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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쟁/이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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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아가는 이야기

 

그럭저럭 살고 있습니다

 

세연 • 사회변혁노동자당 경기도당 대표, 철폐연대 회원

 

 

사회변혁노동자당 경기도당에서 상근자로 활동한 지 6년째다.

꽤 오랫동안 정치조직에 적을 두고는 있었지만 당 상근을 염두에 두었던 적은 없었다. 나는 영상활동을 했고, 가끔씩 불안정노동 철폐와 관련된 활동을(철폐연대 상근도 희망활동 중 하나였다) 하고 싶다는 생각은 했지만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 그냥 하던 일을 계속하며 살겠거니, 뚜렷한 자기활동의 전망을 세우지도 않았었다. 하지만 출산 이후 육아와 개인적인 영상활동을 병행하는 기간이 늘어나면서 조금씩 한계를 느끼고 있었다. 영상은 기술발전에 워낙 민감한 영역인데 내가 그걸 잘 따라가지 못했고, 내용적으로도 잘 채우고 있는지를 검증하기도 힘들었다. 뭔가 변화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당(당시에는 ‘노동자계급정당 건설을 위한 추진위’였다) 활동은 분회장과 도당 집행위원 정도로 일정하게 역할을 해오긴 했지만 여전히 당 상근은 내 활동의 선택지 중 하나로 고려조차 하지 않았다.

그런데 2015년 초, 덜컥 상근을 시작하게 됐다. 사회주의 세상을 이러저러한 경로로 건설하겠다는 정치적 구상이나, 내 한 몸 불살라 당 건설에 매진하겠다는 원대한 전망을 가지고 시작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꼬임에 넘어갔다. “일 년 뒤 창당을 앞두고 있는데, 지역에서 일할 사람이 없다. 당신은 그동안 집행위원도 했었고, 조건도 되지 않냐(일정한 직업이 없으니), 창당을 앞두고 지역에서 뭐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니냐”는 부담백배 설득을 뿌리칠 수 없어서 시작하게 된 상근이다. 시작은 그랬다.

 

8 살아가는 이야기_02.jpg2016년 변혁당 경기도당 창당총회에서 [출처: 변혁당 경기도당]

 

그랬지만, 그것만은 아니었다. 어쩌면 내 생에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더랬다. 스무 살 이후 가져왔던 신념에 나를 온전히 투여할 수 있는 기회. 그때가 아니면 정치조직에서의 상근, 직업적인 정치활동은 이번 생에서는 불가능할 것 같았다. 경험이 없다느니, 능력이 부족하다느니, 못할 것 같은 이유는 차고 넘쳤지만 꼭 한 번은 하고 싶었다. 사실 그래서 시작한 게 더 크다. 준비도 훈련도 되지 않고 시작한 상근이었으니 주변 사람들에게 참으로 많은 민폐를 끼쳤다. 처음 전국위원회 보고를 올리는데 지역의 모든 회의결과를 Ctrl+C, Ctrl+V 하여, 서너 장이면 충분할 보고를 몇 십 장 만들어 올려서 당시 담당이던 이황*동지가 큰 한숨 쉬게 만들었으니 다른 것들은 말해 뭐해. 주변 동지들을 큰 한숨 쉬게 만들든 말든 나름 열심히 5년을 활동해왔다. 하지만 열심히 한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을 요즈음, 여실히 깨닫는다. 상근 첫 해는 창당에 대한 여러 가지 우려에도 불구하고 그 절박함으로, 창당 이후 일이년은 소위 창당‘빨’로 경주마처럼 앞만 보고 달렸고, 이런 저런 시도와 사업을 벌이고 해나갔다. 대중교통이 열악한 용인에 살면서 안산과 평택, 안성, 군포, 의정부 등을 다니느라 면허 딴 지 이십년도 넘어 시작한 운전 실력은 나날이 늘지… 않았지만 뚜벅이에서 운전하는 여자로 변신했고, 상근 하자마자 시작된 하이디스 정리해고 철폐투쟁과 배재형열사투쟁으로 그 전에는 가본 적도 없는 이천이 가장 많이 다닌 도시가 되었다. 중앙당 차원의 재벌사내유보금 환수운동과 재벌체제청산투쟁, 비록 좌절되었지만 경기노동정치센터를 건설하기 위한 준비사업들, 사회공공성 강화의 일환으로 지역에서 처음으로 제안하고 주도적으로 사업을 진행했던 버스공영제 사업, 매달 배치했던 도당 혹은 분회별 당원 실천의 날 활동, ‘사회주의 ABC’를 비롯한 학습소모임들, 도당브리핑에 이은 도당 웹소식지 ‘경기변혁’ 발행, ‘월담’과의 연대를 비롯한 미조직노동자 조직화를 위한 사업, 각종 정치기획강좌, 쌍차/교육공무직/잡월드 투쟁 등의 지역투쟁사업, 반차별/청소년/이주민/여성/장애 등의 의제와 결합한 지역연대사업…. 열거해 놓으니 적지는 않다. 이런 활동들을 통해서 지역에서 당의 시민권을 일정 정도 획득했지만 여전히 변혁당은 다수의 지역동지들에게 선택가능한 정치적 세력으로 인정받고 있지는 못하다. 문턱 높고, 좀 꼰대스럽고, 들어가면 개고생 할 것이 뻔한 어려운 조직이라는 선입견은 여전히 존재하는 듯하다(나만의 지레짐작일 수도 있다. 그냥 입당할 만한 매력이 없어서 하지 않는지도…). 여기에 더해 당이 점점 정체되어 가는 게 아닐까 하는 불안이 문득 문득 고개를 든다. 분회와 당원의 활동력 강화는 늘 도당총회에서 가장 중요한 사업으로 제출되지만 평가는 매년 미완의 과제로 남는다. 도당의 사업에 결합이 안 되는 동지들은 여전히 일정 규모로 존재하고, 항상 결합하는 동지들의 피로도는 쌓여간다. 그리고 솔직히 나도 조금씩 지치고 소진되어 가고 있었다.

 

8 살아가는 이야기_03.JPG2017.5.24. 안양역 앞에서 도당 당원들과 함께 ‘재벌 범죄수익 환수 변혁당 집중선전전’을 진행하다 [출처: 변혁당 경기도당]

 

그래서 사회주의 대중화다! 당은 작년부터 사회주의 대중화를 위한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작년에는 당원들의 토론을 통해 의견을 모아 동의지반을 만들고, 구체적인 경로와 사업을 입안하는 준비의 시기였다면 올해는 본격적인 사업을 시작하는 사회주의 대중화의 원년이 될 것이다. 현실가능성의 여부, 우경화에 대한 우려 등 넘어야 할 산이 많은 게 사실이다. 그럼에도, 지난 총회에서 이 사업이 통과된 것은 당이 현재의 상태로 계속 간다면 한국사회에서 사회주의가 대중이 선택할 수 있는 정치적 이념으로 현실화하기는 요원할 것이라는 당원들의 판단이 주요하게 작용했다고 생각한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제 당은 지역에서 사회주의 대중화 사업의 주요 의제를 설정하고, 그 사업을 할 동지들을 모으고, 함께 실천하여, 그 결과로 사회주의 대중정당건설을 위한 추진위원회를 결성할 것이다. 이를 위해서 지역에서 할 일은 많고, 마음은 바쁜데, 아뿔싸! 코로나19 바이러스가 발목을 잡는다. 당장 청년학생사업을 확장하기 위해 담당자까지 배치했지만, 학교가 개강을 안 하거나 해도 온라인 수업을 한다. 학교에 학생들이 없으니, 계획했던 사업은 모두 무기한 연기했다. 다른 사업들도 대략 마찬가지다. 선전전을 하나 하려고 해도 유인물 한 장 건네기가 어려운 상황이다. 기획강좌나 교육도 비당원을 대상으로 한 사업은 추진하기가 저어된다. 주말이 없다고 투덜대기는 했어도 거의 매주 참석했던, 그 어떤 집회도 열리지 못하는 상황이다. 속은 타고, 무기력함에 우울하기도 하지만 어쩌겠는가. 앞으로 해야 할 일들을 준비하고, 지금 할 수 있는 것들을 작더라도 하나씩 해나가야지.

그리고 또 다른 과제가 생겼다. 코로나19의 여파가 곧 노동에 대한 총 공세로 들이닥칠 것이 예상된다. 한국사회는 또 한 번의 급격한 변화를 맞을 것이다. 이에 대한 대비가 필요하다. 중앙당 차원으로 TF팀을 만들어 코로나19 정세사업을 준비하고 있다. 지역에서도 할 일을 찾아보려고 한다. 당장 이를 위한 지역공대위 구성과 사업을 준비하려고 지역동지들과 논의를 시작했다. 새롭게 구성할 수도 있고 이미 존재하는 지역연대체에서 진행해도 된다. 뭐라도 하는 게 중요하니까. 가보자.

 

처음 원고를 의뢰받고는 난감했다. 뭔 주제도 안 주고 글을 내놓으라고 하는 건지, 질라라비 200호 발간기념 인증샷 행사의 유일한 참가자라서 이렇게 복수하는 건가? 아무 말이나 써도 된다는 의뢰인의 감언이설에 또 넘어가서(원고청탁을 거절 못하는 병이라도 걸린 것 같다. 아마도 주변의 기관지나 소식지, 잡지들이 얼마나 많은 수고를 거쳐 어렵게 발행되는지를 지켜봤던 것의 나쁜 결과인 듯하다.) 쓰겠다고는 했지만 막막했다. 그래서 책상에 앉아서도 첫 문장 외에는 진도를 내지 못했다. 그러면서 지난 5년의 나를 돌아보게 되었다.

애썼네. 잘 하지는 못했지만. 살짝 뭉클하기도 했다. 제일 절실하게 떠오르는 것은 사람들이다. 상근 시작하기 며칠 전 아빠가 돌아가셨다. 암이 발병한지 9개월만이었다. 너무 빨리 병세가 악화되어서 채 실감이 나질 않았다. 반년이 지난 2015년 추석날. 작은책, 노동자의 힘 기관지, 민주노총 ‘노동과 세계’, 민중언론 참세상 기자였고 금속노조 상근활동을 했던 이정원 동지가 세상을 떠났다. 가족을 제외하고는 가장 오랫동안 인연을 지속했던 친구이자 동지였다. 2년이 넘는 투병생활을 했던지라 각오는 했지만 그녀가 떠난 후 남은 빈자리가 커서 내 세상이 성큼 쓸쓸해졌다. 그리고 또 반년 후, 창당한지 며칠 되지 않아 진춘환 동지가 갑자기 우리 곁을 떠났다. 긴 휴지기 끝에 새롭게 당 활동을 결의했던지라 황망하고 허망했다. 다시 일년 반이 지난 2017년 여름, 영상활동가이자 사회주의자였던 박종필 동지가 가버렸다. 내게는 몇 명 남지 않은, 동지보다는 형이라는 호칭이 자연스러웠던 그였다. 마음이 무너져 내린다는 게 어떤 건지 알게 됐고 세상은 더 쓸쓸해졌다. 그리고 얼마 전 경기도당 5차 총회 당일인 2020년 2월 29일 새벽. 금속노조 두원정공지회에서 민주노조가 건설되기도 전부터 현장활동을 시작했고 노동자의 힘에 가장 먼저 가입했던, 당에서는 2019년 평택분회 분회장으로 헌신했던 신정범 동지가 급작스레 세상을 떠났다. 황망하고, 허망하고, 아직도 그의 부재가 실감이 나질 않는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5년의 시간동안 많은 이들을 잃었다. 그들을 다시 떠올리면 사는 게 참 아무것도 아니구나 라는 생각이 들다가도, 남은 우리가 잘 살아야겠다는 생각으로 다시 돌아온다. 구태의연하고 식상하게 보일수도 있지만 내게는 그것 말고는 답이 없다. 사랑하던 이들이 바라던 세상을 만들기 위해 때로는 사부작사부작, 때로는 성큼성큼 나아가야지. 그리고 또 내 곁에는 나보다 훨씬 능력 많고, 훌륭한 상근활동가들, 당원동지들과 아직은 당에 함께 하지는 않지만 사회주의를 염원하는 활동가들이 각자 자신의 공간에서 최선을 다해 일하고 있다. 코로나19 바이러스야, 니가 아무리 기승을 떨어봐야 우리가 포기하나. 사회주의 대중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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