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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55|10|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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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55|10|2007
용역깡패의 폭력에 스러져간 젊음, 투쟁 속에 다시 불꽃으로 피어나길

:: 2007-11-07   조회: 3941

- 전국건설운송노조 안동근 열사를 만나다





안동근 동지에 관한 기억을 서울서북건설기계지부 전춘식 사무국장 동지와 함께 나누었다.


전국믹서트럭협회 조직에서 건설운송노조까지


“안동근 열사는 전직이 공무원으로, 이후 레미콘 회사에 관리직으로 근무하고, 또 차량을 불하 받아 일하는 중에 업계의 모순된 점을 많이 알게 되었어요. 그래서 92년에 전국믹서트럭협회(이하 전믹협)를 구성하고, 이 사람을 포함한 10명의 기사들이 인천에서 양심선언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계약해지를 당하게 되지요. 이후 전믹협은 전국의 레미콘 기사들을 조직하여 당시 1000여명 이상이 함께하게 되었습니다.
안동지의 활동으로 시행령, 시행규칙 등 기사들이 잘 몰랐던 법들을 모두 개정해 내게 됩니다. 그런데 실제로 기사들이 누려야 할 기본적인 바탕은 없었던 거죠. 분명 노동자인데, 위장사업자로 전락되어 있고, 회사로부터의 불이익을 당하는 것을 보다 못해 노동조합으로의 고민을 시작하게 됩니다.”"1999년경 이었어요. 전라도에서 마지막으로 전믹협 지부 발기인 대회를 하고 설명회를 하고 둘이 급히 서울로 올라오며 비행기를 탔어요. 당시 똑같은 생각을 갖고 있었는데 서로도 말을 못하고 있었던 거죠. 바로 노동조합에 대한 고민이었습니다. 전믹협으로는 기사들의 노동자로서의 기본권 쟁취에 한계가 있다는 것을 느낀 안동지는 ‘동지들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 같다. 법은 다 바꾸었는데, 검사도 1년에 2번인데 1번으로 바꾸어 냈고, 보험 수가도 보험회사의 횡포에 맞서 재경부와 싸워서 누구나 가입할 수 있도록 하였지만, 운반단가 만은 어떻게 할 수가 없다. 이를 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이냐’를 고민했습니다.
이러던 차에 민주노총에서 공문이 왔었지요. 사업자 등록증이 있어도 노조를 설립할 수 있다는 것이었죠. 우리 둘 다 공문을 받았으나 이야기를 못하고 있다가 그 날 서울 올라오는 비행기에서 서로 이야기를 하게 된 거죠. 그래서 서울 와서 민주노총으로 가서 권두섭 변호사도 만나고 자신감을 갖고 준비를 하게 되었습니다.”


전동지와 안동지는 바로 수도권 레미콘 상조회장들에게 연락하였고, 15명 정도가 모여 민주노총을 찾아갔다. 권두섭 변호사와 당시 조직국장인 심동진 동지 등이 모여서 같이 논의하고, 그 자리에서 바로 발기인을 구성했다. 모두들 노조 결성에 동의했다. 그리고 건설연맹 가입을 위해 건설연맹과도 만나서 본격적으로 노조설립을 위한 준비를 해 나갔다. 당시에는 노조설립필증이 나오지 않을 것이라는 추측이 강했고, 그러면 아셈대회장을 레미콘을 끌고 와서 막는 투쟁을 전개할 것을 선포하며 노조설립을 할 수 있는 최선을 준비들을 했다. 영등포 구청과 인천 두 곳에 설립신고서를 냈고, 하루 일찍 제출된 영등포 구청에서 3일만에 신고필증이 나왔다.

“당시 필증이 안 나오면, 차량 갖다 박으려고 딱지 값 등을 마련하는 모금운동 하고 있었는데, 필증이 나온 겁니다. 그리고 수도권 지역부터 조직을 시작했지요. 소문이 나니까 한 달 만에 2800명이 모였습니다. 우리도 감당하지 못할 정도였어요. 그만큼 노동자들의 한이 많았던 것이죠.”


그렇게 레미콘 노동자들이 결집되기 시작했고, 안동지는 노조의 사무처장을 맡았다. 당장 레미콘 노동자들을 조직하고, 교육하여 조합답게 만들어가는 것이 시급했다. 지역 순회 교육을 실시했고, 고양시에서 2박 3일 교육을 하던 중 사건이 발생했다. 유진, 이순 레미콘에서 교육에 참석한 동지들의 차량을 회사가 렉카를 동원하여 끌어낸 것이다. 유진 동지들은 교육 도중 현장으로 달려갔고, 많은 준비가 부족했으나 그렇게 파업은 시작되었다.

“그래서 일단 절차를 밟기 시작했습니다. 서울대학교에서 대의원대회가 있었는데, 당시 나는 준비가 부족하고, 경험도 없기에 최소 1년 정도 조직 후 파업투쟁으로 가야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현장에서의 투쟁은 밀고 올라왔고 90% 이상 찬성으로 파업이 시작되었습니다. 유진, 이순 상황 결합부터 투쟁이 시작된 거죠.”



파업투쟁, 그리고 갑작스레 우리 곁을 떠나버린 열사

“2001년 4월 13일 총파업을 걸고 서울역에서 출정식 갖기로 했습니다. 차를 동원하여 서울 진입을 시작했지요. 그날 아침 내가 있던 파주에서는 200여대가 모였어요. 100대는 이미 들어갔고, 100대가 서울로 가는데, 통일로에서 막혔어요. 그래서 되돌아와서 2시에 맞춰 출정식을 따로 가졌습니다. 이 때 까지만 해도 안동근 열사가 죽음의 길을 가게 될 것이라 생각을 못했던 거죠.”


사업장에서는 계속 싸움이 벌어졌다. 출정식 이후 4박 5일, 수도권 상경 노숙 투쟁이 이어졌고, 레미콘 동지들은 차를 끌고 여의도로 집결을 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면서 이순, 유진에서는 더 심한 탄압이 이루어졌다. 용역깡패가 들이닥쳤고, 그들은 조합원을 끌어내고 폭행했다.

“당시 안동지는 인천과 본조 양쪽을 뛰어다니며 싸움에 결합했고, 나도 계속 현장에 상황실을 꾸리고 붙어서 투쟁 중이었어요. 그 날 내가 먼저 전화를 했었어요. 그쪽 상황이 어떠냐고, 여기도 집회 준비 중이라 투쟁 지원가지 못한다고 했지요. 그 때 갑자기 ‘야, 저 새끼 뭐야, 카메라 뺐어’ 하는 소리가 전화 너머에서 들렸어요. ‘억’ 하고 두들겨 맞는 소리가 들리고, 그 길로 끌려 올라가서 구타를 당하고 입원하게 된 과정을 나중에야 알았어요. 그 건으로 인하대 병원에 입원하였지만 당시 부천 중부경찰서에서는 폭행에 의해 다친 것이 아니라고 결정했어요. 결국 그 후 서울대 병원으로 옮겨져 그곳에서 운명하셨죠.”




뜨거운 가슴으로 살았던 안동근 동지, 그리고 그의 가족

“그 친구를 92년부터 만나왔는데, 전믹협 시절에는 생계가 어려워서 새벽에 신문팔이 하고 요구르트 판매, 우유배달 하고, 오후에는 사무실에서 일을 했었습니다. 생활이 비참하기 이를 데 없었지요. 아내는 남편이 하는 일을 돕는다고 사무실에서 전화를 받고, 그런 생활을 레미콘 노조를 세울 때까지 했었습니다.”
“또 레미콘은 사고가 많아요. 한번은 사망한 동지의 가족들에게 장례식 자리에서 안동지가 돈 봉투를 내미는데, 돈이 없을 텐데 어떻게 마련했나 궁금했었지요. 그런데 알고 보니 본인 집의 물건을 팔아서 마련해 온 것이었습니다. 그 사실을 알고 다른 동지들도 나서서 같이 도왔지요. 지금도 그런 모습을 기억하는 동지들은 안동지에 대한 존경의 마음을 잊지 않고 있어요.”
“전국을 우리 둘이 같이 돌아다닐 때, 어느 날에는 티코를 가지고 강원도 고개를 넘어가야 했어요. 겨울이라 눈이 오고 땅이 꽁꽁 얼어 있어서 나도 운전을 하는 사람이지만 도저히 못 내려가겠더라고요. 그런데 안동지가 ‘저 밑에서 만나기로 레미콘 노동자들과 약속을 했고 동지들이 기다리고 있다’며 그 길을 차를 몰고 내려갔었습니다. 그 친구만 생각하면 지금도 눈물이 많이 나요.”



끝내 눈물을 보이며 전동지는 말을 멈춘다. 그 아픈 가슴이 잠시 진정되기를 기다려 가족들의 안부를 물었다.

“큰딸이 올해 대학 졸업하고, 아들이 중학교 2학년인데, 아내는 작게 옷가게를 하고 있어요. 열사가 마지막에 가면서 내 손을 잡고 말은 하지 못하고 쳐다보는데, 나는 그 눈빛에서 가족들 부탁한다는 말을 읽었어요. 안동지 가고 나서 노조에서 추모회를 만들고 매달 동지들이 조금씩 모아서 생활비를 보태드렸습니다. 딸이 대학 입학하면서는 지난번에 마지막 등록금까지 해 주었죠. 마지막 등록금 준비할 때는 모인 돈이 부족해서 열사 영상을 만들어서 판매하고 그 돈으로 등록금을 마련해 줄 수 있었어요. 졸업하고 취직도 바로 되어서 같이 참 기뻐했습니다. 딸이 ‘아저씨들 나 도와줘서 너무 고마워요’ 하더군요.
처음에는 가족들이 마음의 문을 안 열었었습니다. 원망이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그 나이가 40이었는데.. 그래서 가족들이 처음에는 인정하지 않으려 했고, 생활비를 보태드리고 찾아가고 해도 마음을 쉽게 열지 않았었습니다. 그러다가 노조가 운영하는 홈페이지나 내용들을 보면서 조금씩 마음을 열게 되어, 올해 추모제에는 함께 참석했습니다.
‘정말 고맙다’, ‘여러 사람 앞에서 떳떳이 내 남편에 대해 자랑스럽게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다.’는 말에 우리 동지들이 눈물을 많이 흘렸습니다. 이제는 가족들도 노동조합의 뜻과 안동지의 깊은 뜻을 받아들입니다.”




열사의 기억이 우리를 전진하게 한다.

“비정규 싸움을 계속 해오면서 조합원들이 비정규 법 관련 관심이 매우 컸는데, 그 법이 통과되면서 헛고생 한 것 같다는 이야기들을 많이 합니다. 그걸 설득해서 다시 기운 내게 하기가 어려울 때 안동지 생각이 많이 납니다. 큰 활동가를 잃은 거지요. 힘드니까, ‘괜히 노조 했다’거나, ‘조합이 뭐 해줬어?’ 라고 할 때마다 안동지가 생각나죠. 그는 목숨을 버렸는데, 다른 동지들이 힘든 개인사정을 먼저 내세울 때면 속이 상하고, 나를 다시 한 번 되돌아보게 되요. 그 동지들에게 안동지의 활동을 알려내는 것이 또 내 몫이라고 생각하고요.”


전동지는 ‘그가 있었다는 걸 알아달라는 것보다, 그가 생각했었던, 주변을 배려하고 함께 하는, 먼저 나서서 하는 그 마음들을 많이 가슴에 새겼으면 좋겠다’고 한다.

“나도 활동하면서 집 한 채 팔아먹고, 차 두 대 팔아먹었어요. 노동조합하면서 힘들었지만, 안동지가 못한 것 내가 꼭 하겠다고 마음으로 약속해서 아직까지 계속 이렇게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노동조합이 굴삭기, 덤프까지 조직되며 커지고 있어요. 해마다 추모제때는 눈물을 흘렸는데, 올해는 열사 앞에서 눈물보다도 ‘너한테 나도 이제 할 말 있다’는 뿌듯한 기분이었습니다.”
“처음에는 ‘노동조합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더 이상 안 된다. 다 차를 세워야만 할 것’이라고 생각했었지요. 그런데 노조 필증이 나왔지만 노조를 인정하지 않고 있어요. 덤프, 굴삭기가 노조를 조직하고 있지만, 노동조합이 제대로 인정되지 않는다면 더 힘들어 질 겁니다. 비정규직 철폐는 기를 쓰고, 악으로 반드시 승리해야 하는 문젭니다.
처음 조직할 당시에는 비정규직이라는 것도 몰랐고, 지금은 또 특수고용직이라고 우리를 부르는데, 어떤 방법으로든 이를 부숴내지 않는다면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꾸준히 조직을 만들어내는 수밖에 없고, 또 그 과정 속에 건설기계 동지들이 계속 모이고 있습니다. 계속 된 투쟁으로 쟁취해야 할 것이고, 끝내 그렇게 될 것입니다.”





열사에 대한 기억은 아프다. 하지만 마냥 아프기만 한 것은 아니다. 열사의 뜨거운 생은 남은 자들의 기억으로 파고들어, 오늘도 우리를 전진하게 한다.






편집위원회 | 전국불안정노동철폐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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