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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풀어쓰는 비정규운동

 

능력주의와 공정성 담론의 성격

 

장귀연 • 철폐연대 부설 노동권연구소 소장

 

 

 

2017년 5월 문재인 대통령은 취임연설에서 “기회는 평등하고, 과정은 공정하고, 결과는 정의로울 것입니다”라고 말하고, 며칠 후 첫 외부방문 행사로 인천국제공항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찾아가 공공부문 비정규직 제로화 프로젝트를 천명했다. 이 공공부문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 정책은 3년 후 이른바 ‘인국공 사태’로 이어졌다. 인천국제공항에서 일하던 하청 직원들 중 일부를 직접고용하는 것에 대해 공사 직원들과 취업준비생들이 격렬히 반대했던 것이다. 시간과 노력을 투자한 결과 시험에 합격하여 공기업에 입사하게 되는데, 이러한 과정 없이 손쉽게 들어온 하청회사에서 몇 년 일했다는 이유로 같은 정규직이 되는 것은 “공정한 과정”에 역행한다는 주장이었다. 정부 약속대로 정규직 전환을 요구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기회는 평등”하게 열려 있으니 시험 치고 들어오라는 비아냥이 이어졌다. 결국 공공부문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 정책은 용두사미로 끝났으며, 현재 건강보험공단 콜센터 투쟁에서 보듯 공공기관은 정규직 노조의 반대를 방패막이 삼을 수 있었다.

이러한 노노갈등이 단순히 자본의 갈라치기에 노동자들이 현혹되었기 때문이라고만 하면 너무 쉽게 생각하는 것이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능력에 따라 보상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공공부문 비정규직 정규직화는 공정하지 않다고 느끼는 게 현실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생각하는 데에는 사회적·심리적 기반이 존재한다. 이번 호에서는 사람들이 왜 이렇게 생각하게 되었는지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과정을 풀어보기로 한다.

 

5 풀어쓰는 비정규운동 01.png

 

2017.5.12. 문재인 대통령이 취임 후 첫 외부 공식 행사로 인천공항공사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만나 “공공부문 비정규직 제로시대를 열겠다”고 밝히는 모습. [출처: 청와대사진기자단]

 

능력주의의 기원

 

능력주의는 서구 근대 자유주의 사상과 자본주의 경제가 얽히는 과정에서 태어난 산물 중의 하나다1). 근대 사상의 선구는 사회계약설이라고 할 수 있다. 왕권은 신이 내려준 것이라는 왕권신수설이나 사회의 신분제도는 자연적인 섭리라는 봉건적인 사고를 반대하여, 평등한 개인들이 자신의 안전과 욕망 추구를 보장받기 위해 사회라는 것을 만들었다는 이론으로서, 당시에는 매우 진보적인 사상이었다. 하지만 이론적으로 자기 욕망을 추구하는 개인들을 어떻게 사회적으로 묶을 수 있는지는 풀기가 쉽지 않았다. 여기에 해결책을 제시해 준 것이 아담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 같은 자본주의 논리였다. 개인이 욕심껏 자기 이익을 추구하면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시장 논리에 의해 결국 공공의 이익에 기여하게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사회계약과 시장계약, 정치사상으로서의 자유주의와 자본주의적 시장자유주의가 만난다. 이는 이후에 사회다윈주의와 같은 형태로까지 나아가서, 현재 회자되는 가장 조야한 형태의 통설은 ‘능력 있는 자만이 살아남는다’라는 슬로건으로 표현된다.

물론 근대 철학이 전제한 인간의 이성 능력은 단지 개인의 시장적 합리성(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본성) 이상의 것이었다. 근대 철학은 모든 사람이 천부적으로 보편적인 이성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보았고, 이것은 모든 개인에게 보편적인 권리가 부여되는 근거이기도 하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자유주의 입장에서는 개인이 가진 것을 침해당하지 않을 권리가 바로 인간의 보편적인 권리를 구성한다. 여기에는 생명을 침해당하지 않을 권리, 신체를 구속당하지 않을 권리와 더불어 사유재산을 침해당하지 않을 권리가 포함된다. 시민혁명 시기에 무수히 발간된 문건들은 (사유)재산권을 생명권이나 자유권과 마찬가지로 개인에게 부여된 침해할 수 없는 권리로 간주하고 있다. 예를 들어 노동가치설의 원조이기도 한 영국의 철학자 로크는 사유재산권이 불가침의 권리인 이유는 개인의 능력과 노력으로 축적한 것이라는 점에서 근거를 들고 있는데(동시에 개인의 능력과 노력으로 축적한 사적 재산을 자식에게 물려줄 권리라면서 상속을 옹호하는 모순을 보인다), 이것은 근대 자유주의와 자본주의의 얽힘 속에서 (개인 중심의) 능력주의가 나타나는 방식을 전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실제 시민혁명 이후의 정치 상황을 보면 자유주의의 이러한 측면들이 현실화되었을 때의 모습을 알 수 있다. 서구 시민혁명 후 투표권을 재산이 있는 자로 제한한 것은 노동자·민중의 정치 장악을 두려워했기 때문이지만 분명 그것을 정당화하는 이론적 근거들이 있었다. “대표자 없는 곳에 세금 없다”는 미국독립혁명의 구호처럼 세금으로 국가에 기여하므로 정치에 참여할 권리가 있다는 재산자격론과 더불어, 단지 교육을 받지 못한 무지몽매한 인민들은 정치에 참여할 능력이 없다는 능력론이 그 근거들이었다. 자유주의에서 개인 능력에 대한 신봉은 뿌리 깊은 것이어서, 19세기에 보통선거와 심지어 여성참정권까지 주장한 존 스튜어트 밀도 ‘자유’가 보장되어야 할 이유로 자유로운 상황에서만 개인의 ‘재능과 능력’이 최대한 꽃필 수 있고 그에 따라 보상받는 능력주의 사회가 가능하다는 점을 들고 있다.

결과적으로, 개인의 자유라는 권리가 보장받아야 한다는 근대 자유주의 사상은 시장에서의 자유로운 계약이라는 자본주의의 기본 원리와 맞물려서 시장에서의 보상체계가 개인의 능력에 근거해야 한다는 관념을 낳았다. 그 이후 자본주의 변천 과정에서도 개혁주의자들은 교육 기회의 평등과 보장을 통해 능력에 따른 상승이동의 기회를 넓히는 것과 복지를 통한 분배에만 신경을 썼지 ‘능력에 따른 보상’이라는 관념 자체는 당연시했다.

 

1) 동양의 과거시험과 같은 관료제도 능력주의의 중요한 전통이기도 하다. 그러나 여기서는 자본주의와 능력주의의 관계를 보는 것이기 때문에 자본주의의 기반이 되는 서구 자유주의 사상을 중심으로 보도록 한다.

 

신자유주의 시대 능력주의

 

‘능력에 따른 보상’이라는 원리를 그나마 제어했던 원리라면 마르크스주의의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받는다’는 슬로건일 것이다. 그러나 이 대항원리야말로 1990년대 현실 사회주의 국가들이 붕괴하면서 가장 큰 조롱거리가 되어버렸다. 즉 “공산권이 멸망한 것은 능력에 따른 보상을 하지 않아서 비효율적이고 사람들이 나태하게 되어버렸기 때문이다”는 ‘통설’이 대중화된 것이다.

그 이전 1980년대 신자유주의의 선구였던 영국 대처 정부와 미국의 레이건 정부에서는 18~19세기 자유주의 정치의 ‘자산을 소유하고 교육을 받은, 자격 있는 시민 vs. 무지몽매한 민중’이라는 대립구도가 다시 부활했다. ‘국가에 세금을 내며 기여하는 시민 vs. (다른 시민들이 내준 세금에 의한) 복지에 기생하는 나태한 수급자’라는 구도로 복지국가를 약화하려고 했던 것이다. 이러한 ‘두 국민 정책’에 의해 실패자(‘루저’)들에 대한 낙인찍기가 시작되었다. 적어도 복지국가 이념에서는 한 사람의 생애에서 위험과 실패를 개인 문제로 돌리지 않았던 반면, 신자유주의의 복지에 대한 공격은 실패를 온전히 개인의 노력과 능력 탓으로 몰아세우는 방식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현실 사회주의권 붕괴 후 개인의 능력에 대한 시장의 보상이 가장 효율적이고 성공적인 체제를 만들어낸다는 대중적 이데올로기와 맞물려 시장자본주의에서 실패자들에 대한 낙인은 더욱 강화되었다.

‘개인의 능력에 대한 시장의 보상이 가장 효율적이고 성공적인 체제를 만들어낸다’는 관점에서 보면, 시장에서 보상받는 정도가 개인의 능력을 가늠하는 척도가 된다. 보상체계와 결부되지 않은 능력은 ‘능력’으로 간주되지 않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이웃을 잘 돌보는 사람은 ‘착한’ 사람으로 말해질지언정 ‘능력 있는’ 사람이라고 얘기되지는 않는다. 사회에 기여한다는 점에서는 이웃을 잘 돌보는 것도 능력의 일종이지만, 시장적 보상과 연결되지 않는 활동은 아예 능력으로 가늠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능력은, 노동을 사회적으로 기여하는 활동이 아니라 경제적 보상과 결부된 활동으로만 정의한 근대 자본주의적 노동 개념에 내재된 것이기도 하다. 문제가 악화된 것은, 노동시장에서 밀려난 실패자들은 굶어죽도록 하는 것이 사회발전을 위해서 바람직하다는 18~19세기 자유주의를 뒷받침했던 사고체계가 신자유주의와 함께 부활하였다는 점이다. 성공과 실패를 온전히 개인의 능력으로 귀속시키는 사고는 前근대(前자본주의)는 물론이고 20세기 복지국가 이념에서도 배척한 것이다. 말하자면 신자유주의는 정책의 문제만이 아니라 사고체계의 문제이기도 하다.

 

왜 세대 갈등으로 나타날까

 

여기서 현재 ‘능력주의’와 ‘공정성’ 문제가 세대 갈등의 외양을 띠고 나타나는 이유가 무엇인지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보통 청년세대가 능력주의나 공정성에 대해 강한 선호를 보인다고 얘기된다. 혹자는 현재 청년세대가 어려서부터 교육 체계에서 치열한 경쟁에 길들여졌기 때문이라고 해석하기도 하지만, 이것은 특별히 현재 청년세대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별로 근거가 없다. 한 세대나 두 세대 전에도 청소년들의 성적 경쟁 압박은 중요한 사회문제 중 하나였을 정도로 교육체계에서의 경쟁은 치열했다.

청년세대가 능력주의를 공정한 것으로 보는 데 대한 집착이 특히 강하다면, 한 가지 이유는 앞에서 말한 대로 자유주의 논리가 부활하여 시대정신이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 청년세대는 신자유주의 사고방식이 지배적일 때, 가치관을 형성할 시기인 청소년과 청년기를 보냈다.

이와 더불어 역설적이게도 오히려 계급·계층이 고착화되었기 때문에 청년들은 더욱 능력주의와 공정성에 집착하게 되었다고도 볼 수 있다. 피케티에 따르면2), 주요 자본주의 선진국들에서는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까지 불평등도가 매우 높았다가 20세기를 지나면서 불평등도가 떨어졌지만 20세기 말에 이르러 다시 높아져 현재 다시 19세기 말~20세기 초의 높은 불평등도를 보이는 U자형 곡선을 보인다. 피케티는 이러한 U자 곡선의 원인에 대해서 20세기 후반 시작된 신자유주의 정책도 한몫 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자산 축적의 세대 간 누적 효과라고 설명한다. 20세기 초의 세 가지 사건, 1차세계대전과 대공황, 2차세계대전은 기존 자산을 파괴함으로써 자산계급을 붕괴시키고 결과적으로 사람들이 비교적 평등한 출발선에 서게 만들었다. 그러나 비슷한 지점에서 출발했다 할지라도 능력에 의해서든 운에 의해서든 부를 축적한 사람이 생기고 그렇지 못한 사람과의 격차가 발생하기 마련이다. 피케티는 “자산소득은 항상 노동소득보다 수익률이 크다”를 역사적 법칙으로 제시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부는 더 큰 부를 불러오게 되고 이 부는 세대를 거쳐 상속된다. 따라서 처음 격차는 그리 크지 않았을지라도 3세대나 4세대를 지나면서 누적된 지금은 매우 큰 격차로 나타나게 된다는 것이다. 한국의 역사도 그다지 다르지 않다. 해방 후 농지개혁과 한국전쟁은 기존 자산을 파괴했다. 비교적 평등한 출발선에 서게 된 것이다. 지금 청년세대는 당시 성인들의 3~4세대 후손에 해당한다. 따라서 피케티가 말한 대로 노력과 능력에 의한 소득보다는 상속된 부의 중요성이 매우 커지고 계급·계층이 고착화된 시대이다. ‘수저론’이 한 세대나 두 세대 전이 아닌 근래 등장한 것은 우연이 아닌 것이다.

 

2) 토마 피케티, <21세기 자본>(2013)

 

특히 공공부문에서 공정성 문제가 불거지는 이유

 

이렇게 계급·계층이 고착화된 시대에 청년세대가 능력주의와 공정성에 집착하게 되는 것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이 고착화된 계급·계층을 무너뜨리고자 하는 것으로 나아가지는 않는다. 오히려 금수저들의 성채는 어쩔 수 없는 것으로 인정하고 그를 제외한 나머지(대다수)가 살아남기 위한 경쟁을 하는 것이다. 공정성 논란이 왜 하필이면 공공부문의 비정규직 정규직 전환에서 불거졌는지 생각해보자. 물론 사기업들은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을 거의 하지 않기 때문에 논란도 없을 수 있겠지만, 사기업에서는 “오너 맘대로”라는 자본주의적 ‘자유’(!)가 오히려 당연한 것으로 승인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사기업들이 공채시험, 특히 이른바 객관적이라는 필기시험을 보는 경우는 점점 사라지고 있다. 인맥으로 입사하거나 좋은 집안의 청년들을 골라 뽑아도 뭐라고 할 수 없다. (실제로 집안 배경을 보아 좋은 집안의 ‘자제’를 뽑는 것이 영업이나 회사 성장에 도움이 되기 때문에 그를 선호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인정한다. 미국의 ‘좋은’ 직장들도 바로 이러하다.)

이런 상황에서 공공부문은 사람들이 생각하기에 공정성의 최후 보루이다. 현재 수많은 ‘동수저’ 청년들이 안정적이고 좋은 직장을 갖기 위해서는 공무원이나 공사의 시험에 합격하는 길이 가장 확실한 셈이다. (‘흙수저’는 이런 시험을 준비하기도 쉽지 않다.) 근래 공무원과 공기업 입사가 취업준비생들에게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몇 년씩 공부해 시험에 합격한 사람들 입장에서는, 시간과 노력의 투여, 능력 증명의 과정 없이 갑자기 동일한 직장에 입사한 것이 된 정규직 전환자들이 무임승차자로 비춰진다. 단지 이해관계 뿐 아니라 ‘청춘을 바친’ 시간과 노력에 대한 억울함과 그런 과정 없이 ‘손쉽게’ 들어온 정규직 전환자에 대한 분노감이 능력주의의 심리적 기저를 이루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심리의 사회적 기반은 이미 고착화된 계급·구조에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현실이다.

그런 측면에서 현재 공정성 논란이 ‘을들의 전쟁’이라는 것은 사실이다. ‘금수저’는 굳이 그런 것에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최순실의 딸 정유라의 말처럼 “부모 잘 둔 것도 실력”인 세상이다. 최순실의 딸 정유라에서 조국 전 장관의 딸 조민까지 사례들이 보여주듯이 금수저들은 자기들만의 카르텔을 공고히 하고 있고, 그 성채 아래에서 동수저, 흙수저들이 공정이니 능력이니 싸우고 있는 것이다.

 

노동자 통제 기제로서의 능력주의

 

공공부문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과정에서 사회적 이슈가 되었지만 능력주의는 그보다 훨씬 다양한 방식으로 노동현장에서 노동자 통제의 기제로 사용되고 있다. 그러한 기제를 크게 세 가지로 분류해 볼 수 있다.

 

첫째는 분할의 기제이다. 노동자 분할의 정당화 기제는 성별·학력·연령 등에 의한 분할 → 고용형태에 대한 분할 → 직무에 의한 분할 → 능력에 기인한 분할로 변화해왔다. 주의해야 할 것은 이것이 분할의 기제라기보다는 분할을 ‘정당화’하는 기제라는 점이다. 말하자면 성별, 학력, 학별, 고용형태, 직무 등에 의한 분할선들은 당연히 지금도 상호 겹쳐서 작용한다. 그것을 정당화하는 담론이 달라졌다는 것이다.

지금도 학력이나 학벌에 따라 노동자를 차별하는 것에 대한 비판이 강하게 존재하는데 사실 학력이나 학벌에 의한 차별은 예전(1960년대~1990년대)에 훨씬 노골적이고 심했다. 20세기에는 대졸과 고졸의 입직구를 달리하고 임금 및 승진체계가 완전히 분리되어 있고 유니폼과 식당을 따로 사용하는 것 등은 아예 문제조차 되지 않는 당연한 일이었다. 좋은 학교 졸업생들은 좋은 직장에 프리패스 했다. 1988년 남녀고용평등법이 제정되기 전에는 채용공고에서 명시적으로 성별을 규정하고 연령을 제한했으며, 그 이후에도 공식적으로 명기만 하지 않았을 뿐 남성과 여성의 채용 및 승진에서의 차별은 공공연한 일이었다. 적어도 이런 점들에 관한 눈에 띄는 차별은 담론에서뿐만 아니라 현실적으로도 20세기보다는 지금이 훨씬 개선된 것이 사실이다. (물론 그렇다고 완전히 없다는 것은 아니다.)

IMF 경제위기 후 21세기에 접어들며 비정규직 고용이 많아지자 정규직/비정규직의 고용형태에 따른 차별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같은 일을 하면서 단지 고용형태만 다르다는 것으로 차별을 정당화하기는 쉽지 않았기 때문에 고용형태에 따른 차별은 직무를 분리하는 것으로 곧 대체되고 중첩되었다. 즉 ‘핵심업무’와 ‘주변업무’를 구분하고 분리하여 전자는 정규직 고용을 하고 후자는 비정규직으로 고용하는 방식이 주를 이루게 된 것이다.

물론 지금도 이러한 차별은 계속 존재한다. 다만 이것을 ‘능력’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하는 경향이 커지게 되었다. 여자라서 차별을 하는 것이 아니라 여자가 일을 못하기 때문에 차별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식이다. 주변업무에서 일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는 능력이 없기 때문에 좋은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고 그 일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능력을 중심으로 하는 분할 정당화 기제는 차별을 온전히 ‘개인’의 탓으로 돌린다. 즉 논리구조상, ‘저 여자가’ 일을 못하는 것이고, ‘내가’ 능력이 없어서 좋은 일자리를 갖지 못한 것이 된다. 이러한 분할 기제를 통해 자본은 노동자들을 개인화하고 수월하게 통제할 수 있게 된다.

 

둘째는 경쟁의 기제를 들 수 있다. 경쟁은 채용 시에만 아니라 그 고용 경쟁을 뚫고 기업 내부 노동시장에 들어와서도 계속된다. 가장 대표적으로 직무성과급 임금체계를 예로 들 수 있다. 직무성과급제는 어떤 일을 하느냐(직무)에 따라 다른 임금을 받고 얼마나 일을 잘하냐(성과)에 따라 임금의 높낮이를 정하는 것이다. 흔히 직무급제는 ‘동일노동 동일임금’이라는 원칙에 기반한 ‘공정한’ 임금체계로 얘기되기도 한다. 친노동적이라는 학자들과 일부 노동계에서조차 직무급제가 마치 비정규직 문제를 비롯한 중요한 노동문제의 해법인 듯 적극 옹호하고 있다. 그러나 ‘동일노동 동일임금’의 이면은 ‘다른노동 다른임금’으로, 노동자의 분할을 정당화하는 기제이다3).

주목할 만한 점은 젊은 세대가 특히 직무성과급을 선호하는 경향이 커서 세대갈등의 양상을 띠기도 한다는 것이다. 특히 아직도 기본적인 임금체계로 호봉제를 사용하고 있는 공공부문에서 그러하다(사기업 부문의 사무관리직은 이미 호봉제가 대부분 파괴되었다). 청년세대의 입장에서는 윗세대보다 자신이 일도 더 많이 하고 더 잘하는데 근속년수가 높다는 이유로 나이 든 사람들보다 임금을 적게 받는 것이 ‘불공정’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더군다나 최근 급속한 기술 변화로 인해 나이 든 세대가 일하는 데 쓰이는 기술을 따라잡기가 쉽지 않아 실제로도 청년세대가 더 일을 잘 한다고도 할 수 있다. 즉 예전에는 경력에 따른 숙련이 일의 성과에 영향을 미쳤기 때문에 경력이 긴 노동자가 더 일을 잘 하는 것으로 인정과 존경을 받을 수 있었다면, 지금은 오히려 새로운 기술에 익숙한 젊은 세대가 더 높은 성과를 낼 수 있다. 따라서 일을 더 잘하는 청년세대가 보기에는 일도 잘 못하면서 높은 임금을 받는 호봉제보다 직무성과급제가 더 공정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임금에 대한 접근방식의 문제이다. 호봉제가 현실적으로 문제가 적지 않음에도4) 어느 정도는 생애주기에 따른 생활임금적 요소를 반영하고 있는 데 비해, 직무성과급제는 어떤 일을 얼마나 잘하느냐에 따른 것으로 경쟁의 원리를 도입하고 있다.

젊은 세대 노동자들은 고용에서의 공개시험, 임금에서의 직무성과급제 등을 공정한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 다시 말하자면 고용 및 임금에서의 ‘성과체계’는 능력에 따른 것으로 ‘능력주의’ 담론과 결합하면서 ‘공정성’으로 정당화된다. 그러나 경쟁의 원리에 기반하고 있는 이러한 방식들은 노동자의 삶을 악화시키는 주범이다. 경쟁의 원리는 내가 열심히 잘하는 것의 문제가 아니다. 내가 ‘남보다’ 잘 해야 하는 것이다. 좋은 일자리의 채용시험에 합격하기 위한 공허한 스펙 쌓기와 시험공부, 그에 성공하여 기업 내부 노동시장에 진입한 이후에도 인사고과에 의한 끝없는 성과 압박. 남보다 잘해야 한다는 경쟁으로 인해 연대는 파괴되고 자발적인 정신적·육체적 노동강도 강화로 노동자의 삶은 피폐해진다. 반대로 자본의 입장에서는 노동자 통제가 더 쉬워지는 것이다.

 

셋째는 배제의 기제라고 할 수 있다. 능력주의는 실패자에 대한 낙인을 동반한다. 저성과자는 단순히 성과를 못낸 것이 아니다. 능력주의는 (자본 입장에서의) 저성과를 ‘무능력자’라는 개인 정체성의 문제로 전환한다. 사회 전체적으로도 좋은 일자리를 찾지 못하고 2차노동시장을 전전하는 노동자들에 대해서, 사회가 좋은 일자리의 마련과 위험 및 실패에 대한 사회적 보장에 대한 책임을 갖는 것이 아니라, 개인이 능력이 없고 노력을 하지 않은 탓으로 돌린다. 앞에서 서술한 바와 같이 이러한 관념은 20세기 복지국가 이념에서도 거부했던 것인데 신자유주의에서 부활한 것이다. 능력주의 담론은 실패자에 대한 저격수 역할을 하면서 이들을 권리에서 배제하는 역할을 한다.

 

3) 이에 대해서는 질라라비 2021년 4월호 <풀어쓰는 비정규운동>의 “임금체계개편, 그리고 직무급제” 참고.

4) 호봉제는 사실 평생직장의 시대에만 가능한 임금체계이다. 그래서 지금도 호봉제 임금체계가 남아 있는 곳은 정년퇴직이 거의 보장된 공공부문과 일부 노조가 강한 대기업 생산직뿐인 것이다. 고용이 보장되지 않은 상태에서 호봉제는 오히려 근속년수가 긴 노동자를 먼저 해고하게 되는 효과를 발생시키기도 한다.

 

5 풀어쓰는 비정규운동 02.jpg

 

2021.4.23. 19개 단체가 모인 <청년·학생 시국선언 원탁회의>가 서울시청 앞에서 보수 양당의 ‘공정성 프레임’을 비판하며 세대론적 담론 대신 체제의 근원적 문제를 직시해야 한다고 밝히고 있다. [출처: 사회변혁노동자당]

 

능력주의에 대한 문제제기

 

능력주의에 대한 한 가지 대응방법은 현재 능력주의가 진짜 능력주의도 아니고 공정하지도 않다는 점을 부각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직무성과급제의 문제로 직무와 성과가 객관적으로 공정하게 측정되기 어렵다는 점을 강조한다. 영업직처럼 성과가 양적으로 측정될 수 있는 일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일에도 팀별이든 개인별이든 성과평가 체계가 도입되어 있고, 평가에 따라 임금은 물론 ‘저성과자 해고’도 법제화만 되지 않았을 뿐 실제로는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다. 실제로 직무나 성과를 ‘객관적으로’ 측정하는 일은 매우 어렵기 때문에(양적 측정이 가능한 것 같은 영업직에서도 실제로는 사내의 여러 요소들이 개별 성과에 영향을 미친다), 인사평가의 공정성은 노동자들의 주요한 불만 요소이다.

그러나 이것은 능력주의를 인정하되 ‘공정성’에 대한 의문만 제기하는 것으로, ‘더 공정한’ 평가체계를 해법으로 내놓게 된다. 학자들과 일부 노동계에서도 직무급을 옹호하면서, 단 직무분석과 인사평가 기준에 노조가 참여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여기에 노조가 신기술 도입과 노동자들의 숙련 제고에 개입해야 한다는 주장이 더해진다. 즉 능력주의를 적극적으로 인정하면서, 노조가 직무분석과 인사평가 과정에 참여함으로써 사측이 자의적으로 노동자를 통제하는 것을 방지하고, 노동자들의 능력을 향상시킴으로써 사측에 대해 협상력을 강화한다는 의도이다. 그러나 능력주의와 성과체계를 인정한 기반 위에 단지 노조의 개입으로 분할과 경쟁과 배제의 기어를 제어할 수 있을지는 극히 의심스럽다.

사회적으로도 현재 작동하고 있는 능력주의에 대한 대안은 ‘진정한 능력주의 사회를 만들자’는 것이 되기 십상이다. 예를 들면 피케티의 해법도 그러하다5). 자본세를 통해 불로소득을 제어하고 누진적 소득세를 통해 경영자의 어처구니없는(즉 능력 이상의) 고소득을 제한하는 등의 조처를 통해 금수저들의 카르텔을 약화시키고 진정한 능력주의가 실현될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다.

교육에 의한 계층상승을 아직도 믿는 사람들은 (부모의 직접 개입에 의한 요인이 비교적 덜 작용하는) 수능정시확대나 사법시험의 부활을 외치면서 시험만능주의를 보이기도 하지만, 이미 오래 전부터 많은 연구들이 이러한 ‘객관적인’ 시험 성적조차도 출신 계급·계층에 따라 좌우된다는 점을 분명하게 밝혀냈다. 실은 다들 이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정한 시험’을 주장하는 것은, 계급·계층이 이미 고착화된 상황에서 어찌해 볼 수 없는 금수저들의 성채는 포기하되 최소한 동수저들 정도는 좋은 일자리를 가질 기회를 확보하자는 것이다. (피케티가 추구하는 건전한 사회도 ‘중산층이 강화된’ 사회이다.)

하지만 능력주의의 실제 작동방식을 분석해 보면, 불평등이 고착화된 사회에서 능력주의란 ‘동수저들의 전쟁’을 의미한다. 금수저들은 “부모 잘 만난 것도 실력”이기 때문에 ‘공정성’을 둘러싼 능력 전쟁에 신경 쓸 필요 없고, 흙수저는 능력 전쟁에서도 배제된다. 바로 이러한 현실에서 출발하면, 우리의 방향은 진정한 능력주의 사회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연대를 강화하여 불평등한 계급구조 자체를 바꾸는 것이어야 한다.

 

처음으로 돌아가서, “평등한 기회, 공정한 과정, 정의로운 결과”라는 슬로건을 다시 살펴보자. 현재 능력주의가 중점을 두고 있는 것은 ‘평등한 기회’와 ‘공정한 과정’이다. 사실 평등한 기회와 공정한 과정을 거치면 ‘정의로운 결과’는 자연히 따라오는 것으로 앞선 두 가지의 논리적인 결과물로 간주하고 있다.

하지만 정치철학자 존 롤스는 <정의론>에서 ‘정의로운 결과’를 ‘평등한 기회’와 ‘공정한 과정’에 연결시키지 않았다. 그는 불평등은 가장 취약한 사람들에게 이익을 가져올 때만 정의에 부합한다고 말했다. 이와 같이 평등한 기회와 공정한 과정이 즉 정의로운 결과라고 믿는 능력주의 사고의 고리를 끊어낼 필요가 있다. 정의는 (능력에 따른) 평등한 기회와 공정한 과정과는 다른 문제인 것이다. ‘평등한 기회’에서 출발할 것이 아니라 ‘정의로운 결과’에 초점을 두고 보편적인 권리의 관점으로 정의의 문제를 접근할 필요가 있다.

 

5) 앞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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