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을 만드는 사람들의 이름 - 엔딩크레딧」 출범

by 철폐연대 posted Sep 04,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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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정규직 백화점’ 방송 제작 현장의 비정상, 방송을 만드는 우리가 끝장내자!

- 「방송을 만드는 사람들의 이름, 엔딩크레딧」 출범에 부쳐

 

‘방송 바닥은 원래 그래’라는 말은 지난 수십 년간 방송 프로그램 제작 현장의 불법과 비정상을 곪게 만드는 주문이었다. 지난 1991년 외주제작 편성비율 의무 도입 이후 방송사들은 ‘유연한 고용 구조’를 고착시켰고 그 결과 2023년 오늘 지상파 방송사 입사자의 60%가 비정규직이다. ‘프리랜서’, ‘파견’, ‘용역도급’, ‘임시사역’, ‘기간제’ 등 형태도 다양하다. 그야말로 ‘비정규직 백화점’이다.

 

하나의 방송 프로그램을 만드는 사람은 누구인가? 소수의 정규직이 아니다. 비록 화려한 조명을 받지 못하지만 카메라 뒤에서 묵묵히 현장을 지키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이다. 이들의 땀과 희생이 없이 방송 산업은 성장할 수 없었다. 그런데도 이들의 권리는 수십 년간 철저히 박탈당했다.

10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생방송을 위해 출근했지만 말 한 마디에 해고당한 뒤 퇴직금조차 요구할 수 없었다. 밤샘 노동을 밥먹듯이 해도 수 년째 월급은 최저임금에도 못 미쳤다. ‘프리랜서’라는 이름 때문이다. 처음부터 2년만 일하고 방송국을 떠나는 것이 당연한 일인 줄 알았다. 방송사가 아닌 ‘파견 업체’와 계약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들이 밀려난 자리는 또 다른 비정규직이 대신 메웠다.

 

오늘 우리는 이같은 비정상과 불합리함을 더 이상은 그냥 두지 않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모아 방송 노동자들의 권리찾기를 위한 새로운 여정을 시작한다.

지난 2017년 11월 노동조합 바깥 노동자들의 목소리를 직접 듣기 위해 출범했던 ‘직장갑질119’의 업종별 모임인 ‘방송계갑질119’의 활동은 ‘방송 스태프지부’ 결성으로 이어졌다. 2021년 2월 CJB청주방송 故 이재학 PD의 사망 이후 결성된 대책위원회의 끈질긴 투쟁은 여전히 바뀐 것이 없는 방송 바닥에서 이대로 가만 있어선 안 된다고 각성시키는 불씨가 되었다. 이후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다수의 방송 현장 ‘무늬만 프리랜서’들이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소중한 법률 투쟁의 성과들도 축적되었다.

그러나 노동자들의 선명한 저항 이후 사용자 방송사들의 비정상적인 맞대응도 뚜렷해졌다. 일터로 돌아간 당사자들의 고립, 정규직의 연대 부재 등은 개별 사건의 성과들을 파편화하고 노동자들의 더 큰 연대와 저항을 가로막는 걸림돌이 되었다.

 

‘방송을 만드는 사람들의 이름, 엔딩크레딧’은 이처럼 방송 제작 현장을 바꾸고자 부단히 맞서왔던 방송 노동자들, 법률가들, 활동가들이 지난 수년간‘다른 방식의 투쟁’이 필요하다는 고민을 거듭한 끝에 결성되었다. 법률가, 활동가가 이끄는 투쟁이 아닌 방송 제작 현장에 몸담고 있는, 그래서 스스로 일터를 변화시켜야 할 주체인 ‘당사자’들이 주축이 된 활동을 핵심 목표로 우선 다음과 같은 활동을 시작한다.

 

첫째, 개별 법률 투쟁의 성과에 매몰되지 않는 더 폭넓은 대응을 시도한다.

최근 수년간 ‘무늬만 프리랜서들’의 노동자성 인정 선례들은 그 자체로 매우 소중하며 그 발자국을 따라 또 다른 저항이 이어졌다. 다만‘1인의 법률 다툼’을 넘어 다수의 노동자들이 선제적으로 문제를 제기하는 방식으로의 전환이 절실하다. 전국의 방송 비정규직들이 뭉친 집단 법률 대응에 나서는 동시에 관련 현안에 대한 법 제도 개선 요구, 현장 간담회 개최 등 종합적인 대응을 모색한다. 그 중심에서 현장의 노동자들은 단순히 법률 대응의 ‘당사자’가 아닌 투쟁의 ‘주체’로서 함께 할 것이다.

 

둘째, 전국에 흩어져 일하는 방송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연결고리’를 구축한다. 그동안 각자 맡은 일과 노동조건이 다르고 한 자리에 모이기 어렵다는 사실은 각자가 처한 현실을 ‘개인의 문제’로 치부하게 만드는 이유가 되었다.

‘엔딩크레딧’은 각자가 겪고 있는 문제가 방송업종 전체의 문제이며 ‘우리가 방송을 만드는 주류’라는 인식을 확산시키고 이를 토대로 개인의 이익을 넘어 방송제작 현장 구조의 모순을 함께 바꿔나가고자 한다. 주류 언론이 외면해온 언론보도 활동을 통해 엔딩크레딧의 존재를 알리고, 현장에서 이미 문제에 맞서 싸운 당사자들과 함께 전국의 방송 노동자들과 직접 만나 경험을 공유하는 기회를 마련하고자 한다.

 

셋째, 정규직 비정규직간, 직종간 벽을 넘어선 더 큰 연대를 모색한다.

수십 년간 사용자가 견고하게 구축한 비정규직 백화점에서 노동은 분절되고 고용형태에 따라 노동조건의 격차는 점점 더 벌어졌다. 그 속에서 노동자들은 각자의 이해에 얽매여 반목하고 뭉치지 못했다.

사용자 방송국은 긴 세월 비정규직을 착취함으로써 막대한 이윤을 축적했지만 이제 ‘시장의 위기’를 언급하며 ‘비정규직부터 구조조정’을 예고하고 있다. 이는 비단 비정규직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다. 지금이야말로 정규직과 비정규직, 직종 대 직종간 경계를 넘어선 연대가 시급하다. 이를 위해‘엔딩크레딧’은 각 집단간 접점에서 발생하는 현안들에 대해 문제를 지적하고 이를 개선하기 위한 구체적인 활동들을 이어가고자 한다.

 

오늘의 시작은 미약할 수 있다. 하지만 방송 제작 현장의 불법과 부당한 처우, 차별의 ‘엔딩’을 위해 내딛는 첫 걸음을 통해 새로운 길이 만들어질 것이다. 그 길 위에서 방송을 만드는 사람들, 방송 제작 현장의 ‘주류’인 우리 방송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손을 맞잡고 함께 걸어갈 이들을 기다린다.

 

2023년 9월 1일

방송을 만드는 사람들의 이름 <엔딩크레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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