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전국불안정노동철폐연대

질라라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첨부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첨부

■ 비정규직 투쟁 돌아보기

 

 

파견법에 맞선 4년의 투쟁, 방송사비정규직노조

 

 

김혜진 • 전국불안정노동철폐연대 상임집행위원 

 

 

 

철폐연대 사무실에는 방송사비정규직노조1) 주봉희 위원장의 사진이 걸려 있다. “파견철폐”라는 글씨로 머리를 물들이고 머리띠를 두른 채 담배를 물고 있는 그 사진은 한겨레신문 기자가 찍은 것으로서 그해 보도사진전에서 금상을 받기도 했다. 그 사진은 우여곡절 끝에 철폐연대 사무실로 왔다. 파견법이 얼마나 나쁜지 알리고 싶었는데 별다른 방법은 없고 머리에 글씨를 새기면 사람들이 쳐다볼 것 같아서 머리에 ‘파견철폐’를 새긴 노동자. 사진 속의 노동자, 주봉희 위원장은 우리에게 묻는 듯하다. 간접고용을 퍼뜨린 그 파견법은 어떻게 철폐할 것이냐고. 

 

파견법으로 해고되다 

 

1990년대 중반 이후 정부는 신자유주의 노동유연화 정책을 시도한다. 그중 하나가 파견법 제정이었다. 누구도 타인의 노동에 끼어들어 중간착취를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근로기준법과 직업안정법에 새겨진 고용의 원칙이었지만 정부는 그 예외로서 26개 업종에 한해 파견을 허용하자고 했다. 96년 말, 김영삼 정부가 파견법과 정리해고법을 날치기 통과하자 노동자들은 96·97년 총파업으로 맞섰다. 그러나 경제위기가 닥치고 노동계는 더 이상 투쟁을 이어가지 못한 채 파견법과 정리해고제도를 수용했다. 합법파견 노동자의 수는 많지 않지만, 파견법이 제도화된 이후 여러 유형의 간접고용이 계속 생겨났다.

 

파견법 도입 이후 카메라 보조, 오디오맨, 웹디자인 등 방송사에서 용역으로 일하던 노동자들은 파견직으로 전환했다. 운전직이 대표적인 직종이었다. KBS는 정규직과 비정규직 운전직이 섞여서 일했었다. 정규직 기사들은 개인 탁자와 옷장, 의자와 냉장고, 에어컨이 있는 대기실에서 쉬었지만, 비정규직 기사들은 좁은 공간에 커다란 선풍기 하나로 버텨야 했다. 출장을 나갈 때 정규직 기사들이 운전하는 차량을 추월해도 안 되고 배차 불이익도 받았었다. 그런데 경제위기 이후 진행된 구조조정은 정규직도 비껴가지 않았고, 정규직 운전직 중에 강제 명예퇴직으로 쫓겨난 이들의 자리는 모두 파견직으로 채워졌다.

 

파견법은 1998년 7월 1일에 시행되었다. 파견으로 2년이 넘게 일하면 정규직으로 간주하는 조항이 있었다. 방송사들은 2년이 되기 한 달 전인 2000년 6월에 파견노동자들에게 해고 통지를 보냈다. 10년도 넘게 일했던 노동자들도 있었지만 예외는 없었다. 방송사들은 노동자들을 해고하고 다른 파견직으로 교체 사용하기를 택한 것이다. 그 결과 운전직과 촬영보조 등 SBS 437명, MBC 160명, KBS 227명의 파견노동자들이 해고되었다. 방송사를 지켰던 이들을 함부로 자르지는 않을 것이라는 믿음은 참으로 허망하게 깨졌다.

 

 

7. 본문사진1.jpg

2018.10.12.~13. ‘파견법 폐기, 간접고용 철폐 2018 파견노동포럼’에서 상영된 영상 “파견법 20년을 돌아보다” [출처: 철폐연대] 

 

 

동료를 빌려서 투쟁하다 

 

해고 통지를 받은 노동자 중 이전에 노조활동 경험이 있었던 노동자가 있었다. 주봉희 위원장이었다. 그는 노조를 만들어서 싸우자고 동료들을 설득했다. 처음에는 27명의 운전직 노동자들이 모여 서울본부 직가입으로 노조를 설립했다. 그런데 카메라 보조와 오디오맨 등 해고를 앞둔 다른 파견노동자들도 주봉희 위원장을 찾아왔다. 그래서 ‘방송사 비정규직 노동조합’으로 노조 이름을 바꾸고 노조 설립신고필증도 다시 교부받았다. MBC와 SBS 지부도 만들었다. 조합원은 150명까지 늘어났고, 7월 1일 해고 전에 파업에 들어갔으나, 7월 1일은 다가왔고 노조는 해고를 막지 못했다.

 

해고 이후 방송사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오래 버티지 못했다. 오래 준비한 투쟁이 아니니 투쟁기금도 없었고, 워낙 저임금으로 일하던 노동자들이라 임금을 받지 못하면 생계를 유지할 수 없었다. 해고와 함께 조합원들은 떠나고 결국 27명만 남아 투쟁을 이어갔다. 방송사를 상대로 한 투쟁을 이어 준 것은 다른 투쟁사업장 노동자들이었다. 방송사비정규직노조가 파업에 들어가고 얼마 후 파업에 들어간 롯데호텔노조와 이랜드노조가 방송사 앞 집회에 연대해 주었다. 조합원은 얼마 없어도 KBS 정문 앞 집회는 연대하는 노동자들의 힘으로 활기가 넘쳤다.

 

남은 조합원들도 노조의 교섭으로 퇴직금을 받게 된 후 모두 떠났다. 두 달 후에는 위원장을 포함하여 두 명만 남았다. 주봉희 위원장은 남은 노동자의 생계를 걱정하며 집으로 돌아가라고 설득했고, 결국 홀로 남아 투쟁을 이어갔다. 그래도 KBS 앞에서의 투쟁은 연대하는 노동자들과 함께 꾸준히 진행되었다. 2000년 12월 파업에 돌입한 한국통신계약직 노동자들이 함께했고, 2001년 4월 파업에 돌입한 건설운송노조가 KBS 앞 집회에 동참했다. 매번 “조합원을 꿔서 집회를 했다”고 말하지만 다른 노조에서 흔쾌히 연대한 것은 그만큼 주봉희 위원장이 모든 투쟁사업장에 마음을 다해 연대해 왔기 때문이었다.

 

투쟁은 속절없이 길어졌다. 2002년 봄, 투쟁사업장들이 대부분 마무리되어 현장으로 돌아가거나 깃발을 내렸다. 주봉희 위원장은 홀로 남게 되었다. 숙소이자 사무실로 삼고 있었던 민주노총 서울본부도 장충동으로 이사를 했다. 소송에서도 패소했다. 주봉희 위원장은 생계를 유지하기도 어려웠고, 더 이상 투쟁을 유지할 전망을 갖기도 어려웠다. 그래서 훌쩍 투쟁 현장을 떠나기도 했다. 하지만 파견법에 맞서 누군가는 싸워야 했다. 한 달이 지나 다시 현장으로 돌아온 주봉희 위원장은 머리에 ‘파견철폐’라는 글씨를 물들이고, 마음을 다졌다. 다시 기약 없는 긴 투쟁이 시작되었다. 

 

이 해고가 정당하다는 법원 

 

1998년 정부는 근로자파견제의 도입을 반대하는 노동자들에게 ‘파견법을 입법해야 파견노동자를 보호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이름도 ‘파견근로자보호 등에 관한 법률’이라고 지었다. 1년 계약을 하되, 2년 이상 일할 경우 직접고용으로 간주한다는 내용을 포함하면서 이것이 노동자를 정규직화하는 법안이라고 했다. 그러나 파견사업의 관리기관인 노동부는 ‘동일한’ 파견노동자를 2년 이상 사용하는 경우에만 직접고용 간주 규정이 적용된다는 유권해석을 했다. 파견노동자를 2년마다 교체 사용하는 것을 정당화한 것이다.

 

방송사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해고된 후 ‘근로자지위존재확인소송’을 진행했다. 이것은 파견노동자가 파견법에 의해 보호될 수 있는지를 가늠하는 중요한 소송이었다. 법원은 파견노동자의 손을 들지 않았다. 방송사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1심과 2심에서 모두 패소했고, 비용 부담으로 인해 대법원까지 가지 못했다. 법원은 중간착취만을 목적으로 하고 직업소개소에 불과한 파견업체의 실체를 인정했다. 운전업은 파견법상 허용대상 업무이지만 한국방송공사는 노무도급계약 형식으로 위장하여 파견노동자를 공급받았고, 파견사업주인 렌트카업체는 파견업 허가를 받지 않은 무허가 파견업체였다. 게다가 이중파견이었다.2) 그런데도 법원은 이 파견을 정당한 것으로 인정한 것이다.

 

또한 법원은 ‘2년 이상 일한 파견노동자의 직접고용 간주조항’의 경우 “원칙적으로 제한된 파견기간을 초과하면서까지 동일한 파견근로자를 계속 사용해야만 하는 특별한 사정이 있는 경우에 한해서만 파견근로자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다”라고 판단했다. 직접고용 간주조항을 회피하기 위해 노동자를 교체사용하는 것이 문제가 없다고 판결함으로써, 파견법의 입법 취지가 노동자들을 보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비정규직을 자유롭게 쓰기 위한 것임을 법원 스스로가 확인시킨 것이다. 

 

다시 노동자들을 조직하고, 마침내 현장으로 돌아가다 

 

연대하던 다른 투쟁사업장 노동자들도 현장으로 돌아갔지만, 한 번 현장을 떠났다가 다시 돌아온 주봉희 위원장은 새롭게 투쟁을 시작했다. 다만, 이제부터의 투쟁은 이전과 달라야 했다. 파견법 소송에서 패소한 후 방송사들은 노동자들을 2년에 한 번씩 교체사용했다. 2000년 7월 1일에 파견노동자를 대량해고했던 것처럼 2002년에도 노동자들을 해고했다. 숙련된 운전직 노동자가 필요했던 방송사들은 심지어 방송사들끼리 노동자들을 교체하기도 했다. 이렇게 해고가 예정된 파견노동자들을 다시 조직해야 했다. 2003년 12월, 서울본부에서 방송사비정규직노조 일일주점을 열었고, 주봉희 위원장은 KBS 운전직 노동자들을 다시 만나기 시작했다.

 

주봉희 위원장은 해고된 지 3년이 넘었다. 당연히 얼굴을 모르는 노동자들이 더 많았다. 하지만 KBS에 차량이 들어올 때마다 이야기하자면서 불러냈고 노동조합에 함께하자고 설득했다. 그에 힘입어 조합원들이 다시 조직되기 시작했다. 그 노동자들의 입장에서도 2년마다 다가오는 해고 때문에 노조의 필요성을 공감했던 것이다. 조합원들이 새롭게 조직되면서 KBS와의 교섭도 재개되었다. 정연주 사장이 KBS 사장이었기에 노조와 교섭 자리를 마다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KBS의 입장은 완고했다. ‘정규직도 정리해고를 했는데 비정규직을 정규직화할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결국 정규직화 방안은 논의되지 못했다.

 

계속된 교섭 끝에, 2004년 3월 합의에 도달했다. KBS의 자회사인 ‘KBS비즈니스’ 밑에 또 다른 자회사, 즉 손자회사인 ‘㈜방송차량서비스’를 만들어서 운전직 노동자들을 복직시키기로 한 것이다. 이에 따라 KBS 258명의 파견노동자는 ㈜방송차량서비스 소속으로 채용되어 2004년 7월 1일부터 근무하게 되었다. 주봉희 위원장도 그곳으로 복직을 하게 되었다. 해고된 지 4년 만의 일이었다. 파견직은 사라져서 2년에 한 번 해고가 되는 일은 피하게 되었지만, 손자회사라는 이중의 간접고용 형태는 계속 유지되었다. 

 

 

7. 본문사진2.jpg

2005.11.13. 2005 전국노동자대회에서 주봉희 위원장의 ‘파견법 철폐’를 요구하는 퍼포먼스. [출처: 은평시민신문]

 

 

방송사비정규직노조 투쟁의 의미와 과제 

 

방송사 비정규직 투쟁은 우선 소수의 투쟁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보여 주었다. 4년의 기간 동안 한 사람이 끝까지 남아 투쟁하면서 노동자들의 고용구조를 바꾸어 낸 것은 소중한 성과이다. 방송사비정규직노조는 오래 버티며 때를 기다렸고 결국 현장의 노동자들을 다시 조직하고 교섭을 성사시켰다. 그런데 이 투쟁의 의미는 ‘결국 현장으로 돌아갔다’는 것에만 있지 않다. 주봉희 위원장이 그 긴 기간을 버틴 것은 ‘파견법을 없애자’는 의지가 있기 때문이었다. 파견법이 얼마나 문제인지 사회에 알리기 위해 주봉희 위원장은 머리를 물들이고 얼굴에 눈물을 그렸다. 지금도 소수가 남아서 투쟁하는 이들이 있다. 이 모든 이들이 현장으로 돌아가야 하겠지만, 그 과정에서 이 노동자들이 사회를 향해 무엇을 말하는지에 귀를 기울이고 함께 외쳐야 한다. 투쟁의 의미를 확장해 나가는 것, 그것이 함께하는 이들이 해야 할 일이기도 하다.

 

그리고 방송사 비정규직의 투쟁을 ‘연대’가 어떻게 실질적인 힘인지를 보여 주었다. 한 명이 남아 싸우는 이 사업장에서 투쟁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한 것은 투쟁사업장들의 연대였다. 이 글의 초안을 읽고 주봉희 위원장은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남겼다.

 

“해고된 지 4년 30일. 고단한 삶이었다. 조합원은 다 떠나서 혼자 남은 나는 외롭고 쓸쓸해 자신을 괴롭혔다. 그래도 난 투쟁하는 동지들이 있어 버틸 수 있었다. 한국통신계약직, 이랜드, 인사이트코리아, 레미콘 노동자들, 철폐연대 동지들이 큰 힘이 되어 주었다. 그러나 개인 생활은 엉망진창이었다. 전셋집에서 사글세로, 하루 한 끼가 전부였다. 2003년 초 인사이트 지무영 위원장이 서울본부에 찾아왔다. 복직하고 첫 월급이라며 150만 원을 주었다. 가슴은 콩닥거리고 눈에서는 주먹만 한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참 고마운 동지들이었다. 특히 철폐연대 동지들이 고마웠다. 2003년 5월 현장을 떠나 시골로 내려가 있었다. 핸드폰을 꺼놓고 받지 않았다. 그런데 7월 초 다시 전화가 왔다. 파견법 시행 5년 국가인권위원회에서 토론이 있으니 올라오라는 것이었다. 두 달 동안의 잠수도 잠시. 나의 투쟁은 다시 시작이었다.”

 

지금도 소수가 끈질기게 투쟁하는 사업장이 있다. 부산의 서면시장, 세종호텔과 같은 사업장이다. 이 투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 당사자들은 끈질기게 버티겠지만, 그렇게 버틸 힘을 주는 것은 바로 우리의 연대이다.

 

그런데 KBS 운전직 노동자들은 자회사도 아니고 손자회사로 고용되었다. 이런 이중착취 구조에서 노동자들의 노동조건이 좋아지기는 어렵다. 2009년 임금 15% 삭감, 2010년 식대 8만 7,000원 삭감(2011년 복원), 2012년 임금동결 등 노동자들의 노동조건은 점점 나빠졌다. 사측은 2011년에 복수노조를 만들었고 민주노총 조합원을 징계하고 불이익을 주었다. KBS는 ‘노조가 파업을 하면 계약을 해지한다’는 조항을 용역계약서에 포함시키기도 했다. ㈜방송차량서비스 노동자들이 퇴직하면 그 자리를 렌터카 업체를 통해 차량과 기사를 공급받았다. 그 때문에 2013년 316명이던 KBS 방송차량서비스 노동자들은 2023년 100명가량이 줄었다. 간접고용 구조를 바꾸지 않는 한, 노동자들의 삶은 나아질 수 없다.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파견법 철폐”를 말하지 않는다. 파견법은 슬그머니 정당화되었다. 콜센터, 사무보조 등 많은 파견노동자들은 2년에 한 번 해고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반월시화공단을 비롯한 공단에는 편법·불법으로 파견을 일삼는 파견업체들이 난무한다. 현대·기아자동차, GM대우, 현대제철 등 대기업 사내하청의 소송에서도 법원은 묵시적 근로계약관계를 인정하지 않고 불법파견으로 판결했다. 그리고 ‘파견법에 근거’하여 직접고용의무를 인정하여 기업들이 발탁채용을 할 수 있도록 만들어 버렸다. 이제 기업들은 불법파견 리스크를 없애겠다면서 파견허용업종을 더 늘리라고 요구하고, 심지어 스스로 파견업체를 만들기도 한다.

 

이제는 ‘파견법 철폐’를 이야기할 때이다. 파견·용역·사내하청·하도급 등 어떤 이름을 갖든, 간접고용 구조에서 이 노동자들을 채용하고 있는 간접고용 업체들은 실질적인 권한은 아무것도 없다. 대규모 파견업체이고 기술과 역량을 갖고 있다고 주장하는 콜센터 파견업체들도 숙련과 기술은 파견노동자들에게 있지, 파견업체에 있는 것이 아니다. 파견업체들은 중간착취 업체에 불과할 뿐이다. 주봉희 위원장은 자신의 투쟁으로 파견법의 이런 현실을 문제를 드러내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지금은 아무도 ‘파견법 철폐’를 위해 투쟁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파견법의 문제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직접고용’의 원칙을 다시 세우고, 간접고용을 허용한 ‘파견법 철폐’를 운동의 요구로 되살려야 한다.

 

 

---------------------------------------------------------------------

 

 

1) 투쟁 당시는 민주노총 서울본부 직가입노조로서 방송사비정규직노조였고, 현재는 언론노조 방송차량서비스지부이다.

2) 대한렌트카와 대한통운렌터카는 KBS와는 ‘렌트카 및 운전용역계약’을 체결하고, 대한카도크센터와 백산주택종합관리에서 운전자만을 파견받아서 자신들의 렌트카와 이렇게 파견받은 운전직 노동자들을 다시 KBS에 파견하는 형태였다.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