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라라비/202308] 사회서비스 고도화와 대한민국의 지속가능성 / 제갈현숙

by 철폐연대 posted Aug 07,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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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책 포커스

 

 

사회서비스 고도화와 대한민국의 지속가능성

 

 

제갈현숙 • 노동권연구소 연구위원

 

 

 

나는 예수가 아니야!

 

지난겨울 어머니의 수술로 종합병원 입원실에서 6일을 보냈다. 다행히 나는 6일 동안 시간을 낼 수 있었기에 간병인의 도움을 구하지 않아도 됐다. 그곳에서 환자들의 모습, 그들을 돌보는 가족 또는 간병인들의 모습이 특별하게 다가왔다. 어느 날 환자의 자녀로 짐작되는 여성의 고성이 들렸다. “엄마! 나는 예수가 아니야. 나도 너무 힘들어. 지금 나만 계속 이렇게 엄마를 돌보고 있잖아. 그런데도 왜 나에게만….” 조용한 복도를 통해 쩌렁쩌렁 울렸던 소리는 입원실에 있던 사람들의 이목을 주목시키기에 충분했다. 전후 맥락을 모두 알 수 없지만, 병환과 간병에 지친 환자와 보호자의 상황이 전달되었다. 자신을 돌보는 사람에게 전적으로 의지할 수밖에 없는 환자의 입장과 자신의 생업과 생활을 중단한 채 간병을 해야 하는 자식의 입장 모두가 자연스럽게 이해됐다. 이들의 절박한 상황에 국가는 없었다.

 

국민 삶의 질 향상을 위해 2007년부터 도입된 사회서비스는 산업적 규모 면에서 상당한 발전을 거쳐 왔지만, 이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의 손을 잡아 주지 않는다. 물론 간호간병통합서비스가 존재하지만, 2022년 6월 말 기준, 이 서비스를 제공하는 기관은 594개소로 서비스에서 제외된 요양병원과 정신병원을 제외한 병원급 총 1,771개소의 33.5% 수준이다. 이를 병상수 기준으로 보면 보장되는 규모는 더 축소되고, 무엇보다 간호간병통합서비스를 제공하는 기관에서 경증환자를 중심으로 선별적으로 제공하면서 이 서비스가 더 절실히 필요한 중증환자들은 외면당하고 있다. 이에 중증환자와 그 가족은 ‘간병비 파산’에 더 직접적으로 노출되어 있다.

 

인간 의존, 존재론적 사실

 

인간은 출생 후 누군가의 도움 없이 생존할 수 없다. 그리고 생애 기간 내내 타인의 돌봄이 필요한 시기가 반드시 발생하고, 노년기로 접어들수록 의존성은 더욱 높아지게 된다.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는 우리에게 의존하지 않는 인간을 성공한 인간으로 제시하면서, 각종 복지급여를 받는 사람들에게 낙인을 부여하고, 의존적 인간에 대해 부정적 이미지(게으름, 나태함, 개선의 여지가 보이지 않음, 의욕 상실 등)를 덧칠해 왔다.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은 모두 의존적인 존재라는 사실을 감춰 왔다. 이것이 감춰질 수 있었던 기반에는 자본주의로의 전환 이후 성역할의 분할이 고착되면서 여성에게 일련의 가사 및 돌봄노동을 어머니의 이름으로, 아내의 이름으로, 며느리의 이름으로, 딸의 이름으로 일임되었기 때문이다. 여성은 대가나 사회적 인정 없이 가사·돌봄노동을 수행해 왔고, 산업노동력이 부족해지면 노동시장으로도 불려 나가기도 했다.

 

일과 가정을 모두 책임져야 하는 부담은 남성보다 여성에게 무겁게 다가왔고, 한국 사회는 출산을 거부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할 정도로 모순이 극심해졌다. 인간 의존 사실은 변할 수 없고, 인류 재생산을 위한 기본적인 이 가사·돌봄노동을 ‘누가, 어떤 방식으로 조직해서 수행할 것인가’에 대한 사회적 책임이 부각되었다. 이에 한국 정부는 2006년부터 ‘사회서비스’를 제도화하면서 대응해 왔지만, 시장화의 굴레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고 있다. 사적 공간에서 사랑이란 이름으로 수행해 왔던 노동이 시장에선 어떤 가치로 수행되고 있나?

 

사회서비스 시장화의 기원

 

2006년 참여정부는 ‘보건복지부문 사회서비스 확충전략’을 발표하였다. 이 전략의 정책 목표는 사회투자형 서비스 개발 및 확충과 새로운 일자리 창출에 있었다. 정부의 사회서비스 확충전략은 처음부터 공공적인 전달체계를 구성하지 않고, ‘시장’을 통한 공급구조 창출과 일자리의 양적 창출에 초점을 맞췄다. ‘사회적 위험으로부터 국민을 지키고 사회통합을 증진하면 사람에 대한 투자와 사회서비스 제공을 통하여 국민의 삶의 질 향상과 국가발전에 기여한다’는 정책적 지향이 어떻게 시장활성화를 통해서 가능할 수 있을지에 대해 분명한 답변은 처음부터 없었다.

 

사회적 위험으로부터 국민을 지키는 것은 지극히 ‘사회적’인 영역으로 시장의 모순과 실패로 인해 발생하는 문제에 대해 보편적인 방식으로 국민을 보호하는 것이다. 그런데 모순과 실패가 상존하는 시장의 방식으로 사회적 위험에 대처한다는 것은 비유하자면, 간병이 필요한 환자에게 시장에 간병회사와 간병노동자들이 많으므로 ‘선택’만 하면 되는 것이다. 즉 국가는 시장에 간병인프라를 마련해 두었으니 필요한 시민이 알아서 구매하라는 것이다. 만약 구매력이 없는 환자라면, 안됐지만 돌봄을 포기하든가 간병파산을 직면하게 된다. 물론 바우처를 통해서 일부 비용에 대해 국가가 지불하고 있지만, 바우처는 모든 시민에게 제공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복지부에서 매달 사용 한도를 정하고, 제공되는 사업도 한정적이다. 또한 바우처는 정부가 제공하는 사업의 공급자를 양성해서 시장을 형성하는 데 기여해 왔다.

 

사회서비스는 일자리 창출과 새로운 성장 동력 확보라는 점에서 국가경영전략으로 부상되었고, 이에 국가전략에서 사회서비스의 공공성보다는 고용전략과 산업 성장의 차원에서 산업화하였다. 사회적 위험에 대한 국가적 대응은 공공성을 담보로 적정 수준의 서비스를 보편적으로 제공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회서비스에 대해 다른 산업정책과 마찬가지로 산업양성을 위한 비용을 투입하면서 마치 사회복지의 제도적 확대인 양 전략을 구축한 것이다. 적은 재원으로 사회서비스 시장을 형성하기 위해서 누구든 이 사업에 참여할 수 있도록 진입장벽이 거의 없도록 했고, 일자리의 질 따위는 고려 대상이 되지 못했다. 또한 시민의 연대로 이루어지는 조세가 주요 재정이지만, 사회서비스 이용자에게 소비자로 인식시키기 위해 바우처 방식을 도입하였고, 공급자 간 경쟁은 더 좋은 서비스 제공을 통해서가 아닌 바우처 확보를 위한 음성적 경쟁으로 서비스의 질 향상을 기대하기 어려운 시장으로 발전되었다.

 

무엇보다 돌봄은 ‘타인 지향적 가치’, 즉 돌봄 제공자의 욕구보다는 돌봄을 받는 사람의 욕구를 우선으로 해야 하는 실천 행위인데, 이 노동에 대한 대가는 최저임금 수준을 맴돌고 있고, 노동에 대한 사회적 인식과 보상이 매우 낮다. 그 결과 좋은 인력을 유지할 만한 그 어떤 요인이 없고, 결과적으로 2차 노동시장의 거대한 일자리로서만 기능하고 있다.

 

주로 가정 내 여성에 의해 타인 지향적 가치를 기반으로 제공되었던 가사·돌봄노동을 저임금과 낮은 직업적 지위를 감내할 수 있는 계층에게 떠넘겼고, 시장 방식으로 서비스 공급이 조직된 결과, 산업적 측면에서도 노동생산성이 낮고, 사회적 측면에서도 사회서비스 확대에 따른 국민 삶의 질 개선은 매우 미시적이고, 무엇보다 출생률 상승에 전혀 영향을 미치지 못하면서 지난해 합계출산율은 최저치를 또다시 경신했다.

 

윤석열 정부의 지속가능한 복지국가 : 국가의 재정 책임 축소를 위한 패러다임

 

지난 5월 31일 사회보장 전략회의를 통해 윤 정부의 복지국가 전략이 발표되었다. 지속가능한 복지국가 비전 아래 ‘약자 복지’, ‘서비스 복지’, ‘복지 재정 혁신’을 중점적으로 추진하고, 사회보장제도 통합관리와 사회서비스 고도화 추진을 핵심과제로 제시하였다.

 

‘지속가능’이란 단어는 다양한 측면의 정치적 의미가 있다. 우선 기후 위기에 직면하고 있는 지구는 생태적 지속가능성을 위해 특단의 조치가 필요하고, 세대 간·계층 간 연대를 위해서도 사회의 지속가능성이 전제되어야 한다. 그런데 신자유주의 이후 사회정책 범주에 등장한 ‘지속가능’은 국가 재정의 사회복지비 지출에 대한 긴축을 간접적으로 상징하는 용법처럼 사용되어 왔다. 예를 들어 사회보험에서 지속가능성은 가입자의 부담인 보험료율을 높이거나, 보장성을 낮추거나, 급여대상자 규모를 조정해서 급여 혜택을 축소하는 방식으로 재정적 측면만을 강조한다. 현재 진행 중인 제5차 국민연금재정계산에서도 재정의 지속가능성이 중심 주제로 다뤄지면서, 저출생과 고령화로 증가될 연금급여재정에 대해 누가 부담할 것인가를 두고 갑론을박이 뜨겁다.

 

지속가능한 복지국가 비전하에 복지 재정 혁신을 중점으로 제시하면서 사회보험 지속가능성 제고, 사회보장제도 통합관리, 사회보장 전달체계 효율화를 목록화했다. 사회보험 지속가능성에서는 미래 세대를 강조하며 세대 간 공정을 구현하겠다는 내용만 제시했다. 지속가능성과 세대가 결합되면, 저출생과 고령화로 증가될 수밖에 없는 부양비용에 대해 미래 세대의 부담을 덜어 주는 것이 공정한 것으로 간주된다. 이 전제하에서 증가될 부양비용에 대한 부담은 사회적 방식으로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수익자 부담원칙, 즉 위험에 노출된 당사자들이 재원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공정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접근으로 국가의 사회복지책임은 개인에게 전가되고, 재분배를 통한 시장의 모순을 완화하려는 공공적인 시도는 축소될 수 있다.

 

최근 국가 정책을 보면, 사회적 필요 중심이 아니라 특정 세대만을 겨냥한 포퓰리즘 정책이 상당하다. 예를 들면 빈곤이나 주택에 대한 접근도 보편적인 욕구 기반 중심이 아니라, 중장년층을 제외한 채 청년 빈곤, 청년 주택과 같은 방식으로만 대응해 왔다. 그 결과 대다수 중장년층은 전형적인 사회복지의 사각지대에 놓였다.

 

신자유주의 경제체제 이후 변화된 자본의 축적구조로 일자리와 임금이 심각하게 분할되고, 이전 세대보다 적은 기회와 열악해진 노동조건을 청년세대가 감수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문제는 이전 세대가 더 많은 자원을 가졌기 때문이 아니라, 지극히 계급착취의 모순에 기인된 결과이다. 정치권과 언론에서 선호하는 일련의 세대론은 자본과 국가의 책임을 은폐하고, 자기 자신을 세대 측면으로만 인식함으로써 노동자계급으로서 동질감을 형성하는 데 방해해 왔다. 빈곤은 노동시장의 모순으로 모든 세대의 저임금노동자가 겪게 되는 문제이지, 특정 세대에게만 걸리는 저주가 아니다. 그러므로 세대 간 공정은 이러한 근본적 모순을 은폐함으로써 국가와 자본의 책임을 희석하고, 노동자와 시민에게 각자도생만이 유일한 대책인 듯 강요한다.

 

OECD 국가 노인 소득빈곤율 평균은 13.1%이지만, 한국은 43.4%로 OECD 평균보다 세 배 이상 높다(Pensions at a Glance, 2021). 이렇게 높은 빈곤율의 원인은 여전히 부족한 공적복지의 한계에서 비롯된다. 그런데도 보수정부는 매번 재정을 내세워 사회적 책임을 개인의 몫으로 전가하는 일관성을 보여 왔다.

 

윤석열 정부의 약자 복지와 사회서비스 고도화

 

윤 정부는 생산가능인구 감소에 따른 잠재성장률 하락을 전망하면서 인구 구조의 악화와 고용 없는 성장을 사회서비스 추진 배경으로 상정하고 있다. 이에 지속가능한 복지를 위해 사회서비스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우선 2019년 고용유발계수(명/10억 원)를 보면, 사회복지서비스 26.4, 사회서비스는 11.0으로 전체 산업 7.4보다 모두 높은 것을 근거로 일자리의 저수지로 상정한다. 또한 사회서비스 투자를 통해 저소득층이 안정적인 일자리와 소득 확보가 가능하다고 진단한다. 그러나 정부의 이러한 진단은 상당히 주관적이다. 우선 고용유발계수가 높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 이유는 노동비용이 현저하게 낮으므로 발생하는 착시효과이다. 같은 비용을 투입했을 때, 노동비용이 적게 드는 산업에서 더 많은 고용이 유발되는 것은 너무 쉬운 산수이다. 또한 사회서비스 투자를 통해 제공되는 일자리와 소득은 정부의 표현대로 안정적이지 않고, 적정 소득이 아닌, 정부 표현 그대로 소득만 확보되는 일자리이다. 사회서비스 제도화 초기부터 줄곧 사회서비스 일자리는 2차 노동시장의 가장 불안정하고 불평등한 직종에서 벗어 나지 못하고 있다. 고도화된 산업에 걸맞은 일자리의 위상이 아니다. 그런데도 사회서비스 고도화는 윤 정부 복지의 핵심 아젠다가 되었다.

 

윤 정부는 지난 1년간 ‘약자 복지’의 성과를 긍정적으로 자평하면서 지속가능한 복지국가를 위해서 약자 복지의 성과 위에 ‘복지-고용-성장’을 올려놓았다. 이게 대체 무슨 소리인가?

 

‘약자 복지’는 보편복지에 대한 보수진영의 억하심정으로까지 느껴진다. 과거 무상급식을 두고 펼쳐진 ‘보편복지 대 선별복지’의 이데올로기 투쟁에서 보수진영은 패배했고, 그 후 보편복지에 거슬리는 정치적인 언행을 삼가 왔다. 박근혜는 대통령 선거기간 동안 모든 노인에게 기초연금을 지급하겠다고 약속하며 당선되었지만, 당선 후 2개월도 채 안 돼 국가 재정상 모든 노인에게 지급하는 것은 불가능하므로, 선별적 지급으로 정책 노선을 변경하였다. 박근혜 정부 당시 대통령자문 사회보장위원회 위원이자 김기춘의 사위인 안상훈이 현 정부의 대통령비서실 사회수석으로 임명되었다. 보수진영은 그들의 분명한 노선을 어떤 방식을 표방하든 정책적으로 실현하는 아집이 있다. 보편주의로 대중의 지지를 얻었지만, 결코 모두에게 대가 없이 제공하는 복지는 그들에겐 용납되지 않는 듯하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시민권은 모두에게 부여된 권리로 이해되지 않고, 사람 간 불평등은 자연스러운 것이고, 그에 따른 차별을 공정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에 정치적으로 불리한 선별복지란 용어 대신 ‘약자 복지’란 카드를 제시하기에 이르렀다. 이를 통해서 보편복지는 재정만 많이 들고 효율성이 없지만, 약자 복지는 정말 약한 사람들을 국가가 돕는다는 식의 거짓 포장으로 대중적 거부감 없이 국가의 복지 책임을 축소할 수 있게 되었다. 대체 누가 약자이고, 그것을 누가 규정할 수 있는 것인가? 이런 모호한 아젠다는 구체적인 내용을 확인할 수 없게 하고, 결국 국가 행위의 구속력을 자연스럽게 약화시킨다.

 

사회서비스 고도화의 첫 번째 과제는 기존 취약계층 중심 서비스에서 신규 사업을 확대해서 대상자를 확대하겠다는 계획이다. 이제까지 대표적인 사회서비스는 조세로 지원되는 전자바우처 사업과 무상보육, 그리고 사회보험재정으로 지원되는 노인장기요양이다. 바우처의 경우 취약계층 중심이지만 아동과 노인에 대한 서비스는 기본적으로 보편성을 띠고 있다. 다만 정부의 재정지원이 형식적 수준에서 맴돌기 때문에 일상에서 필요한 돌봄서비스는 발견되지 않을 뿐이다. 이에 중상층도 이용할 수 있는 서비스를 제공하겠다고 하지만, 이것은 제공이 아니라 구매이다. 바우처보다 높은 본인부담금이 책정될 것이고, 정부 지원사업이 미끼 상품이 돼서 시장에서는 더 많은 끼워팔기가 가능하도록 설계될 것이다.

 

정부는 낮은 수준의 서비스 질에 대해서 비용효율성이 낮은 소규모 공급자가 다수 존재하는 것을 주요 원인으로 제시했다(전체 제공기관 23만 2,107개소 중 종사자 4인 이하 기관은 10만 3,638개소로 전체의 44.7%, 2019년 통계청). 그러나 이것은 정부 정책의 결과이다. 사회서비스 공급업체에 대한 자격 기준을 최소화시켜서 누구나 시장에 진입하도록 하였고, 각 기관은 최대한 많은 사회서비스 인력과 계약을 맺도록 함으로써 일자리를 형성하도록 했다. 그러나 이미 진입한 공급기관에 대한 적정 서비스 관리, 맨파워 향상을 위해 필요한 지원, 자격 없는 기관에 대한 퇴출과 같은 서비스 질 향상을 위해 필수적인 조치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제 와서 소규모 공급자의 존재가 전체 서비스 질을 낮춘다는 것은 두 가지 전제를 염두에 둔 주장에 불과하다. 첫째, 사회서비스 시장화는 문제가 없고 계속되어야 한다. 둘째, 시장화를 통한 서비스 질 개선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규모의 경제라도 달성해서 조금이라도 환경 변화를 꾀할 수 있다. 이러한 전제는 공급 혁신 계획상에서 확인된다. 사회서비스 시장은 이미 시장이므로 경쟁 원리가 작동되고 있다. 다만 앞에서도 언급했다시피, 시간당 정해진 단가를 정부가 통제하고 있으므로 더 좋은 서비스로 경쟁할 만한 기반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 공급 혁신이란 이름으로 경쟁 원리를 도입해서 민간 공급자의 역량을 강화시키겠다는 포부를 펼치고 있다. 경쟁 원리 도입의 주요 내용으로 제공기관의 복수 지정, 부실 기관 퇴출(장기요양에서만), 지역사회바우처에 대한 지역 칸막이 제거를 제시했고, 표준모델 공유, 통합서비스 등 제공자 성장, 기관 간 연계 지원을 통해 규모화를 달성하겠다는 것이다. 제공기관 간의 서비스 차이가 크게 나지 않을 경우, 의미가 사라지는 복수 지정, 바우처 사업과 보육 관련 서비스 영역에서는 계획되지 않는 퇴출 조치, 지역 칸막이 제거로 발생할 수 있는 지역공동화, 모두가 민간업자만이 존재하는 시장에서 실현 불가능한 통합서비스와 표준모델의 무용성… 실험을 해 보기도 전에 정부가 제시한 방안에 대해 그 어떤 기대도 생기지 않는다. 여기에 디지털 기술 도입과 같은 복지기술 고도화는 논의의 대상으로 두기도 무의미하다.

 

정부 정책으로 변화될 유일한 방향은 공급기관의 규모 조정과 가격에 대한 자율성을 부여해서 기존의 소규모 업체들을 축소해 가며 가계소득에 따른 이용자의 부담금을 차등적으로 적용하는 방식이 급진전될 것으로 보인다. 정부 정책 어디에도 공공 공급구조 확대, 사회서비스 일자리의 질 제고, 시민들의 사회서비스에 대한 보편적 권리는 전혀 제안되지 않았다.

 

사회서비스의 시장화는 불가역적인가?

 

2015년 12월 일본 외무상이었던 기시다와 박근혜 정부 사이에 일본군 성노예 문제에 대해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인’ 합의가 발표되면서, 불가역적이란 단어가 주목되곤 한다. 불가역(不可逆)이란 물질의 상태가 한 번 바뀐 다음에 다시 본디의 상태로 돌아갈 수 없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지만 한국의 시민들은 이 주장에 대해 동의하지 않았고, 문재인 정부 내내 일본과의 외교는 거의 단교상태였다. 국가의 대표가 국가를 대표해서 합의했지만, 국민이 동의하지 않을 경우, 그 합의는 가역적으로 변화될 수 있다.

 

사회서비스가 시작된 이래, 시장화를 반대하는 투쟁에서 가장 어려웠던 요소는 사회서비스 시장화에 대해 불가역적이라고 주장하는 정부와 정치인, 전문가, 현장의 사람들이었다. 한 번 시작된 정책의 근본을 개혁하는 것은 쉽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사회서비스의 시민권과 노동권을 높이기 위해서는 잘못 형성된 시장을 근본적으로 뜯어고쳐야 한다. 타협 또는 형식적인 개혁처럼 보였던 사회서비스원의 실패는 오히려 본질적 개혁만인 유일한 해법이 될 수 있다는 신호이기도 하다. 사회서비스의 공급구조 개혁은 같은 비용을 어떻게 사용할 때, 사람들의 삶이 더 나아질 수 있는가의 문제이다. 서비스를 이용하는 시민뿐만 아니라 제공하는 노동자들의 삶까지도 모두 포괄하면서, 투입된 비용이 제대로 사용될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 갈 수 있다. 끊임없이 실패하는 시장에만 의존하는 방식이야말로 구태 자체이다.

 

OECD 국가 중 출생률이 가장 낮고, 초고령화가 급진적으로 진행되는 한국 사회의 지속가능성을 위해 우리가 투자해야 할 시간이 많지 않다. 사람들이 살아가고 싶고, 아이도 낳고 싶고, 힘든 날들도 있었지만 살아보니 행복했던 대한민국이 되는 것은 어떤가? 그런 대한민국이 되기 위해서 인간의 의존성이 존재하는 모든 곳에 휴머니즘과 사회적 책임으로 이웃을 돌볼 수 있도록 사람을 조직하는 것, 이러한 변화만이 대한민국의 지속가능성을 기대할 수 있게 하지 않을까? 불가역성을 가역성으로 변화시킬 사람들의 변화가 절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