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수외국인‘보호’소화재참사 7주기를 맞으며, 기억과 추모로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요.

by 철폐연대 posted Feb 10,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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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2월 11일 여수외국인‘보호’소화재참사로 세상을 떠난 故 김광석, 故 김성남, 故 리샤오춘, 故 손관충, 故 양보가, 故 에르킨, 故 이태복, 故 장지궈, 故 진선희, 故 황해파 열 분의 고인들을 생각하며,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입니다.
여수외국인‘보호’소화재참사 7주기를 맞으며, 기억과 추모로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요.

2007년 2월 11일 새벽 여수외국인‘보호’소 3층에서 불길이 치솟았습니다. 그곳에는 체류기간을 초과했다는 이유로, 허가받지 않은 노동을 했다는 이유로 단속되어 강제구금된 수십 명의 이주노동자들이 있었습니다. 불길을 피하려 아우성치는 이주노동자들의 도주를 우려한 '보호'소는 철창문을 열지 않았고, 열 명의 생목숨이 그대로 사라졌습니다. 50여 일의 농성 끝에 목숨값은 돈으로 환산되었고, 십 수 명의 부상자들은 제대로 된 보상과 치료도 받지 못한 채 자신들을 불길 속에 가뒀던 한국에서의 이주노동을 또다시 선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7년이 흘렀습니다.

2014년 2월 10일 여의도 새누리당사 앞에서는 포천아프리카예술박물관에서 예술 활동을 하는 아프리카 출신의 이주노동자들이 기자회견을 열었습니다. 이들은 월 60여 만 원의 임금, 하루 4천 원의 식대를 받으며 일해 왔다고 했습니다. 휴가도 없이, 일상적인 인종비하적 발언을 들으며 수년간 일을 해왔다고 합니다. 바닥에 물이 새고 쥐가 돌아다니는 난방도 되지 않는 기숙사에서, 여권과 통장을 압수당한 채 노예처럼 일을 해왔다고 했습니다. 기자회견에서 폭로된 충격적인 사실들은 미디어를 통해 금세 퍼져나갔고 수많은 시민들이 분노를 표했습니다.

이주노동자의 인권과 노동권을 외치는 목소리는 이주노동자들이 한국사회로 진입하기 시작한 이십오 년 전과 별로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산업연수생제도에서 고용허가제로 제도가 바뀌었지만, 이주노동을 더럽고 어렵고 힘든 현장의 일회성 보완재 정도로 치부하는 한국사회의 인식은 그대로입니다. 물론 이주노동자의 노동력과 노동권을 고용주의 생사여탈권 아래 두고 관리하고 통제하는 제도 자체의 문제 역시 심각합니다.

무소불위의 출입국관리법은 주권과 인권을 정면 대립시키며, 이주노동자에 대한 살인단속과 강제구금을 법의 이름으로 합리화합니다. 나아가 이주민은 물론 모든 국민에게까지 개인정보수집과 감시‧통제를 확대하려는 출입국관리법 개악이 기획되고 있습니다. 한편, 부당한 현실을 바꾸려 용기를 낸 이주노동자들의 노동조합 설립신고는 노동부에 의해 반려되었고, 법정으로 간 이주노동자들의 단결권은 올해로 7년째 침묵하는 대법원에 의해 묶여 있습니다.

하지만 아주 조용히 여수외국인‘보호’소화재참사 7주기를 맞으며... 법제도와 권력기관의 횡포만큼이나 아프게 확인하는 것은, 어제의 야만을 잊고 오늘의 새로운 야만에 새롭게 분노하는 우리들의 모습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더불어 살아가는 삶의 의미를 깨닫기도 전에 뿌리내린 ‘다문화’의 홍수 속에서, ‘노동자는 하나다’ 구호 뒤에 가려진 공고한 위계에 기대어 살아가면서, 우리는 은연중에 차별과 불평등을 자연스럽게 호흡해온 건 아닐까도 싶어집니다.

실은 이런 글을 쓰는 것도 무척 부끄럽고 새삼스럽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희미해지는 기억을 되살리며, 우리마저 잊는다면 없었던 일이 될 지도 모르는 억울한 죽음들을 추모하며, 한 번 더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이주노동자들의’ 노동권과 인권이라는 말을 따로 할 필요가 없는 언젠가를 꿈꾸면서 우리, 기억과 추모로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요.

2007년 2월 11일 여수외국인‘보호’소화재참사로 세상을 떠난 故 김광석, 故 김성남, 故 리샤오춘, 故 손관충, 故 양보가, 故 에르킨, 故 이태복, 故 장지궈, 故 진선희, 故 황해파 열 분의 고인들을 생각하며,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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