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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지엠 창원공장으로 가는 길

손소희 (지역사회노동자운동지지모임, 철폐연대 회원)

 

 

창원에 도착할 시간이 가까워지는데 지회장과 연락이 닿지 않는다. 무슨 일이 생긴 것인지 알 수 없다. 한국지엠 창원공장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한국지엠 창원비정규지회(이하 지회)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데 지회장은 연락이 닿지 않고 낭패다. 그 시각 조합원총회가 열리고 있었다. 거의 타결 직전이라고 한다. 한국지엠은 12월 말로 하청업체 계약해지를 통보하면서 노동자들에게 문자로 해고통보를 한 상황이다. 대량해고가 눈앞에 벌어질 위기에 놓인 한국지엠 창원공장 비정규직 노동자 투쟁소식을 <질라라비> 연재의 시작으로 삼기로 했다. 취재도 할 겸 연말연시를 한국지엠 공장에서 맞을 생각으로 12월 30일 창원으로 향하던 중이었다. 김희근 지회장은 저녁 7시 전에 도착해야 공장으로 들어갈 수 있다고 내게 당부했다. 오토바이를 타고 스릴 있게 들어간다고 해서 기대를 잔뜩하고 있었다. 어쩔 수 없이 안민동에 위치한 공장 밖 노조사무실에서 지회총회가 끝날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지회총회를 마쳤다는 소식과 함께 조합원 전체 저녁식사를 하러 간다고 연락이 왔다. 백수십 명이 들어갈 수 있는 식당을 찾았다는 지회의 신속한 실무처리능력이 놀랍다. 8시는 족히 넘은 시간이었는데 식당 안 자리를 차지한 조합원들은 꾸역꾸역 포개 앉아 불판에 고기를 굽는다. 식당주인 입장에선 갑작스럽게 들이닥친 손님들이 마냥 반갑기만 할 리는 없을 것 같다. 식탁 위 세팅은 불판과 고기밖에 없고, 드문드문 김치가 보인다. 식당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허둥지둥 거린다. 사람들은 고픈 배를 채우기 위해 한 손으론 집게를 쥐고, 한 손으론 가위를 들어 고기를 굽고 자르기 바쁘다. 또 다른 사람들은 젓가락을 들고 적당히 잘 익힌 고기를 입으로 넣어 우적우적 씹는다. 입가에는 웃음기가 멎질 않고 어떤 이는 고기가 가득 물린 입을 크게 벌리고 웃는 모습이 엿보인다. 그들은 안도의 한숨과 승리에 축배를 들며 기쁨의 절정을 누리는 듯 했다.

 

 

노동조합 씨앗이 발아하기까지

 

2006년 지엠대우 창원공장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굴뚝농성 기억이 아스라이 남아있다. 지금은 지엠이 인수하면서 대우는 브랜드로만 남아있을 뿐 다른 회사가 되었다.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외롭게 공장을 지켜왔던 사람이 있었다. 2006년 굴뚝농성을 했던 당사자인 진환씨는 오늘의 투쟁이 있기까지 노동조합의 끈을 놓지 않고 해고자복직 투쟁을 이어오고 있었던 것이다.

“2006년 회사가 비정규직 노조를 공장 밖으로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 그런데 우리가 잘못한 것은 없었다. 불법파견을 저지른 것은 회사고, 우리의 주장은 너무 정당한데 이렇게 밀려나는 상황이 너무 억울했고 포기할 수 없었다. 괜히 투쟁했다는 생각을 바꾸고 싶었다. 우리가 정당했음을 확인하고 싶었다.”

 

2006년 당시 김희근 지회장은 세진산업에서 병역특례를 받고 있었다고 한다. 지엠대우 비정규직 노동자가 굴뚝농성을 하고 있다는 것 정도는 소문을 들어 알고 있었다. 병역특례를 마치고 창원에서 제일 잘 나갈 것 같은 완성차 대기업에 취업을 희망했다. 2008년 한국지엠 창원공장에 취업했을 때만 해도 노조의 흔적은 찾아보기 어려웠다고 한다. 한국지엠 창원공장에서 3개월, 6개월, 10개월짜리 단기계약으로 들락날락하던 김희근 지회장이 계약해지를 당해 더 이상 들락날락할 수 없는 신세에 직면하게 되고 6개월 동안 부당해고에 맞서 싸우는 일이 발생한다. 5년을 넘게 근무했던 김희근 지회장으로선 계약을 수차례 갱신해왔지만 계속 일할 수 있다는 기대가 있었다. 싸움을 시작하자 노동부도 이를 인정하여 무기계약직이라고 손을 들어준 것이다. 아무리 대기업 하청업체라고 해도 2년 이상 반복갱신했던 이들을 해고하는 것은 명분이 없다. 김희근 지회장은 하청업체 무기계약직으로 승승장구하며 현장복직을 하게 되고 이와 유사한 사건으로 여러 번 싸워 이기는 성과를 맛보게 된다.

그리고 또 하나의 중요한 계기는 2006년도에 검찰이 지엠대우를 불법파견으로 고발했던 사건이 2013년도가 되어서야 불법파견으로 인정된 것이다. 그 역사의 산증인으로 남은 진환씨는 옛날 동료들을 만나서 다시 한 번 싸워보자고 설득작업을 했지만 다수가 회의적이었다. 겨우 5명이 불법파견 정규직화 싸움을 하기로 결정한다. 김희근 지회장과 진환 사무국장 그리고 5명의 비정규직 노동자, 그렇게 겨우 7명이 모임을 시작하고 노동조합이라는 씨앗이 발아하기 시작한 것이다.

 

 

대공장에 만연한 불법파견을 조직화의 촉매제로

 

2014년 9월 현대자동차 불법파견 판결이 계기가 되어 지회는 본격적으로 ‘불법파견소송단’을 모집한다. 당시 김희근 지회장은 ‘불법파견 정규직화’ 투쟁 전술의 한계를 들어 알고 있었기에 그것을 넘어서기 위한 방안과 의미를 찾으려 했다. 조직화의 수단으로 최대한 모아내고 투쟁으로 훈련하자는 기조를 유지했다고 한다. 한국지엠 창원공장 뿐 아니라 부평과 군산 등 지역에 흩어져있는 한국지엠 공장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모아내는 촉매제의 역할을 하고자 했던 것이다. 무엇보다 조직화는 투쟁을 통해서 확대해가야 한다는 신념이 분명히 있었다.

하청업체의 한 부서가 통째로 날아갈 위기에, 단기계약직 2명이 해고될 상황이 있었다. 당시 소수의 조합원이 파업을 시도하고 싸웠지만 끝내 복직을 이뤄내지 못한 채 불법파견 소송만 남겨두고 해당 조합원은 생계투쟁을 나갔다. 그해 말에 조합원이 가장 많은 하청업체 3곳이 날아갈 위기를 맞아서 지회는 원청타격투쟁을 전개하고 고용-노조-단협 ‘3승계’를 쟁취하는 승리를 만들어낸다. 한국지엠 창원공장 하청업체 8개 중 7개 업체에 조합원이 있었고, 비록 소수라서 생산타격의 효과는 적었지만 선전과 홍보를 하면서 7개 업체 조합원들은 다함께 파업을 전개했다. 이런 소소한 싸움으로 지회 조합원들은 훈련되고 경험을 쌓고 있었던 것이다.

 

2016년 6월에 불법파견 정규직화 민사소송을 제기했던 5명의 조합원이 소송에 이겨서 정규직이 되었다. 이를 계기로 ‘조합원가입 및 불법파견소송단’을 모집하는데 100명 정도가 노동조합을 찾아왔다. 장영진 조합원은 그 당시를 이렇게 설명한다.

“처음 노조 가입할 때 근로자지위확인 소송 때문에 가입했습니다. 당시 한국지엠 창원공장에서 노조 조합원 5명이 대법원에서 승소했고, 이후 동일한 소송을 두 곳에서 진행했는데 한 곳은 노조이고 다른 한 곳은 제가 근무 중인 업체에서 추천해주는 변호사 쪽으로 소송하는 방법이었습니다. 바지사장인 업체가 진짜사장인 한국지엠에게 소송하라고 변호사까지 추천해주며 권하는 꼴이 믿음이 가지 않아서 노조에 가입하고 소송을 진행 중에 있습니다.”

 

당시 현장노동자들이 노동조합에 가입한 이유는 불법파견 정규직화라는 목적도 분명히 있었지만, 그동안 관리자들의 횡포와 현장통제, 인격적 모욕 등의 불만이 가득 쌓여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한 업체에서 조합원 가입이 대거 이뤄져 사정을 알아봤더니 마치 군대처럼 위계질서를 강요하며 노동자들을 가두고 줄 세웠다고 한다.

지회는 ‘불법파견 소송단’ 모집과 현장설명회를 하면서 7월 말까지 노조가입을 받는다. 노동조합에 가입한 신규조합원은 10회 이상 의무교육을 이수해야 한다는 원칙을 견지했다. 임‧단협 투쟁이 시작되고 10월 16일 조합원 임시총회를 개최해 하반기 투쟁계획과 목표를 세워 본격적인 싸움을 시작하게 된다. 그리고 바로 10월 19일 첫 파업을 한다. 노조에 가입한지 석 달 만에 파업을 하게 된 장영진 조합원은

“노조 가입 이후 고작 3개월 만에 첫 파업을 했어요. 그 전에는 한국지엠 정규직노조에서 매년 하는 파업만 보다가 직접 파업을 해보니 조금은 생소했어요. 새로운 광경을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평소 작업장갑을 안 끼고 일을 안 하던 관리자가 생산 공정에 들어가 일을 하고, 불법파견이 아니라고 우기던 한국지엠은 우리가 파업을 하자 생산라인이 멈추는 현상까지 발생하고 결국 휴업까지 하였습니다.”

 

 

‘총고용 보장’은 끝이 아니라 시작입니다

 

현장에서는 노조 간부와 활동가 10%는 날릴 거라는 소문이 일파만파 퍼져있었고, 조합원들이 소속된 7개 업체 중 3개 업체를 폐업시켜 현장 조합원을 흔들어댔다. 이때에 원청 정규직지회의 통제와 상급단체인 금속노조 경남지부의 압박이 끊이지 않았다. 원청과 교섭권을 열어줄 테니 쟁의권을 상급단체에 위임하라는 거였다. 현장투쟁의 수위를 낮추라는 압력이 숨통을 죄어오고 있었다.

“파업대오 150명이 식당에서 정규직들과 함께 식사를 하는데 정규직들의 시선은 평상시와 다르지 않았어요. 비정규직의 파업에 대해서 불편해 하지 않았어요. 오히려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것 같았지요. 이런 분위기면 이번 싸움 우리에게 승산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계약해지 시점이 12월 31일인데, 생산이 축소된 것도 아니고. 어차피 하던 양은 생산할 거라서 결코 불리한 싸움이 아니었던 거죠. 자본은 12월 31일로 시간을 정해놓고 그 때까지 버텨낼 거냐 아니냐를 보는 겁니다. 우리도 그게 걸려있고. 우리의 심장박동이 자본이 걸어 놓은 최면에, 자본의 시간에 맞춰 뛰게 만들어놓은 거지요. 우리는 이 시기를 거뜬히 넘겨서 우리의 시계추에 맞춰 심장이 뛰게 해야 합니다. 저들의 프레임을 넘어설 때 이길 수 있는 겁니다.”

아사히비정규직지회 차헌호 지회장이 창원공장 파업교육을 하고 와서 들려준 식당의 풍경이다.

 

어떻게 대기업을 상대로 이길 수 있을까? 저들은 맘먹고 제대로 탄압하려고 덤벼들 텐데, 우리는 해고를 감당하고 끝까지 싸워갈 수 있을까? 만감이 교차될 시점이 다가오자 단단하게만 보였던 현장 조합원들에게도 고비가 찾아왔다. 해고통보일 며칠을 앞두고 현격하게 불안해지고 있었나보다.

그러나 겉으로 드러난 모습과 다르게 조합원들은 해고예정일 12월 31일을 넘길 각오라도 한 듯 배낭을 메고 전원 공장으로 집결했다. 자본이 보는 앞에서 싸울 준비를 해서 공장으로 들어온 거다. 이제 조급해진 건 자본이다. 시기를 넘기게 되면 싸움이 어느 방향으로 흐르게 될지 장담하기 어렵다. 재고물량은 바닥이 났고, 생산을 가동해야 할 때에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흔들리지 않았다는 것은 자본을 엄청 당혹스럽게 만들었을 거다. 때마침 원청지부장이 ‘총고용 보장과 3승계’를 조건으로 교섭을 하겠다고 제안했다.

물론 지회 입장에서 원청지부에 교섭을 위임한다는 것을 환영할 수 없었지만, 거대한 기업을 상대하기엔 비정규직 노동조합은 취약하기도 했다. 투쟁만으로 돌파하기 어려운 점이 분명히 있었다고 김희근 지회장은 한계를 인정한다. 그러나 만약 ‘총고용보장과 3승계’라는 원칙을 분명히 하지 않았다면 교섭을 위임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물론 누구보다 앞장서서 활동했던 5명의 조합원들이 고소고발 당한 것도 열 받는데 대기발령으로 남들보다 한 달이나 늦게 현장에 복귀해야 하는 안타까운 일도 있었다. 이 과정을 거치면서 장영진 조합원은 누구보다 열심히 했던 사람들을 지켜주지 못한 미안함과 자본을 향한 분노가 누구보다 더 커졌다고 한다. 노동조합은 늘 시작하는 조직이라는 그의 이야기로 한국지엠 창원비정규직지회의 투쟁이야기를 갈무리한다.

“저희 노조는 전체조합원이 투쟁조끼를 가지고 있습니다. 투쟁조끼 등 뒤에는 ‘비정규직 철폐’라는 문구 아래 ‘해고자 복직’이라는 문구도 있습니다. 10년 전 투쟁하다 억울하게 해고된 동지들이 아직도 복직이 안 되어서 회사 밖에서 투쟁 중에 있고, 그들의 복직을 위해 적어놓은 문구입니다. 그런데 해고자를 복직시키기는커녕 함께 투쟁한 5명의 동지들마저 지키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한계였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전체 조합원의 3분의 2가 조합 가입한 지 석 달 밖에 되지 않은 신규조합원이었고, 투쟁전력이 다소 약할 수밖에 없는 게 현실입니다. 이번 투쟁으로 너무 많은 것을 느꼈습니다. 조합원들도 많이 성장하리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총고용을 보장받더라도 이건 끝이 아니라 시작일 뿐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2 [출처 한국지엠창원비정규직지회].jpg

 

한국지엠창원공장으로가는길_손소희_질라라비201702.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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