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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미 금속노조 KEC지회로 가는 길

손소희 (지역사회노동자운동지지모임, 철폐연대 회원)

 

 

‘신사’의 풍경

대한민국 헌정사상 최초로 대통령 파면이 결정되던 3월 10일, 여기저기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금속노조KEC지회 ‘신사’에도 탄핵 축하주를 마시기 위해 조합원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근무를 마치자마자 두 아이를 데리고 신사로 들어선 한 여성은 동료들과 즐겁게 탄핵 축하주를 한 잔 하러 왔다고 한다. 두 아이는 공간이 꽤나 익숙하고 자연스러운 듯 KEC지회 조합원 삼촌과 이모 들의 틈에서 뒹굴고 장난치면서 함께 있다. 신사는 구미 신평동에 위치한 KEC지회 사무실이다. 공장 안의 노동조합 사무실이 있지만 새로운 사무실이라는 뜻으로 사용되고 있는 노동자들의 ‘사랑방’이다. 2010년 파업투쟁 후에 현장으로 복귀하지 못한 해고자를 위해서 공장 바깥에도 사무실이 필요했다.

현장으로 복귀하자마자 KEC자본은 조합원들에게 ‘반인권교육’을 실시했다. 당시 반인권교육은 KEC지회뿐 아니라 경주 발레오만도지회를 비롯해서 노조파괴시나리오의 한 축으로 진행되는 프로그램이었다. 조합원 중 공장점거를 하지 않은 사람은 노란색 티셔츠를 입히고, 공장점거를 한 사람은 파란색 티셔츠를 입히고, 마지막까지 공장점거를 한 사람은 오렌지색 티셔츠를 입혀서 7주간 교육을 실시하겠다고 한 것이다. 일터로 돌아간다는 설렘을 느껴볼 새도 없이 조합원들로선 무척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KEC자본이 실시하는 반인권교육은 또다시 전쟁선포가 되었고 조합원들은 매일같이 신사에 모여서 대응 논의를 비롯해서 실전 준비했고, 조합원 한 사람 한 사람이 자본과 일대일 격투기를 해도 끄떡없을 훈련과정이 되고 말았다.

신사는 엄혹한 시절의 조합원들이 맘 편히 모여서 밤샘논의를 하고 치열하게 자본과 경쟁하기 위해서 작전을 짜는 야전사령부의 공간이었다. 그리고 삶의 공동체가 되어준 공간이기도 했다. 구미공단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잠시라도 편히 몸을 누일 수 있도록 허락된 공간이었다. 지금은 아사히비정규직지회의 사무실로도 사용되고 교육공간으로 활용되기도 한다.

 

 

그녀들이 달라졌어요

영근(41세)씨는 고등학교 3학년 취업생으로 KEC에 입사했다. 2010년 파업 전까지만 해도 애사심이 투철했다. 회사 덕분에 가족들이 모두 건강하게 잘 살아갈 수 있다고 철석같이 믿고 따랐던 그녀도 새로운 부서장에게는 도저히 마음이 열리지 않았나보다. 중국에서 왔다는 신임부서장은 현장에서 십년 넘게 일해 온 노동자를 아주 우습게 보는 듯 했다.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라며 인격을 무시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중국노동자와 비교하고 경쟁시키고 막무가내였다. 말이 통하지 않았다.

고3 취업생 때부터 주간근무라고 해도 새벽별 보고 퇴근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던 공장생활이지만 함께 일하는 부서 언니들이 친자매처럼 챙겨주고 아껴주는 통에 별로 불만 없이 힘들어도 참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새파랗게 젊은 부서장이란 놈이 저렇게 안하무인격으로 함부로 사람을 대하는 꼴은 계속 지켜볼 수 없었다. 때마침 노동조합에서 파업을 한다니 부서에서 함께 일하는 동료들과 모두 동참하기로 했다. 열 명의 여성노동자들은 휴가를 얻은 것처럼 즐겁게 파업에 참여했다.

영근씨와 한 부서에서 일했던 미옥씨는 원래부터 노동조합 정신이 투철한 사람은 아니었단다. KEC 근무하는 25년 동안 노동조합 사무실은 딱 세 번 갔다는 그녀에게 노동조합은 좀 귀찮은 존재였다. 노조사무실을 찾아간 건 순전히 노조에서 나오는 경조금을 받기 위해서였다. 노조는 매년 임단협 시기만 되면 습관처럼 파업을 해왔다. 미옥씨는 단 한 번도 참가한 적 없었다. 1999년도에 가장 긴 파업을 할 때가 4일 정도였는데, 파업하는 사람들 눈에 띄는 게 민망스러워 남들보다 훨씬 일찍 일어나 도시락 싸들고 출근을 했었다. 자신뿐 아니라 같은 부서에 일하는 동료들의 도시락까지 준비해서 “모두 파업에 동참하지 말고 일하자”고 독려했던 그녀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2010년 노조파괴시나리오가 본격 가동되면서 KEC지회도 피해갈 수 없었나보다. 부서장과의 갈등과 마찰로 화가 난 그녀들이 가벼운 마음으로 휴가를 즐기듯 파업에 참여하던 어느 날 직장폐쇄와 함께, 용역깡패가 여성기숙사를 들이닥쳐 폭력을 행사하는 사건이 터졌다. 그녀들은 다른 세상을 만나게 된다. ‘은인 같았던 회사가, 평생을 몸 바쳤던 나에게, 우리에게 어떻게 이런 만행을 저지를 수 있지?’ 놀랐을 동생들을 생각하면 회사에 대한 배신과 분노가 끓어올랐다. 노조탄압의 신호탄이 이미 터졌지만 그녀들은 그제야 심상치 않은 사태에 눈을 뜨게 되고 파업투쟁에 열심히 참여하게 된다.

함께 파업에 동참했던 열 명의 부서동료들은 “현장에 들어가도 같이 들어가고 못 들어가도 같이 못 들어가자”고 철석같이 약속하고 파업투쟁에 복무하지만 최고참 언니가 제일 먼저 현장에 복귀해 버린다. 나머지 부서동료들은 끝까지 의리를 지켜 파업을 끝내고 2011년 8월 5일 7주간의 반인권교육인 회사와의 대결에서 승리해 당당하게 현장으로 복귀한다. 그렇게 그녀들은 다른 세상을 만나게 된다.

 

 

투쟁해야만 교섭력 생긴다

KEC자본의 탄압은 끝을 모른다. 복수노조법이 시행되자 이미 준비된 어용노조는 사무실에 간판을 달고 노조체계를 갖춰 교섭권을 빼앗아갔다. 현장으로 복귀한 KEC지회에 끊임없이 양보를 요구해왔다. 2011년 11월에 정리해고 계획을 발표하고 희망퇴직과 상여금 삭감을 요구했다. 큰 투쟁을 경험한 미옥씨는 노조의 주요직책을 제안 받고 고민 끝에 수락한다. 공장경력으로 보면 고참 축에 속하는 그녀는 후배들에게 짐을 안겨주고 싶지 않았다. 자신이 책임져야 할 연배가 되었다는 것을 깨달은 그녀가 부지회장을 수락한 이유였다. 영근씨는 노조는 몰라도 사람이 좋았다. 조합원들과 함께 하는 것이 마냥 좋았다. 노조간부를 제안 받았을 때는 개인시간이 많이 없어지는 게 살짝 고민스럽긴 했지만 누군가는 노조간부를 해야 했고, 다 돌아가면서 하기로 했기 때문에 시원하게 조직부장을 맡았다.

KEC자본은 2012년 2월 24일 조합원 75명에 대해 1차 정리해고를 통보했다. 이번엔 노조는 당황하지 않고 3개월 동안 신나게 투쟁했다. 지난번보다 여유가 생겼다. 투쟁이 마냥 힘겹고 처절하기만 해선 승리할 수 없다는 것을 터득했기에 즐겁고 신나게 투쟁하자고 했다. 그러나 질기게 투쟁하자고 다짐했다. 자본을 어떻게 상대해야 할 지 자신감이 생겼다. 지노위 판결을 하루 앞두고 회사측에서 75명의 정리해고를 철회해 억울한 심정으로 현장에 전원 복귀했다. 문자 한 통으로 전 조직이 순식간에 집합할 수 있을 만큼의 조직력을 갖춰내는 중요한 투쟁이었다.

세월호 학살의 광경에 대한민국의 전 국민이 슬픔에 빠진 날, 눈물도 채 마르지 않은 2014년 4월 17일은 2차 정리해고 통보를 앞둔 날이었다. 전 조합원이 정리해고를 막아내는 싸움을 하겠다고 다짐하고 결의했다. 민주노총과 금속노조 지도부가 내려와서 고작 한다는 말은 교섭으로 협상하자는 것이었다. 조합원들은 반발했다. 회사보다 상급단체 때문에 더 힘들었다. 사측은 싱겁게도 정리해고 통보를 하루 만에 철회했다. 정리해고를 막아내는 건 불가능하다고 입을 모았던 민주노총과 금속노조 관료들은 어디로 사라졌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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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4.17. 'KEC 정리해고 분쇄를 위한 동병상련 봄소풍' [출처: 철폐연대]

 

 

손배가압류가 우릴 갈라놓을 순 없다

 

자본의 민낯을 그대로 보여주는 손배가압류가 KEC지회에도 들어왔다. 2010년 파업투쟁에 공장점거농성으로 막대한 손해를 입혔다는 억지주장을 하면서 KEC자본이 조합원들에게 족쇄를 채웠다. 100억대의 손배가압류는 화해조정으로 30억을 3년에 걸쳐 갚는 것으로 결정했다. 노동기본권이 보장되지 않는 사회에서 노조활동의 결과는 너무나 가혹하기 짝이 없다. 비정한 자본은 법과 제도를 마음껏 휘둘러 노동조합을 고사시키려고 한다. 투쟁으로 돌파하기엔 개별사업장이 감당할 수 없는 손배가압류는 이름만 들어도 공포이고 두려움이다. 결정의 기준은 단 하나였다. 무엇이 조합원을 위하는 길인가? 원칙은 단 하나였다. 쟁의권만큼은 포기할 수 없다. 모든 게 충족된 것은 아니었지만 선택의 폭도 넓지는 않았다. 피해를 최소화하고 KEC지회 공동체가 무너지지 않고 건강하게 유지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했다.

손배가압류 해당 당사자는 비조합원 포함 61명이다. 최저생계비 150만 원을 제외한 나머지 금액을 압류 당한다. 상여금이 있는 달은 50%정도 압류를 당하고, 월급만 나오는 달은 최저임금수준이라서 압류금액이 크진 않다. 그러나 근속년수가 길고, 상대적으로 임금수준이 높은 남성가장들은 50%이상의 압류금액이 치명적이다. 하지만 당사자들은 법적으로 어찌할 수 없는 상황에서 큰 흔들림 없이 받아들였다. 당사자들만의 몫이 아닌 모두의 책임으로 만들어가고 함께 해나가기 위해서 노조는 최선을 다해 조합원들과 간담회로 내용을 공유하고 해결방안을 모색하는 토론을 수개월 동안 벌여왔다.

영근씨는 2010년 공장점거 당시 어머니의 병환으로 들어갈 수 없는 상황이었다. 비당사자인 셈이다. 함께 책임져야 하는 건 당연한 거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얼마나 결의하고 금액을 낼지는 고민이었다. 누군가가 “50만원은 내야 하지 않느냐”고 이야기했을 때 살짝 부담스러운 금액에 고민이 되긴 했지만 결의해야 한다고 마음먹었다. 조합원모임에서 손배가압류 30억을 어떻게 해결할지 의논하면서 각자의 사정과 형편을 허심탄회하게 나눴다. 서로의 사정을 이해하면서도 비당사자 조합원의 자발성을 높여내자고 했다.

KEC지회는 이미 조합비 외에도 각종 법률비용과 신사 운영에 필요한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별도의 CMS회비를 각출하고 있었다. 직급별로 나눠서 적게는 10만 원에서 많게는 20만 원까지 납부하고 있다. 거기에 사측의 압류금액을 결의해야 하는 삼중의 고통을 떠안아야 하는 셈이다. 손해배상 압류 당사자의 고통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노조의 입장에서 조합원들을 설득하고 동의하는 과정은 신중하고 또 무겁다.

영근씨 입장에선 더 큰 금액도 결의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조합원들의 오랜 토론 끝의 결론은 각자가 납부하는 CMS금액으로 자발적으로 납부하자는 거였다. 영근씨는 조합비와 별도로 14만 원 정도를 납부하고 있었다. 거기에 14만원을 손배가압류 비용으로 결정한 것이다. 영근씨에게 적지 않은 금액이지만 흔쾌했다. 더 많은 금액을 결의한 조합원들도 있다. 모두의 마음이 한결같기는 쉽지 않지만 그래도 나보다 더 힘든 누군가가 있기에 티내지 않고 한마음 한뜻을 모아나갔다.

돈으로 노동3권을 무력화시키는 손배가압류는 법과 제도가 철저하게 자본의 편임을 선명하게 드러내준다. 헌법으로 보장된 노동권이 종이에 갇혀 숨 쉬지 못한다는 것을 현장에서 여실히 보여주는 제도이다. 현장 노동자들의 생명력도 결코 무시할 수 없다. 생존하기 위해 버텨내며 발버둥을 쳐왔다. 그러나 개별사업장에 맡겨져야 할 문제는 분명 아니다.

   

지금의 결과를 만들기까지가 너무나 힘겨웠다고 이미옥 부지회장은 말한다. 그러나 공동체는 무너지지 않았다. 자본의 계략은 실패했다. 이 숱한 노조탄압을 막아서는 과정에 KEC지회 조합원은 더욱 단단해지고 성장해왔다. 무엇보다 자신의 현안에만 몰입해 있었다면 이렇게 당찬 결과를 맞기 어려웠을 것이다.

구미 지역의 스타케미칼해복투, 아사히비정규직지회 투쟁에서 보여줬던 KEC지회의 연대투쟁은 민주노조운동의 역사에 큰 교훈이다. 아사히비정규직지회는 KEC지회의 자양분을 받아 생존했다. 연대투쟁은 조합 활동의 당연한 권리라는 것이 이미옥 부지회장과 영근씨의 생각이다. ‘더 못 해줘서 미안할 뿐’이라는 그녀들의 말은 진심이다. 그녀들의 생각이 아니라 KEC지회의 생각이다. 연대는 당연히 내가 해야 할 투쟁이다.

 

 

구미금속노조KEC지회로가는길_손소희-질라라비201704.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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