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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터 션샤인> 막내 스태프의 안부가 궁금하다

- 권리 찾기를 시작한 희망연대노조 방송스태프지부

조혜승 (독립PD, 희망연대노조 방송스태프지부 부지부장)

 

 

 

#1 빼도 박도 못하고, 비정규직

 

“나는 ‘KBS 촬영’ 스티커를 차에 붙이고 다니면 불법유턴하고 과속해도 딱지를 안 끊어서 PD일에 재미를 붙였는데 세월이 가다 보니 빼도 박도 못하고 미래 없는 이 직업을 계속하고 있다.”

 

<왕초와 용가리>라는 장편 다큐를 만든 이창준 독립PD의 말이다. 내 말이기도 하다. 방송일에 재미를 붙인 이유야 다르겠지만 우리 모두의 말이기도 하다. ‘빼도 박도 못하고 미래 없는 이 직업을 계속하고 있는’ 우리는 ‘비정규직 방송노동자들’이다. 언제부터였을까, 갓 일을 시작한 후배들에게 “빨리 그만둬”, 농담인 듯 진담을 내뱉기 시작했던 것은?

 

 

#2 낮아지고, 높아지고, 그대로인 것

 

그때부터다. IMF 외환위기 이후 방송가에도 비정규직의 그림자가 드리우기 시작했고 ‘기술의 발달’이란 강한 빛까지 내리쬐면서 어두운 그림자는 더욱 짙어졌다. 외주제작단가는 해마다 낮아졌고, 방송장비가 소형화되고, 컴퓨터가 도입되면서 아이러니하게 노동강도는 점점 높아졌다. IMF 이전에는 방송 교양물의 경우 연출, 조연출, 촬영감독, 촬영 어시스턴트, 조명감독, 운전기사까지 최소 5~6명이 움직이던 일을 이제는 PD 혼자 다 한다. 요즘엔 드론까지 날리고, 수중촬영까지 하는 피디도 있다. 울트라 ‘을’이다. 낮아지지도 높아지지도 않고 20년 넘게 그대로인 것도 있다, ‘임금’. 1990년대 초 외주제작사 조연출로 일을 시작하면서 80만 원을 받았었는데 노조가입자 중 막내가 입봉전 작년에 받은 초임이 100만 원이란다. 2000년대 초 10년차를 넘겼을 때 내가 받은 임금이 월 320만 원, 얼마 전 노조설명회를 찾아온 13년차 독립피디는 한 달 연출료가 300만 원이 채 안 된단다. 빼도 박도 못하고 사십 줄에 들어선 ‘울트라 을’. 미처 못 물어봤다, 장가는 갔을까?

 

 

#3 여기는 미친 세상이야

 

2016년 10월 CJ E&M의 이한빛PD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드라마 조연출이었던 그는 비정규직 스태프 해고 업무를 가장 괴로워했고 죽기 전 친구에게 “여기는 진짜 미친 세상이야” 라고 토로했다 한다. 2017년 7월에는 박환성, 김광일 두 독립PD가 아프리카에서 교통사고로 유명을 달리했다. 촬영감독, 운전 스태프도 없이 취재하고 이동하다 생긴 사고다. 故 박환성 PD는 출장 직전 EBS의 불공정계약 관행에 대해 공개적으로 이의 제기를 했었다. 같은 해 12월에는 드라마 <화유기>의 미술 스태프가 세트장 천장에 샹들리에를 달다가 3m 아래로 추락, 하반신이 마비되는 사고가 있었다. 남의 일이 아니었다.

때마침 같은 달 오픈한 ‘방송계갑질119’에는 이제까지 분출하지 못했던 비정규직 방송노동자들의 울분과 성토가 빗발쳤다. 무법지대의 파편화된 개인으로, 강요된 프리랜서와 개인사업자로 존재하던 ‘을’들이 노동자로서의 권리를 찾기 위해 온라인상에서 ‘노조동의’를 연호하기 시작했다. 연호가 100명에 이르면 오프라인 모임을 구성하자며, 미친 세상을 바꿔보자며.

 

 

#4 ‘저녁이 있는 삶’이라뇨? 그저 ‘밤에 잠 잘 수 있는 삶’이라도

 

“방송계 ‘을’들 모여라-노동권ON 갑질OFF”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진행된 2018년 2월 3일 첫 오프라인 모임에는 드라마 스태프, 독립PD, 작가 등 다양한 직종의 비정규직 방송노동자 30여 명이 참석했고, 3월 3일 2차 모임을 거쳐 ‘방송스태프노조 준비위원회’가 결성되었다. 노조 설립에 가속도가 붙기 시작한 것은 5월, 각기 독자적으로 노조 설립을 준비해온 ‘독립PD노조설립추진위원회’(17년 8월)와 ‘드라마스태프협회(17년 8월)’가 준비위로 합류하면서부터다. 회원 규합을 위해 개설한 ‘방송노동자 권리찾기 밴드’에는 두 달여 만에 600여 명의 방송스태프들이 실명을 밝히고 가입신청서를 보내왔다. 특히 하루 20시간 가까운 살인적인 촬영스케줄에 시달리고 있던 드라마 스태프들의 기대가 컸다. 7월 개정된 근로기준법이 시행되고 방송이 특례업종에서 제외되면 ‘밤이 있는 삶 - 밤에 잠 잘 수 있는 삶’이 실현될 거라는 희망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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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방송스태프지부 페이스북]

 

 

#5 48년 전의 구호를 소환한다

 

7월 4일, 희망의 돛을 올렸다. ‘희망연대노조 방송스태프지부’.

생길 법하고 생겼어야 할 것이 비로소 탄생했지만, 방송계 비정규직 노조 설립과 그 과정을 흥미롭게 바라봐온 주된 시선은, 그것이 외부의 시선이든 주체들의 시선이든, ‘과연, 될까? 뭉칠까?’ 하는 의구의 시선이었다. 프로젝트별로 일 따라 이리저리 옮겨 다니고, 입문하면서부터 프리랜서로 길들여져(?) 노동자의식이 희박하고, 무엇보다도 ‘방송사’라는 막강한 ‘갑’이 버티고 있는데, 과연?

‘희망연대노조 방송스태프지부’의 싸움은 주체들의 의식 속에 깊게 똬리 튼 ‘파편화된 개별 근로자로서의 무기력’과 방송제작 전반에 깊숙이 배어있는 악습과의 투쟁으로부터 시작된다.

온갖 첨단기술이 사용되고 세계적인 영상콘텐츠 강국을 자부하는 ‘방송’ 분야가 노동권과 관련해서는 전근대에 살고 있는 느낌이 종종 든다. 전근대성과의 싸움.

방송사와 제작사는 프로그램 방영이 시작되고 나서 혹은 끝나고 나서야 계약서를 작성하고, 콩나물값 깎듯 기준도 없이 제작비를 깎고, 저작권, 2차 저작권 등등 모든 권리는 갑이, 모든 책임은 을이, PD와 작가는 계약서 한 장 없이 말로 일을 하고, 10년을 근속해도 퇴직금 한 푼 없고, 드라마 스태프는 계약서를 쓰긴 하는데 24시간을 저당 잡힌 계약을 하고, 잠 좀 자게 해달라고 호소하고, 후배는 선배의 계약에 덤으로 얹혀 일을 하고(턴키 계약), 산재사고가 생기면 고용주인 선배가 병원비라도 보태주면 고맙고, 방송사 제작사는 뒷짐 지고 있으면 되고, 상습적인 임금체불 업체가 이름 바꿔 다시 등장해도 사업에 지장 없고, 방송사는 그저 “오! 스타 배우~, 그럼 OK.”

전근대 재래시장이 이럴까? 근로기준법이 개정되고 방송이 특례업종에서 제외되면서 이제야 비로소 우리는 48년 전 전태일의 구호를 소환해 외친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그리고 속으로 되뇐다, ‘우리는 노동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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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파 방송사와 계약직PD와의 계약서 내용 중 일부. 근로계약이 아닌 업무위임계약서를 작성하고 근로고용이 아님을 별도 조항으로 명기하고 있다. 왜 굳이 이런 강조가 필요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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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젓이 24시간 노동이 명기돼 있는 드라마 조명팀의 턴키계약서.

3,4일 연속촬영인 경우 마지막 날만 야간연장가산을 적용하고 있다. 그것도 새벽 2시가 넘어 끝나는 경우에만 해당.

 

 

#6 첫 술에 시장기 채우고 먼 길을 간다

 

지난 7월 31일 노조에서는 처음으로 사측과 마주 앉았다. KBS 주말드라마 <같이 살래요> 현장 스태프들의 노동환경 개선을 요구하는 자리였다. 노조에서 내건 요구 사항은,

 

1. 12시간 노동 12시간 휴식을 준수하라.

2. 점심, 저녁시간을 1시간 보장하라.

3. 24시 이후 촬영 종료 시 야간 교통비 지급하라.

 

상식적으로…… 소박하다. 방송사와 제작사의 현실적인 여건을 감안한 요구사항이었지만, 8월 10일 2번에 대한 확답 외에는 회피성 답변이 돌아왔다.

 

1. 노동시간을 68시간 이내로 맞추겠다. (참고로, 3일 촬영에 68시간 개념입니다.)

2. 사업계약(턴키 계약) 내용에 교통비도 이미 포함돼 있다.

 

다행인 건 교섭 진행 이후 노동시간이 1시간~1시간 30분가량 줄었다고 한다. 작지만 변화다.

이 드라마는 9월 8일 종영이다.

 

현재 노조에서는 2차, 3차 드라마 현장교섭을 준비하고 있고, 드라마 <사자>의 임금체불 문제 해결을 위해 <사자>팀의 스태프들과 대응대책을 논의하고 있다. 교양, 예능 부문에서는 조연출, 막내작가들의 최저임금 실현과 제작사의 강요로 편법 도급계약(개인사업자) 형태로 임금을 받으며 아무런 사회적 보장과 안전장치 없이 일하고 있는 독립PD, 작가들의 문제가 가장 시급한 현안이다. 노조의 가장 핵심적이고 근본적인 투쟁의 목표는 ‘방송스태프의 노동자성 인정’과 모든 직종, 모든 영역에서 ‘개별계약’과 ‘근로계약’을 상례화하는 것이다. 무계약, 턴키계약, 편법 도급계약 등의 관행을 타파하고 방송현장을 법의 자기장 안으로 끌어들이는 것!

 

 

#7 <미스터 션샤인> 막내 스태프의 안부가 궁금하다

 

요즘 기다렸다 보는 드라마가 있다. <미스터 션샤인>. 400억의 제작비가 투입되고 넷플릭스를 통해 세계 190여 개국에 동시 방영된다지만 ‘방송신문고’를 통해 올라오는 내용을 보면 스태프들의 노동환경은 국내의 다른 드라마와 전혀 다를 바 없는 것 같다. 얼마 전 <미스터 션샤인>의 특수효과팀 막내 스태프가 야간 촬영을 마치고 다음 새벽 촬영 일정을 맞추기 위해 잠도 제대로 못 자고 운전대에 앉았다가 교통사고가 나 병원으로 실려 갔다는 소식도 있었다. 드라마 볼 때는 이병헌, 김태리 때문에 정신 놓고 있다가 드라마가 끝나면 생각난다. 그 막내스태프는 많이 다치지 않았나? 괜찮을까? 산재처리는 됐을까? (팀 내부적으로 사고에 대해 함구령을 내렸다는 소문도 들린다.)

 

단지 <미스터 션샤인>뿐이랴, <서른이지만 열일곱입니다>, <라이브>, <아는 와이프>, <러블리 호러블리>, <그녀로 말할 것 같으면>, <한국인의 밥상>, <인간극장>, <세계테마기행>, <아침마당>, <생활의 달인> 등등. 대부분의 드라마, 절반에 가까운 교양‧예능 프로그램들이 외주제작,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열정과 고혈로 만들어지고 있다. 폭염이 기승을 부린 올 여름은 특히나 제작현장 스태프들의 안부가 궁금한 계절이었던 듯하다. ‘희망연대노조 방송스태프지부’가 내년 여름에는 스태프들에게 좀 더 시원한 소식을 전할 수 있기를 소망한다.

 

 

3 2018.8.10. 방송스태프지부가 러블리 호러블리 팀에 보낸 커피차 [출처 방송스태프지부 페이스북].jpg

2018.8.10. 방송스태프지부가 러블리 호러블리 팀에 보낸 커피차 [출처: 방송스태프지부 페이스북]

 

 

ps. <미스터 션샤인> 보시고, <한국인의 밥상> 보시고, 마지막까지 스태프 스크롤도 보시고, 이 드라마는 노동환경은 괜찮은가? 이 프로그램 제작피디는 근로계약을 제대로 했을까? 이 방송은 공정한가? 궁금하셨으면 합니다. 그런 세상이었으면 합니다. 카메라 뒤에도 사람이 있음을 떠올리는, 가끔씩이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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