조합원들과 함께 모금한 금액을 어려운 이웃과 나누기도 하고, 투쟁사업장을 돌며 투쟁기금을 전달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활동은 우리 지부가 어려울 때 도움을 받았던 기억 때문이에요.

2003년 공안탄압 당시 12월 9일부터 2004년 9월 22일까지 명동성당 들머리에서 ‘원청사용자성 인정과 공안탄압 분쇄’를 내걸고 289일간 노숙 농성을 한 적이 있습니다. 한겨울 추위에 비닐을 덮고 18일을 버티고 나서야 겨우 천막 하나를 칠 수 있었죠. 그때 우리보다 앞서 이주노동자들이 ‘강제추방 저지와 미등록 이주노동자 전면합법화를 위한 농성투쟁단’을 꾸려 천막농성을 하고 있었습니다. 천막도 없는 우리를 그 동지들이 따뜻하게 맞아 줬고, 많이 도와줬던 기억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 동지들 덕분에 추운 겨울을 버틸 수 있었죠.

또 하나의 기억은 용인 동백지구 투쟁 시 우리 조합원들이 대거 연행된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지역 사람들이 몰려와서 안산경찰서 문을 뜯고 연행자를 석방하라는 투쟁을 힘 있게 해줬던 기억도 있습니다. 2007년 목수총파업도, 적은 역량으로 파업까지 해낼 수 있었던 힘은 지역 동지들이 함께했기 때문입니다. 경찰이 침탈하려고 할 때 지역의 동지들이 달려와 막아냈던 기억, 연대를 통해 우리가 힘 받았던 경험들이 지금 연대의 중요성을 강조하게 된 계기가 된 것 같습니다.

 

 

비정규투쟁, 힘들지만 그래도 뚜벅뚜벅 나아가야

 

현재의 비정규투쟁에는 두 가지의 경향이 있는 것 같아요. 첫 번째는 열악한 노동조건을 개선하기 위한 투쟁과 공공부문을 중심으로 한 정규직화 쟁취 투쟁이죠. 전자는 지난 10년간 보여 왔던 모습이라면, 후자는 최근의 경향이라는 생각입니다. 비정규직 조직화는 현재의 민주노조운동이 가장 중점적으로 해야 할 역할입니다. 특히 공공부분 비정규직과 플랫폼 노동을 중심으로 한 조직화는 지금도 그렇고 이후로도 활발하게 진행될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다만 실질적으로 더 많이 조직되어야 할 공단의 열악한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조직과 투쟁이 필요한데, 아무래도 더 많이 고민하고 더 길게 조직을 고민해야 될 문제라는 생각이 듭니다.

어찌됐든, 비정규직 투쟁이 끊임없이 계속되고 있지만 여전히 개별적인 투쟁이 대부분입니다. 과거에는 모두가 힘들고 소수의 사람들이 투쟁을 하다 보니 연대체의 필요성이 많이 제기되었지만, 지금은 대중을 설득하기도 힘들어졌고 투쟁의 방식에도 많은 변화가 있는 것 같습니다. 시기마다 다른 방식의 투쟁이 있고, 그 방식을 거부하기보다는 현재의 조건에서 나아갈 길을 찾는 게 맞는 것 같아요.

 

 

또 다른 변화를 만들어내기 위해

 

생각해 보면 지난 건설노조운동은 불가능하다고 했던 것들을 가능하게 만들어내는 과정이었습니다. 일용노동자가 무슨 노동조합이냐며 노동조합 자체도 안 될 거라고 했던 사람도 있었고, 다단계하도급 구조에서 원청과의 단체협약이 가능할 것인가를 물었던 사람도 있었습니다. 모래알 같은 사람들을 어떻게 모이게 하고, 그들과 어떻게 총파업을 하겠냐는 제기도 있었지만 결국 해냈고, 전국 중앙임‧단협도 많은 우려 속에서 결국 만들어냈습니다. 될 때까지 해보자는 꾸준한 시도가 있었고, 수십 년을 건설노가다로 멸시 당해왔던 건설노동자들의 분노가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93년 노조를 만들고, 97년 실업극복운동과 2007년 안산지역 목수총파업, 2017년 중앙임‧단협 체결까지의 과정에서 노동조합은 침체와 부활을 반복했습니다. 지금은 다시 조직을 다져야 할 시기라는 생각이 듭니다. 다져진 조직을 가지고 또 다른 변화, 근본적 변화를 만들어내야죠. 그렇기 위해서는 내부적 실력을 키워야 합니다. 조합원들의 실력, 새로운 간부들의 실력을 키워내는 것이 올해, 그리고 앞으로 제가 해야 할 일이라고 봅니다.

 

 

철폐연대 동지들에게

 

철폐연대는 처음 만들어졌을 때부터 회원이었습니다. 비정규직을 조직하고, 정책을 마련하고, 비정규직 주체들 간의 연대를 형성하는 데에 철폐연대는 많은 역할들을 해왔다고 봅니다. 건설노조 차원에서도 철폐연대는 공안탄압 당시에 많은 도움을 준, 항상 고마운 단체입니다. 회원으로서 자부심도 있고요. 당시 철폐연대는 지역 조직화도 많이 고민했고, 지역별 회원모임도 했었습니다. 특히 비정규직 노조들의 연대와 공동투쟁을 만들어내고자 했던 노력들도 있었죠. 그런데 지금은 그러한 역할들이 잘 드러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철폐연대가 이론을 생산해내는 것뿐만 아니라, 비정규직 노조들 간의 연대라든가 공동투쟁을 만들어내는 것을 더 많이 고민하고 계기를 만들어내는 역할을 적극적으로 해줬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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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질라라비> 200호 발간 기념행사에 함께해주세요.

- 2020년 4월 24일(금) 오후 6시 30분 / 비정규노동자의 집 꿀잠 강당(지하)

- 후원계좌 : 하나은행(전국불안정노동철폐연대) 824-910011-23204

<질라라비>가 200호를 넘어 훨훨 날아갈 수 있도록, 비정규직 노동자의 투쟁과 비정규직 철폐운동에 함께하는 동지들의 참여와 후원을 요청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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