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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장에서 지역에서 철폐연대 동지들은

 

걸어온 길에서 나아갈 길까지, 노동박물관을 향한 한걸음

양규헌 (노동자역사 한내 대표, 철폐연대 회원)

 

 

역사는 지난날 인간사회에서 일어난 사실 중에서 누군가에 의해 중요한 일이라고 인정되어 선택된 것입니다. 역사란 결국 기록에 남은 것이며, 기록에 남지 않은 것은 역사로 연결되지 않습니다. 자본주의 이래 노동자가 사회 구성원의 절대 다수가 되었으나 노동자들은 천대받는 대상으로 여겨졌으며 그들에게는 기본권리조차도 인정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모순에 맞서서 노동자들은 투쟁을 통해 사회를 변화시켰고 정의, 자유, 평등을 주장하는 중심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노동자들의 투쟁을 역사적으로 정리할 기록이나 자료는 보존되거나 관리되기는커녕, 버려지고 유실되어 왔습니다. 역사는 과거와 상호 작용하는 끊임없는 소통이며, ‘역사는 기록하고 기억하는 자의 것’이라고도 합니다. 그런데 역사를 기록해도 그 기록물을 관리하고 활용하지 않으면 기록 자체만으로 의미를 찾기가 어려워집니다. 따라서 노동의 역사는 과거와 현재뿐만이 아니라 미래까지 상호 작용한다는 확신에서 자료를 수집, 관리하고 활용할 방안을 모색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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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8. 노동자대투쟁 30주년 ‘1987 노동자 인간선언’ 기념전시회 [출처: 한내]

 

 

노동운동사의 본질을 무차별 왜곡하는 자들

 

자본의 끊임없는 착취에 맞서 싸워온 노동자 역사는 늘 왜곡되고 소외되어 왔습니다. 어디에서도 노동자들이 사회 공동의 이익을 추구하는 계급이라는 설명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왜곡된 역사를 배우는 것은 역사적 진실이 아니라 권력자(지배계급)의 검열을 통과한 특정 해석을 수용하는 것일 뿐입니다. 때문에 역사를 어떻게 볼 것인가 하고 물을 때 누구를 위한 역사인가, 어떤 계급의 이해를 대변하는 역사인가에서 시작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목격했던 역사의 중심은 모두 지배권력의 역사였습니다. 지배자들의 기록물은 관리되어 전수되지만 노동운동 기록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자료는 유실되면 복원이 어렵지만 자료의 가치는 시간이 지날수록 높아집니다. 기록으로 보존되지 못한 노동자 역사는 왜곡되거나 단절되었고 결국 노동운동은 입맛에 따라 기형적으로 해석되고 쓰여졌던 것이 사실입니다.

 

10여 년 전, 한때 노동운동을 했던 사람이 정부 관료가 되어 노동운동 자료관을 만들겠다며 상당한 예산을 들여 토론회를 개최한 적이 있습니다. 이 자리에 참석했던 일본의 오하라 연구소 소장의 한마디가 야심차게 준비했던 정부 주도의 노동운동자료관을 포기하게 만들었습니다. 그 한마디는 바로 “노동운동 자료는 노동자가 관리해야 한다” 였습니다. 그렇습니다. 노동운동 자료는 노동자가 수집하고 관리하고 운영해야 합니다. 정부가 노동운동 자료를 관리하고 활용한다면 노동운동에 대한 본질이 어떻게 왜곡되는지 불을 보듯 뻔합니다.

 

자료를 수집하고 관리하고 운영한다고 해서 운동의 정신이 계승되거나 발전되지 않습니다. 기록에 남겨진 사실조차도 사회악인양 엉뚱한 방향으로 해석하는 경우를 지금도 목격하고 있습니다. 최근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전태일의 풀빵정신이 왜곡되어 유행병처럼 번지고 있습니다. 전태일 정신은 “해방정신”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엄혹한 유신독재정권 시기 전태일의 풀빵이 불쌍한 노동자에게 먹거리를 건넨다는 온정주의로 해석되어서는 안 됩니다. 비참한 상황에 처해진 동지와 아픔을 함께하겠다는 계급정신으로 해석되어야 합니다. 아픔을 함께하며 그들을 조직하여 투쟁으로써 생존과 기본권을 확보하자는 계급정신인 동시에 투쟁의지 속에 담긴 해방정신이 진정한 전태일 정신이라고 봅니다.

그러나 풀빵정신을 왜곡하여 ‘노동자는 노동자끼리 나눠야 한다’는 발상은 저임금‧고용불안의 현실을 바꾸기 위해, 노동자 권리를 향해 자본가 계급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끼리 나눠야 한다는 이상스런 논리입니다. 다시 말해 모순에 대한 근본적인 원인이 자본가계급에게 있다는 사실을 애써 외면하고 노동자간(정규직과 불안정노동자)에, 정규직이 비정규직에게 베풀지 않는다고 꾸짖고 있습니다. 이들은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조차도 감싸 안으며 노동자를 비난하고 있습니다.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으로 같은 노동자를 포섭과 배제의 대상으로 구분하여 노동자간 경쟁으로 몰아 계급 내부를 갈라치는 자들은 자본가들인데 말입니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주장은 비열한 자본가들의 논리를 대신하는 대행업체 같은 것이라고 봅니다.

 

 

10년의 방황과 그 후 10년

 

‘노동자역사 한내’의 출발은 1996년 전노협 해산 시기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전국에서 수집된 민주노조운동 자료가 『전노협백서』 발간 이후 10여 년을, 조난당한 배처럼 여기저기로 떠다녀야 했습니다. 자료를 보관할 안정된 공간이 없어서 자료의 유실을 우려한 많은 동지들이 힘을 모아 2008년 ‘노동운동 역사자료실 한내’를 설립하였습니다.

지난 10여 년간 한내는 노동자 역사를 제대로 세우고 민주노조운동의 정신을 이어가겠다는 일념으로 자료 수집과 관리는 물론 DB관리, 전시와 역사기행, 탐방과 교육사업, 출판사업(투쟁백서 등)을 진행해 왔습니다. 크고 작은 과제를 수행해 온 배경은 노동운동 역사자료관으로서의 임무이기도 했지만 더 많은 자료와 박물을 대중에게 전시하여 노동자 투쟁의 역사에 대한 고민을 확장하기 위함이었고, 관심 있는 연구자들이 연구할 수 있는 조건을 마련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에는 자료관의 성과를 모아 박물관을 설립한다는 더 큰 목적이 있었습니다. 나아가 이 목적은 노동자 모두의 꿈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노선과 전략이 없는 노동운동은 형식은 있으나 내용이 없다는 증거입니다. 노동해방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이며 노동운동의 정신이 무엇이고 우리가 추구했던 운동의 노선이 무엇이었는지 주장할 수 없고, 노동운동 전략이 전무한 상태를 노동운동의 위기라고 합니다. 위기는 기회라고 하지만 위기 대응에 구체적 방안이 없으면 기회는 절대 잡을 수 없습니다. 운동의 성과를 계승하고 장기적인 대안을 마련하기 위해 자료관과 전시관을 더욱 발전시키려 하고 있습니다.

이제 박물관을 향한 첫발을 내딛습니다. 노동박물관은 노동운동의 흔적들을 보여주려는 목적에서 추진되는 것이 아닙니다. 박물과 자료를 안정된 공간에서 체계적으로 관리하며, 생산된 자료를 통해 노동운동 역사탐방, 토론회, 교육, 연구사업을 안정적으로 추진하려는 목적이 담겨있습니다.

 

촛불 이후 정치적으로 많은 변화가 있었고, 4차 산업과 함께 노동자 인권이 강조되는 시기에 이르렀지만 정작 산업발전의 원동력인 노동자 운동의 흔적은 체계적으로 집약되지 못하고 분산되어 있는 게 지금의 현실입니다. 자료와 박물에 대한 인식도 높지 못합니다. 노동운동의 연구 성과를 모아내기 위해서 뒷받침될 수 있는 자료와 근거 들이 필요한데 이 또한 미약한 것이 사실입니다. 노동박물관은 자료는 물론이고 노동운동의 역사를 계급적으로 인식하고 노동운동의 전망을 발견하는 곳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한국에는 노동박물관이 없습니다. 몇몇 지자체에서 간판에 이름만 덧붙인 산업노동박물관은 있으나 이런 박물관은 노동박물관이 아닌 산업박물관입니다. 산업의 한 모퉁이에 끼어 놓은 노동운동은 산업역군으로서의 임무만 부각시킨 왜곡이며 비약입니다. 황실, 민속, 자연사, 역사, 산업, 신발, 짜장면 박물관은 있는데 노동박물관은 없습니다. 노동자역사 한내가 동지들과 함께 노동박물관을 세우려고 합니다.

 

 

확장된 공간과 체계적 관리와 연구가 가능한 노동박물관

 

지난 10여 년간 한내가 수집한 자료는 20만 건이 넘었고, 박물류 400여 점, 사진영상 100여 상자 등 많은 자료들이 발 디딜 틈도 없이 쌓여가고 있습니다. 나아가 지속적으로 생산되는 자료 수집과 관리는 물론, DB관리체계 구축에도 어려움이 있습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구조적 방안이 마련되어야 하는데 그 대안이 바로 노동박물관입니다.

박물관은 일상적인 전시는 물론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운영되어야 합니다. 참여하는 대상도 노동자뿐만 아니라 학생들에게도 공개되어야 하며 일반시민들에게도 열려 있어야 합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노동운동의 역사를 보여주는 것이 운동인 동시에 박물관의 역할입니다. 따라서 박물관 건립은 특정 개인이나 단체가 아니라 노동자를 포함한 운동진영이 함께 힘을 모아야 그 의미가 빛을 발할 수 있습니다.

 

이제 노동자역사 한내는 사업 10년의 성과를 모아, 자료관의 위상을 넘어 박물관으로 전환하기 위한 기반을 다지려 합니다. 지금까지 다양한 사업을 수행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많은 동지들의 참여와 협력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려움을 겪었던 문제는 안정적인 공간 확보였습니다. 현재 일산에 200평 규모의 건물이 완성되어가고 있습니다. 박물관으로 출발하기에 손색이 없다고 판단합니다. 향후 전체 노동자와 운동진영이 이 사업을 함께한다면 공간은 얼마든지 확장될 것이며 역량도 축적된다는 확신에서 도전하기로 했습니다. 당위로서의 사업이 아니라 실천해야 할 과제로 설정하고자 합니다.

 

역사적으로 노동운동이 도전하지 않았던 새로운 길, 박물관 건립에 많은 동지들이 함께해주실 것을 호소합니다. 박물관으로의 출발은 자료와 박물을 보여주는 공간으로서의 위상이 아니라 민주노조운동의 정신과 열사들의 투혼을 노동자, 학생, 시민이 함께 공유하는 공간으로 확장하는 것입니다. 보다 체계적이고 안정된 공간이 민주노조운동의 투혼을 살려내고 정체성을 확립하여 노동운동을 질적으로 발전시켜내는 토대가 될 것이라 확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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