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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불안정노동철폐연대

투쟁/이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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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아가는 이야기

 

 

정학예사는 아닙니다만…

 

 

손송이 • 철폐연대 회원

 

 

 

저는 학예사입니다, 라는 문장으로 글을 시작하면 좋겠으나 현재는 전일제 박사과정 대학원생이다. 질라라비 원고 청탁을 받고서 망설였던 것은 그 때문이었다. 전국불안정노동철폐연대에 가입할 무렵에는 어느 사립 박물관에서 학예사로 재직하고 있었다. 하지만 ‘여긴 국공립 기관이 아니다’라는 식의 주장이 그곳에서 발생한 불합리한 일들을 쉽게 정당화했다. 수시로 커피 타기와 같은 학예 업무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잡무들을 견디지 못해 제 발로 나왔다.

 

사실 그 박물관에서 근무하기 직전에 어느 공공기금으로 운영되는 미술관에서 일자리 제안이 들어 왔었다. 제안을 주셨던 그분은 본인의 업무를 별도의 지시 없이도 내가 알아서 일을 잘해 내면 ‘어시스턴트 큐레이터’라는 직함을 경력증명서가 아니라 도록 등에 실어 줄 수도 있으며, 내가 하는 거 봐서 계약을 연장할 수도 있다는 말을 전했다. 지원하지도 않은 직무에, 동의 없이 내 이력서를 어디선가로부터 전달받아 확인한 다음 불쑥 연락을 해 온 것도 불쾌했지만, 누군가의 불명확한 자의적 기준을 충족하려고 애를 써야지만 간신히 홍보물 한 귀퉁이에 나를 어시스턴트 큐레이터라고 지칭할 수 있는 상황이 착잡했다.

 

그런 맥락에서 큐레이터 내지는 학예사라는 명칭을 마주할 때마다 복잡한 심경이 된다. 2012년 부산비엔날레에서 에듀케이터로 일을 시작하면서 미술계 언저리에서 이런저런 일들을 해 왔지만 10여 년이 지난 지금도 나는 어딘지 모르게 미숙한 인력으로 여겨진다. 한 기관에 10년 가까이 장기 근속한 학예사들도 최저임금에 가까운 급여를 받으며, 퇴직금이나 초과근무수당 등은 생각할 수도 없다고 토로한다. 이런 상황에서 내가 다시 미술계로 돌아가 학예 관련 업무를 할 수 있을지, 한다면 얼마나 오래 버틸 수 있을지 사실 자신이 없으면서도 이 인정 투쟁의 각축장에서 완전히 벗어날 자신도 없다. 어찌 되었건 앞으로 있을 지난한 자기 증명 과정에 에너지를 덜 쏟고 싶어서, 올해 여름에 정학예사 3급 자격증을 신청했고 지금은 10월에 있을 심사 결과를 기다리는 중이다.

 

학예사란?

 

거칠게 말해 학예사는 박물관·미술관에서 근무하는 전문 직업인이라고 할 수 있다. 박물관및미술관진흥법 제4조에 따르면 박물관 및 미술관 사업은 박물관 및 미술관 자료의 수집, 관리, 보존 전시 및 교육, 조사 연구 업무를 포괄한다. 박물관·미술관에서 일하는 보존수복 전문가, 교육 전문가도 ‘학예사’로 일컬어지기도 하지만, 학예사는 대개 박물관·미술관 소장품의 수집, 연구, 전시 및 연계 프로그램 기획 등의 업무를 담당하는 이들을 지칭한다. 그리고 작가 인터뷰 및 문헌조사를 통한 작가 및 작품 관련 연구, 미술사 및 사회문화사적 맥락 연구, 필요시 외부 작품 대여 관련 공문 발송 및 보험 가입 등의 행정 업무, 보도자료 작성 및 배포, 포스터 등 홍보물 제작 발주 및 배포, 전시 작품 목록화, 전시 서문 및 전시장에 배치할 텍스트 작성, 미술작품 운송업체 직원과 작품 배치 및 동선 설정, 수장고에서 반출 자료 확인, 작품 상태 확인, 전시 도록 제작을 위한 원고 작성, 필자 및 번역자 섭외 및 텍스트 교정교열, 홍보 및 출판물에 들어갈 자료의 저작권 확인, 디자인 업체와의 출판 편집 작업, 도록의 배포, 전시 연계 프로그램 기획, 교육 프로그램 담당자와 협의, 개막식 개최, 정산 등 광범위한 업무를 맡는 노동자이다.

 

박물관및미술관진흥법 제6조에서 규정하는 바와 같이 학예사 자격을 취득하려는 사람은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자격요건을 갖춘 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명의의 자격요건 심사를 거쳐야 한다. 학예사 자격 제도는 정학예사 1, 2, 3급과 준학예사로 등급화되어 있다. 준학예사 자격증은 학사학위 취득 후, 준학예사 시험을 통과하여 경력인정기관으로 승인된 박물관 및 미술관에서 1년간의 경력을 채워야 취득할 수 있다. 많은 기관에서 정3급 학예사 이상을 자격조건으로 요구하고, 대부분은 정3급 학예사를 취득하고자 하는 편이다. 석사학위 취득 없이 준학예사에서 3급 정학예사가 되기 위해서는, 준학예사 자격 취득 이후 경력인정기관에서 4년의 경력이 필요하다. 학예사 자격 제도에서 학예사를 이와 같이 규정하고 있기 때문에, 경력인정기관이 아닌 박물관, 미술관, 대안공간, 갤러리, 비엔날레 조직위원회 등에서 전시 기획 관련 일을 하는 이들은 ‘학예사’라는 명칭보다는 ‘큐레이터’, ‘전시기획자’ 등으로 불리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큰 범주에서 본다면 학예사와 큐레이터는 동의어로 볼 수 있다.

 

 

8. 본문사진.jpg

2017년 기획했던 프로젝트 행사

- 낭독 상영 토크 프로젝트 ‘보세요, 그의 눈은 진주로 변했어요’. [출처: 손송이]

 

 

그런데 학예사가 되어 가는 과정에서 경제적 여건이 현실적으로 진입 장벽이 되고 있다. 준학예사로 경력인정기관에서 4년 경력을 쌓기란 쉬운 일이 아니므로, 많은 이들이 석사학위 취득 후 경력인정기관에서 2년간의 경력을 쌓아 3급 정학예사가 되는 길을 택하는 편이다. 문제는 모든 이들이 대학원에 진학할 만한 재정적 여력이 있는 것이 아니며, 이미 학예 직종 내에 석사 이상의 고학력자가 포진되어 있다는 데 있다. 일부 오지, 벽지에 소재한 기관을 제외하고는 경력인정기관에서 채용 공고를 내는 인원보다 그 기관에서 일을 하고자 지원하는 사람들이 많은 상황인지라 학예사들은 언제든 대체 가능한 인력으로 여겨진다. 많은 수의 학예직들이 근로조건의 불안정성, 저임금, 초과수당 등이 없는 초과근무, 학예 업무 이외의 각종 잡무 등을 감내하고 있는 와중에, 준학예사들은 상대적으로 그보다 더욱 열악한 일자리를 감내해야 할 가능성이 크다. 지인 중의 한 명은 집안 사정으로 인해 학부 졸업 이후 경력인정기관에서 경력을 채우기 위해 국립중앙박물관 인턴을 거친 후 국립현대미술관 인턴십을 마무리한 후에 사립 미술관에서 다시 예비 학예인력으로 일을 했다. 나 또한 경력인정기관에서 경력을 채워야 한다는 생각에 미술이론 전공으로 석사 과정을 수료한 이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1실에서 일반적인 학예보조 직원처럼 일을 하며 인턴십을 이수한 후에 지역 시립미술관에서 다시 인턴을 하며 자괴감을 느꼈다. 다른 선택지가 있다면 짧은 기간의 불안정한 보조 업무를 연속으로 선택하지 않았을 테지만, 사실상 더 나은 선택지를 찾기가 어려웠다.

 

학예인력지원사업

 

최근에는 박물관·미술관 정책 공부를 할 수 있는 대학원에 진학하여 학예사의 근로조건과 관련하여 선행 연구들을 찾아보면서 전국 사립 및 대학 박물관·미술관을 대상으로 시행되는 학예인력지원사업 관련하여 조사를 진행 중이다.

 

이 사업은 매해 변동되는 지원 예산에 따라 학예 전문인력과 예비 학예인력, 교육인력을 전국 사립 및 대학박물관과 미술관에 지원하는 정부의 직접 일자리 사업 중 하나이다. 취약계층이 실업 상태에서 벗어나 민간 일자리로 이행할 수 있도록 한시적 일자리를 제공한다는 정부의 직접 일자리 사업의 취지와는 달리, 대다수의 등록 사립미술관과 사립대학박물관은 학예인력지원사업을 인력확보의 방편으로 활용하고 있다. 이는 2021년 사립 및 사립대학박물관 전문인력 지원사업 참여 기관을 대상으로 행한 설문조사에서 해당 지원사업에 참여한 동기 중 가장 많이 손꼽혔던 답변이 ‘기관 내 업무 인력의 확보’였다는 것에서도 드러난다.

 

한편 직접 일자리 사업은 ‘한시적’ 성격이 뚜렷하기 때문에 반복참여가 제한된 탓에 학예인력들은 2회 이상 해당 사업에 참여할 수 없다. 그래서 해당 사업 참여 학예인력이 사업 참여를 종료한 후에는 지원사업에 참여하지 않는 관, 그중에서도 특히 경력인정기관에서 발생하는 희소한 채용공고에 경쟁적으로 응시를 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인다. 이런 점을 비추어 볼 때 해당 지원사업의 참여자가 지원사업 종료 후 해당 기관에 취업이 되거나, 타 박물관에서 채용되는 결과로 이어지는 경우는 드물다. 이는 실제로 인턴형 직접 일자리 사업에서 민간 일자리로의 이행 연계율이 3.9%에 그치는 등의 결과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즉, 인턴형은 일-경험 제공 일자리 이행 목적이 상대적으로 강한 사업임에도 불구하고 전반적으로 연계율이 높지는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또, 직접 일자리 사업에 있어서 사업 자체의 성과가 있더라도 고용의 측면에서 미흡하거나 부진한 사업은 ‘감액’ 등급을 부여받는데, 문체부 주도의 사립 및 대학박물관 전문인력 지원사업인 ‘박물관·미술관 진흥지원’ 사업은 2021년에 ‘개선 필요(감액)’ 등급을 받았다. 요컨대 이 사업은 한시적인 직접 일자리 사업으로 운영됨에도 불구하고, 실질적으로는 민간 일자리로의 고용 이행을 이끌어내기보다는 상시적으로 고용의 유연성을 높이는 기제로서 작동한다고 볼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비정규직 관련 법제와 사회학 분야의 관련 논문들을 살펴보면서 불안정하고 열악한 노동 조건들이 사회 전반의 구조적인 문제임을 깨닫게 되었다. 동시대 노동의 문제에 대해서 조금 더 알아가 보고 싶은 막연한 마음에서, 그리고 불안정한 노동 구조에 문제를 제기하고 이를 철폐하고자 운동을 하고 계신 분들을 멀리서 조금이나마 응원하고자 전국불안정노동철폐연대의 후원회원이 되었다. 요즘은 왜 그간 학예사들의 연대와 조직화, 노동조합 설립이 어려웠는지, 어떻게 하면 학예직 종사자들의 근로조건을 개선할 수 있을지를 고민하면서, 쉽게 냉소하는 무신경한 인간이 되지 않으려고 노력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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