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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 노동자의 꺼져 있던 노동권 스위치를 켜다

- ‘방송계갑질119’의 활동을 되짚으며

서명숙 (방송작가, ‘방송계갑질119’ 스태프)

 

“오픈채팅방의 정원은 1,000명입니다. 방송 종사자가 아닌 분들은 자리를 양보해주세요.”

카카오톡 오픈채팅방 ‘스태프’에 양해의 공지를 올리면서도 ‘드디어 이런 날이 오다니’ 하고 내심 흐뭇했다는 걸 고백해야겠다. 비정규직 노동운동을 해 온 활동가와 법률전문가 들이 스태프로 참여하는 방송계 ‘을’들의 신고센터, ‘스태프’. 지난해 12월 20일에 문을 열었으니 이제 두 달 쯤 지났다. 사실 첫날부터 호응은 그야말로 폭발적이었다. 문을 열고 2시간 만에 600여 명이 넘는 사람이 들어왔고 당번 스태프뿐 아니라 모든 스태프가 한 마디씩 거들며 응대를 해야 할 만큼 방송계 ‘을’들의 고발은 이어졌다. 마치 ‘참을 만큼 참았다’는 듯, 이러한 광장이 열리기를 기다렸다는 듯. 저임금, 장시간 노동와 같이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방송계의 병폐부터 성폭력 사례, 부당해고, 인격모독 등 수많은 갑질 사례들이 쏟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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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나는 ‘스태프’를 준비할 때만 해도 이 정도 반응은 예상하지 못했다. ‘스태프’는 ‘직장갑질119’ 프로젝트의 직종별 온라인 모임 중 하나로 준비된 것이었다. 11월 1일에 먼저 문을 연 ‘직장갑질119’ 오픈채팅방을 지켜보면서 나는 좀 불안했다. 최저임금 위반, 부당전보, 연차 등 법률 상담이 주를 이루는 ‘직장갑질119’를 보고 있자니, 방송작가를 비롯한 방송계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참 ‘상담할 거리’가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방송계 비정규직들은 대다수가 프리랜서, 그러니까 특수고용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월 100만 원을 받고 휴일 없이 일해도 근로기준법 위반 여부를 따질 수 없는 형편이었다. 그러한 한계를 누구보다 당사자들이 가장 잘 알고 있는데 신고를 할까, 하는 염려가 들 수밖에 없었다.

방송작가로 10년을 일하면서 나 역시 체념을 배웠던 것 같다. 몸이 아프거나 휴식이 필요하면 일을 그만뒀다. 우리에겐 병가라든가 유급휴가 같은 건 존재하지 않으니까. 누군가는 성희롱과 성폭력이 만연한 직장을 떠났다. 이를 바로잡을 시스템이 그곳에는 없었던 것이다. 또 몇몇은 제작비가 줄었다며 해고를 당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해당 프로그램이 줄어든 인원으로는 방송을 만들 수 없어 다시 충원한 경우도 있었다. 부당한 해고의 책임을 물을 방법조차 우리에겐 없었다. 임금체불이 벌어져도 법적으로 해결하는 경우는 5.5%밖에 되지 않았다(공정방송을위한방송작가대나무숲 2017 <방송제작스태프 계약 실태조사>). 대다수는 그만두고 서둘러 그 손해를 만회하기 위해 다음 일자리를 찾을 뿐이었다. 노동청의 문을 두드려도 ‘방송작가는 노동자가 아니라서’ 라고 답한다니, 다른 방법을 찾기 어려웠다. 일하다 부상이나 질병이 발생해도 당사자가 자비로 해결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프리랜서니까, 경력과 임금과 대우가 모두 ‘프리’하게 선택 가능하다 믿었는데 현실은 달랐다. A와 B 중에서 하나를 고르는 것이 아니라 A가 아니면 ‘아무것도 없음’이 우리에게 주어진 선택지의 실체였다. 하긴, ‘을’이 괜히 ‘을’이겠나. 그래서 우리는 ‘이 바닥은 원래 그래’ 라는 자조와 ‘바뀔 리가 없지’ 하는 체념만 곱씹을 뿐이었다.

그런 방송 노동환경의 특수성 때문에 플랫폼을 만들 때 고민을 많이 했다. 병원이나 보육교사 등 다른 직종들은 ‘직장갑질119’에 모여 상담을 하는 과정에서 동일 직종끼리 같은 문제의식을 공유해 네이버 밴드와 같은 온라인 모임을 따로 만들었지만, 방송계 비정규직이 ‘직장갑질119’에서 목소리를 낼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그래서 별도로 만들게 된 ‘스태프’, 일단 호응은 뜨거웠지만 문제는 또 있었다. 한동안 구체적인 제보보다는 부당한 현실에 대한 성토가 주를 이뤘던 것이다. 많은 이들이 법적인 해결을 기대하기보다 차라리 ‘블랙리스트’를 공유해서 악덕 제작사나 ‘갑’들을 피해 다닐 수 있도록 해달라고 말했다.

 

다음 걸음을 고민하고 있을 때, ‘상품권 1천만 원’이라는 대화명의 참가자가 등장했다. 당시 채팅방을 담당하고 있던 김유경 노무사가 “대화명은 본인이 겪은 일인가?” 하고 물었다. 사실 방송계에선 프리랜서 스태프들에게 상품권으로 임금을 지급하는 일이 드물지 않게 벌어졌고 오픈채팅방에서도 계속해서 제보를 요청하던 중이었다. 참가자는 ‘상품권 1천만 원’이 자신의 경험이라고 답했다. 프리랜서 카메라 감독으로 SBS의 유명 예능 프로그램 제작에 참여했는데 6개월 치 임금 가운데 900만 원 가량을 백화점 상품권으로 받았고 심지어 미방영 촬영분에 대해서는 지금껏 지급받지 못했다고 했다.

그의 고발에 뒤이어 상품권 페이 제보는 이어졌고 이는 곧 기사화되었다. 사실 업계 종사자들이라면 모두가 알고 있었던 사실이었다. 심지어 예능 프로그램에선 아예 한 달에 40만 원, 100만 원을 상품권으로 받는 작가부 인턴이 자리잡았다고 알려져 있으니, 얼마나 해묵은 폐단인지 더 말할 것도 없다. 그런데도 누구도 문제 삼지 못했다. 나 역시 30만 원가량의 상품권을 추가 근무에 대한 수당조로 준다는 통보를 받은 적이 있는데 담당 PD에게 ‘당신 월급을 상품권으로 주면 좋겠냐. 그거라도 빨리 내놔라’ 정도의 싫은 기색만 했을 뿐, 달리 대응할 방법을 찾지 못했었다. 계약서 한 장 없이 일하는 처지다 보니, ‘갑’들이 시끄러운 ‘을’을 일터 밖으로 내모는 건 어렵지 않다. 해고 아닌 교체, 그리고 그저 일거리를 주지 않으면 그만이니까. ‘갑’의 선택 앞에 ‘을’은 늘 무력했다.

그런 한계와 위험에도 불구하고 고발에 나섰으니 상품권 페이 제보자들은 얼마나 용감한가. 하지만 그에 비해 ‘갑‘의 대응은 좀 치졸했다. 프리랜서 카메라 감독에게 상품권을 건넨 방송사 PD는 “그건 관행이다” 라고 말했고 해당 방송사는 입장문에서 ‘용역 대금’이라는 말을 쓰면서 노동법 위반의 소지를 피해 갔다. 방송작가에게 문화상품권 100만 원 상당을 건넨 또 다른 방송사 PD는 합의된 사항이라고 항변했다. 돈으로 지급할 수 없으니 상품권으로 받으라고, 그걸 수용하지 않으면 기약 없이 기다리든지 아예 줄 수 없다는 게 어떻게 선택이고 합의일 수 있을까. 해당 PD는 덧붙였다. “구성작가는 노동자가 아니라는 판결이 있으니 상품권 페이는 위법이 아니다” 라고. 프리랜서에게 ‘프리’한 선택권은 없었고 다만 노동법 등 최소한의 규제에서조차 프리한 ‘갑’만 존재할 뿐이었다.

입장문이나 반응이 썩 흡족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방송사는 상품권 페이 근절을 약속했다. 고용노동부의 반응도 나왔다. 해묵은 관행이 흔들린 것이다. 그러고 나니, 오픈채팅방의 고발은 더 거세졌다. 독립PD들은 장거리 촬영에 홀로 운전해 가다가 아찔한 사고에 직면했던 경험을 털어놓았다. 드라마 스태프들은 하루 18시간, 3일 연속 쪽잠을 자고 일하는 그야말로 살인적인 스케줄을 고발했다. 방송작가들은 시즌제가 일반화되면서 오히려 늘어난 임금체불과 고용불안정을 토로했다. 비정상적인 계약 관행에 고통 받는 프리랜서 아나운서의 처지에도 공감하는 이들도 많았다. 그동안 방송작가나 드라마 스태프, 독립PD들이 서로의 고충을 나눌 기회는 거의 없었다. ‘스태프’는 그야말로 모래알처럼 흩어져 있던 방송계 ‘을’들이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는 광장이 되었다. 그리고 단지 내 일터의 선배 몇몇이 문제거나 우리 직종만의 문제가 아니라 방송의 노동환경 자체가 ‘총체적 난국’이라는 사실도 알게 됐다.

   

법이 우리의 편이 아니라면, ‘갑’이 너무 대단한 ‘갑’이라면, 이대로는 안 된다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그 답도 오픈채팅방 참가자의 제안에서 나왔다. ‘게으른 일개미’라는 대화명의 참가자가 “우리도 일한다, 우리도 노동자다” 라는 말과 함께 ‘노조 동참 선언’을 제안한 것이다. 우리에게 지금 당장 필요한 건 ‘노동조합’이라는 울타리라는 공감대가 자연스럽게 형성됐다. 몇몇 참가자들은 ‘50번째 참여자에게 선물을 보내겠다’며 자발적으로 참여를 독려하기도 했다. 1주일 쯤 지나니 참여자가 100명이 넘었고 이러한 열기는 ‘스태프’ 오프라인 모임으로 이어졌다.

지난 2월 3일 열린 오프라인 모임은 우선 방송계 비정규직 직군 대부분이 모였다는 점에서 의미가 컸다. 방송작가, 독립PD, 드라마 스태프들까지, 노동법 밖에 존재했던 사람들이 노동권에 대해 이야기하고 ‘노동조합’을 함께 꿈꾸는 자리가 처음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빙고게임으로 자기소개를 하고, ‘스태프’의 활동을 간략하게 정리하는 시간을 거쳐 조별로 나눠 앉아 짧은 토론시간을 가졌다. 주제는 ‘우리 일터에 필요한 변화’에 대한 것이었다. 내가 참여한 조에서는 방송 프리랜서들의 노동자성 인정 문제, 제대로 된 임금 지급이 가능한 수준의 외주 제작비 인상, 근로기준법 59조 폐기 등에 뜻이 모아졌다. 그 자리에서 내게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방송 일을 시작한 지 반년도 채 되지 않았다는 조연출의 발언이었다. 쳐다보는 눈이 많아서인지, 아니면 꾹꾹 눌러둔 서러움이 솟아서인지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그는 말했다. “지방에서 올라온 사람들은 그 월급으론 월세만 겨우 내요. 그런데 밤새 일하고 선배들은 작은 실수에도 화를 내죠. 막내작가와 조연출이 가장 ‘을’인 것 같아요.” 사실 그랬다. 방송사가 적자를 볼 때, 정규직은 임금 동결이나 복지 축소 정도의 어려움을 겪지만 프리랜서들은 일자리를 잃고 외주제작사는 제작비를 삭감 당한다. 제작 인력은 줄어들고 남은 이들의 업무강도는 더 강해진다. 최저임금에 턱없이 못 미치는 임금을 받으며 비용 절감을 위한 가욋일까지 더 해야 하는 조연출과 막내작가의 고충은 더 말할 것도 없다. 가장 약한 계층에게 가장 큰 희생과 인내를 요구하는 구조. 그걸 깨기 위해 우리에게 노동조합이 필요한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이 날 오프라인 모임의 제목은 “방송계 ‘을’들 모여라- 노동권 ON 갑질 OFF”였다. 제목을 지으며 방송계 ‘을’들의 손에 쥐어진 스위치 하나를 상상해봤다. 늘 우리가 강요받았던 최악과 차악을 고르는 선택지가 아니라 최선의 선택이 가능한 노동권 스위치. 꺼져 있던 우리의 권리를 작동시킬 수 있는 선택권이 지금 우리의 손에 있다고, 나의 동료들과 또 대단한 ‘갑’들에게 알려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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