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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불안정노동철폐연대

투쟁/입장



정부 기금을 받기 위해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내세우는 행위는 당장 중단되어야 한다. 비정규직을 조직한다는 의미는 함께 투쟁하겠다는 결의를 밝히는 것이다. 비정규직을 조직한다는 것은 신자유주의적 노동유연화 정책에 맞서 싸우겠다는 결의를 밝히는 것이다.비정규직을 조직하는 힘은 ‘정부에 통제당하는 돈’으로부터가 아니라 ‘연대’의 결의에서 나오는 것이다



  민주노총 대의원대회에 재정혁신 방안이 안건으로 상정되었다. 그 내용의 일부로 “비정규 대량해고와 차별 확산에 대응하기 위해, 비정규`실업 노동자의 상담 및 조직화를 위한 사업은 고용보험 등 정부예산을 사용한다”고 되어 있다. 이미 지난 번 대의원대회에 제출되었다가 대의원대회의 유회로 다뤄지지 못하고, 이번에 다시 1호 안건으로 상정된 것이다. 이러한 재정혁신 방안을 보면서 우리는 참담함을 금할 수 없다.
  정부 기금을 받는 목적이 정말로 ‘비정규·실업 노동자의 상담 및 지원’인가? 민주노총 재정혁신안의 내용 중 하나는 부족한 예산을 어떻게 확충할 것인가에 맞춰져 있다. 다시 말해 목적은 ‘정부의 예산을 받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비목을 무엇으로 하든 민주노총의 전체 예산 상에서는 똑같은 돈이다. 다시 말해 정부의 기금을 받지 않으면 비정규직·실업 노동자 조직화는 민주노총의 전체 예산을 사용해야 할 것이고, 정부의 기금을 받으면 민주노총의 예산에서 비정규직 상담 및 조직화 지원에 대한 비용은 줄어들고 그 예산항목을 다른 곳으로 배치하게 될 것이다.
  또한 민주노총이 정말로 비정규직 조직화 문제를 가장 중요한 조직과제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면 당연히 민주노총의 시스템의 변화만이 아니라 예산 상에도 그 내용이 반영되어야 한다. 즉 민주노총의 전체 예산 중 중요한 부분이 비정규직노동자의 조직화여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비정규직 조직화의 예산을, 실현될지도 알 수 없고, 철저하게 통제를 받을 수밖에 없는 정부 기금으로 특정하고, 민주노총의 전체 예상 항목의 핵심으로 다루지 않는 것은 사실상 비정규직 조직화를 민주노총이 중요한 과제로 여기지 않고 있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비정규·실업 노동자의 상담 및 지원’이라고 특정한 것은 마치 이 사업이 매우 중요해서 그런 것처럼 여겨지게 하지만 실제로는 눈가리고 아웅하는 것이다. 우리는 민주노총이 사업예산에서 부족한 부분을 정부 기금을 받아서 사용하자고 이야기하면 그에 대한 반발이 많을 것이라고 예상했기 때문에 ‘비정규·실업 노동자 사업’을 빌미로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비정규노동자들의 투쟁과 조직에 대한 지원을 모든 이들이 동의하고 있다는 점을 이용하여 민주노총이 정부 기금을 받고자 하는 것은 치열하게 투쟁하는 비정규노동자들에게는 대단히 모욕적인 행위이다.

  설령 정부 기금을 받는 안이 정말로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조직하고자 하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이는 정말로 문제가 많은 발상이다. 비정규직이 양산되는 것은 바로 정부와 자본의 신자유주의 전략 때문이며, 정부는 비정규법안을 만들어서 비정규노동자들을 해고하고 외주화하고 있다. 그 때문에 길거리로 내몰린 비정규노동자들의 피눈물이 아직도 걸거리에 쏟아져내리는데, 정부의 재정 지원을 받아서 비정규노동자들을 조직하고 상담하겠다고 이야기한다. 적들의 돈으로 적들의 심장에 꽂을 칼을 만들 수는 없는 법이다.
  비정규노동자들이 조직되지 않는 이유는 돈 때문이 아니다. 조직을 해서 투쟁을 하면 희망이 있다고 생각해야 조직하고 투쟁하는 것이다. 그런데 아직은 민주노조운동이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그런 희망이 되지 못하고 있다. 민주노총이 정부의 신자유주의적 유연화 정책에 치열하게 맞서 싸우면서 비정규직이라는 고용형태를 없애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지 못한 것의 반증이다. 그리고 민주노총의 전체 구조가 비정규직 노동자를 조직하는 방식으로 만들어지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자신을 혁신하지 못한 민주노총이 비정규직을 양산하는 정부의 돈을 가져다 쓴다고 한다면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과연 민주노총을 믿고 스스로 조직하여 정부와 비타협적인 투쟁을 벌일 수 있겠는가?
  혹시 누군가는 이런 태도가 도덕적 결벽주의라고 이야기할 지도 모른다. 이미 고용기금 등은 한국노총과 일부 시민단체등이 나쁜 방식으로 쓰는데 우리가 제대로 쓰면 되지 뭐가 문제냐고 이야기할 수도 있다. 하지만 왜 자본과 정권의 입맛에 맞는 곳만이 이돈을 쓰고 있는지를 생각해야 한다. 이 돈은 철저하게 정부에 의해 쓰임새가 통제되는 돈이기 때문이다. 원칙적인 입장에 서지 않는 이상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으로 정권과 자본에 의해 활용당하는 것은 시간 문제이다.  

  이러한 방식으로는 조직화도 불가능하다. 민주노총 대의원대회 안건으로 올라온, 정부 기금을 활용한 비정규`실업 노동자 조직화는 실현 불가능한 발상이다. 정부의 기금으로는 절대로 조직화에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경험으로 알고 있다. 경제위기 이후 실업노동자들이 급격하게 늘었을 때 민주노총은 실업노동자들을 조직하기 위해서 고용안정센터를 건설하고 국민들의 모금으로 이루어진 정부 기금을 받아서 운영했다. 그러나 그 기금을 틀어쥐고 있는 근로복지공단은 실업노동자 조직화 계획에 대해 재정 지원을 거부하고, 말 그대로 정부가 해야 할 일을 대행해야 하는 일에만 기금을 사용하도록 종용해왔다. 그 결과 실업노동자 조직화는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정부의 고용보험 등의 기금은 정부가 관리 운영한다. 정부의 통제를 받는 기금이라는 말이다. 그러하기에 이 기금은 조직화와 투쟁에 대한 지원으로는 사용할 수 없을 것이고, 고용문제에 대한 상담이나 직업훈련 등 정부가 해야 할 일을 오히려 노동조합이 대행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비정규노동자들의 투쟁과 조직화를 통제하는 기능을 하게 될 것이다. 노동자들이 투쟁하려고 하는 순간 정부는 재정지원 중단 등을 무기로 내세울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이미 광주시청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 과정에서 광주시청이 민주노총에게 내주었던 건물사용료를 다시 환수하려고 했던 것에서 확인할 수 있는 바이다. 당장에 재정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우리가 손쉽게 정부의 기금을 받는다면 그만큼 조직화와 투쟁에서 우리가 맞서 싸워야 할 정부에 거꾸로 통제를 당하게 될 것이다.

  비정규노동자들은 시혜를 바라지 않는다. 비정규노동자들은 그동안 스스로의 노력으로 자신을 조직해왔고, 어려운 상황에서도 지치지 않고 투쟁해왔다. 그러하기에 정부의 기금을 받기 위해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내세우는 행위는 당장 중단되어야 한다. 비정규직을 조직한다는 의미는 무엇인가? 그것은 함께 투쟁하겠다는 결의를 밝히는 것이다. 비정규직을 조직한다는 것은 신자유주의적 노동유연화 정책에 맞서 싸우겠다는 결의를 밝히는 것이다. 이런 결의를 전제하지 않고 정부의 돈을 받아서 쉽게 ‘조직과 상담’을 하겠다는 발상은 민주노총이 얼마나 비정규직을 대상화하고 ‘조직률’ 이상의 문제의식을 갖고 있지 않은지를 보여주는 것일 뿐이다.
  비정규직 조직화가 너무나 중요한데, 돈이 없어서 문제라면 우리 노동자들 스스로가 최선을 다해서 기금을 만들어야 한다. 비정규직과 함께 투쟁하면서 재정갹출과 연대투쟁의 결의를 밝혀야 한다. 그런 결의에 입각한 비정규 조직화만이 의미를 갖는다. 그것이 정도(正道)이다.


                                2008년 1월 24일
                         전국불안정노동철폐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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