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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아가는 이야기

 

 

지역 독립언론 10년 분투기

 

 

천용길 • 철폐연대 회원, 뉴스민 대표

 

 

 

우리의 기사가 이 그늘진 현장에 햇볕 한 줌 될 수 있다면, 바람이었다. 이따금 흥얼거리는 노래마을의 노래, ‘우리의 노래가 이 그늘진 땅에 햇볕 한 줌 될 수 있다면’처럼 서울 미디어가 주목하지 않는 지역의 비정규직 노동자의 삶에 하나의 희망이길 바라고 시작한 ‘뉴스민’이 올해로 만 10년이다. 2012년 5월 1일 창간한 인터넷신문 ‘뉴스민’은 ‘민중언론’을 표방하던 초기를 지나, ‘대구경북 독립언론’을 표방하고 있다. 10년 전에는 노동자들의 투쟁 현장을 쫓아다니며 기록하는 일이 최우선이었으나, 지금은 아니다.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무엇을 고민하고 있는지 철폐연대 회원들과 함께 나누고자 한다.

 

 

8. 본문사진1.jpg

2022.06.24. 10주년, 독자회원과 함께. [출처: 뉴스민]

 

 

기록과 보도 그 사이

 

2012년 뉴스민은 지역 사회운동 활동가 80명의 후원으로 월급 50만 원, 나를 포함한 기자 2명이 함께했다. 그 돈으로는 사무실을 구하는 것도 여의찮아 민주노총 대구지역본부가 입주한 건물 자투리 공간을 빌려 썼다. 민주노총 산하 사업장의 집회, 기자회견 현장을 다니는 게 주요한 일이었다. 그 무렵 이명박 정부에서 벌어진 ‘노조파괴 시나리오’로 쑥대밭이 됐음에도 끝까지 민주노조를 버리지 않았던 KEC, 발레오만도, 상신브레이크 현장을 다녔다. 학교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대거 노동조합에 가입하면서 여러 직군의 비정규직 노동자를 만났고, 그들의 현장을 기록하는 데 충실했다. 대구시가 위탁한 곳임에도 노조 활동을 탄압했던 대구시지노인병원의 투쟁 현장을 기록하는 일도 기억에 남는다. 물리력을 동원한 경찰의 진압과 노동조합을 탄압하려는 경영진의 무리함을 고발하는 보도를 했다. 출입국관리소의 강제단속을 피하려다 난간에서 떨어져 병원에 입원한 이주노동자를 찾아가기도 했고, 대학의 청소용역 노동자들의 파업 현장 취재를 위해 대학 쓰레기장을 뒤지기도 했다. 건설노조에 부탁해 아파트 건설 현장에 일용직으로 취재를 빙자해 며칠 동안 일하기도 했다.

 

물론 노동 현장만 쫓아다닌 것은 아니었다. 송전탑 건설 반대 운동, 핵발전소 반대 운동, 반성폭력 운동을 기록하기도 했다. 2년 정도 흘렀을까. 답답함과 한계가 찾아왔다. 경제적 궁핍함과 사회운동을 위한 언론은 어떤 길을 가야 할지 고민이 동시에 찾아왔다. 취재비가 따로 없는 가운데 월급 50만 원으로는 생활에 한계가 분명했다. 애초에 작정했지만, 이대로 안 되겠다 싶던 경험이 있다. 취재 가던 도로 위에서 기름이 떨어져 차가 멈췄다. 가까운 주유소에 가더라도 넣을 돈이 없었다. 그래서 긴급출동을 요청한 보험회사에 기름 5L를 넣어 주고, 긴급출동을 3번 쓴 것으로 퉁치자고 부탁했다. 그길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주중에는 과외교사로 일하고, 주말에는 LPG 가스 배달 일을 시작했다. 꾸역꾸역 궁핍함에서 조금 벗어나니, 언론의 역할에 대한 고민이 찾아왔다. 막 조직된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큰 언론사의 한 방이었다. 취재를 마치고 돌아가려던 내게 “아는 방송국 기자 없나요?”라고 물었다. 서럽다기보다는 쪽팔렸다. 오늘 열린 집회를 기록하는 일도 중요했지만, 자신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보도가 필요했던 때문이다. 그러나 내게, 뉴스민은 아직 그럴 능력이 없었다. 상대방을 한 방 먹일만한 지자체나 기업의 핵심 정보에 접근할 취재원이 없었고, 지자체의 예산안과 법적 근거를 따져서 조목조목 비판할 분석력도 없었다.

 

몇 번의 그런 경험 이후, 마음을 고쳐먹었다. 노동자의 투쟁 현장을 찾는 일 대신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국정감사, 대구시, 교육청을 상대로 정보공개청구, 지방의회, 기업경영분석보고서 등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현장에서는 일부러 회사 쪽 관계자를 만나는 데 시간을 더 쏟았다. 기록하는 일 대신 보도를 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노동조합과 사회운동의 잘못에 침묵하지 않을 때

 

자본과 권력으로부터 독립한 언론이 필요하다고 여겼다. 금전적인 이해관계를 따지지 않고, 부당한 사실을 보도함으로써 진보적 가치를 확산시킬 수 있다고 믿었다. 깜빡 잊고 있었다. 어느 곳에도 이해관계가 작동한다는 사실을. 노동조합과 사회운동단체에서 벌어진 불합리한 일을 목격하고도 지나칠 수 없었다.

 

2013년 어느 날 뉴스민으로 전화 한 통이 걸려 왔다. 공무원노조 대구경북지역본부 선거에서 부정선거가 있었다는 제보였다. 취재를 시작했다. 지역본부 조합원 숫자가 공무원노조 중앙에 신고한 조합원 수보다 많았다. 분담금을 적게 내기 위함이었다는데, 문제는 조합원들의 표가 일부분 폐기처분 됐다는 사실이었다. 공직선거에서라면 엄연한 부정선거였고, 그 어느 조직보다 민주적이라고 믿었던 노동조합 선거라면 더욱 문제라고 생각했다. 당연히 보도했고, 공무원노조 쪽에서 항의 전화가 왔다. 일부 조합원들이 후원을 중단하는 일도 있었다. 후원 중단이야 개인의 자유이지만, ‘같은 편끼리 왜 이러느냐. 우리 상황을 이해 못 하느냐’는 말에서 오는 충격은 오랫동안 사라지지 않았다. 이후에도 한 사회단체의 보조금 유용, 허위서류 작성 등을 보도했고, 비슷한 과정을 겪었다. 대구지하철노동조합 위원장의 임금피크제 합의 보도 때도 그랬다. 소위 조국 사태에서 비판적 칼럼을 게재했을 때도 그랬고, 더불어민주당 지방의원의 비리를 보도했을 때도 같았다. 뉴스민을 후원하는 사람은 저마다 다른 기대를 하고 있다는 사실도 알았다. 명확해진 건 사회적 소수자의 권리 신장과 진보적 가치를 확산하기 위해서는 어떤 이해관계에서도 자유로워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삼성전자서비스, 아사히글라스

 

노동운동과 사회운동에 실망감을 넘어 절망감을 느낄 때도 있었지만, 10년을 버티게 해 준 힘 역시 노동운동과 사회운동이었다. 삼성전자서비스지회가 설립한 초창기, 대구에서 과로로 임현우 씨가 세상을 떠났다. 조합원과 유족을 통해 근무일지를 확인하고, 결국 산업재해 승인까지 받아 냈다. 당시 유족 다수는 삼성과 합의를 하고 장례를 빨리 마무리했지만, 현우 씨의 형이 끝까지 놓지 않았다. 그는 동생이 생각나 괴로울 때마다 전화를 걸어 왔다. 울분과 한탄을 토해내고 나서 마지막에 이르면 그는 ‘또 이런 일은 없어야 하잖아요. 잘 부탁합니다’라고 했다. 그는 노동조합을 한 경험도 없던 작은 회사에 다니던 평범한 사람이었다. 세상에는 생각보다 끈질긴 사람이 많았다. 내가, 뉴스민이 능력이 부족할지라도 끈질긴 매체가 되어야 한다고 다지기에 부족함 없는 격려였다.

 

구미 아사히글라스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만난 건 행운이었다. 7년을 버티는 동안 그들은 노동조합이 무엇을 지향해야 하는지, 다른 사회적 소수자와 연대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노동조합의 운영 원리가 왜 민주적이어야 하는지 늘 영감을 주었다. 그들 옆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보도를 이어갈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다. 만약 서울에 있었더라면 그들과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그들이 공장으로 복직해서 공장으로 돌아갈 때, 복직 이후 노동조합 활동까지 보도하는 게 나에게는 매우 중요한 목표가 됐다.

 

 

8. 본문사진2.JPG

2022.07.09. 아사히 7년 연대한마당. [출처: 뉴스민]

 

 

지역 언론을 키우는 데 주저하지 말자

 

“뉴스민 같은 매체가 왜 우리 지역에는 없어요?”, “전국에 뉴스민 같은 지역 언론이 몇 개나 있어요?” 종종 다른 지역 사람들과 만나면 듣는 질문이다. 글쎄. 뉴스민을 어떻게 여기느냐에 따라 답은 다르겠지만, 10년 동안 뉴스민을 지켜 준 자발적 후원자가 대구/경북만큼 있을지 모르겠다. 창간부터 10년을 빼놓지 않고 후원한 사람은 29명이었다. 실은 작년에서야 뉴스민 직원 월급이 최저임금이 됐고, 함께 시작한 후배들 이후 첫 공개 채용을 했다. 물론, 올해도 최저임금이 월급이다. 내 편을 들어주면 좋겠지만, 사회운동을 확산시키고, 때때로는 우리 운동을 감시해 줄 지역 언론 하나 키우는 데 철폐연대 회원들이 주저하지 않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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