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석회의 구성과 활동
한라하청, 지역금속노조 동명분회(카스코), 캐리어하청노조 투쟁에 이어 01년 12월 기아사내하청노조가 결성되어 정리해고 분쇄, 고용승계 쟁취를 위한 투쟁이 시작되었다. 연이어 작년 한해 '정보통신부 계약직 노조(민주노총 지역본부 직가입)' 투쟁을 바탕으로 건설되었던 전국집배원노동자협의회(준)(이하 집노협(준))의 투쟁이 전개되면서, 광주지역에서 비정규직 노동자들간의 연대가 활발해지기 시작했다. 이러한 연대활동을 바탕으로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안정적인 연대투쟁의 필요성이 제기되면서 지난 2월 '광주·전남 비정규직 노조 연석회의(이하 연석회의)'가 구성되었다. 초기 연석회의에는 민주노총 지역본부(미조직 담당자), 한라하청, 캐리어하청, 기아하청, 집노협(준), 광양 삼화산업, 건설노조, 건설운송노조, 재능교육교사노조9지부, 여성노조 등 지역의 거의 모든 비정규직 노동조합들이 참여하는 가운데, ▷ 각 사업장의 투쟁에 최대한 연대하고 ▷ 비정규직 문제를 사회화하기 위한 활동을 중심으로 투쟁할 것을 결의하였으며, 이후 4월 말에 보건의료노조 전대병원원내하청지부
가 한국노총 연합노련에서 민주노총으로 조직을 변경하면서 새롭게 결합하였다. 2월에 두 차례에 걸친 공동 선전전을 평가하면서, "▶ 비정규직 철폐 ▶ 파견법철폐와 중간착취 근절 ▶ 특수고용노동자 노동기본권 쟁취"를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공동 투쟁요구로 정립하였다.
연석회의는 상반기 동안 금요 선전전, 월 1회 공동집회를 전개하면서 노동청 앞과 각급 사업장 앞에서 비정규직 문제와 각급 노조의 상황을 알려내는 투쟁을 전개하였다. 또한 5.18 투쟁과 6월 초 월드컵 기간 중에 비정규직 투쟁 주간을 계획하여 집회와 선전전, 하청노조 토론회, 영화제 등을 실시하였다.
연석회의의 활동과 위상·역할에 대한 평가
이렇듯 연석회의가 비정규직 노동조합들의 자발적인 연대체로 구성되어 어렵게 투쟁하고 있는 각급 비정규직 노조들에 실질적으로 연대하면서 비정규직 문제를 사회화하려 했던 시도는 광주전남 지역 비정규직 투쟁의 일대 전진이었다고 평가된다.
하지만, 초창기부터 연석회의가 비정규직 문제를 사회화시키기 위한 활동을 중심적인 과제로 하여 이를 위한 독자적인 투쟁 계획을 세워내지 못하면서, 단위사업장 현안에 몰입하는 한계를 노정하게 되었으며, 급기야 6월 월드컵 기간 중 집중투쟁을 마지막으로 사실상 활동이 중단되었다.
활동중단의 원인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주요하게는 소속 노조들이 ▷ 자 노조 일정을 중심에 놓고 사고하는 단사이기주의를 극복하지 못했고, ▷ 약속불이행에 따른 불신이 팽배해지면서 통합력이 급속도로 해체된 데 있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요인은 ▷ 연석회의가 지역 공동투쟁 일정을 조율하는 단위가 아니라, 단사를 뛰어넘는 비정규직 문제에 대한 공동 전선 형성에 복무하는 것을 주요한 과제로 삼는 단위였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단위사업장 문제해결을 위한 투쟁일정에만 목매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뒤돌아보면 연석회의는 주 1회 공동선전전, 월 1회 공동집회를 무계획적으로 진행함으로써, 장기적이고 안정된 투쟁기조 없이 그때 그때 임기응변하듯 표류해왔었다.
비정규직 철폐의 문제는 반(反)신자유주의 전선을 전국적으로 설치하
는 문제이고, 전선의 전진없이 단위사업장 현안의 근본적인 해결도 결코 진전될 수 없다는 사실을 연석회의 소속 노조들도 충분히 공감하고 있었지만, 이는 추상적인 수준의 동의일 뿐 구체적인 사업과 공동투쟁 계획으로 실질화되지 못했다. 최저임금 현실화 투쟁이나 불법파견, 중간착취 문제, 블랙리스트 문제, 노동법 개악 저지 투쟁 등은 단사를 뛰어넘는 공동의 문제로 상정하여, 전국적인 수준에서 공동계획하고, 수개월에 걸친 투쟁일정이 수립되었어야 했다. 연석회의는 각 사업장의 상황 공유나 투쟁일정을 확인하는 차원을 넘어, 전술을 함께 논의하고 실현하는 단위였어야 했다. 단사 노조가 할 수 없는, 정말 꼭 연석회의 같은 비정규직 노조 연대체가 할 수 있는 일을 안정적으로 수행함으로써 통합력을 창출했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함으로써 연석회의 소속 노조들이 다시 단사의 투쟁일정 중심으로 뒤돌아서는 것을 막아낼 수 없었던 것이다.
'당사자' 논리를 극복하고 반신자유주의 노동자연합전선을 지향해야
9월 초, 연석회의가 2개월만에 다시 소집되어, "비정규직 철폐 100만인 서명운동"을 중심으로 한 하반기 투쟁이 논의될 때, 비판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상반기 연석회의 활동을 평가하면서, 100만 서명운동과 같은 비정규직 관련 투쟁이 또다시 연석회의에 집중적으로 떠넘겨지는 것에 대한 우려였다. 사실 상반기 지역 비정규직 투쟁 과정을 평가해 보건대, "비정규직 투쟁은 당사자인 비정규직 노동자가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논리가 현실에서는 비정규직 관련 투쟁과 사업을 "당사자인 비정규직 노동자들만" 진행하는 형태로 외화되었다. 이는 다시 의도와는 다르게 비정규직 투쟁은 "비정규직 노동자들만"의 투쟁이라는 왜곡된 사고를 알게, 모르게 재생산한다.
민주노총 광전지역본부의 사업방식의 문제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은 전체 민주노조운동 진영 내에 널리 팽배해 있는 문제이다. 비정규직 확대의 문제는 노동의 유연화, 민영화, 외주화, 분사화, 노동통제·노동강도 강화와 같은 신자유주의 구조조정과 직결된 문제이지, 구조조정의 일부로 치부하거나, 구조조정 저지 투쟁과 분리해서 사고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따라서 비정규직 철폐투쟁은 비정규직, 정규직 모두의 과제일 수밖에 없으며, 기업내 구조조정과 통일적으로 사고되고 통일
적인 투쟁계획으로 제시되어야 한다. "비정규직 철폐투쟁을 전개하자"는 핵심은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에 맞서는 '노동자연합전선'을 형성함으로써, 전체 노동자가 계급적으로 단결하는데 있는 것이다. 하지만, 현장의 정규직 조합원들이 아직 자신의 고용문제와 노동강도 강화의 문제, 외주화 문제 등의 구조조정을 비정규직 문제와 연결선상에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이유를 들어 정규직 노조 간부들과 정규직 활동가들이 비정규직 철폐 투쟁을 부담스러워하거나, 기피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연석회의가 보여 준 소기의 의의는 비정규직 노조의 독자적인 연대체였다는 데 있다.
현실이 그러하다면, 비정규직 철폐투쟁을 전체 민주노조진영의 중심적인 과제로 세워내기위한 계획이 필요하고, 이를 위한 유력한 방법으로 "비정규직 노동조합 협의회"와 같은 비정규직 노조 주체들의 독자적인 연대체를 전국적으로 구성하는 것이 그 출발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비정규직 노조 연대체는 민주노총의 사업을 떠 안는 소극적인 단위가 아니라, 민주노총이 비정규직 투쟁과 조직화를 중심적인 과제로 받아 안을 수 있도록 단결된 발언을 조직하는 독자적인 단위여야 한다. 비정규직 조직화가 미조직 조직화 문제로 환원되거나 장기적으로 투쟁중인 비정규직 사업장의 문제가 "장기투쟁사업장" 문제로 동일하게 취급되는 형태로 "비정규직" 문제가 묻혀서는 안된다. 이는 앞에서 언급한 왜곡된 '당사자' 논리와는 무관한 것이다.
1880년대 말, 영국의 가스 노동자들로부터 출발하여 엘레나 마르크스가 주도했던 영국 런던 부두노동자 투쟁과 같은 "신(新)노동조합주의" 운동은 관료화되버린 숙련노동자들의 귀족노조와는 다르게 "비숙련노동자"를 독자적으로 조직화하는 투쟁이었고, 대공장 "비숙련노동자"가 중심이된 20세기의 산별노조운동으로 발전하였다. 이와 비슷하게 지금의 신자유주의 하에서 비정규직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음에도, 대공장-정규직-남성 중심의 노동조합운동이 헤게모니를 행사하는 한계를 극복하고, 자본의 노동자 분할 전략에 맞서 노동자의 계급적 단결을 꽤하기 위해서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광범위하게 조직화하고, 비정규직 노조들의 독자성을 확보해야한다.
그렇다고 해서 독자적인 비정규직 노조 연대체가 "제3노총 건설" 논의 등으로 왜곡되어서는 안된다. 독자적인 비정규직 노조 연대체 건설도 어디까지나 계급적 단결을 위한 것이지, 분리주의적 사고에 근거한 것이 아니며, 80년대 말, 전노협 건설 과정에서 제기되었던 노총민주화냐?, 제2노총 건설이냐는 논쟁이 제기되었던 맥락과도 그 현실적 논의 지반이 다른 것이다.
사실, 광주전남 비정규직 노조 연석회의는 비정규직 노조들의 독자적인 연대체의 필요성과 그 연대체가 독자적인 사업계획을 갖지 못했을 때의 한계를 동시에 보여주었다.
연석회의 해소와 지역본부 미조직 특위로 전환 후의 과제
민주노총 광전 지역본부는 상반기 연석회의 활동에 대한 평가를 토대로, 하반기에는 연석회의를 해소하고, 지역본부 미조직특위로 전화하는 계획을 제출하였다. 연석회의에 대한 평가가 면밀히 진행되지 못한 가운데, 지역본부가 제시한 평가는 주요하게 '연석회의와 지역본부간의 관계'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연석회의 구성 주체들 중에 집노협(준), 여성노조와 같은 공식적으로 민주노총 소속이 아닌 조직들이 있음으로 인해 민주노총과의 정확한 관계가 정립되지 못했고, 지역본부 미조직 담당자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책임주체가 불명확하여 사업을 원활히 진행하는 데 질곡요인이 되었다" 는 것이다. 따라서, 지역본부의 공식체계인 미조직 특위로 재편하여, 책임성과 사업의 명확성을 확보하겠다는 계획이다. 물론 지역본부가 책임지고 비정규직 투쟁을 받아 안고, 재정의 문제까지 해결해 보겠다는 것은 지지해야하는 내용이다.
그러나, 앞서 지적한 상반기 연석회의 활동의 핵심적인 한계를 바로 읽지 못한 채, 민주노총의 공식 체계로 재편이라는 조직형식에 과도하게 집착하는 것은 잘못되었다고 본다. 비정규직 조직화는 그 특성상 공식적인 내셔날센터의 체계로 묶을 수 없을뿐더러, 조직형식에 과도하게 집착하는 것은 오히려 비정규직 철폐 투쟁의 장애로 작동될 수 있다. 프랑스, 일본 등 타국의 예에서도 비정규직 투쟁은 공식적인 노조체계와는 다른 방식으로 조직되어왔고, 심지어 노동조합 활동가들 뿐만 아니라, 정치·사회단체의 활동가들까지 포괄되는 방식으로까지 전개되고 있다.
하반기 100만인 서명운동 과정에서 다시 한 번 반복되고 있는 것 같아 또 다시 아쉬움이 남지만, '당사자' 논리를 극복하고, "지역본부 차원에서 책임지고" 비정규직 철폐를 위한 독자적이고, 꾸준한 사업계획을 제출하고 정규직 노동조합과 함께하는 비정규직 철폐투쟁의 계획 등을 제출하지 않는 이상, 연석회의가 던졌던 소기의 문제의식은 희석될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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