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정규직’이란 단어 자체가 생소한 시기였던, 지난 2000년 이후 한통계약직 동지들의 517일간의 처절한 외침을 비롯해 수많은 비정규 투쟁들이 명멸해 갔다. 그렇게 비정규직이라는 단어는 보통명사가 됐던 것이다. 그리고 최초의 비정규직 개악안에 대한 비정규노조 대표자들의 분노와 항의의 뜻으로 2004년 9월 열린우리당사 점거투쟁이 있었으며 이를 통해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사회적 요구가 최초로 의제화 되기도 했다.
우연일까? ‘진창에 끌어내려진 깃발’로 표현되기도 했던 민주노총, 아니, 민주노조 운동의 위기국면의 중심을 경유하며 우여곡절, 2년여의 시간을 끌어온 비정규직 개악입법은 이제 돌이킬 수 없는 막바지 국면으로 치닫고 있다고 본다. 과연, 노동기본권 보장까지는 아니라 하더라도, 척박한 사회여론을 일으켜가며 개악안 통과를 최선을 다해 2년이나 저지한 성과라도 인정해야 할 것인가?
비정규직 문제야 말로 집권초기부터 가장 심각한 사회문제였으며 노무현조차도 ‘사회양극화의 핵심 문제’라고 언급할 만큼, 정권의 아킬레스건이 아닐 수 없었다. 입만 열면 비정규직문제해결을 떠들어 왔던 정부, 그리고 국회야 말로 비정규개악안에 대한 일방처리의 부담이 없었을 리 만무했을 것이라는 것이 2년 이라는 시간을 끌어야 했던 진실에 보다 가까운 답일 것이다. 얼렁뚱땅으로 안 되는 사기에는 시간과 공이 필요한 법이다.
2년 전이나 지금이나, 사내하청, 그리고 건설플랜트, 그리고 특수고용 노동자들의 그야 말로 모질디 모진 투쟁들은 계속 되고 있다. 비정규 개악입법을 둘러싸고 전개되었던 숱한 논란과 쟁점들은 훨씬 이를 비껴갔음은 왜일까? 분명한 점은 이후, 비정규 개악안이 통과되든 말든 비정규노동자들의 투쟁은 계속될 수밖에 없고, 터져 나올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사유제한이냐, 기간제한이냐’, ‘고용의제냐, 고용의무냐’, ‘(파견대상)포지티브냐, 네가티브냐’ 등등 참으로 복잡한 쟁점들이 제기되기도 했지만 결국 ‘비정규직 철폐냐’이냐, ‘차별해소냐’로 대립되기 일쑤였다. 얘기가 그렇다 보니 벌써 860만 명이 넘는다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한꺼번에 정규직으로 전환하라는 요구는 도무지 사회인식도 없는 비현실적이고 무책임할 뿐 더러, 최대 강령적 요구라는 비난, 다시 말해 차별해소가 현실적 방안이라는 주장에 직면하기도 했다. 이는 비단 정부만이 아니라, 시민단체, 심지어 노조운동 일각에서도 공공연한 주장이 되기도 하는 실정인 것이다. 어쩌다 이 지경에 이르게 됐는가.
90년대 초반에도 ‘노동법개정투쟁' 국면이 있었는데 당시의 주요 이슈는 '정치활동 금지, 제3자 개입금지, 국가보안법 등’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대중일반의 의식과 경제적 이해를 뛰어넘어 정부자본이 그렇게도 싫어하는 정치적 요구를 걸고 투쟁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아예 ‘노래에 가사를 붙여 만들어’야 하는 걸까? 정부와 자본은 치밀하게 마치 비정규직의 처지를 보살피는 양, 허구의 논리를 들이대며 대중여론을 헷갈리도록 해왔다. 한편, 민주노조 운동은 비정규 개악안을 저지한다고 하면서도 정작, 현실의 처절한 몸부림으로 투쟁할 수밖에 없는 비정규직노동자들의 목소리를 과연 얼마나 대변해 왔는지 의문이다.
일반적으로 차별과 소외에 고통 받는 비정규직 문제의 해법은 ‘정규직화와 차별철폐’라고 각인돼 있다. 거기에 머물러 있었으며 여전히 시혜와 대리주의의 한계를 말하고 있다.
돌이켜 보면 일찌감치 보편적 권리로서의 ‘노동기본권’을 말하지 못했던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비정규직 문제와 장기투쟁사업장, 그리고 ‘로드맵’, ‘공무원 노동기본권’, 나아가 ‘한미FTA’의 투쟁과제는 따로 놀게 된 것이 아닐까. 가뜩이나 문명사회 중에 한국사회는 ‘노동기본권’에 대한 인식이 천박한 사회라고도 한다. 모든 자원을 동원할 수 있는 정부와 자본의 나름대로의 치밀하게 공들여온 ‘비정규직 이데올로기’에 대해 애초부터 접고 들어간 순간부터 패배와 양보는 이미 예고됐던 것이 아닐까.
노조를 만들고 투쟁하는 이유에 정규직, 비정규직이 다를 리 없다. 정부와 자본의 탄압방식이 다를 뿐이다. 숱한 비정규투쟁사업장에는 업종과 규모에 상관없이 천문학적 액수의 손해배상·가압류와 공권력 투입, 해고, 구속이 어김없이 이뤄져 왔다. 차별해소를 위해 노조를 선택했지만 국가로부터 돌아온 것은 ‘사용자 없고 노동자 아님’ 즉, ‘불법’이라는 규정이었던 것이다. 노동기본권은 관념의 문제가 아니라, 처절한 현실의 문제이며 최대강령이 아니라, 기본강령이다. 아직도 실존하는 진실에 대해 눈 감고, 귀 감는 다면 이제부터라도 착취와 차별을 합리화 하는 자본의 논리를 대변하거나 편승하는 행위로 규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야 말로 최근 비정규노동자들의 투쟁은 치열했다는 말로도 부족할 만큼이었다. 그러나 목적의식적 전선과 전략을 만들어 갈 수 없었음은 뼈아프게 자성하고 비판할 대목이 아닐 수 없다. ‘귀족노조’니, ‘뻥파업’이니 벼라 별 비난을 받아온 것도 사실이지만 비정규직 개악안 저지라는 이름으로 파업을 조직할 수 있었던 것은 그나마도 민주노총뿐이었다. 이러한 총파업에 비정규직 주체들은 간부파업과 선도투쟁, 그것이 최선이었다. 하지만 이것도 진실의 전부는 아니다.
57명의 단일노동사건 최대구속자, 그리고 백주대낮의 국가적 타살…. 순간 자본은 승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끝내 건설노동자들의 투쟁은 멈출 수 없다. 아니 멈추는 것이 가능하지 않다. 포항플랜트노조의 프래카드에 ‘건설비정규직 노동자라는 자기 규정’이 등장했으며 사회적 존재로서의 자각이 이뤄지고 있다. 같은 시기, 최초의 사내하청 노동자 공동파업이 전개되었으며 화물, 덤프, 등 특수고용노동자들의 하반기 공동투쟁의 준비되고 있다. 이 들의 요구는 노동기본권 보장, 즉 원청사용자성 인정, 노동자성의 인정이다.
다른 한편인 민주노총과 민주노동당에서는 노동계 단일요구안, 재수정안이 논의되고 있다고 한다. 대체 무슨 아이러니 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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