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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터에서 지역으로, 새로운 현장이야기

이백윤 (철폐연대 회원)

 

 

공장노동자로 살기 시작하면서부터 줄곧 괴롭히던 왼쪽 어깨 통증이 부쩍 심해졌다. 의자에 앉을 때면 시큰거려서 옆 의자에 왼팔을 걸치고 있거나 연신 주물러야 했고, 일할 때는 왼팔에 힘이 들어가질 않아서 오른팔에 더 힘을 주어야 했다. 자연스레 양쪽 어깨가 다 망가져갔다. 칫솔질 할 때면 신음소리가 일상이 되었고 한쪽 손으로 칫솔질을 오래 할 수가 없어서 칫솔은 양손을 번갈아 이동해야 했다. ‘더 이상은 안 되겠다 쉬자!’고 마음먹고 산재처리를 했다. 2년 전 일이었다.

주변 동지들은 엎어진 김에 쉬어가라 했다. 나도 바쁘다는 핑계로 그동안 소원했던 사람들과 회포도 풀고, 여행도 다니면서 데코레이션용으로 진열되어 있던 책도 좀 꺼내보고, 하루 종일 씻지도 않고 통닭을 뜯으며 미드 몰아보기 하는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늘상 시간에 쫓기던 일상에서 벗어나 모처럼 얻은 여유를 만끽하고 싶었다.

 

그런데 산재 요양기간이 시작되자마자 최순실사태가 터졌다. 나는 그 상황을 외면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나 없다고 세상이 안 돌아가는 것도 아니고, 그런 세상이면 멈춰버리는 게 맞다 싶었고, 무엇보다 나는 환자였다. 하지만 온 세상이 요동치고 있는데 방구석에 있기란 쉽지 않았다. 어디서 들었는지 “산재라며? 얘기 좀 하자”며 피하고 싶은 전화가 자주 걸려 왔다. 군대얘기 나오면 말수가 줄어들고 조용히 술잔을 드는 군대 안 갔다 온 친구들처럼, 나중에 언젠가 촛불항쟁 얘기에 고개를 숙이는 내 모습이 상상되기도 했다. 무엇보다 돌아가신 아버지가 술만 드시면 삼형제를 앉혀놓고 87년 6월항쟁 때 명동에서 시위대에 삼양라면 두 박스를 주고 오셨다며 자랑하시던 그 모습, 수백 번을 들었던 그 얘기가 계속 떠올랐다.

결국 산재환자임에도 ‘치료’는 안중에 없이 거리를 쏘다니게 되었다. 진보변혁정당 활동가들이 모여서 매일 충남 전역을 돌며 시국연설회를 했다. 집회를 준비하고 회의하고 마이크를 잡는 분주한 일상이 여유로운 삶을 대신했다.

   

그리고 내가 살고 있는 서산에서 활동하기 시작했다. 충남은 국정농단 사태가 정점에 오른 시점에서도 유일하게 박근혜 지지율이 두 자릿수를 기록할 만큼 은근 보수가 많은 지역, 지역운동도 뭔가 중심에너지가 없는 것 같은 그런 지역이었다. 전국 시도별 집중집회에 몇 천 명, 몇 만 명을 찍는 상황에서도 충남은 시국대회 참여자 천 명을 넘기기 어려웠는데, 인구 17만 소도시인 서산에서 열린 촛불집회에는 천 명이 넘게 참여했다. 지역의 활동가들이 세월호참사 이후 3년 동안 매주 촛불을 들었던 힘, 소수라도 누군가 목소리를 내고 있다는 자체가 갖는 힘이 근원이지 않을까 싶었다.

그런 서산에서 시민사회단체와 노동조합 활동가들과 함께 움직였다. 박근혜 탄핵안 상정될 즈음부터 세월호참사 3주기까지 아홉 번의 촛불집회를 열었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더 나은 세상을 바라는 염원을 담아서 문화제, 가요제, 세월호 영화제 등을 준비했고 매주 힘들지만 보람 있는 시간을 보냈다. 물론 난관도 있었다. 자유한국당 출신 서산시장은 타 단체와의 형평성을 이유로 수백 장의 세월호 추모 만장을 철거했고, 우리는 낮에 철거한 만장을 되찾아와 그날 밤 다시 붙이는 야밤의 전쟁을 추모제 전날까지 연일 반복했다.

 

고민했다. 다시 현장에 돌아가면 노동과 휴식 이외에 내 삶, 내 운동이 자리 잡을 곳은 없어질 것이고, 그렇다고 회사를 관두자니 남아있는 조합원들 볼 낯이 없고 막막한 생계도 문제가 될 것이 뻔했다. 고민 끝에 회사를 그만두었다. 일할 때는 내가 이러다 일찍 죽겠다 싶었고, 아무런 대책 없이 관두고 나니 이러다 굶어죽는 게 아닐까 걱정되었다. 결국 저지르고 나면 그다음 길이 열리게 되는 것일까?

동료들 두고 퇴사한 내가 뭐가 이쁘다고 조합원들이 생계를 걱정해주었고, 당 상근활동을 하면서 입에 풀칠은 하게 되었다. 당장의 경제적인 압박은 없지만 오히려 ‘이제 무엇을 할 것인가’가 더 큰 고민이 되었다. 한편 13년을 몸담았던 현장을 관뒀으니 그렇게 중대한 결심을 한 만큼 뭔가 이뤄야한다는 강박이 자리 잡았다.

 

고민의 시간은 길지 않았다. 또 할 일이 생겼기 때문이다. 산업폐기물매립장, 생활쓰레기소각장, 코크스발전소……. 그동안 지역에서 몸살을 앓고 있던 유해환경시설 문제들이 수면 위로 불거졌고, 주민대책위와 시민단체들이 모여서 ‘환경파괴시설 전면백지화를 요구하는 서산시민사회연대’라는 긴 이름의 대책기구가 만들어졌다. 할 일이 없어 보여서 그랬는지 지역동지들이 나에게 집행위원장을 맡겨버렸고, 나는 계속 분주해졌고, 가끔은 현장에서 일하는 게 차라리 낫겠다 싶을 만큼 바빴다. 집회와 기자회견, 회의 준비로 한 주는 하루처럼 흘러가고, 걸어서 환경부까지 갔다가 비닐 덮고 노숙도 했고, 서산시 화학물질 안전관리 조례를 만들고 제대로 굴러가도록 밀고 있다.

   

어려움이 많다. 욕심은 많은데 아는 게 없고 시간이 필요했다. “소각장 반대해서 싸우는 데 동참 안 하믄 다 빨갱이들입니다!”라며 발언하시는 나이 드신 주민분을 어색하지 않게 느끼는 데까지는 시간이 필요했고, 화력발전소와 석유화학단지가 둘러싸고 있는 서산의 최대이슈인 환경 분야에 정작 집행위원장인 나는 생소한 초년생이었다. 삶의 조건을 개선해야 한다고 부르짖는 데에는 익숙한 나였지만, 정작 시민이자 주민으로서 내 삶의 윤택함과 인간다운 생활에는 관심 밖이었던 나의 마인드에 변화가 필요했다. 지역민들에게 어떤 고민과 욕구가 있는지 체화되어 있지 않았던 무지함을 극복하는데 시간과 노력이 투여되고 있다.

또 서산시 예산이 어디에 어떻게 쓰이는지, 지자체와 정부기관은 어떤 권한을 갖고 있는지, 사람을 알아가고 지역에 어디가 맛집인지도 알아가고 있다. 요구되는 만큼을 수행하기에 턱없이 부족했던 시간이 지나가고 있고, 조금씩 지역에 녹아들고 있다는 생각도 갖게 된다.

요즘은 조금 배가 불렀나 보다. 밤 11시 이후에는 일하지 않겠다는 스스로와의 약속도 세웠다. 밤늦게까지 노트북 앞에서 작업하다 노트북과 내가 구분되지 않는 몽롱한 상태가 되어버리지는 않아야겠다는 다짐이다. 야밤에 전화를 끼고 사는 습관을 버리려 한다. 백수라서 때로는 급해서 나도 상대방도 거리낌없이 오밤중에 전화하지 않도록, 일과 휴식시간을 구분해 보려 한다.

 

반드시 노동조합이 아니더라도 지역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함께 모일 수 있는 시도를 해보고 싶어서 만들어진 ‘행복한서산을꿈꾸는노동자모임’이 이제 3년차가 되었다. 누구보다 서로에게 큰 힘이 되어주고 있는 이런 관계가 좋다. 더 많은 사람이 더 발전적으로 함께할 수 있도록, 그래서 경쟁과 효율 대신 공존과 연대가 운영원리가 되는 그런 지역공동체를 만들어보는 것, 회사를 관두고 나온 나에게 스스로 늘상 하는 다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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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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