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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장 속으로

 

전국금속노동조합 경기지부 시흥안산지역지회 시그네틱스분회 김양순 수석부분회장 ㆍ 윤선애 사무부장 인터뷰

 

“세 번의 복직, 네 번의 해고” 아직 끝나지 않은 시그네틱스 노동자들의 싸움

 

인터뷰 ‧ 정리 임용현 • 전국불안정노동철폐연대 상임집행위원

 

 

 

세 번의 복직, 네 번의 해고….

영풍그룹의 전기전자 계열사인 시그네틱스 해고 노동자들의 이야기다.

참으로 무지막지한 20년 세월이었다. 회사의 노조혐오와 노동탄압도 지독했지만, 시그네틱스 노동자들도 보통내기는 아니었다. 어떻게든 민주노조와 그 조합원들을 공장 밖으로 밀어내려는 회사에 맞서 부단히 ‘옳음’을 입증하는 과정이었다.

입사 때 갓 스물을 넘거나 30대였던 노동자들은 어느덧 중년이 됐다. 20년…. 이토록 긴 시간을 싸울 수 있었던 힘은 어디에서 나온 걸까. 3월 17일, 시그네틱스분회 김양순 수석부분회장, 윤선애 사무부장 두 동지와 함께 시그네틱스 노동자들의 해고 투쟁 이야기를 나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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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3.17. 광화문 동화면세점 앞 정기선전전에 참여 중인 시그네틱스분회 윤선애 사무부장(왼쪽)과 김양순 수석부분회장(오른쪽)의 모습. [출처: 철폐연대]

 

그리운 봄날

 

반도체 조립업체인 시그네틱스는 국내 최초의 외국인투자기업이기도 하다. 1966년 미국 시그네틱스가 한국공장을 세웠고, 1975년에는 필립스가 지분을 인수했다. 한창 때의 시그네틱스는 반도체 사업 선도기업으로 입지가 제법 탄탄한 회사였고, 직원 복지나 임금도 손꼽히는 업체였다. 그러니 당시 시그네틱스에 다닌다고 하면 주변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곤 했다.

이제는 20년도 훨씬 지난 ‘옛날이야기’가 되어 버렸지만, 회사 생활은 어땠는지 궁금했다.

 

해고되기 전에는 동료들과 무척 행복한 나날들을 보냈어요. 부서마다 각종 소모임이 활성화돼 있어서 틈틈이 같이 쫄면도 먹으러 다니고 꽃꽂이도 하고 산행도 가곤 했죠. 회사 앞에 화장품이나 옷 가게, 분식집이 즐비했어요. 거기도 자주 가고, 또 회사 안에는 향나무며 살구나무며 조경으로 멋지게 다듬어진 정원도 가꾸어 놓았어요. 점심 먹고 정원을 거닐 때도 기억나고, 한때는 참 즐거웠었죠.” - 김양순

 

1996년도였나. 민간기업으로는 아마 최초로 어린이집을 설립, 운영한 회사가 시그네틱스일 거예요. 워낙 여성노동자들이 많은 사업장이었으니까, 아이들 맡길 데가 없으면 제대로 일하기 어렵잖아요. 그래서 노동조합이 다른 복지시설보다도 어린이집부터 만들라고 몇 년간 줄기차게 요구해서 단협으로 따냈어요. 그때가 거평그룹 시절이었어요.” - 윤선애

 

즐거웠던 한때를 듣고 싶었는데 별안간 노동조합 활동으로 이야기가 튀었다. 아닌 게 아니라 이들에게는 노동조합 활동이 오롯한 일상이었다. 당시 시그네틱스 현장은 유니온샵 제도를 채택하고 있었기 때문에, 입사하고 3개월 수습기간만 지나면 누구나 조합원이 될 수 있었다. 그런 만큼 시그네틱스 노동자들에게 노동조합은 지극히 평범하고 자연스러웠다.

 

외투기업 시절의 시그네틱스는 남부럽지 않은 회사였다. 그러나 1995년, 필립스 자본은 국내 시장보다 값싼 노동력을 찾아 떠났다. 당시 문어발 경영으로 몸집을 부풀리고 있던 거평그룹이 시그네틱스를 넘겨 받았다.

 

나승렬 회장 시절 거평그룹은 방만한 사업 경영으로 인해 곧 부도 위기에 내몰렸어요. 그 바람에 1998년 들어 시그네틱스도 워크아웃 사업장이 되었고요. 이 때 염창동 공장을 담보로 융자를 받아 파주공장을 지은 것도 위기를 부채질한 요인이었어요. 그래도 파주공장이 만들어지면 사람과 기계 모두 데려간다던 회사 약속을 철석같이 믿었죠. 일단 경영 사정이 어려운 회사부터 살려놓아야 파주공장에서 장밋빛 미래도 꿈꿀 수 있을 것만 같았어요. 퇴직금 누진제를 폐지하고, 임금 동결하고, 상여금도 반납하고… 정말 많은 권리를 양보했어요. 덕분에 예상보다 빠른 2000년 8월 워크아웃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었어요.” - 김양순

 

2000년 5월 거평그룹의 뒤를 이어 이번에는 영풍그룹이 시그네틱스의 인수자로 나섰다.

노동자들의 양보와 희생으로 시그네틱스는 워크아웃을 조기 졸업할 수 있었다. 현장엔 머지않아 파주공장에서 더 나은 미래를 꿈꿀 수 있다는 기대가 충만했다. 그것이 얼마나 순진한 믿음이었는지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600일의 파업

 

2001년 7월, 회사는 서울 강서구 염창동에 있던 기존 공장을 돌연 폐쇄하고 정규직 노동자 전원을 규모도 작고 허름한 안산공장으로 인사발령 냈다. 앞서 언급했다시피, 시그네틱스 노사는 새로 짓는 파주공장으로의 고용승계를 2002년까지 완료하기로 합의한 바 있었다. 그런데 느닷없이 사업체 규모도 영세한 안산공장으로 이전하라니, 노동자들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파주공장 이전 약속을 지키라는 노동조합의 거듭된 항의에도 회사는 꿈쩍하지 않았다. 파주공장에는 정규직 일자리가 없다고 잘라 말했다. 그리고 “공장 이전은 경영권에 관한 중요한 사항”이므로 노동조합과 상의할 문제가 아니라고도 했다.

시그네틱스 노동자들은 사측의 일방적인 공장 이전 계획에 맞서 전면파업에 돌입했다. 600일 넘게 지속된 파업 투쟁에서 노동자들은 삭발, 단식, 고공농성 등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해 끈질기게 싸웠다. 회사도 물러서지 않았다. 조합원에 대한 고소 고발, 임금과 재산에 대한 가압류, 파업 참가자 전원(130명) 징계해고를 밀어붙였다. 최선을 다해 싸웠지만 결국 서울공장 폐쇄와 대량해고를 막아내지 못했다.

기나긴 소송 끝에 2003년 중앙노동위원회의 심판으로 93명의 해고 노동자 중 28명이, 2007년 대법원 판결로 36명이 안산공장으로 복직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핵심 간부를 포함한 나머지 29명은 대법원 판결에서 패소해 복직 대상에서 제외되고 말았다.

 

기나긴 복직 투쟁

 

그로부터 4년이 지나 회사는 두 번째 해고를 강행했다. ‘안산공장 경영악화’를 이유로 복직한 노동자들에게 사내하청업체로의 전적을 강요했고, 이를 거부한 32명의 노동자를 정리해고한 것이다. 단 한 명의 직접고용 인원도, 노동조합도 존재하지 않는 ‘100% 비정규직 공장’을 만들겠다는 일념이 뜻대로 먹히질 않자 회사는 복직자들을 도로 내쫓는 손쉬운 방법을 택했다. 다시 법정 공방이 이어졌고 2012년 11월 법원은 노동자들에게 부당해고 판결을 내렸다. 어쩐 일인지 회사는 항소하지 않았고, 대신 휴업을 통보했다.

이듬해 초 안산공장으로 복직했지만, 회사는 노동자들이 제풀에 떨어져 나가길 바라는 마음뿐이었다. 회사는 기존에 제공해 오던 통근버스도 갑자기 제공하지 않겠다며 뻗댔다. 그래도 노동자들은 굴복하지 않았다. 노동조합에서 봉고차 2대를 마련해 매일 복직자들을 실어 날랐다. 왕복 4~5시간이 소요되는 거리였다. 노동자들이 포기하지 않고 버티니 회사는 안산공장을 매각하고 광명시 하안동에 아파트형 공장을 얻어 출근시켰다. 이곳에서도 회사는 물량이 없다면서 휴업과 조업 재개를 되풀이했다.

 

2016년 9월, 회사는 어김없이 정리해고의 칼을 빼들었다. 세 번째 정리해고의 명분은 ‘광명사업부 경영악화’였다. 사표를 쓰면 위로금을 두둑히 챙겨준다는 회유도 뒤따랐다. 오랜 투쟁에 지칠 대로 지친 조합원 13명은 끝내 사표를 썼고, 마지막 9명이 남았다. ‘3차 해고자’ 9명은 다시 또 법정투쟁을 결의했다.

2017년 9월, 경영상 위기를 빌미로 한 해고에 법원은 재차 노동자들의 손을 들어 주었다. 회사는 곧바로 항소했고, 대법원의 복직 확정 판결이 나기까지 꼬박 1년이 더 걸렸다. 이윽고 회사는 복직명령서만 보낸 채 ‘또’ 휴업을 통보했다. 2019년 9월, 위장휴업과 강제휴직 철회를 요구하는 소송에서도 노동조합이 연거푸 승소했다. 간신히 되돌아간 일터에는 생산시설은커녕 책상 하나만 달랑 놓여 있었다. 텅 빈 공장에서의 대기발령 처분이 한동안 지속됐고, 때마침 찾아온 ‘코로나19 위기’를 빌미로 2021년 1월 31일 정리해고가 단행됐다. 네 번째 정리해고였다.

 

저희가 네 차례 해고되면서 회사가 든 이유는 항상 ‘경영상 문제’였어요. 매번 위기를 조장하고 부실을 조작해내요. 그래야만 우리를 자를 수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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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0.21. “블랙리스트로 해고된 시그네틱스 여성노동자!” 동화면세점 앞 수요 정기선전전에 함께한 금속노조 시그네틱스분회 조합원들과 연대 시민들. [출처: 시민단체 ‘더불어삶’ 페이스북페이지]

 

다시, 봄날은 온다

 

2001년 안산공장 이전에 반대하는 첫 파업을 할 때까지만 해도 이 싸움이 이렇게 길어질 줄은 아무도 몰랐다. 투쟁기간 중 서울공장, 안산공장, 광명사업부가 경영악화를 빌미로 연달아 문 닫았지만, 본사인 시그네틱스 파주공장은 설립 당시 소사장제를 도입해 지금까지도 정규직 없는 ‘100% 비정규직 공장’으로 정상가동 중이다. 자본에겐 ‘꿈의 공장’, 노동자에겐 ‘절망의 공장’이 바로 시그네틱스 파주공장이었다.

 

법원의 부당해고 판결도 부질없었다. 노동자들이 번번이 이겼으나, 회사는 판결을 순순히 수용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소송을 최대한 오래 끌면서 노동자들의 인내심이 바닥나기만 기다렸다.

네 번의 해고 과정에서도 회사는 판에 박힌 듯한 구조조정 절차를 되풀이했다. 일방 휴업-퇴직자 모집-공장 이전-정리해고로 이어지는 수순을 매번 똑같이 밟았다.

그럴 때마다 노동자들은 악착같이 싸우고 버텼다. 물론, 싸움이 길어질수록 회사의 회유와 압력으로 투쟁을 포기한 이들도 많았다. 그래도 떠난 이들을 마냥 원망할 수만은 없는 노릇이었다. 힘겨운 해고 생활을 이어가기란 결코 쉽지 않은 선택이었기 때문이다.

두 동지는 영풍 자본과의 지리멸렬한 싸움에서 꼭 이기고 싶다며 이렇게 말했다.

 

내가 스스로 이력서를 내서 이 회사에 들어왔어요. 사표도 내가 원할 때 낼 수 있어야 그게 맞는 거잖아요. 저 자신의 삶을 결정할 권리를 (자본이) 함부로 침해하는 게 잘못됐단 걸 말하고 싶어요. 아직도 회사는 자기 잘못을 인정하지 않아요. 그렇다면, 저희도 끝까지 투쟁해야죠.” - 윤선애

 

영풍 자본은 우리 노동자들보다 가진 게 훨씬 많아요. 재계 22위 그룹사답게 돈도 많고 언론이나 정치권에 입김도 세잖아요. 힘 있는 자본이라고 제멋대로 노동자 괴롭히면 반드시 혼쭐난다는 걸 알게 해야죠. 그리고 사회적 약자인 여성노동자들이 너무나 쉽게 해고되고 무시당하는 현실을 우리 사회에 널리 알려야죠. 20년을 싸웠는데, 이제 와서 싸움을 포기할 순 없어요. 그러면 영풍그룹 같은 악덕기업들이 버젓이 활개를 치게 될 텐데 순순히 물러날 순 없잖아요.” - 김양순

 

두 동지는 인터뷰를 마치고 곧장 짐을 챙겨 선전전 장소로 향했다. 마침 이날은 매주 수요일 저녁 7시 광화문 동화면세점 앞 선전전이 진행되는 날이기도 했다. 시그네틱스분회 수요 정기선전전은 영풍그룹의 악랄한 정리해고를 알리는 데 그치지 않고 노동자ㆍ시민의 절박한 문제를 여론화하는 활동도 함께 벌여 나가고 있다. 시그네틱스 해고 노동자들의 문제와 한국사회의 모순은 서로 동떨어진 해결 과제가 아니라는 생각에서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정기선전전을 지속해온 시그네틱스분회 조합원들의 끈기가 마침내 노동자들의 봄을 활짝 열게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 이 인터뷰는 박일환 작가가 쓴 책 『빼앗긴 노동, 빼앗길 수 없는 희망: 시그네틱스 노동자 18년 투쟁의 기록』(박일환 저 | 우리학교 | 2019년 12월)을 참조하여 진행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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