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꿀잠, 비정규운동의 새로운 진지를 꿈꾸다

황철우 (꿀잠 집행위원장, 철폐연대 회원)

 

 

3 2017.8.19. 꿀잠 문여는 날 [출처 정택용].jpg

2017.8.19. 꿀잠 문여는 날 [출처: 정택용]

 

 

비정규노동자의 쉼터, 꿀잠

 

거리에서 한뎃잠을 자는 노동자가 있다. 씻을 곳도 빨래할 곳도 마땅치 않다. 따뜻한 밥 한 끼는 엄두도 못 낸다. 비닐 천막으로 새벽이슬만 피하면서 추위와 더위를 이겨내야 한다. 때론 '하늘감옥'인 고공으로 올라갈 때도 있다. 투쟁하는 비정규노동자의 농성장 풍경이다. 서울 도심을 걷다보면 한 번 쯤은 이런 농성장과 마주친 기억이 있을 것이다. 누군가는 불편하게 생각하거나 도시의 한 풍경으로 치부하고 무심코 스쳐지나간다. 누군가는 그들의 요구가 무엇인지, 잠자리와 밥은 어떻게 해결하는지, 혹시 하루 밤 사이에 농성장이 사라지지 않았는지 궁금해 한다. 삶의 여유가 있어서 그런 건 아닐 것이다. 그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면 내 삶의 부당함도 호소할 수 없고 사회정의가 무엇인지도 알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런 안타까움과 연대의 마음이 모여 비정규노동자의 쉼터 ‘꿀잠’이 지어졌다.

   

꿀잠은 지난 8월 19일, 영등포역 뒤편 신길동에 위치한 허름한 4층 건물을 새 단장(리모델링)하고 ‘문 여는 날’ 행사를 가졌다. 꿀잠의 1층은 식사와 차를 마실 수 있는 ‘꿀잠카페’와 장애인 쉼터 ‘장콜’, 세탁실, 주방으로 꾸며졌다. 지하는 전시 공간 ‘땀’과 교육·문화 공간 ‘판’으로 구성되어 각종 전시와 회의, 문화공연, 영화상영, 몸짓연습과 요가 등 체육활동이 가능하다. 2~3층은 재정부족으로 세입자가 거주하고 있으며, 4층과 옥탑은 온전히 쉼터 기능을 담아냈다. 각 방의 이름은 ‘단잠’, ‘온잠’, ‘푹잠’, ‘굳잠’으로 한뎃잠을 자는 노동자들이 잠시나마 꿀잠을 잘 수 있도록 냉난방시설과 편의시설이 마련되어 있다. 옥상은 순천정원박람회에 참여하신 조경전문가가 사계절 푸름이 살아있는 휴식 공간으로 만들어 주었다. 꿀잠은 비정규노동자는 누구나 무료로 이용할 수 있다. 오가면서 편하게 차를 마실 수 있으며, 사전예약을 하면 잠자리와 식사제공, 영화상영도 가능하다. 특히 청년아르바이트 노동자, 노조에 가입되지 않은 노동자, 취업준비 중인 노동자들이 즐겨 찾는 공간이 될 수 있도록 다양한 교육문화사업도 준비 중에 있다. 처음 문 여는 날, 지금도 투쟁하고 있는 KTX 해고 승무원은 “정말 우리도 이용할 수 있는 건가요?” 라며 기뻐했다. 불법파견 정규직화 투쟁을 전개 중인 동양시멘트 노동자, 정리해고 투쟁을 하고 있는 콜트콜텍 노동자와 하이디스 노동자, 최장기 고공농성을 했지만 다시 거리로 나올 수밖에 없었던 파인텍 노동자는 꿀잠의 첫 손님이 되었다.

 

 

기륭전자, 희망버스 그리고 꿀잠

 

꿀잠은 2015년 7월 기륭전자분회 투쟁 10주년 토론회에서 처음 제안된 이후 2년여 만에 꿈이 현실로 이루어진 것이다. 그동안 2천 명이 넘는 분들이 후원을 해주었다. 비정규직 없는 세상을 바라며 첫 아이의 돌잔치 축하금과 다달이 모아온 적금, 자식의 결혼 축의금을 선뜻 내주시는 분들도 있었다. 정년을 넘긴 수녀님들은 월급의 절반을 모아서 보내주었고 투쟁사업장 노동자들은 투쟁기금을 쪼개서 후원해 주기도 했다. 백기완 선생님의 붓글씨와 문정현 신부님의 서각작품으로 꾸려진 전시회 <두 어른 전>의 판매기금과 노동전문기자들이 만든 비정규직 특별잡지 <꿀잠>의 판매기금 전액이 기부되기도 했다. 이렇게 모아진 금액이 무려 7억 6천여 만 원이다. 하지만 건물매입비용이 부족해 3억 원을 대출받아야 했다.

 

결국 새 단장작업은 사회적 연대로 이루어졌다. 공사기간 100일 동안 무려 천 명이 넘는 분들이 함께해주었다. 세월호 농성장을 설계한 건축가는 꿀잠의 설계를 맡아 주고 감리도 책임져 주었다. 용접, 목공, 도배, 페인트 공사와 옥상 텃밭·정원 조성, 지하 공사는 전문가들의 무보수 작업으로 이루어졌다. 가구, 전자제품, 식기 등은 물품 후원으로 마련됐으며, 재능과 물품으로 연대하기 힘든 분들은 꿀잠을 짓기 위해 한여름 비 오듯 땀을 흘리면서 몸으로 연대해주었다. 투쟁사업장 동지들은 작업반장과 붙박이 일꾼이 되어주었다. 이 모든 분들의 공통점은 비정규투쟁을 기억하고 희망버스를 함께 탔던 분들이다. 꿀잠이 처음 제안되었을 때 “좋은 생각이지만 이게 가능하겠냐?” 라고 이구동성으로 이야기했다. 하지만 기륭전자를 비롯해 이랜드, 홈플러스, KTX, 코스콤, 현대기아차 비정규직 동지들이 먼저 나서자, 비정규직노동자와 함께했던 개인이나 단체 들이 제일 먼저 반겼다. 광우병 촛불투쟁 이후 기륭전자투쟁과 함께했던 촛불시민들과 다양한 사회연대세력인 희망버스 승객들이 팔을 걷어붙였다. 꿀잠을 통해 우리사회 곳곳에서 비정규투쟁을 응원하고 함께했던 동지들이 다시 만나 ‘비정규직 없는 세상은 가능하다’는 꿈을 현실로 만들어 낼 수 있는 새로운 진지를 만든 것이다.

 

 

꿀잠과 정규직노조운동의 현주소

 

“꿀잠 같은 건 민주노총이 나서서 지어야 하는 거 아니야?” 꿀잠을 짓기 위해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자주 듣는 소리였다. 사실 민주노총 임원도 만나고 중앙집행위원회도 들어가서 이야기했지만 조직적 결의를 모아내는 것은 쉽지 않았다. 주요 연맹도 방문했지만 공감은 하면서도 별도 기금이 없기 때문에 힘들다고 난색을 표명했다. 꿀잠을 짓는 과정에서 정규직노조의 도움이 컸지만 기대에는 못 미쳤다. 통상임금 소송의 승소비용 일부를 낸 노조도 있었고 비정규특별잡지 <꿀잠> 구매, 주춧돌 기금과 후원금을 모아온 노조도 있었다. 상집간부가 결의해서 꿀잠 지을 때 하루 몸으로 연대를 해주기도 했다. 하지만 기대했던 대기업노조들은 현안투쟁의 다급함과 예산배정‧조직결정의 어려움 등의 이유를 들어 함께하지는 못했다. 평상시 비정규노동자와 연대를 꾸준히 해왔던 노조나 정규직 활동가들에게는 긴 설명이 필요 없었다. 꿀잠이 비정규노동자의 쉼터를 넘어 새로운 구심점이 되어 달라고 주문하기도 했다. 이것이 비정규노동자의 절박한 절규에 연대하는 정규직노조운동의 현주소다.

 

최근 전교조의 기간제교사 정규직 전환에 대한 입장이나 공공부문 노조 내부의 비정규노동자에 대한 정규직 전환에 대한 반발 움직임, 기아차 1사1노조 원칙 파기와 조직분리 결정도 위와 무관하지 않다. △조합주의 경향의 고착 △정규직노동자의 기득권과 우월의식 심화 △비정규노동자에 대한 시혜적 연대와 일상적 연대의 단절 △자본의 통제와 분열 책동에 대한 투쟁 회피 △노동운동의 전망 상실 △학습과 교양의 부족 등으로 정규직노조운동은 스스로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다. 민주노총의 비정규운동은 확장이 아니라 고립을 자초하고 있다. 정규직 조합원에 대한 일상적인 교양이나 연대활동이 없는 상태에서 정규직과 비정규직간의 이해관계 대립이 발생하면 노조간부들은 조직보위라는 이름으로 조합원의 손을 들어 줄 수밖에 없다. 오히려 조합원보다 간부가 나서서 이를 부추기는 일도 발생하고 있다. 한뎃잠을 자면서 투쟁하는 노동자들을 위한 쉼터를 짓겠다는 사회적 호소에 제일 먼저 응답하는 곳은 거리의 농성장을 가슴 아프게 바라보고 말없이 연대해 왔던 이웃이었다. 정규직노조처럼 이유나 핑계를 달지 않았다. 재정이 없으면 재능이나 물품으로, 그것마저도 없으면 몸으로 연대를 해주었다. 민주노총이 나서서 꿀잠을 지었더라면 그 진정성마저 의심했거나 이렇게 빨리 집을 지을 수 있었을까 라는 괜한 걱정마저 든다.

 

 

꿀잠, 비정규운동의 새로운 진지

 

꿀잠은 우선 비정규직노동자의 ‘쉼터’ 기능에 충실할 계획이다. 함께했던 모든 분들의 바람이기 때문이다. 따듯한 밥 한 끼를 해결할 수 있고 씻을 수 있고 빨래를 할 수 있고 잘 수 있는 공간으로 모든 준비가 끝났다. 지금 이 순간도 투쟁하는 노동자들이 지속적으로 찾아오고 있다. 식자재와 생활용품 등 다양한 후원도 이어지고 있다. 하지만 비정규직 없는 세상을 위한 새로운 진지로서의 준비와 역할도 마다하지 않을 것이다. 새 정권 출범 이후 비정규직 제로선언과 노조가입률을 높이겠다는 제안은, 주체역량이 준비되어 있지 않거나 자본의 저항과 공세를 넘지 못하면 공염불이 될 수 있다. 과도하게 정권에 기대거나 편승해서 개량적 흐름을 묵과한 채, 남아 있는 역량까지도 소진시킬 수 있을 것이다. 꿀잠은 서울 한복판에 있으면서 비정규노동자라면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공간이다. 공간만 있으면 사람들이 모일 수 있으며, 그곳에서 다양한 교류와 소통, 실천적인 조직 활동을 전개할 수 있다. 비정규운동과 함께해 온 다양한 사회연대세력도 만날 수 있다.

 

꿀잠은 비정규직 없는 세상을 위한 사랑방이자 새로운 진지를 꿈꾸며 실천해 나갈 것이다. 쉼터를 바탕으로 미조직‧비정규노동자들이 참여할 수 있는 문화공연, 영화상영, 교육사업, 의료연대사업과 법률지원활동 등을 전개할 계획이다. 또한 조직된 비정규직노동자들이 함께 모일 수 있는 ‘밥상 나눔’을 시작으로 정기적인 모임과 학습, 토론회 등을 제안할 예정이다. 청년알바노동자들이 직접 꾸미고 만들어가는 ‘알바데이’ 행사 등 공간 제공사업도 추진 중이다. 이제 비정규운동은 스스로의 힘으로 굳건히 서야 한다. 정규직노조운동에 휘둘리거나 새 정권의 눈치를 보는 것이 아니라 비정규노동자의 절박한 삶과 투쟁을 바탕으로 사회적 연대세력과 함께 노동운동의 질서를 새롭게 재편해 나가야 한다. 꿀잠에서 만난 비정규노동자들이 서로 머리와 어깨를 맞대고 스스럼없이 토론하고 투쟁할 수 있길 바란다. 꿀잠의 문은 항상 열려 있다.

 

 

꿀잠, 비정규운동의 새로운진지를꿈꾸다_황철우-질라라비201710.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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