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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부터 대의(大義)를 위한, 이병삼 한남운수 정비노동자의 투쟁
문재훈 (서울남부노동상담센터 소장)

 

개인적으로 한남운수와 우리 상담소는 인연이 깊다. 물론 악연이다. 글을 쓰는 지금도 한남운수 출투를 마친 직후다. 이병삼 정비노동자 전에 정만승 기사 해고자와 함께 4년을 싸웠다. 이어 이병삼 정비 해고자와 6년, 도합 10년이 넘는 시간을 한남운수 정문 앞에 서 있다. 그 사이에 대표이사가 바뀌고 한국노총 조합장이 세 번 바뀌었다. 그들 모두 조합장이 되기 전에 우리 상담소에서 상담을 했던 이들, 조합장 된 이후 인사도 건네지 않았다. 정만승 해고자가 투쟁할 때 정비사들은 구사대 비슷했다. 그래서 운전기사에 비해 정비사들에 대한 인상도 좋지 않았다. 

 

1994년 이명박은 서울시내버스를 준공영제로 바꾼다. 세금으로 버스회사 이익을 안정적으로 보장해 주는 것이다. 하지만 시민들에게는 중앙차로제의 신속함과 환승제의 저렴함만 보였다. 이명박이 대통령이 된 힘이 버스 준공영제와 청계천 복원이라 하니 그 위력을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준공영제는 서울시 버스업체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에게 보이지 않는 지옥이었다. 현재까지 준공영제 이전과 이후에 버스는 1천 대 이상, 기사는 7천 명 이상이 줄었다. 보이지 않는 구조조정 정리해고가 전개된 것이다. 
그 피해는 당연히 정비노동자들에게도 밀려왔다. 정비노동이 고쳐 쓰는 수리 기능에서 부품을 통째로 교환하는 교체기능으로 돌려진 것은 IMF 환란 이후다. 우리에겐 지독한 낭비지만 재벌 자동차 회사나 자동차 부품회사에겐 큰 이익이다. 그 결과 정비기능의 독립성은 사라지고 한 정비사가 다양한 정비기능을 담당하는 체제가 도입된다. 정비사들이 전문기능사로서 중요성이 줄자마자 들이닥친 것이 연봉제다. 정비사들은 근속이 아주 길다. 최소 20년에서 30년이 넘는다. 그래서 개인 임금으로 기사들보다 많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고참 정비사 한 사람의 임금으로 신참 정비사 두세 명은 고용할 수 있다. 그래서 고안된 것이 연봉제다. 연봉제란 이름의 비정규직화다. 현재도 서울시내버스 정비사들의 70-80%는 이런 신세다. 


우리 상담소가 정비사들을 만난 것도 연봉제가 실시된 곳에서 5년, 6년이 되어도 임금은 오르지 않고 고통만 늘어가는 것에 분노한 이들의 방문으로부터였다. 그리고 좀 늦게 만난 정비사들이 한남운수인데 처음에 연봉제로 변경하려는 것에 대한 대응 모색으로 우리 상담소를 찾았다. 

 

서울 시내버스에서 정비사들에게 연봉제를 강제하려면 또 하나의 단계가 있다. 한국노총 소속 어용노조의 조합원 자격을 상실시켜야 한다. 왜냐면 어용노조라도 임·단협이 있고 거기에서는 연봉제가 아니라 월급제로 규정되어 있고, 연봉제 실시 후에도 개인근로계약 형식을 이유로 불이익을 감수케 하기 위해서라도 단체협약 적용 범위를 벗겨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초기에 찾아 온 정비사들은 어용노조 재가입 신청을(이것 설득하는데 참 어렵…) 하고, 조합원 가입을 거부하는 어용노조와 싸우다, 선거 기간의 틈을 이용하여 조합원에 가입된 후 단협 적용을 주장하며 또 싸웠다. 한남운수도 회사에서 정비사들에게 조합 가입 탈퇴를 조장했다. 조합비가 아까운 이들은 탈퇴도 한다. 하지만 그러면 당한다. 그래서 불응하면 이번엔 아예 어용노조가 나서서 조합원 탈퇴를 압박한다. 정말 더러운 어용의 꼴을 보려면 택시노조, 버스노조를 보면 된다.

 

한남운수는 전 회장 박태진이 흑자부도로 물러나고 제1채권자였던 지금의 박복규가 들어오며 연봉제를 강행했다. 정비사들이 연봉제 도입을 거부하자 두 번째로 시도된 것이 근속 많은 정비사들을 운전기사로 돌리는 것이었다. 어차피 근속을 포함한 임금을 주며 버스기사로 돌리면 실비정산(실제 지급한 돈을 세금으로 받는 제도 형식)이 되니 큰 문제가 없고, 대신에 신참 정비사들을 고용하면 표준정산제(버스당 고정비용을 세금으로 받는 제도 형식)이니 기존의 지급되는 임금의 반 이하로 주며 일도 시키고 나머지도 챙겨먹게 되는 것이다. 신참들은 들어올 때 처음부터 비정규직 연봉제 계약을 하고 그 기준은 최저임금이다. 그러니 자본가들에겐 이 방법도 꿩 먹고 알 먹는 수단이다. 


그래서 한남운수는 정비사들에게 전원 1급 면허를 취득하게 한다. 그것을 거부하면 징계를 준다고 한다. 그런 과정에서 우리 상담소를 처음 찾아온 정비사들 중심으로 5명이 정비사들이 단결해 투쟁하자는 단합수련회를 간 시간에, 운전기사로의 전직에 서명을 한다. 처음 우리 상담소를 찾아와 총대를 멘 이들의 배신이었다. 속으로 낙망(落望)했다. 배신을 한 최고참 책임자는 나머지 정비사들에게 “너희는 절대 투쟁할 수도 단결할 수도 없다. 회사 말 수용해라. 안 다치고 살려면 상담소 가지마라.” 했다고 한다. 


그래도 나머지 정비사 14명을 모았다. 놀랍게도 그분들은 스스로 단결하고 투쟁할 것을 결의한 채 찾아왔다. 나의 상담 역사에서 손가락에 꼽히는 감동의 순간이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노동자 계급의 저력과 힘을 느꼈다. 일종의 기적이었다. 그래서 회사의 방침이 ① 정비사로 특정된 근로계약서를 파괴하는 것이고, ② 정비사로서 평생 직업에 대한 자부심과 헌법이 보장하는 직업선택권을 부정하는 것이며, ③ 버스 기사로 2년 이상 경험해야 가능한 운전기사로의 전직 기준을 위반하는 부당한 것이라는 이유를 들어 거부의 내용증명 서신을 보낸다. 그때 근속이 짧은 막내이자 당시 정비사들의 조직화에 열심이었던 차재만 정비사의 친구라는 이유만으로 ‘이병삼외 13인의 정비사 일동’이란 명의로 내용증명을 보냈다. 결의를 했지만 아직도 총대를 멜 용기를 내고 나서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 명칭 하나로 이병삼을 정비사들의 대표로 본 회사는 모든 탄압과 괴롭힘을 이병삼에게 집중시킨다. 그리고 그 탄압은 해고에 이른다. 

 

준비되지 않는 상태에서의 해고라 이병삼의 해고 투쟁은 쉽지 않았다. 출근 투쟁을 시작한 것도 해고가 된 지 만 2년이 넘어서였다. 그 사이에 이기고 지는 법적 투쟁 과정이 있었고, 집이 넘어가고 형제가 헤어지는 신고(辛苦)도 겪었다. 투쟁을 결심하고 나설 때, 이병삼 해고자는 투쟁을 처음부터 개인의 복직 문제가 아니라 시민의 안전 문제로, 준공영제의 구조적 문제로 시작했다. 이것은 지금까지 유지되어 온 관점이다. 그리고 이 관점의 유지가 대법에서의 해고 소송 패배 등의 악재에도 흔들리지 않고 투쟁을 전개할 수 있는 토대가 되었다. 


이병삼 해고자는 일관되게 해고의 이유 자체가 준공영제의 허점을 극대화하려는 자본의 탐욕의 결과이자, 서울시민의 세금을 버스업체의 사익에 퍼주는 잘못된 서울시 버스정책에 기인한 것임을 주장했다. 이것을 통해 표준정산제라는 제도를 악용하여 24명의 정비사 임금을 받고도 14명의 정비사만 고용되어 있는 현실이 보여주는 임금 세금 도둑질을 폭로하고, 예방정비가 아니라 고장정비에 머무는 안전상 치명적인 문제점을 고발했다. 그것도 모자라 연봉제라는 비정규직화, 신참 최저임금 고용을 통해 마른 수건 쥐어짜는 버스 자본들의 잔인함을 폭로했다. 이병삼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사회 전체의 문제, 이병삼 개인의 해고 복직 문제가 아니라 공공성이 강한 버스 교통 체제에 대한 구조적 문제임을 확인했다. 그 과정에서 정비사들은 한국노총의 굴레를 깨고 나와 민주노총 공공노조 버스지부 정비지회를 조직한다. 이들은 이병삼 문제를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전체 문제로 받아 안고 서울시 로비 농성, 한남운수 면담요구 차고지 사무실 점거투쟁을 40일 넘도록 함께하고 있다. 대의를 통해 실리를 만드는 순서에 익숙해지는 것, 이것이 일상에서 자본과의 투쟁에서 이기는 과정이고 이 삶의 습관이 계급 당파성을 만든다.  

 

개별적으로는 너무나 약하고 약점도 많고 문제도 많지만, 정비노동자들이 스스로의 처지를 알고 분노하고 조직하고 투쟁한 시간이 십년이다. 처음에 함께 투쟁한 정비사들이 정비지기회라는 조직을 일군다. 그들을 중심으로 버스회사 정비창을 일일이 방문해서 선전 조직 활동을 한다. 그 힘으로 민주노조를 만드는 과정을 지켜본 나로서는 그 시간 자체가 기적이자 감동이다. 

예전처럼 신속하고 확고하게 해내는 현장 조직화 과정이 아니다. 하고 싶은 조직적·정치적 지도도 사라진 지 오래다. 그래도 정말 오래가는 민주노조, 삶이 윤택해지는 민주노조를 만드는데 노동자들 자체만으로도 충분하다는 것을 알아온 과정이었다. 옆에만 있어도 좋았다. 
그러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이 있다. 되든 안 되든 모임의 정기성과 모임에 학습을 병행하는 것이다. 처음부터 개인의 이해득실이 아니라, 나의 이해가 왜 전체 정비사들의 이해인지, 나아가 전체 노동자들의 대의인지 이해시키는 과정이어여 한다. 그 과정에서 때론 다투고 때론 삐지지만 챙겨지는 관계의 의리, 서로에 대한 이해와 존중이 중요하다.  

 

 

사족으로 한남 운수투쟁의 과정에서 느낀 즐거움을 하나. 
성질이 급하고 입이 험한 것은 기름쟁이들의 특성이다. 그런 이들이 술까지 취하면 입에서 나오는 말의 반은 ‘씨발’이고 나머지 반은 ‘좆도’다. 그보다 더 험한 말이 안주처럼 따라 붙는다. 처음 정비사들을 보며 상담 전에 기초 교육을 진행했다. 그러면서 회사로부터 인간 대접을 받지 못해 억울한 이들이 가정에서 악질자본 짓을 하면 안 된다, 당장 다 못 바꿔도 술 먹고 하는 욕을 좀 줄이자고 했다. 한두 달 지난 다음 한 사람이 뒤풀이 자리에서 그런다. “소장님 요즘 우리 집에서 상담소 가래요? 술 먹고 집에 가서 욕을 안 하게 된 것이 노조 교육 때문이라니 노조 좋다며 그래요.” 노조하면 가정 파괴된다는 말만 듣고 살았는데 민주노조를 하면 가정이 평화로워진다는 사실에 흐뭇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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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삼한남운수정비노동자의투쟁_문재훈질라라비_201612.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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