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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풀어쓰는 비정규운동

 

생명안전의 원칙을 만들어가는 생명안전기본법

 

김혜진 • 전국불안정노동철폐연대 상임집행위원

 

 

 

 

1. 왜 생명안전기본법이 필요한가?

 

우리 사회에서 생명과 안전은 중요한 가치가 아니었다. 기업의 이윤을 위해서, 혹은 통치를 위해서 언제라도 침해될 수 있는 것이 사람의 생명과 안전이었다. 하지만 세월호 참사 이후 위험사회에서 각자 도생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과 안전을 시민의 권리로 만들고 정부가 이것을 지키도록 만들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정부는 자신을 ‘안전’의 주체로 인식하고, 시민들을 관리 대상으로 생각한다. 그러다 보니 위험에 처했을 때 잘못을 개인의 책임으로 돌리고, 국가의 정책과 제도에 의해, 또는 그런 제도와 정책의 미비로 생명과 안전이 위험해지는 것을 방치하는 경우가 많다. 생명안전은 시민의 기본권이며, 정부가 이것을 지킬 책무가 있다는 것이 ‘생명안전기본법’의 핵심 취지이다.

안전과 관련한 기본법으로는 ‘재난 및 안전관리 기본법’이 있다. 그러나 이 법은 기본법으로서의 역할을 하지 못한 채, 재난 상황에서 정부가 어떤 역할을 하고 어떻게 권한을 배분할 것인지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다. 시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기 위해서 꼭 필요한 권리보다는 재난 관리 시스템에 집중되어 있는 법인 것이다. 이 법은 기본법의 이름을 갖고 있지만 생명과 안전에 대한 철학을 그 안에 담고 있지 못하다. 따라서 재난과 안전을 다루는 각 법의 상위법으로서의 기본법이 새롭게 만들어질 필요가 있다. 생명안전시민넷에서는 재난과 안전에 대한 기본 가치와 철학을 담는 기본법, 시민들이 누려야 할 권리를 담은 기본법을 만들고자 하며, 그것이 바로 ‘생명안전기본법’이다.

생명안전기본법은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은 초안 상태이며, 2020년 7월 말에 완성된 법안이 만들어질 것이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법 조문을 담기보다는 생명안전기본법에 어떤 조항들을, 어떤 의미를 담아서 넣고자 하는지를 설명하고자 한다.

 

5 풀어쓰는 비정규운동_01.jpg

2020.7.15. <국회 생명안전포럼>이 주최한 ‘생명안전을 위한 기업책임강화 제도 도입 토론회’에서 발표하는 필자 모습. [출처: 이탄희 의원실]

 

2. 생명안전기본법의 주요 내용

 

‘안전권’을 법률에 반영하고 국가 책임을 명문화

 

모든 사람은 사고와 재난의 위험에 노출되지 않고 생명·신체·재산을 보호받으며 안전하게 살 권리가 있다. 성별과 종교, 국적, 인종, 세대, 지역, 사회적 신분이나 경제적 지위 등에 관계없이 ‘모든 사람’이 권리를 갖는다. 안전 약자들이 특별히 보호되어야 한다. 안전 약자는 보통 장애인과 노인, 영유아 및 아동, 임산부나 환자 등을 의미하지만 최근 코로나19 상황에서 확인할 수 있었던 것처럼 저소득층일수록 피해를 많이 입고 있으며, 여행객이나 이주민 등 문화적 약자도 위험에 노출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경제적·사회적·문화적 약자 모두가 특별한 보호가 필요하다.

이 권리에 대한 책임 주체는 국가이다. 안전권을 법률에 명시한다는 것은 국가가 시민의 생명과 안전에 대해 책무를 가진 주체임을 명확히 하는 것이다. 국가는 또한 그 책무의 이행을 위하여 안전에 관한 정책 수립·시행 및 재원의 확충과 효율적인 집행을 위해 노력할 필요가 있다. 안전과 관련한 계획과 지침을 공개하고, 안전사고를 수습하는 전 과정에서 피해자의 권리를 보장해야 하며, 피해자 및 피해지역에 대한 종합적인 시책을 수립하도록 해야 한다. 또한 이 법에서는 기업도 안전에 대한 책무가 있음을 명시하고 있다.

 

안전사고에 대한 독립적인 조사기구 설치

 

국가는 안전사고 발생 시 발생원인 및 대응의 적절성을 조사하는 독립적인 기구를 설치해야 한다는 조항을 담았다. 안전사고가 발생하면 경찰이 수사를 시작하고, 산재의 경우 고용노동부가 원인조사를 한다. 그런데 지금까지의 원인조사는 대부분 표면적인 원인에 머무는 경우가 많았다. 경찰이나 검찰의 수사도 누구에게 책임을 물을 것인가에 초점이 맞춰져있을 뿐, 구조적인 원인을 들여다보고, 대응이 과연 적절했는지를 따지지는 못했다. 이것이 재발방지대책을 마련하는 것을 어렵게 만든다. 그런 점에서 이후 재발방지대책을 세우려면 구조적인 원인을 파헤치는 독립적인 조사기구의 존재가 필수적이다.

이미 항공·철도사고나 해양사고는 독립적인 조사기구가 있어서 사고가 발생하면 그 기구에서 조사를 담당한다. 최근 중대재해가 발생할 경우 별도의 조사기구를 구성해서 원인조사를 진행하는 경우도 많았다. 가습기살균제 피해와 세월호 참사를 조사하는 사회적참사특별조사위원회만이 아니라, 2017년 5월 1일 발생한 거제의 삼성중공업 크레인 충돌 사고에 대해서도 조사위원회가 구성되었고, 김용균 노동자의 죽음 이후에도 특별조사위원회가 구성되었다. 이런 조사기구가 상설화되어 중대재해에 대해 전문성을 갖춘 조사가 이루어지고 재발방지대책이 마련되도록 해야 한다.

 

피해자의 권리 및 피해 회복 지원

 

재난참사에서 피해자들이 신속하고 적정한 구조를 받지 못하고, 유가족들은 가족의 생사 여부와 구조인력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제공받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 또한 잘못된 정보가 아무런 여과 없이 언론에 제공되어 불신이 가중되기도 했다. 이 법은, 지금까지의 재난상황에서 피해자들이 맞닥뜨린 문제들을 ‘피해자의 권리’로서 규정하고 정부가 이를 보장하도록 책무를 명시하고 있다. 이는 결국 ‘피해자는 어떤 존재인가’라는 질문과 맞닿아있다. 피해자는 단지 재난과 참사에서 운이 없는 개인들이 아니라, 구조적인 원인에 대해 질문할 수 있는 사람들이기에, 그런 질문이 덮여지지 않도록 사회가 지원해야 한다.

이 법안에는 피해자의 권리로서, 신속하고 적정하게 구조 받을 권리, 정확한 정보를 받을 권리, 인도적인 처우를 받을 권리, 이를 위해 사생활과 개인정보를 보호 받을 권리, 피해자들의 화합과 조력을 받을 권리, 각종 경제적 지원, 사고 원인 조사과정에 참여할 권리, 배보상의 권리, 후속조치에 대한 의견개진의 권리 등을 담고 있다. 피해자들의 일상의 회복만이 아니라 진실을 알고, 재발방지대책을 마련하는 데에까지 피해자가 나설 수 있도록 권리 항목을 구성하였다.

 

재난과 참사에서 시민들의 참여권

 

정부도 시민 참여를 이야기하지만, 그 때의 참여는 주로 동원의 의미를 갖고 있다. 그리고 전문가들을 불러 이야기 듣는 것을 ‘시민 참여’라는 이름으로 포장하기도 한다. 우리 사회의 위험은 정부가 완벽하게 관리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 있다. 또한 기업들은 자신의 이윤을 위해 위험을 은폐하기도 한다. 따라서 시민들이 참여한다는 의미는 단지 정부의 여러 역할 중 일부에 함께한다는 의미를 넘어서 기업과 정부를 감시하고, 정부의 행정력으로 감당할 수 없는 부분에서 안전을 위한 제안을 한다는 의미이다. 이것이 가능하도록 시민들이 생명과 안전에 관심을 갖도록 교육의 자리를 마련하는 것도 중요하다.

그런데 시민의 참여는 모임을 통한 참여를 의미한다. 생명과 안전에 관심을 갖는 이들이 모임을 만들고, 토론과 교육을 통해 어느 정도의 전문성도 갖춰나갈 수 있도록 할 때 참여는 힘을 가질 수 있다. 다양한 시민 모임의 구성을 전제로 하여 참여의 기틀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 참여를 의미 있게 만들려면 생명과 안전을 과제로 하는 시민 모임에 권한이 주어져야 한다. 각종 재난과 안전사고에 대한 정보에 대해 접근할 수 있어야 하고, 재난과 사고의 예방 및 대처 과정에서 참여하여 역량을 발휘할 수 있어야 한다. 정부와 지자체는 재난과 안전사고에 대한 각종 계획을 마련할 때 시민 모임의 의견을 참조해야 한다.

 

안전영향 평가와 재난 및 위험정보의 공개

 

정부는 규제개혁위원회 등 규제완화 장치를 통해 안전에 대한 규제도 풀어버린 바 있다. 이제는 각종 제도와 법, 정책이 안전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평가하여 안전을 지킬 수 있도록 규제할 필요가 있다. 환경영향평가 등을 통해 중요한 사업이 환경에 미칠 영향을 고려하도록 하는 것처럼 정부에서 수행하는 제도만이 아니라 각종 사업에서도 이것이 노동자나 시민의 안전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파악하여 대응하도록 하자는 것이다. 이런 안전영향평가는 별도의 법률로 규율하도록 조항을 담았다. 이는 시민의 생명 보호와 재난 및 안전사고 예방에 있어 매우 효과적인 수단이 될 것이다.

또한 위험에 대한 정보가 제대로 공개될 때 안전이 지켜질 수 있다. 재난 및 위험의 정보는 국가 또는 기업이 독점하고 있는데, 정보를 체계화하지 않거나 은폐하는 경우도 있다. 지금도 위험에 대한 정보는 많이 공개되어 있으나 전문가가 아닌 이상 쉽게 접근하기 어렵고 분석하기도 쉽지 않다. 위험에 대한 정보는 쉽게 찾을 수 있는 방식으로 공개되어야 한다.

그런데 문제는 기업이다. 기업들은 영업비밀이라는 이유로 위험에 대한 정보를 제대로 공개하지 않고 있다. 기업의 정보 공개를 요구하는 다양한 법률이 있기 때문에 그 법에 근거하되 이 법에서는 기업이 사고원인과 재발방지, 피해회복에 관한 사항을 공개하도록 했다.

 

추모와 공동체 회복

 

재난 및 중대안전사고는 지역사회의 분열을 동반하는 경우가 많다. 세월호 참사만이 아니라 태안 기름유출 사고, 포항 지진, 구미 불산누출 사고 등 재난과 사고는 광범위하게 영향을 미친다. 이러한 재난지역민들의 심리적 안정을 위해서 심리 치유와 회복을 위한 프로그램이 마련되어야 한다. 그리고 재난 및 안전사고로 인해 주민들 사이에 갈등이 발생하기도 한다. 피해 정도에 따라 지속적으로 투쟁을 하고자 하는 이들과 빠르게 마무리하고 싶어 하는 이들 사이의 갈등도 심각해진다. 따라서 지역사회의 신뢰 회복 및 각종 갈등의 조정을 위한 시책을 정부 혹은 지자체에서 마련하도록 하고 있다.

추모공원이나 조형물 등 기억을 위한 노력도 중요하다. 재난과 안전사고에 대해 잊는 것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다. 오히려 기억함을 통해 재발을 방지하며, 우리 사회가 어떻게 변화해야 하는지를 논의하며 행동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기록의 중요성이 있다. 재난참사의 기록은 그 자체로 안전사고를 막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교육 자료이기도 하다. 재난과 중대사고에 대해서는 사고의 발생과 원인, 수습과정, 재발방지대책 등을 기록으로 남겨야 하고, 이 과정에 반드시 피해자의 의견을 수렴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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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5.7. 정부 출범 3주년 및 이천 물류창고 산재사고에 즈음하여 재난 및 산재 피해자 가족들이 문재인 대통령에게 전하는 ‘안전한 나라를 위한 제안’ 공개 서한을 발표했다. [출처: 생명안전시민넷]

 

3. 생명안전기본법을 만들기 위해 함께

 

기본법을 만든다는 것은 ‘생명안전’을 우리 사회의 중요한 가치로 만들자는 것이다. 우리 사회는 점차 복잡해져서 정부가 위험을 관리하고 참사에 대응하기는 쉽지 않다. 그런데 재난과 안전사고는 한 번 발생하면 그 피해가 매우 심각하며, 대응이 제대로 되는가 여부에 따라 피해자 개인의 삶만이 아니라 공동체를 파괴하기도 하고 새롭게 공동체가 구성되기도 한다. 지금까지 안전에 있어 시민들은 늘 대상의 자리에 머물렀으며 기업과 정부는 자신의 책임을 제대로 인정하지 않았다. 이제야말로 생명과 안전을 지키는 주체로서 노동자와 시민사회가 나서야 한다.

세월호 참사 이후 생명안전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하지만 아직 이것을 자기 과제로 하는 시민들의 조직이 잘 만들어지지는 않고 있다. 노동자들은 중대재해를 경험하면서 조금씩 나서고 있고, 산재피해 가족모임인 ‘다시는’도 구성되어 활동하고 있다. 이런 활동이 시민들의 모임으로 연결되도록 해야 한다. 생명안전기본법에 관심이 있는 이들이 함께 모이고 토론하는 것은 단지 법안을 만들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우리 사회에서 ‘생명안전’을 기본 가치로 만들고 그것을 위해 노력하겠다는 선언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런 힘이 모여야 생명안전기본법도 만들어질 수 있을 것이다.

현재 행정안전부에서도 ‘기본법’적 성격을 가진 ‘안전기본법’을 만들겠다고 한다. 그런데 이 법안은 여전히 안전에 대한 국가의 책무를 강조하듯이 개인의 책무를 강조하고 있고, 시민들을 동원의 대상으로 간주한다. 관리체계로서의 기본법의 틀을 여전히 갖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만들고자 하는 기본법은 가치에서 ‘생명의 존엄’을 기본으로 하고, 피해자를 중심에 두며, 시민사회가 나설 수 있도록 하는 법이라는 점에서 정부가 내놓고자 하는 법안과는 성격이 다를 수밖에 없다. 생명안전을 위한 기본법을 만들어나가려면 노동자와 시민들이 함께 목소리를 높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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