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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책 포커스

 

노동권 제도 재구성의 필요성과 방향

장귀연 (전국불안정노동철폐연대 부설 노동권연구소장)

 

 

노동자/노동권에 대한 기존 개념

 

모든 인류 역사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노동을 함으로써 생계를 유지할 재화를 획득해 왔다. 사회적으로 어떤 제도적 방식을 통해 사람들이 노동으로 생계 유지를 하는가가 마르크스주의적인 용어로 사회적인 ‘생산관계’이며, 마르크스가 이를 기준으로 하여 사회적 양식을 구분해서 역사적 유물론의 기초를 삼았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이것의 자본주의적인 방식은 노동자가 ‘고용’이 되어 일하고 ‘임금’을 받아 생계를 유지하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부르주아지와 쁘띠부르주아지, 프롤레타리아트라는 전통적인 삼계급론을 내세웠다. 생산수단을 소유하고 누군가를 고용해서 일을 시켜 수익을 얻어내는 부르주아지, 생산수단을 소유하고 그것을 가지고 스스로 일하는 쁘띠부르주아지, 생산수단을 소유하지 못해서 자신의 노동(력)을 판매하는 프롤레타리아트. 일반적으로 노동자란 자신의 노동력을 판매하는 프롤레타리아를 가리킨다. 즉 고용이 되어 임금을 받는 임금노동자를 의미하는 것이다. 쁘띠부르주아도 스스로 노동하는 것으로써 생계를 유지하지만 ‘노동자’라는 개념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쁘띠부르주아는 생산수단을 소유했기 때문에 어떤 의미에서는 부르주아의 일종이고, 사실 자본주의의 발전에 따라 양극분해될 것이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노동자란 곧 임금노동자를 의미했다. 생산수단을 소유하지 못해서 노동력을 판매하여 그 대가로 살아가는 사람이다. 여기서 노동력 판매란 다음 두 가지를 의미하는데, 하나는 자기 노동의 산물이 자기 것으로 돌아오지 않는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노동과정에서 자기가 원하는 대로가 아니라 시키는 대로 일을 해야 한다는 점이다. 바로 이 두 가지가 쁘띠부르주아, 즉 자영노동자와 다른 점이다.

 

반대로 고용이란 특정한 ‘시간’ 동안 일을 시킬 권리를 사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 특정한 ‘공간’에 노동자를 모아 일을 수행하게 한다. 따라서 임금노동은 특정한 시공간을 전제하고 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우선적으로, 통제와 감시의 문제 때문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예제는 금지되고 노동(력)이 상품화되었지만, 역설적으로 노동은 사실 노동자라는 구체적인 인간 자체에서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 특정한 시간 동안 노동을 시킬 권리를 사는 것인데, 이 시간 동안 노동자가 고용주가 원하는 만큼 일을 해줄지는 또 다른 문제다. 고용주는 그 시간 동안 최대한 일을 많이 시키려고 하겠지만, 노동의 산물이 자기 것이 되지 못하는 임금노동자가 몸과 마음과 정신을 지나치게 소모해가면서까지 일할 동기는 없다. 그리하여 고용주의 입장에서 통제와 감시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다. 일을 시키는 동안 특정한 공간에 모아두는 것이 직접적으로 감시하고 통제할 수 있기 때문에 효과적일 수밖에 없다. 이것의 역사적인 사례로, 자본주의 초기 선대제(요즘 식으로 말하면 외부도급)에서 고용주의 작업장에서 일하는 매뉴팩처로 이행하는 과정을 얘기할 수 있다. 18세기에 아담 스미스가 이미 언급했듯이, 기계가 사용되지 않고 노동과정이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더라도 단지 통제된 분업과 직접적인 감시만으로도 생산성이 크게 증가했던 것이다.

 

또한 시간이 지나 자본주의가 발전하면서 현대화됨에 따라 대기업의 대규모 시설과 설비 및 협업-분업 조직이 필요하게 되었다. 개인이 감당할 수 있는 시설과 조직이 아니기 때문에 노동자들은 이러한 시설을 갖춘 장소로 출근을 해서 일을 해야 했다. 이 시기에도 통제와 감시 문제는 계속되었다. 테일러주의가 이 시기의 사례이다. 브레이버만이 잘 설명한 것처럼, 테일러주의란 노동에서 구상과 실행을 분리하고 노동과정을 매뉴얼화하여 세분화된 분업으로 재조직함으로써 노동과정에서 최대한 노동을 짜낼 수 있게 만드는 것이다. 이 시기에는 기계 자체에 이러한 세분화된 작업과정을 설계하고 인간의 노동을 이에 종속시키는 방식으로 노동을 더욱 효과적으로 통제하는 것이 가능했다.

 

노동자란 바로 이러한 방식으로(고용이 되어, 특정한 시공간에서, 감시와 통제를 받으며) 일하는 사람을 의미했기 때문에, 노동권도 이에 조응하는 방식으로 성립되었다. 사실 자유주의적 관점에서는 고용계약도 간섭을 받지 말아야 할 자유로운 상호계약이지만, 실제로 임금노동자는 결코 고용주와 대등한 관계가 아니고 훨씬 더 불리한 입장에서 계약을 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적어도 이러한 권력 불균등 관계에 대해서 특별한 보호가 필요하다는 인식이 확산되었던 것이다. 물론 역사적으로, 이에 대해서 자본가들의 세력과 자유주의적 이데올로기의 반대가 심하였지만, 노동자들이 피를 흘려가며 쟁취한 권리이다. 그 결과 두 가지 방식으로 노동권 제도가 수립되었다. 하나는 근로기준법 등 개별적 노사관계에서 법적 보호이고, 다른 하나는 노동3권 보장을 통한 집단적 노사관계의 확립이다.

 

 

신기술과 고용관계의 해체

 

노동권의 성립은 내부노동시장(요즘 식으로 말하면 정규직)의 형성에 기여했다. 내부노동시장은 일단 진입을 하면 외부와의 경쟁에서 어느 정도 차단된다는 뜻인데, 비용 절감을 위해서는 경쟁노동시장이 분명히 자본에 유리한데도 불구하고 이러한 내부노동시장이 성립한 이유로는 대체로 다음과 같은 것들을 들고 있다: 기업특수적 숙련, 거래비용, 노동조합의 세력화.

노동권의 성립은 물론 노동조합의 세력화에 크게 영향을 미쳤다. 뿐만 아니라 근로기준법 등 법적 보호를 통해 해고 등의 비용을 크게 높임으로써 거래비용을 증가시켰다. 하지만 현대의 신기술은 이러한 경향을 반전시키는 데 기여하였다.

 

신기술이 노동에 미치는 영향은 주로 세 가지 측면에서 논의되어왔다. 우선, 가장 많이 이야기되는 것은 일자리의 양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이다. 즉 신기술로 고용이 축소되는가, 아니면 기존에 사람들이 일하던 것을 기술적 수단이 대체하더라도 신기술과 관련된 새로운 일자리의 창출로 상쇄될 수 있는가 하는 것에 관한 쟁점이다. 예를 들어 자동화가 통상 얘기되는 것보다 급격히, 또는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연구들도 있다. 하지만 사실 그것은 기술적 문제라기보다는 비용 문제이다. 어떤 경우에는 완전자동화보다 부분자동화가 노동을 탈숙련하여 값싸게 노동력을 사용할 수 있기 때문에 비용 측면에서 유리할 수 있다. 즉 설사 고용량을 축소하지 않더라도 임금의 상한을 설정하는 기능을 할 수 있다.

다음으로, 노동과정과 관련한 영역이 있다. 기술의 변화는 노동과정을 재조직화하게 된다. 예를 들어 이른바 노동과정의 유연화라고 부르는 것은, 다기능화와 동시에 탈숙련화를 추구한다. 말하자면 사소한 자율성을 주는 것과 동시에 핵심적인 부분에 대해서는 통제를 강화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여기에서 다루는 주제로 고용관계에 미치는 영향이다. 신기술은 내부노동시장 성립의 이유였던 기업특수적 숙련과 거래비용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기여하기 때문이다. 디지털 기술은 작업과정을 더욱 표준화하여 기업특수적 숙련의 필요성을 떨어뜨린다. 컴퓨터라는 도구를 통한 표준화된 프로그램들은 이 시대의 컨베이어벨트라고 할 만하다. 또한 정보통신기술의 발전은 거래비용을 떨어뜨리는 것을 가능케 하였다. 적은 비용으로도 일할 사람을 찾고 관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결국 신기술은 내부노동시장을 해체하고 고용관계를 외부화하는 데 주요하게 이용된다.

 

특히 정보통신기술은 고용의 시공간을 해체한다. 어디서나 접속하여 회사의 자료를 가지고 업무가 가능하고(ex. 클라우드, 웹하드 등), 원격지의 상황이 중앙센터에 바로 입력되고 집적되며(바코드나 RFID 태그, POS, 업무입력 단말기 등), 언제 어디서나 즉각적인 요구와 호출이 가능하다(모바일 앱). 이를 통해서 원격 통제가 가능해지면서 노동자가 작업장에 모일 필요가 없어졌다. 즉 노동공간이 해체된 것이다. 또 이렇게 집중 공간이 해체되면서 시간을 정해놓을 필요가 없어지면서 시간도 해체된다. 결국 이러한 시공간의 해체는 고용관계 해체로 이어진다. 고용을 해서 특정 시간 동안 특정 공간에서 일을 시키지 않아도 노동을 관리·통제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결과 고용관계가 아니면서도 자본에 포섭·종속된 노동이 증가하게 되었다. 그러한 것들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 특수고용 : 예전에는 고용관계를 맺는 임금노동자였으나 근래에 들어와 외부화하여 개인사업자가 되었다. 주로 외근직이며 성과가 명백히 계산될 수 있는 직종 중심으로, 화물기사, 택배기사, 보험모집인, 학습지교사 등을 들 수 있다. ② 프리랜서 : 기간이 정해진 프로젝트성 업무(또는 그것의 일정 부분)을 위탁받아 수행한다. 작업장에 갈 수도 있고 재택근무를 할 수도 있다. 문화예술 부문에는 예전부터 이러한 방식이 지배적이었으나, 방송이나 출판, 프로그래밍 등의 업종에서는 예전에는 임금노동자였다가 외주화로 인해 개인사업자인 프리랜서로 전환되는 과정을 거쳤다. ③ 단기주문노동: 중개 플랫폼, 앱 등을 통한 주문에 응하는 초단기(몇 분에서 며칠까지)적이고 단속(斷續)적인 노동들이 생겨났다. 요즘 주로 플랫폼노동이라고 부르는 것들이기도 한데, 예전에 주로 비공식부문에 속했던 가사나 음식배달 등의 직종이 이 부문으로 포섭되었다. ④ 프랜차이즈 자영 : 예전에는 자영업자(삼계급론에서는 쁘띠부르주아)가 운영했던 식당·소매 등의 자영업 부분을 대자본이 지배하고 종속화하는 방법이다. 이처럼 고용이 되지 않고도 자본(기업)을 위한 노동을 수행할 수 있게 된 것은 시공간을 떠나 중앙에서 통제가 가능한 정보통신기술의 발달에 의존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비임금노동은 다음과 같은 점에서 임금노동과 다르다. 첫째, 형식적으로 고용계약 관계가 아니다. 그러므로 고용된 임금노동자에게 적용되는 노동권에서 배제된다.

둘째, 사용종속 관계가 명확치 않을 수 있다. 이른바 직접적인 ‘지휘감독’이 없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정보통신기술의 발달로 직접적인 지휘감독이 없어도 실시간으로 업무상황을 파악하는 것이 가능하고 원격으로 통제하거나 제재하는 것이 가능하다. 또한 전속성이 없어서 사용자가 누구인지도 명확하지 않을 수 있다. 노동의 시공간이 명확히 규정된 한 임금노동자는 사용자와 1:1로 대응될 수 있지만, 시공간이 해체된 비임금노동자들에 대해서는 (특정 시간 동안 일을 시킬 권리를 사서 특정 공간에 모아놓고 일을 시키는 사람이란 의미에서의) 사용자가 굳이 필요하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셋째, 생산수단인 자산을 소유하고 있을 수 있다. 상점이나 트럭, 기계 등 일하는 데 필요한 장비들을 직접 가지고 있는 경우들이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쁘띠부르주아로 분류될 수 있는 근거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이러한 생산수단을 가지고 자기 사업을 운영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주체(즉 기업)을 위해서만 일을 한다면 생산수단의 소유 여부와 무관하게 종속관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사실 현실적으로 노동자가 이러한 생산수단을 소유하게 된 것은 임금노동자의 지위에서 입지전적으로 쁘띠부르주아로 상승한 것이라기보다, 자본이 자신의 경영상의 위험부담을 노동자에게 전가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현상에 가깝다. 원래 운송회사에 소속되어 있었던 화물운송 기사들이 1998년 경제 위기 상황에서 회사가 화물차를 매각함에 따라 지입차주가 된 것이 전형적인 예이다. 프랜차이즈 상점 같은 경우에도 본사에서 경영상의 문제 상당 부분을 관리해준다고 유혹하면서 점포라는 생산수단의 자산 관리 위험성을 떠넘긴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비임금노동자들 역시 자신의 노동의 대가로 살아갈 뿐 아니라 그 노동을 사용하는 자본의 이익을 창출하고 있다. 그러므로 실질적으로는 독립적인 쁘띠부르주아가 아니라 자본-노동 관계에 종속적인 위치로 편입되어 있는 것이다.

 

 

노동(권)의 확장과 재구성

 

이처럼 신기술이 고용관계를 해체하면서도 자본-노동 관계를 유지·확장하는 데 기여한다면, 노동의 미래는 어떻게 될 것인가.

사실 기술에 의한 일자리 감소는 노동자에게 공포일 수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자본주의적 임금노동의 한계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더 이상 자본주의적 임금노동으로는 먹고 살아가기가 어렵다는 것이며 그러한 관계에 기반하고 있는 사회도 유지되기 어렵기 때문이다. 마르크스의 말을 인용하자면 필연의 왕국에서 자유의 왕국으로 가는 과정일 수도 있다. 그러한 생각에 기반하여 (자본주의적) 노동 중심의 삶을 벗어나 다양한 활동 중심의 삶으로의 전환을 주장하는 논자들이 적지 않다. 또한 정보통신기술은 비자본주의적 공유경제의 매개로 이용될 수도 있다.

 

하지만 적어도 현재는 신기술이 노동과 노동권을 위협하는 방식으로 사용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노동자들은 더욱 개별화되고 노동으로 유지하는 삶은 더욱 불안정해지며 기존에 수립된 노동권 제도들은 효력을 잃고 있다. 지금은 현재 진행되는 공격을 막고 노동자의 권리를 재편하는 것이 시급한 때이다. 이를 위하여 노동권을 재구성하고 확장하는 제도적 방향들을 다음과 같이 생각해 볼 수 있다.

 

일단 ‘노동자’의 개념을 현 시대에 맞게 재규정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른바 노동자의 (인적) 종속성 판단 지표로 직접적인 지휘감독의 존재 여부는 신기술로 인해 이미 의미를 잃어버렸다. ‘노동과정 중에 직접’ 감독을 하거나 지시를 내리지 않아도, 디지털 정보통신기술로 인해 자동적으로 축적되는 데이터를 통해 사후적인 통제나 제재가 가능하다. 적어도, 지휘감독이라는 개념은 이러한 사후적인 통제와 제재를 포함해야 한다.

그런데 신기술이 발전할수록 이러한 관리와 통제를 점점 더 은밀하게 만들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사용자(또는 그를 대리하는 관리자)가 직접 관리와 통제를 하지 않아도, 알고리즘으로 자동적으로 통제하는 방식이 있다. 방식은 달라도 컨베이어벨트처럼 기계적 통제에 의한 종속의 일종이지만, (사람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오히려 ‘공정한’ 것으로 포장되는 경향마저 있다. 따라서 인적 종속성에 대한 ‘지휘감독’의 개념은 ‘통제’의 개념으로 재구성될 필요가 있고 그것은 신기술의 기술적 통제까지 포함해야 한다.

 

현 시대에 자본-노동 관계에서, 인적 종속성이 은밀해지는 대신 오히려 더 눈에 띄게 되는 것은 경제적 종속성이다. 이에 대해서는 최근 미국 일부에서 법제화된 abc 테스트를 참고할 만하다. 이것은 a) 기업의 통제나 지배로부터 자유롭고, b) 기업의 통상적인 사업 외부의 노동을 하고, c) 스스로 독립적인 고객층을 갖는 등 독립적인 사업을 하는 경우에만 실질적인 자영노동자로 인정하고, 이 세 가지 기준 중 어느 하나에라도 해당되지 않는 경우에는 모두 기업에 종속적인 노동자로 인정하여 노동보호법과 노동3권 등 노동권 제도를 적용하는 것이다. 이것은 현재 변화된 자본-노동 간의 종속 관계를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이와 더불어, 간과하지 않아야 할 점은, ‘노동자’의 개념과 동시에 ‘사용자’에 대한 개념의 재규정도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이다. 현재 제도상으로는 노동자와 사용자 관계가 기본적으로 1:1 관계인 것으로 상정되어 있다. 하지만 사용자가 누구인지 명확하지 않을 수도 있고 사용자가 하나가 아닐 수도 있다. 이것은 전속성이 없는 플랫폼노동이나 프리랜서 같은 비임금노동에만 해당되는 얘기가 아니다. 간접고용도 마찬가지이다. 노동의 내부화 경향이 반전되어 외부화 추세로 바뀌면서 고용관계는 점점 더 중층화되고 있다. 이전에 내부노동시장이 형성되었던 대기업들에서도 시시때때로 행해지는 구조조정을 통해 외주화를 확대하고 분사나 자회사를 만들고 있다. 사실 이제 대기업들은 (거래비용을 하락시킬 수 있는) 신기술에 힘입어 가능한 한 업무들을 쪼개어 다른 기업이나 개인에게 외부화하고 외부화한 일들을 조정·관리하는 데 집중하고자 하는 경향을 보인다. 이런 상황에서 비임금노동뿐 아니라 임금노동에서도 노동의 사용자가 단지 하나가 아닌 경우들이 점점 더 늘어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는 박제성의 노동관계에서 사용자의 지배권에 대한 분류가 유용할 수 있다(박제성, 2016, “새로운 노동관계를 규율하기 위한 노동법의 역할과 원칙”, 황덕순 외,「고용관계 변화와 사회복지 패러다임 연구」, 한국노동연구원 pp. 184-185.). 그는 노동관계에서 사용자의 지배권이 발현하는 양식을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하는데, 직접적 지배권, 간접적 지배권, 유보적 지배권이 그것이다. 직접적 지배권은 전통적인 고용관계에서 보여지는 지시권이고 이른바 직접적인 지휘감독에 해당된다. 이러한 사용자성은 직접고용에 해당된다. 간접적 지배권은 원하청 관계에서 원청 사용자의 지배권이 발현하는 양식이라고 얘기한다. 즉 원청은 하청 교체의 권한을 쥐고 있음으로써 간접적으로 간접고용 노동을 지배한다. 유보적 지배권은 사용자의 지배권이 평가나 계약 속에 유보되어 있어서, 예를 들어 성과에 따라 보수가 차등되도록 하거나 사후적으로 제재가 가능하도록 만드는 것으로써 비임금노동자를 통제하는 데 사용된다. 이에 따르면 직접적인 고용관계를 맺은 사업주 뿐 아니라 원청 사업주나 비임금노동을 이용하는 사업주도 노동에 대해 사용자성을 띄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다양한 사용자성을 규정하고, 이 다양한 사용자들의 책임성이 개별적 노사관계 및 집단적 노사관계에서의 노동권 제도에 편입될 수 있도록 법·제도를 재편하는 것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현재 일부 논의가 진행 중인) 직접고용한 사용자와 더불어 원청 사업주나 비임금노동을 이용하는 사업주 역시 산업안전에 책임을 지도록 하는 것뿐 아니라 노동조합과의 단체교섭에 응해야 할 의무를 지우는 등, 개별적 노사관계와 집단적 노사관계의 법·제도에서 여러 가지 새로운 규정들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좀더 장기적으로는 고용되어 있거나 고용되어 있지 않거나 종속적이거나 종속적이지 않거나 등과 무관하게 모든 노동하는 사람들의 보편적 권리로서의 노동권을 사회적으로 수립하는 것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 있고 그래야 한다. 그러나 이것을 제도화하는 방식이 자본의 책임을 면제하여 전체사회로 떠넘기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사실 가장 궁극적으로는, 노동이 더 이상 자본주의적인 ‘노동’이 아닌 사회, 즉 노동을 사회에 기여하는 개인의 활동으로 정의한다면 그 활동이 자본의 이익 추구와 결합이 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자기실현 및 즐거움과 결합되는 사회를 꿈꿀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이 이른바 ‘탈노동’ 담론이 얘기할 수 있는 가장 궁극적인 지향일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 이르기까지는 또 넘어야 할 산이 많고 해야 할 일도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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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16. 노동권연구소 기획토론회 현장 [출처: 철폐연대]

 

※ 이 글은 2020년 1월 16일 진행된 철폐연대 부설 노동권연구소 두 번째 기획토론회, <기술과 노동의 변화 그리고 노동권>의 발제문을 재정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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