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개의 기후정의선언] 기후정의운동과 불안정노동철폐운동이 만나기 위해

by 철폐연대 posted Dec 18,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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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개의 기후정의선언]

 

기후정의운동과 불안정노동철폐운동이 만나기 위해

 

 

바야흐로 기후재앙의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더더욱 빈번해지고 파괴적인 모습으로 나타나는 생태계 붕괴, 자연재해, 감염병 재난사태 등은 급격한 기후변화가 아니고서야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종래의 ‘환경보호’ 캠페인 수준으로는 기후비상사태를 해결할 수 없다는 점도 날이 갈수록 자명해지고 있다. 이렇듯 기후위기는 환경문제를 넘어 전지구적인 사회적‧경제적‧정치적 위기의 문제로 인식되고 있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제안들도 무성하다.

 

그러나 오늘날 기후위기를 가속화한 주범인 기업 권력에 대한 적극적인 통제, 나아가 공공적인 재편을 말하는 목소리는 여전히 미약하다.

자본의 무한성장, 이윤추구 시스템을 그대로 둔 채 우리는 다른 미래를 그릴 수 있을까?

자연과 인간에 대한 끝없는 착취와 억압, 수탈을 통해 굴러가는 자본주의체제 아래 가장 고통받는 당사자 중 하나인 불안정노동자들이 기후정의운동의 주체로 서야 하는 이유이다.

 

 

‘일자리 지키기’를 넘어

 

정부와 자본은 지금의 위기를 기회로 전환하는 데 박차를 가하고 있다. 화석연료 산업을 그린‧디지털 산업으로 전환하겠다는 야심찬 프로젝트가 탄소배출량이 많은 산업을 중심으로 진행 중이다. 2030년까지 순차 폐지가 예고된 석탄화력발전소가 그렇고, 2040년까지 단종, 퇴출 수순을 밟게 될 내연기관 자동차도 마찬가지다. 국내 산업부문 탄소배출량의 76%를 차지하는 철강, 석유화학, 정유, 시멘트 산업 역시 연료대체, 설비전환 등 직‧간접적인 산업전환의 영향이 불가피하다.

 

그런데 정부와 자본이 말하는 산업전환이란 새로운 이윤창출의 수단으로 제기되는 신산업 진출 프로젝트에 다름 아니다. 자본주의 성장시스템을 탈피하지 못한 산업전환은 필연적으로 인적구조조정을 수반한다. 이 때 노동조합은 폐쇄되는 공장, 사라지는 일자리에 대한 대응에 치중할 수밖에 없다. 탈탄소 구조조정 과정에서 노동자들의 일자리 지키기는 산업전환에 따른 비용을 불안정노동자들에게 전가하는 자본과 갈등하면서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요구다. 사라지는 일자리를 가까스로 지켜내는 것을 넘어 기후정의 실현을 위한 노동자의 일자리 요구는 어때야 할지 근본적인 성찰이 필요하다. 가령, 이윤을 위한 일자리가 아니라 사회적으로 유용하고 생태회복에 기여하는 일자리로의 전환은 어떻게 가능한지 말이다. 일자리 분배 및 유지라는 노동조합 고유의 목표를 뛰어넘어 새롭게 생겨날 일자리의 성격을 논의하고 설계하는 과정 전반에 노동자들의 목소리가 힘을 발휘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특히 내연기관 자동차를 빼놓고서는 이 문제를 말할 수 없다. 화석연료를 태워 구동하는 내연기관차는 3만여 개의 부품으로 구성되지만, 전기차는 배터리가 엔진 부품을 대체해 내연기관차 기존 부품의 30%가량은 더 이상 쓸모없게 된다. 전기차 전환에 따른 완성차 하청업체, 부품사 노동자들의 대대적인 일자리 상실은 피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이런 상황에서 완성차 대기업‧정규직 중심의 고용유지 전략은 자동차산업 불안정노동자들의 생존을 담보할 수 없을 것이다. 자본의 꽁무니만 좇아서는 완성차 대기업, 부품사, 영세하청으로 나뉘어 각자 공장에서 살아남기, 일자리 지키기에 급급한 상황을 면치 못하게 된다. 그렇기에 불안정노동 문제를 포괄하는 노동의 대응이 자동차 산업의 변화에 대응하는 데 반드시 필요하다.

 

자동차산업, 발전산업을 막론하고, 화석연료를 대체하는 에너지의 등장과 기술 진보가 오히려 해당 산업 노동자들의 삶을 옥죄고 있는 형국이다. 자본은 그중에서도 산업생태계의 주변부에 자리한 불안정노동자들을 가장 먼저 공격하고 있다. 이렇게 시차를 두고 벌어지는 구조조정 꼼수를 효과적으로 막아낼 수 있는 수단은 결국 공동의 요구와 투쟁뿐이다.

 

 

속도를 줄이고 혹사를 멈추기

 

기후재난은 건설, 운송, 배달, 환경미화, 전기통신 등 주로 옥외에서 일하는 이동노동자들에게도 치명적인 영향을 초래한다. 화석연료를 태워 막대한 이윤을 거둬들이는 자본은 노동자들의 건강과 안전이 위험 상황에 노출됐을 때조차 이들의 보호는커녕 파괴적인 생산체제를 지속할 뿐이다.

 

생활물류산업은 코로나19라는 기후재난을 틈타 일약 언택트 시장의 강자로 떠올랐다. 생활물류산업에서 일하는 노동자들 역시 대부분 이동노동을 하고 있는데다가, 다단계 하청 또는 특수고용‧플랫폼 등 고용구조의 왜곡도 심각하다. 물류센터뿐만 아니라 라이더, 택배기사, 대리운전기사 등 이동노동 종사자들의 상당수는 24시간 노동체제에 결박돼 있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해당 업종에서 자본이 보다 많은 이윤을 위해 불안정노동자들을 분/초 단위로 쪼개 통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동노동을 하는 이들의 건강하고 존엄한 노동을 위해서는 극단적인 성과 경쟁을 부추기는 시스템부터 바꿔야 한다. 오직 대량생산, 대량소비를 위해 고안된 물량과 임금(건당수수료)의 연계를 끊어내고 일의 속도를 적극적으로 늦춰야 한다.

 

건설산업은 또 어떤가. 원청 건설사의 공기단축 압박, 하청 건설사의 원가절감 압력이라는 이중의 착취구조가 만연해 폭염기에 쓰러지거나 장마철 무리한 작업강행 지시로 감전사하는 노동자들이 속출하고 있다. 이처럼 이윤 논리에 포획된 건설사 원하청 자본이 노동자들을 일용직‧계약직으로 부려 먹으니 ‘빨리빨리 속도전’도 ‘날림공사’도 피할 수 없게 된다.

토목공사 과정에서 나무를 베고 흙과 바위를 캐내는 것뿐만 아니라, 건물을 짓고 부수는 과정, 심지어 건축자재 폐기물을 처리하는 과정에서도 어마어마한 탄소배출이 이뤄진다. 건축 과정에서 재생에너지 사용빈도를 획기적으로 높이는 한편, 건물의 에너지 효율을 높이는 공법을 채택하는 등 에너지와 자원의 과도한 사용을 ‘계획적으로’ 줄이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무분별한 개발과 확장 중심의 도시 계획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안은 ‘노른자 땅’을 노리는 건설 자본의 쟁탈전을 종식하는 것뿐이다.

 

 

위험은 당연한 게 아니다

 

기후변화로 잦아진 자연재해와 감염병재난 상황은 공중보건과 안전을 심각하게 위협하고 있다. 특히 코로나19 사태의 발발은 기후위기의 심각성을 드러내는 강력한 징후였다. 우리는 이 같은 재난 상황에서 공동체 구성원들의 생명과 신체ㆍ정신적 건강을 유지하는 데 필수적인 의료와 돌봄 역량이 매우 취약하다는 점도 비로소 실감하게 되었다. 그러나 보건의료, 돌봄 노동자를 비롯한 필수노동자의 희생과 헌신은 당연한 의무로 간주되고, 그들의 권리는 나중으로 밀려나는 모습 또한 우리는 목격했다.

 

필수노동자들은 위기상황이 생길 때마다 위험을 무릅쓰고 일해야 한다. 지진이나 산불, 집중호우, 폭설 같은 자연재해나 코로나19 같은 감염병재난이 대표적이다. 이런 상황에서 필수노동자들은 공동체의 안전체계가 붕괴되는 것을 막기 위해 통상 일터의 재난위험보다 훨씬 더 위험한 상황을 감수해야만 했다.

기후재난 현장을 최일선에서 맞닥뜨리는 필수노동자들에게도 건강하고 안전하게 일할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 위험이 당연한 것으로 간주되지 않으려면 노동자의 알 권리, 거부할 권리, 참여할 권리가 지금보다 더욱 확대돼야 한다. 모두에게 안전하고 평등한 ‘보편적 공공서비스’의 실현은 의료와 돌봄 등 사회적으로 필수적인 노동에서 시장적 접근을 배제할 때 비로소 가능할 것이다.

 

불안정노동자들에게 있어 ‘정의로운 전환’은 곧 일터와 사회에서 기본권이 보장되는 가운데 화석연료 없이도 살아갈 수 있는 공공 중심의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다. 이는 정부와 기업이 그토록 강조하는 ‘공정한 전환’ 계획으로는 실현할 수 없다.

불안정노동자들에게 지금보다 더 많은 권리가 보장될 때, 노동자들은 불건강하고 위험한 일터 환경에 대해 더 이상 침묵하지 않을 것이다. 제대로 된 안전대책 마련, 과도한 노동시간의 단축, 적정인력 충원 요구 등 기업의 이윤보다 노동자의 건강과 안전을 중심에 둔 정책이 필요하다고 목소리 낼 것이다. 이 같은 불안정노동자들의 노동권, 건강권 보장 요구는 이윤추구에 매몰된 자본과 끊임없이 불화할 수밖에 없다.

 

 

체제전환을 위한 불안정노동자들의 결집과 투쟁을 시작하자

 

지금처럼 기후위기 대응을 탈탄소 구조조정에 착수한 일부 업종과 직종에 한정한다면 착취와 추출 중심의 경제생태계를 사회 전반의 필요와 지속가능성을 중심으로 재편해 나간다는 도전적인 과제를 수행할 역량은 결코 준비할 수 없다.

체제전환이라는 담대한 전망은 결국 내가 일하는 현장의 구체적인 과제와 만나야 한다. 노동자들의 보편적 권리 확장이 어떻게 체제전환과 연결될 수 있는지 더 넓은 시야 속에서 더 많이 상상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실천은 불안정노동자들이 기후정의 관점에서 정의로운 전환의 주체로 서는 과정이 될 것이다. 산업전환에 능동적으로 개입하고 참여하는 권리주체로서 불안정노동자들의 요구와 투쟁을 아래로부터 만들어가자.

 

 

2023년 12월 16일

전국불안정노동철폐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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