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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고

 

한국 교육의 가장 아픈 곳을 응시하다

김경엽 (전국교직원노동조합)

 

 

고등학교 현장실습을 두고 교육부는 훈련 과정의 한 부분으로 ‘학습’한다고 하지만 학생들은 산업현장에서 임금노동을 하고 있다. 교육부는 사건사고가 날 때마다 사회적 언론에 몰매를 맞고 반복되는 대책을 내놓았다. 앵무새처럼 무의미한 현장실습 내실화 정책을 발표할 때마다 현장실습을 훈련이라고 했다가 노동이라고도 하는 등 말 바꾸기를 일삼아 현재는 현장실습이 정확히 무엇인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놓였다. 지금까지 진행되었던 고등학교에서의 현장실습이, 하나의 불안정한 노동시장을 형성하고 있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지난해 전남 지역에서 실시한 도제학교 실태조사는 현장실습이 ‘임금노동’이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실습생은 노동자의 신분으로, 그들이 수행한 일은 노동자의 직무수행과 다르지 않았다. 학생들은 훈련의 과정에 있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육부 관계자들은 전남 지역 실태조사 결과를 두고 ‘좁은 지역에서 실시한 조사다’라거나 ‘조사의 표본이 타당하지 않다’는 등의 이유를 들어 조사 결과에 내포된 의미를 읽으려 하지 않았다.

 

특정한 방법의 입시제도가 지배계급의 자녀들이 적법한 과정으로 명문대학에 입학하는 경로라고 하지만, 공정한 경쟁을 통해 얻는 성과로 보기에는 허점이 많다. 우리는 부모세대로부터 물려받은 귀속요인으로 공정한 경쟁을 가장한, 불공정한 교육제도를 통해 계급을 지키려는 부르주아 계급의 속성을 성찰하였다. 이는 교육 정책의 문제로 확장되었고, 나아가 고등학교 공교육 개혁이 이야기되고 있다. 그러나 특성화고, 마이스터고, 종합고의 직업교육과정, 일반계고 직업교육 위탁과정은 우리 교육의 가장 아픈 지점임에도 불구하고 교육불평등 해소 논의의 장에 초대받지 못하고 있다.

 

교육부는 분리교육에 담긴 의미, 어떻게 불평등한 교육문제를 야기하고 있는지, 어떻게 이 문제를 해소해나갈지, 단 한마디 언급도 하고 있지 않다. 그저 산업체의 인력 수요에 맞추는 훈련이 학생의 적성과 소질에 적합한 교육이라고 각색하고 있다. 현재와 같이 훈련과정으로 운영되는 현장실습제도 해소는 직업계고의 교육 정상화와 내실 있는 교육 운영을 촉발하는 첫 단추이다. 이는 교사의 노동형태, 즉 학생의 학습활동을 촉진하는 교사 직무수행의 형태를 규정짓는 가늠자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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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월담]

 

 

‘현장실습’은 훈련과정의 한 부분이다

 

 

누구나 노동자가 된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는 진리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새로운 회사에 들어가면 어색한 노동환경에서 일을 하게 된다. 낯선 일터에서 초기에는 당연히 노동생산성이 떨어지게 된다. 기업은 이런 부분에서 어떻게 노동생산성을 높일까? 기업은 생산공간이 아닌 곳에서 별도의 훈련공간을 마련한다. 그 공간에는 실제 생산환경과 유사한 설비를 마련한 뒤 훈련교사를 배치한다. 누구나 낯선 생산도구와 직무환경에서 능숙하게 작업을 할 수 없기에, 이 공간에서 생산도구 실습과정을 거쳐 생산현장에 배치된다.

이것뿐인가? 생산성에 지대하게 영향을 미치는 것은 개인의 기술 수준만이 아니라, 노동집단 전체의 기술 수준이다. 결국 사람과 사람의 관계성, 개별 공동체의 독특한 상호 소통 방법, 노동집단에 숨어 있는 암묵적 기술 형태 등을 익히는 공백의 시간이 꼭 필요하다.

 

현장실습이라는 직무활동 기간은 훈련이란 전체 과정 중에서 훈련공간이 아닌 생산공간에서 이루어지는 노동자 집단간 포괄적인 기술전수를 의미한다. 또한 두 가지 관점이 추가된다. 낯선 생산현장에서 적응하는 시기와 노동생산 전체 주기 속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시기도 있다. 왜냐하면 능숙한 노동자로 성장하기 위해 끊임없는 학습, 노동, 사색 등 교육의 하위 3요소가 병행되는 시기는 초기 입직단계에만 국한되지 않기 때문이다. 변화되는 기술이 현장에 적용되는 시점, 이직과 같은 시기, 노동자 집단 구성원이 변화하는 시기 등 노동자가 생산 주기에 참여하는 기간 내내 일어난다.

 

결국 이런 모든 노동자들의 현장실습은 생산공정 적응기간이며, 기업에게 이익을 주는 노동자의 직무향상활동이다. 또한 생산공정에 배치되는 채용 이후에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노동시간에 산정되어야 한다. 더불어 기업 울타리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훈련은 포괄적인 의미에서 여러 가지 의미가 내포된 노동행위라 보아야 한다.

기업 내의 훈련원 기간은 채용을 전제하지만 배움의 기회를 충분하게 제공해야 한다는 차원에서 수당 성격의 금전적 지원을 받는다. 훈련원 운영에 대해 기업은 국가보조금, 훈련지원금, 취업장려금, 장학금 등 다양한 형태로 외화된 정부로부터의 직간접 혜택을 받고 있다. 무상교육도 이런 관점의 맥락에 놓여 있다. 그러나 현장실습은 임금노동이고 생산활동이 동반되는 기간이다. 따라서 채용 이후라는 점이 명료하고 임금노동으로 요건이 갖추어지기에 ‘임금’이며, 법적 효력도 발생하는 종속관계로 계약이 형성된다.

 

 

기업은 왜 훈련비용을 적게 투자하는가?

 

기업 훈련원에서의 훈련과정에 대한 비용은 국가 지원에서 충당하고 있다. 훈련비용을 세제 혜택 등 다양한 방식으로 적극 장려함에도 불구하고 기업은 이에 대한 투자를 지속적으로 줄여나가고 있다. 현대에 와서는 기업 내에 있어야 하는 훈련원을 노동부 관할의 국가기관(훈련소)에 의존하는 경향도 높아졌다. 신생 분야나 미래성장 분야, 기업이 위험을 떠안을 가능성이 있는 분야 등 기업이 직접 투자를 꺼리는 곳에 사회적 자산이 투여되는 경우가 있다. 논의의 폭을 좁히기 위해 이런 문제는 접어두고, 당연하게 기업이 책임져야 하는 기업의 사내 훈련원이 국가가 운영하는 직업훈련소로 이전되는 문제를 지적하고자 한다.

무한 경쟁을 낳는 자본주의 체제가 그 원인으로 지목된다. 기업주가 돈을 들여 노동자의 기술력을 높여 놓았는데 다른 경쟁 기업에서 인재를 빼앗아가는 경우가 수없이 일어난다. 이는 경쟁기업이 나빠서가 아니라 지독한 시장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비용 절감을 해야 하는 기업이 취하는 생존 경영전략이다. 이는 기술수준의 척도는 노동집단 전체에 있음을 이해하지 못해서 오는 경우다.

기업의 생산물은 한 개인의 힘에 의해서가 아니라 노동자 집단의 사회적 과정에서 산출되는 것이다. 기술은 기술을 소유한 개별 노동자에게만 존재하지 않는데 지금 훈련체제 논의는 개별 노동자의 직무능력에 집중되어 있다. 집단성에 의존하지 않고 개별능력에 좌우되는 시각은 훈련비용 배분 문제를 낳는다. 기업은 생산성 향상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하는 상층 고숙련 노동자에게 집중하여 투자하는 모순적 행동을 한다. 즉, 이들도 언제나 회사를 떠날 수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지금 당장의 높은 생산성을 바라는 경영전략을 선택한다. 그에 비해 저숙련의 단순 공정은 기계화, 자동화하는 기술방식을 생산공정에 적용한다. 이런 기업의 행태는 기업이 약아빠져서 그런 것이 아니라 생산 비용을 낮추어 자본주의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함이다.

 

자본주의 경쟁 구조 속에서 살기 위해 이윤을 추구하는 기업이 훈련비용 투자를 꺼리고 있으며, 특히 낮은 단계의 훈련은 자신들이 책임지지 않고 국가기관으로 떠넘기고 있다. 교육부는 이와 같은 기업의 경영전략을 교육적 성찰 없이 그대로 수용하였다. 그 모습이 고등학교에서 운영 중인 현장실습의 형태로 저숙련 일자리에 필요한 노동자를 충족시키는 구조를 만들어냈다.

교육부가 고등학교에 기업 훈련원(노동부 훈련소)의 기능을 요구하고 있다고 하여도, 학교 밖에서 이루어지는 현장실습은 어떤 법률적 제도로 정비하더라도 고등학교 교육활동의 대상이 아니라는 점은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육부는 일학습병행제법을 통해 현장실습을 더욱 강화해나가고 있다. 문재인 정부의 교육부도 학생이 생산활동의 임금노동을 하여도 ‘학습’하는 현장실습이라고 포장하여 저임금노동으로 내몰고 있다.

   

 

현장실습은 구조적 노동착취 제도이다

 

지배적 이념이 ‘취업으로의 연계’, ‘현장실무 경험 익힘’ 등의 수사로 현장실습을 곡해하여도, 현장실습은 직무훈련과정에서 생산노동과정으로 넘어가는 중간지대로서 노동과 훈련의 공통분모 지점이다. 이런 방식의 훈련은 실습장과 같이 별도 훈련장소가 아닌 산업현장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매우 명확하고 확실한 규제가 필요하다. 기업 훈련원이나 노동부 훈련소가 운영하더라도 훈련기간에 참여자가 충분하게 그 과정을 이수할 수 있는 지원이 명확하게 설정되어야 하며, 기업 채용 후 산업현장에서 진행되는 훈련기간에는 노동자의 안전을 구체적으로 담보해내야 한다. 또한 노동자 집단의 기술 수준을 잘 흡수해 낼 수 있도록 공고한 체제가 마련되어야 한다. 이런 전제 조건들이 형성되지 않는 현장실습은 훈련과정의 한 부분이 아니라 저임금노동으로 흘러가게 된다.

 

최근 현장실습에 참여하다가 안타까운 죽음을 당한 학생들의 부모님들이 있다. ‘다시는 아무도 죽이지 말라’고 호소하며 전국을 누비고 있다. 그분들의 증언은 학생들이 임금노동을 하였고, 노동자로서 대우받지 못하였으며, 그들을 보호하는 법은 있지만 취약했던 그들의 삶을 이야기한다. 우리는 성찰하고 있지 않은가. 가장 얇은 곳이 가장 먼저 터지는 현실을. 기업이 사악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 시대가 만들어낸 구조가 그들을 이 세상 밖으로 떠나게 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현장실습은 교육이 아니다

 

 

우리는 사형제도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가. ‘살인자는 죽여야 한다.’ 이에는 이라는 생각에는 반론할 가치조차 없다. ‘사법행정에 오류가 있을 수 있다.’ 억울한 사람을 만들지 말아야 한다. 법의 카르텔로 죽어간 약자들의 사례는 무궁무진하다. 자신을 보호하는 데에 취약할 수밖에 없는 계층이 더 위험에 노출되기 때문이다. ‘사형제도는 범죄를 예방하는 효과가 있다.’ 사형제도가 없는 국가의 낮은 범죄율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범죄는 개인적인 나쁜 마음보다는 사회구조적 영향으로 나쁜 사람들을 만들어낸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지배계급이 노동자 민중을 지배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형제도를 운영하였다. 먼 과거로 갈 필요도 없다. 법원 판결문의 잉크도 마르지 않았는데도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던 독립투사들, 민주화 열사들이 이 사실을 증명해주고 있다.

 

현장실습으로 노동자의 기술 향상과 학업의 병행이 가능하다는 주장, 회사 내 청년층이 산업현장에서 전문지식과 기술을 갖추고 신규 노동자들의 직무능력을 강화시킨다는 교육부의 주장을 우리는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거짓말을 충분히 자주 반복하면, 사람들은 그것을 믿게 될 것이다. 그리고 너 자신도 그것을 믿게 될 것이다.” 독일의 히틀러 치하에서 나치의 선전을 담당했던 괴벨스가 한 말이다.

 

현장실습은 어쩔 수 없이 자녀 때문에 불안한 마음에 시달려야 하는 학부모, 살아남기 위해 직업을 가져야 하는 학생들의 불안한 심리를 이용해 자기 잇속을 챙기는 이 땅의 지배세력이 심어놓은 왜곡된 이데올로기일 뿐이다.

 

교육이 계층 상승의 도구는 아니다. 교육의 목표는 사람살이의 이치를 알고 살림살이의 기초를 터득하여 자립적인 삶을 살아가게 하는 데에 있다. 인간이 사회체제로부터 해방을 꿈꾸고 자유로운 삶을 살아가는 데에 꼭 필요한 기능을 익히는 것이 교육의 가치를 실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너무 많은 교육을 쓸 데 없는 것으로 치부하는 지배계급에게 필요한 교육은 받아야 한다고, 교육에 희망의 끈을 놓지 않도록, 교육혁명의 길을 열어나가는데 우리 모두 함께해야 한다.

 

 

 

[편집자주] <질라라비> 187호(2019년 3월) ‘정책포커스’에 “직업계고 현장실습, 이제는 끝날 때가 되었다”를 써주셨던 전교조 김경엽 동지의 기고글을 전합니다. 지난 호 ‘법률포커스’에 실린 “산업현장 일학습병행 지원에 관한 법률의 제정, 도제교육은 현장실습과 다른가”(최은실)_http://workright.jinbo.net/xe/issue/66419를 참고해 함께 읽어주셔도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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