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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통의 인권

 

 

다른 세상에 대한 상상력, 건강권이 아닌 질병권!

 

조한진희 •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 저자, 다른몸들 활동가

 

 

 

“저러니까 아프지”

몸이 아프다고 하면, 의사는 물론 주변 사람들도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잘못된 생활습관으로 질병이 왔다고 말이다. 짜게 먹어서, 담배를 피워서, 주 3일 정도의 운동도 하지 않아서 질병에 걸렸다는 식의 ‘진단’이다. 일상적으로 우리 모두 한마디씩 그런 말을 타인에게 하거나 들어 본 적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말들 안에서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제대로 보장되지 않는 점심시간은 급한 식사로 짜게 먹는 결과를 초래하고, 경제빈곤이나 시간빈곤층일수록 담배로 빠르게 스트레스를 해소하게 되며, 일상적 야근과 과로 속에서 운동을 할 여분의 에너지가 남지 않는 구조적 현실은 휘발된다.

 

‘아픔, 질병=자기관리 실패’라는 낙인

 

나는 이와 같은 현상을 ‘질병의 개인화’라고 표현한다. 이는 질병의 원인을 개인에게서 찾는 현상을 포착한 표현으로서, 노력하면 건강을 지킬 수 있는데 개인의 부주의함이나 잘못된 습관으로 질병이 왔다는 관점이다. 이는 코로나19 상황에서도 마찬가지다. 확진자들은 ‘손을 더 자주 씻었으면 괜찮았을까, 마스크를 자꾸 만지지 말았어야 했는데, 점심 시간에 함께 식사를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라며, 수없이 자책의 이유를 찾고 자신이 좀 더 조심했더라면 감염되지 않았을 거라며 미안해하고 절망한다. 동시에 확진자를 향한 비난과 조롱도 여전하다. ‘이런 시기에 왜 굳이 많이 돌아다녔느냐, 조심성이 너무 없었던 거 아니냐’ 정도의 말은 SNS에 차고 넘친다. 그들을 비난하는 기저에는 감염된 것은 그들의 잘못이라는 의식이 흐르고 있다.

 

코로나19 이후 우리 사회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코로나19는 올바른 생활습관으로 예방할 수 있다’는 캠페인 구호가 전혀 틀린 말은 아니지만, 누구나 공평하게 ‘생활습관’을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누락된다. 생활습관을 쪽방 주민들의 손 씻기로 살펴보면, 찬물만 나오는 공동 세면장은 손 씻기를 불편하게 하고, 무엇보다 코로나19를 이유로 서둘러 폐쇄된 급식소는 위장보다 마음을 더욱 쓰리게 만들었다. 소외감은 자괴감으로 이어지고, 손 씻기와 마스크를 찾아 헤맬 의지를 꺾었다.

 

개인의 잘못된 습관, 부족한 관리 때문에 질병이 왔다? 바로 그 ‘습관’과 ‘관리’가 삶에 녹아 있는 건강 불평등이다. 건강이 개인의 노력으로 지켜질 수 있다는 환상은 건강의 사회성과 연대성을 휘발시키고, 그 빈자리에 ‘질병은 자기관리 실패’라는 낙인을 남긴다. 물론 저 구호의 문제는 공평한 생활습관 뿐 아니라, 생활습관 자체에 있다. 방역의 문제를 지속적으로 개인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는 현실의 반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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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픈 몸들의 저항적 질병서사로 만들어진 시민연극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 한 장면. [출처: 사진_김덕중, 제공_다른몸들]

 

주지하다시피 가난하면 좋은 생활습관을 유지하기 어렵고 더 많은 질병에 노출되며, 질병에 걸리면 가난해지기 쉽다. 건강형평성학회 등 수많은 곳에서 발표하는 자료들은 하나같이 소득은 수명과 비례하고 있으며, 인명은 재천이 아니라 소득이 결정한 지 오래라고 말한다. 중산층이 빈곤층으로 이동하는 대표적 이유가 병원비이고, 고용이 불안정할수록, 학력이 낮을수록 더 많이 아프다는 것을 시민들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건강이 개인의 생활습관과 노력으로 지켜질 수 있다는 환상, 질병의 개인화 프레임은 질병이 사회적 결과라는 사실을 자꾸 지운다.

 

불현듯 찾아온 질병과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떠날 수 없는 가난의 굴레에서 사람들은 좌절을 느끼고, 노력하면 질병과 빈곤을 ‘예방’할 수 있다고 여겨지는 사회에서, 그들의 좌절감은 실패한 자신의 책임이 된다. 구조의 책임을 개인의 책임으로 돌리는 것은 권력의 속성인데, 신자유주의 사회에서 아픈 이들과 가난한 이들은 자기 경영과 관리의 실패자가 됐다. 실패자로서 세상에 민폐가 된 이들은 존재가 죄송해진다. 코로나19 현실에서 감염된다는 사실 자체보다 감염됨으로써 사회적으로 비난받는 게 더욱 두렵다는 한국 사회 시민 정서1)는, ‘질병의 개인화’ 프레임이 강력한 한국 사회 현실에서 예견된 현상이었으며 당연한 귀결이었다.

 

‘질병의 개인화’ 프레임은 질병 발생의 사회 정치적 맥락을 제거함으로써 질병을 탈정치화하고 있다. 즉, 개인 생활습관이 질병의 원인이기 때문에, 질병 예방과 건강 증진을 위해 변화되어야 하는 것은 개인의 생활습관이 된다. 산재, 과로, 차별, 유해물질, 기후위기 등으로 인해 발생하는 질병 요인을 음식이나 요가 등 개인의 생활 습관으로 조절하고자 한다. 이는 결과적으로 질병의 책임을 정부나 자본이 아닌 시민 개인에게 전가함으로써 정부와 자본의 책임을 면책시킨다. 또한 노동자 건강을 위해, 환경 및 구조 개선에 사용해야 하는 비용을 지출하지 않고, 노동자 생활 건강 교육으로 대체함으로서 비용 절감 효과를 낳는다. '이윤의 사유화, 손실의 사회화'는 질병의 개인화 프레임에도 적용되는 셈이다.

 

건강중심사회에서 밀려난 아픈 몸들

 

그런데 알다시피, 우리는 아플 수밖에 없는 사회를 살고 있다. 세계 최고 산재사망 국가라는 것은 사망하지 않았지만, 산재로 아프게 된 사람 또한 세계 최고치라는 의미다. OECD는 한국 정부가 대기 오염을 관리하지 않으면 2060년 대기오염으로 인한 사망자가 가장 많은 국가가 될 거라며, 대기 관리를 경고한 바 있다. 라돈침대, 가습기 살균제, 환경호르몬 등의 위험물질이 사회적으로 제대로 관리되지 않고 있으며, 조심할 기회도 없이 건강이 손상되고 심할 경우 사망하고 있다. 끊임없이 안전성 논란이 일고 있는 유전자조작식품(GMO) 수입 현황에서 한국은 부동의 1위를 유지하고 있다. 이외에도 성폭력과 성차별, 불안정 노동, 불안정 주거, 과도한 경쟁, 성별임금격차 등도 모두 건강을 직접적으로 훼손하는 요소들이다.

 

결국 아플 수밖에 없는 사회지만, 아프게 되면 그 책임을 개인에게 전가하는 사회! 게다가 한국 사회는 여전히 중산층이 빈곤층으로 이동하는 주된 이유 중 하나가 의료비이고, 아픈 몸들의 노동권은 전혀 보장되고 있지 않으며, 허술한 사회적 안전망 속에서 각자도생해야 하는 사회다. 이렇다보니, 건강을 잃으면 사실상 거의 모든 것을 잃게 된다. 그 안에서 아픈 몸들은 우리 사회에서 비가시화되며 차별의 대상이 되고, 건강한 이들은 질병에 대한 불안 속에서 살게 된다. 현재 헬스 산업에 호구가 되고 아픈 몸들을 혐오하는 문화가 형성되어 있다. 결국 우리는 아플 권리도 아프지 않을 권리도 없는 사회를 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처럼 우리가 아플 수밖에 없는 사회를 살고 있다면, 건강이 훼손되지 않는 안전한 구조로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동시에 잘 아플 수 있는 사회 구조를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 않을까? 더 나아가 아파도 괜찮고, 잘 아플 수 있는 사회가 더 좋은 사회 아닐까?

 

그러나 기존의 담론은 어떻게 해야 좀 더 건강하게 살 수 있는가를 중심으로 진행되어 왔고, 아픈 몸은 건강 회복을 위해 노력해야 하는 ‘임시’적인 상태로 전제되어 온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현대사회는 과거와 달리, 질병이 죽음 아니면 회복이라는 이분법에 놓여 있지 않게 되었다. 아픈 몸이 임시적 상태가 아닌 거의 영구적 상태인 사람들이 늘었다. 울리히 벡 등이 지적한 대로 만성질환자의 시대가 된 것이다. 그런데 여전히 정부와 시민사회 모두 어떻게 아픈 이들을 건강하게 만들 것인가라는 공회전 같은 이야기만 할 뿐, 아픈 몸으로도 살아갈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것에는 관심이 없어 보인다.

 

건강권 영역에서는 건강은 사회참여와 행복의 전제조건이며, 불평등 해소로 모두 최고의 건강에 닿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건강하지 않아도 사회참여가 가능한 사회가 되어야 한다. 아픈 몸이 불행을 전제하는 것은 아니다. 마치 장애가 불행을 전제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또한 건강불평등 요소를 제거한다고 해서 모두가 ‘정상적인 최상의 건강’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정상적인 최상의 건강을 상정하면 몸이 서열화될 수 있고, 누군가는 계속 열등한 몸으로 규정될 수 있다.

회복되지 않는 아픈 몸으로 살고 있는 한 명의 시민으로서, 건강중심사회를 비판적으로 성찰하면서 새삼 확인하게 되었다. 질병은 인간 삶인 생로병사 과정의 일부이고, 질병이 반드시 악인 것도 아니고 완전히 퇴치 가능한 것도 아니며, 건강하지 않다고 해서 반드시 불행한 것도 아니라는 점이다.

 

의학으로 죽음을 삭제할 수 없듯이 질병을 삭제할 수 없고, 누구나 아프게 되고 죽게 된다. 질병이나 죽음 자체가 비극이 아니라, 그것을 온전히 자신의 삶으로 겪어낼 수 없을 때 비극이 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고된 노동을 반복해도 결코 아프지 않은 무한히 노동할 수 있는 몸이 아니며, 자연이 생명체에게 부여한 생로병사를 낙인이나 차별 없이 겪을 수 있는 있는 몸, 질병권(疾病權)이 보장되는 잘 아플 수 있는 사회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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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 어느 페미니스트의 질병관통기>(조한진희 지음/동녘/2019.) 책 표지.

 

‘나약한 몸, 아픈 몸’에게 권력을!

 

질병권은 건강권을 포함하지만 초점을 건강에서 질병으로 이동시키고 보다 확장시킨 개념이다. 내가 질병권이라는 개념을 처음 착안하게 된 것은 건강중심 세계에서 질병난민처럼 살고 있는 아픈 몸의 삶을 기존의 건강담론이나 건강권 안에서 설명하기 어렵다는 문제의식이었다. 또한 건강이 사회정치적 결과임에도 상당히 탈정치화 된 현실에 대해, 다른 방식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는 판단에서였다.

 

건강권의 궁극적 목적이 건강 자체가 아니라 만족스러운 행복한 삶이라면, 표준의 건강을 쟁취할 수 없는 존재들이 어떻게 아픈 상태로도 만족스러운 행복한 삶이 가능한가에 대한 대안이 필요하다. 그러나 사회는 건강해져야 사회에 참여할 수 있고 행복해질 수 있다고 말할 뿐, 건강해질 수 없는 아픈 몸이 처한 삶의 환경에 관심이 없어 보인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회복되지 않는 아픈 몸은 생산성과 효율성이 떨어지는 ‘쓸모없는 몸’이자 사회의 짐으로 여겨질 뿐이다.

 

삶의 전제조건이 건강인 사회에서, 건강은 아픈 몸들에게 쟁취하고 싶은 대상이자 절망에 빠지게 하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아무리 노력해도 표준의 건강을 쟁취할 수 없는 아픈 몸들에게 건강해져야 모든 것이 가능해진다는 요구는 결국 아픈 몸들을 평생에 걸쳐 패배자로 만든다. 회복될 수 없는 아픈 몸들에게 필요한 것은 더 나은 건강을 쟁취하라는 요구가 아니라, 어떻게 잘 아플 수 있는 환경을 만들 것인가라는 관점으로 접근하는 게 더 유용할 수 있다. 또한 건강이 아닌 질병을 중심으로 말할 때 건강에 대한 강박과 집착으로부터 좀 더 거리를 유지할 수 있다.

 

기본적으로 건강권이 전제하는 문제의식은 의학의 발전과 건강불평등 해소 등으로 인류가 보다 나은 건강을 쟁취하는 것, 즉 “어떻게 더 건강하게 만들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으로 보인다. 사고의 중심에 건강이 있고, 건강한 몸을 사회의 표준 몸으로 설정하며, 건강을 위한 임시적 상태로서의 아픈 몸을 본다. 따라서 아픈 몸 관련 논의는 의료에 집중되어 있었으며, 빠르게 ‘건강한’ ‘정상적’ 상태가 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해야 하는 의무가 부과되고, 언제나 의료적 치료와 회복 이후에 삶의 권리를 주장하길 권장받는다.

 

반면 질병권의 문제의식은 건강회복 강요를 배제하고, 행복 전제조건으로서의 건강을 거부하며, “회복되지 않는 아픈 몸으로도 어떻게 온전한 삶이 가능하도록 할 것인가”를 고민한다. 질병을 중심에 배치하고, 아픈 몸을 사회의 기본 몸으로 설정하며, 질병을 겪는 상태도 삶의 ‘정상적’ 시기로 본다. 더 이상의 건강을 쟁취할 수 없는 아픈 몸을 인정하고, 모든 이가 건강을 삶의 최우선 목표로 두지 않을 수 있음을 존중한다. 건강권이 건강 증진을 중심으로 움직인다면, 질병권은 건강추구와 치료를 누락시키는 것은 아니지만 아픈 몸으로도 온전히 존재하는 것 자체를 중시한다.

 

다시 말하면, 기존처럼 건강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더 첨단의 의료, 더 많은 헬스 산업 소비로 미끄러지는 게 아니라, 잘 아플 권리를 강조하면서 사회 제도와 환경을 재구성하는 방식으로 시선을 옮겨 보는 것이다. 질병이 사회적 구조의 결과이며, 우리가 아플 수밖에 없는 사회를 살고 있다면, 잘 아플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건강은 역사적으로 개인의 운명이나 불행이었고 국가나 권력의 주된 관심 영역은 아니었으나, 근대국가가 형성되면서 인구가 곧 국력이라는 인식이 형성되었다. 바로 이 점을 떠올려 보면 우리가 건강권이 아니라 질병권을 통해 상상하고 사유할 수 있는 가능성을 더 많이 볼 수 있을 것이다. 질병권은 건강중심세계에서 ‘탈식민’ 하자는 의미일 뿐 아니라, 건강한 몸이라는 게 누구에 의해 정의된 어떤 몸이며, 어떤 의미인지 다시 묻고 재구성하는 행위이다. 질병권은 ‘건강한 남성의 몸’을 전제로 설계된 공장, 사회 자체에 문제를 제기한다. 효율적 노동을 중심으로 구성된 ‘건강한 몸’, 인간 몸의 조건 자체를 다시 질문하는 일이다. 누가 건강한 몸에 대한 욕망을 부추기는가? 건강에 대한 기준이 높아질수록 누구에게 이익인가? 누가 아픈 몸을 열등한 몸이라고 규정하고 배제하는가?

 

과거 ‘민중에게 권력을!’이라는 구호가 등장했다면, 건강중심사회에 필요한 구호는 무엇일까. 국가의 인구와 국력으로서의 건강이 아니라 노동자의 권리, 시민적 권리로서 건강권을 요구한다면 ‘아픈 몸에 대한 상상력에 권력을!’은 어떨까. 더 나아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쓸모없는 몸으로 여겨지는 ‘나약한 몸, 아픈 몸에게 권력을!’, ‘민중에게 잘 아플 권리를!’ 이라고 외침으로써, 자본에 의해 정의된 몸과 건강중심사회에 전복적 균열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1) 서울대 보건대학원 유명순 교수팀이 코로나19 관련해 전국 만 18세 이상 성인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한 인식조사 결과(조사기관 한국리서치)를 분석해 발표한 결과에 따르면, 감염보다 더 두려운 것이 주위의 비난으로 나타났다. 코로나19 국면에서 ‘상황별 두려움’을 묻는 질문에 ‘내가 확진자가 됐을 때 주변으로부터 비난, 추가 피해를 받는 것이 두렵다’라는 항목이 3.52점으로 제일 높았고, ‘무증상 감염되는 것’이 3.17점, ‘주변에 증상이 의심되는데도 자가신고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 것 같아 두렵다’가 3.10점이었다(5점 척도 기준). 김영은, “코로나19 관련 상황별 두려움을 느끼는 정도” <연합뉴스>, 2020.2.24.

 

경기도 공공보건의료지원단과 서울대 보건대학원 유명순 교수팀이 코로나19에 대한 경기도 내 코로나19 확진자와 접촉자 총 1,498명(확진자 110명, 접촉자 1,388명)을 대상으로 한 인식조사 결과를 발표한 결과에 따르면, 확진자들을 대상으로 두려움의 정도를 5점 척도로 설문한 결과 ‘주변으로 받을 비난과 피해가 두렵다’가 3.87점으로 가장 높았다. 심지어 ‘완치되지 못할 수 있다는 두려움’(2.75점), ‘완치 후 재감염될 수 있다는 두려움’(3.46점)보다도 더 높은 수치이다. 코로나19 감염의 책임이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는지를 뜻하는 귀인(歸因)에 대해 조사한 결과 일반인의 30.7%는 ‘코로나19 환자의 감염에 대한 책임은 환자 자신에게 있다’고 보는 반면 확진자의 9.1%, 접촉자의 18.1%만이 ‘그렇다’고 답해 각각 21.6%p와 12.6%p의 차이가 났다. 박희봉, “‘내가 코로나19에 감염된다면 누구 탓일까?’ … 국내최초 인식조사 실시”, <KBS 뉴스>, 2020.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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