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불안정노동철폐연대 질라라비
HOME | 운영자에게 | 소개 | 사이트맵
NO.77|08|2009
검색
Home > 지난목록 > NO.77|08|2009  

NO.77|08|2009
우리 안의 민주주의

:: 2009-09-30   조회: 3297


<노동자의 민주주의는 어떠해야 하는가>


■ 자유민주주의 공화국 뒤집기
■ 노동자 민주주의란 어떠해야 하는가
■ 우리안의 민주주의, 코스콤사례

이명박 정권 들어서 ‘민주주의가 죽었다’라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민주당마저 ‘민주주의가 죽었다. 다음선거 때 심판하자’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노동자 민중의 생존권은 마치 선거라는 절차를 통해 정권이 교체되고, 형식적인 민주주의가 회복되면 해결되는 것처럼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사실 노무현, 김대중 정권 때, 그들이 말하던 민주주의가 실현되었을 때도 노동자민중의 생존권에 대한 탄압은 계속되었고, 삶이 어렵긴 마찬가지였습니다.
민주주의라는 것이 누가 정권을 잡느냐에 따라 실현되거나 안 되는 것은 아닙니다. 또 선거와 같은 형식적인 절차를 갖추는 것으로 민주주의가 실현되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민주주의에 대한 정의를 다시 한 번 이야기하고, 그들이 말하는 민주주의의 한계를 이야기를 나눠보고자 합니다. 분명 형식적인 측면에서 더 나아가야 할 것도 있겠지만, 민주주의라는 말 속에 담겨야 할 철학 또한 ‘민주주의가 죽었다’는 분노들 속에서 함께 논의되어야 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한편 노동자의 민주주의, 노동조합의 민주주의도 위기입니다. 예전보다 형식과 절차는 잘 갖춰졌지만 그 형식과 절차를 갖추어 가는 동안 단결과 계급성을 놓쳐 온 측면도 있습니다. 그 때문에 우리는 소수의 의견, 투쟁하는 개인, 집단을 때로는 배제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살펴보고, 이를 극복하고 단결과 연대를 실현하는 노동자 민주주의란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함께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을 보신 적이 있으신지? 이 소설은 공산주의 내에 침투한 파시즘을 보여주고 있다.아마 소설을 읽거나 영화를 보신 분이라면 코스콤 비정규직(이하 ‘코비’)의 사례가 이 소설과 거의 흡사한 과정을 밟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2007년 5월 투쟁부터 2009년 12월 직접고용에 합의하기까지

  
코스콤(옛 한국증권전산)의 사내하청에서 십수 년을 일했던 노동자들은 정규직화 회피를 위한 사측의 위장도급 운영과 고용불안 처지에 불만을 갖고 2007년 5월 사무금융연맹 증권산업노조에 가입하여 코스콤비정규지부를 설립한다. 코스콤은 임직원의 비정규직 중간착취 및 차별이 극심한(정규직 대비 1/5 수준 임금) 대표적 사업장이었다. 그리고 정규직화를 요구하며 2007.6.28 일주일의 1차 파업을 거쳐 2007.9.12일 2차 파업에 돌입하여 475일간 장기간 투쟁하게 된다. 그 결과 2008년 12월말 직접고용 무기계약에 합의하고 3개월 이내에 복귀하기로 한다. 그러나 총 76명의 조합원 중 65명만 직접고용에 합의하고 11명은 추후 합의키로 한다.


07년 모범적인 조직운영 (조합원 분임토론과 교육과 평가, 정보공유)


증권노조의 상근간부의 절반이 코비에 파견되어 노동조합의 운영과 교육에 힘쓴다. 이것은 특히 민주적인 의사결정 구조를 마련하고 노동자의 세계관을 갖추기 위한 것이었다. 또한 쟁의행위와 교육, 총회 등을 마치고 난 후에는 반드시 ‘평가’를 함으로써 공통의 문제의식을 갖게 되면서 차기 계획에 대한 안목을 갖추는데 큰 힘이 되었다. 특히 간부들의 자세 역시 우수했는데, 2차 파업 전에는 실무에 대한 집중 훈련을 받고 매일 새벽까지 회의와 토론을 거치며 장기전이 될 수 있는 파업을 준비했다. 또한 조직라인은 활발한 분회모임을 추진하고 간부들이 가능한 조합원을 많이 찾아다니며 의견을 듣고 조직했다.
이때까지는 항상 모든 회의의 기록을 남기고 각 실무진의 업무추진 현황을 보고하는 등 기본적인 체제가 유지되고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코비 내의 투쟁 회의론과 노사화합론이 제기되면서 점점 달라지기 시작한다.


투쟁무용론, 외부세력 개입론, 노사화합이 서서히 조직을 잠식

  
급박하게 돌아가는 정세 속에 엄청난 육체적 피로가 계속 되자, 서서히 많은 것들이 생략되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조합원과 공유하는 상황 보고가 점점 뜸해졌고 그 내용도 굉장히 부실했으며 피상적인 사건만 보고하게 되었다. 두 번째로는 교육 프로그램이 없어졌으며, 세 번째로 학습과 교육을 기피하는 조직 분위기가 팽배하면서 자연스럽게 조합원 분임토의가 사라졌다. 조합원 정보공유와 토론은 매우 중요했는데 투쟁의 정세를 모두가 동일한 정보로 공유하고 분석해야만 향후 방향을 함께 결정지을 수 있는 것이었다. 이는 총회를 회피하는 현상으로 확대된다. 그 다음으로는 소식지 발행을 불필요한 것으로 간주했다. 이로 인해 회사를 상대로는 한 목소리를 내야할 조직이 제 각각 회사를 상대로 가이드라인을 벗어나는 요구와 발언들을 하게 되었다. 이는 전체 전술에 있어서도 치명적인 결점이었다. 모든 상황정보가 일부 간부에게만 집중되자 조합원들은 자기 투쟁에 대해 잘 알 수가 없었고, 자연스럽게 조합 활동에 소극적이고 방관적인 태도를 취하게 되었다. 그러나 간부들은 이러한 조직적 결함이 어디에 원인이 있는지는 찾으려 하지 않고 조합원들의 근태를 비판했다. 그리고 당연한 수순으로 간부들은 그런 조합원들에게 상명하복식의 명령 전달체계로 조직을 운영하게 되었다. 여기에 남성들로만 구성된 군대식 정서가 개입되면서 ‘동지’ 보다는 ‘형님-아우’의 문화가 조성된다. 이것은 동지적 친밀함이라는 측면과 함께 조합 내 권위적 관계도 인정하는 양면성을 띄고 있었다. 이러한 조직 분위기 역시 추후 조직 내 관료주의, 패권주의의 승리에 일조하게 된다.


정보독점은 간부의 권력집중과 특혜로


2008년 봄, 간부 2명이 파업 기간 중에 술에 취해 다른 테이블 손님과 싸움이 난 적이 있었다. 어쨌든 파업 중이었기 때문에 간부가 저지른 그 사건은 평가가 필요했고, 공식적으로 사과도 했어야 했다. 그런데 공개적인 논의나 당사자의 사과가 이뤄지지 않았다. 논리는 ‘지켜줘야 한다’는 것이었다. 감추면 늘 문제는 더 지고 조직 상황을 악화시킨다.
이 사건은 분명히 개인의 책임이었는데 당시 총무가 벌금(총 380만원)을 지부 재정으로 지급했으면 좋겠다고 제안했다. 지급이 아닌 개인에게 특별 대출해주는 것으로 정리를 했다. ‘파업 기간이라 당사자들이 갚을 능력이 없다하니 빌려주자, 안 그러면 조직의 수장이 감옥 가야한다’는 논리였지만, 당시는 지부가 정말 돈이 없을 때였다. 조합원 생계비를 15만 원을 주냐, 20만 원을 주냐를 놓고 몇 시간씩 회의할 때였다. 그 380만 원이 아니었으면 1인당 5만 원 씩 더 줄 수 있었다.
그러나 이와는 대조적으로 조합원에 대한 처우는 냉담했다. 비슷한 시기에 한 조합원이 오랜 파업으로 치질이 악화돼 수술해야 하는 지경에 이르자, 40만 원만 지부 돈으로 빌려달라는 것을 재정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그 외에도 일부 간부들은 정기 집회에 결석하는 일이 잦았고 농성장 출퇴근도 정해진 규칙 없이 마음대로였다. 물론 조직이기 때문에 일부 조합원들도 그런 일이 발생하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비난의 대상은 조합원이었지 조직을 장악한 간부와 친분이 두터운 간부는 항상 예외였다.

평가가 없다면 → 자기비판이 없고 →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은폐하는 조직이 된다 → 권력의 횡포로 발한다.


직권 조인 전초전 (어제는 동지가 외부세력으로 분리되다)


‘외부세력에 의한 무리한 투쟁과 선동으로 조합원들만 싸움판의 희생양’이라는 오래된 자본의 이데올로기가 치고 들어왔다. 코비 결성부터 결합하고 가장 모범적으로 산별노조의 기치를 실천하던 증권노조 파견 3인과 민주노총 활동가는 서서히 가장 신뢰하는 동지에서 외부세력으로 분리되기 시작했다. 급기야 2008년 가을에는 이 ‘외부세력’을 제외하고 집행부 회의를 하겠다고 하였고, 이에 내부에서 반발하자 ‘회의’가 아니라 그냥 모임이라고 치부하였다. 당연히 이것은 회의가 아니었으므로 회의록도 없었다. 그 모임에서 이루어진 주된 내용은 이제 다 컸으니 외부세력으로부터 독립해야한다, 그러면서 증권노조로부터의 탈퇴가 아닌 파견 3인의 축출로 여론을 몰아갔다. 이 현상은 같은 시기에 상급단체인 증권노조 사태1)와 긴밀한 관련이 있다. 또한 이 같은 주장이 발생하던 시기인 2008년 봄에 나는 이런 기류를 조장하던 상급단체 간부에게 반발했다는 이유로 폭행2)을 당하기까지 한다.


외부세력 개입론을 취급한 배경과 투쟁무용론


더 이상 투쟁만으로는 파업을 끝낼 수 없기 때문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민주적인 방식(민주노조의 원칙을 지키는 방법)으로는 사태를 끝낼 수 없기 때문에, 어떤 과정을 거쳐서 어떤 결과가 되든 관계없이 파업을 종료하고 싶었던 배경에 있다.
특히 교섭 전술에 있어, 연맹 임원들의 공중전 실력을 이렇게 쉽고 안전하고 효과적인 투쟁방법들이 있는데 지금껏 쓸데없이 고생했다는 생각이 들었을 것으로 추측되면, 더불어 무능한 활동가들의 대책 없는 투쟁 만능주의 주장을 비교해보면서 연맹 임원들의 말이 더 신뢰있고 코비를 돕는 것이라고 생각한 것 같다. 그러나 그것 역시 투쟁 평가에서 엇갈리는 것으로, 그 간의 투쟁과 이슈화 때문에 교섭이 열린 것이라고 평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연히 코비에게 투쟁을 강요한 것은 코비 문제의 해결보다는 비정규직 문제의 사회적 이슈화라는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활동가의 개입으로 그 화살을 돌리게 되었다.


지부장 전권 위임요구3)와 노사화합


장기간의 파업 사태를 종료시키기 위해서는 노사화합이 필요하고, 일부 희생이 불가피하다 그러므로 사태종결 후 사후 반발이 있더라도 지부장의 전권(직권조인)으로 직권조인이 필요하다는 논리였다. 물론 지금도 ‘노사화합’이라는 단어가 내포하는 의미를 그들은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학습과 교육은 모두 거부했기 때문이다. 어쨌든 직권조인을 하기 위해서는 사전 요구안을 조합원에게 공개해서도 안 된다는 주장을 지부에서 하게 되자, 증권노조는 거기에 동의할 수 없으니 교섭권을 지부에 위임하겠다고 하였다. 지부장 전권요구가 뜻대로 되지 않자 증권노조 파견3인과 지부 간부와의 갈등은 심해졌다.


연맹의 주문, 지부장을 중심으로 단결하라


고질적인 관료주의와 위원장 권위보호는 민주노총 전체에 마치 오랜 전통처럼 내려온 듯하다. 상급단체인 연맹 역시 여기서 탈피하지 못해서 항상 코비 문제에 있어서 ‘지부장을 중심으로 단결하고 보좌하라’는 것이었다. 그 결과 조합원들 사이에서는 당연히 지부장은 잘못해도 건드리면 안 되고 무조건 믿어야하는 종교처럼 등장한다.


폐쇄된 집행부를 견제한 학습팀의 활동에 대한 탄압


소수의 인원으로 구성된 이 소모임은 처음에는 단순히 책을 읽고 토론하였으나, 점차 현장활동으로 성격이 확대된다. 가장 먼저 했던 것은 정보 공유와 질문하기였던 것 같다. 현재 정세와 지부에서 무슨 일을 하는 지 돌아가는 모양새를 도통 몰랐던 조합원들에게 정보 공개를 통해서 조합원 스스로 주체가 될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었다. ‘조장단 회의’와 ‘분회모임’에 무게를 싣고 집행부 회의록을 열람하도록 추진했다. 그러나 집행부는 이 흐름을 감지하고 단번에 견지했다. 이것으로 조직 내 분열을 일으킨다는 것이 주요한 이유였다. 이미 조직력은 그들이 장악하고 있었기에, 무엇을 해도 먹히지 않은 채 나와 학습팀 성원들의 입지만 좁아져갔고 ‘사조직, 빨갱이, 좌파’라는 말들을 들어야했다. 학습팀 성원임을 드러낼 수 없었던 몇몇 동지들과 성원들은 매일 밤 조합원들의 눈을 피해 몰래 천막에서 나와 따로 모임을 가지고 현안 대응을 논의했다. 이것은 추후 ‘사전모의’ 했다는 죄를 씌우며 일부 집행간부 축출에 사용되고 학습팀 탄압의 골자를 이루게 된다.


노사화합의 기치 실천


1) 총회의 정신4)을 뒤엎고 소수의 희생을 강요로 합의를 이끌어내다.
2) 한나라당 강성천, 홍준표 의원에 감사 상패 수여 및 수상.
3) 구조조정 발생하면 노동조합이 스스로 받겠다고 조합원 총회에서 공표
4) 노동조건과 관련한 인사권은 회사에 있고, 이에 대해 이의제기 하지 않겠다고 서약.
5) 지부 운영규정은 ‘회사의 본래적 기능과 사명을 다하게 하는 데 있음’


노사화합의 기치를 두고 얻어낸 노동조건


1) 조합원 평균 연봉 1800만원(기존 하청업체 연봉과 동일)
2) 대다수 지방거주 조합원 서울 인사발령(사용자의 인사명령에 대하여 취소요구 및 이의제기 하지 않는 각서를 쓰게 함으로 사실상 노동조합이 합의한 결과)
3) 의료비 지원(200만원~ 3년간 단계적 적용), 각종 기념일에 상품권 지급
4) 열악한 노동조건으로 인한 다수의 희망퇴직자 발생(17명)
5) 노사화합 역할을 가장 잘 실천한 핵심 간부 2인은 업무의 대표자리를 꿰차고 실제로는 인사노무대행 역할을 하며, 결과적으로는 노동조합과 사측간의 완충제 역할을 하고 있음.
- 예) 조기출근 유도 및 자체적으로 업무 관련한 시험 실시 등


지부장과 집행부 권한 집중 및 조직 확대 가능성 말소


1) 집행기구와 의사결정 기구를 운영위원회(집행부)로 통합
2) 조직 질서유지와 조합원의 권익 수호 명목으로 지부장 긴급조치권 발동
3) 대의원 대회를 총회에 갈음하는 최고의결기관으로 정함
4) 조합원 숫자 확대 방지 의도로 조합원 가입 자격에 엄격한 제한
만약 민주적인 조직운영으로 치열하게 싸웠다면 코비의 노동조건은 어떠했을까? 설령 쌍용자동차처럼 겉으로는 백기투항하는 결과가 왔더라도 그 내포된 결과는 달랐듯이 코비가 만든 미래는 달랐을 것이다. 아니, 코비의 조건이었다면 민주적인 조직운영만 지켰더라면 노동조건은 더 향상 되었을 뿐더러 생존권도 지킬 수 있는 미래가 있었을 것이다.
차별에 저항하기 위해 일어섰다. 생존권을 지키기 위해 일어섰다. 그런데 노동조합 내에서는 그렇지 않다. 누구에게는 더 평등하고 누구에게는 덜 평등하기도 하다.
코비 투쟁을 통해 노동조합의 민주주의를 논하면서 깨달은 명제가 있다.
차별의 분야에는 많은 것이 있다. 장애인의 차별, 성차별, 비정규직 차별, 나이, 직업 등... 그러나 어떠한 분야를 다루건 건 간에 하나의 차별이라도 용인한다는 것은 차후에 반드시 파시스트(또는 관료주의화, 권력의 횡포)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평상시에는 눈에 띄게 문제되지 않고 잘 모르기도 한다. 그러나 결정적인 순간에는 드러난다.
MB 정권 들어 ‘민주주의의 후퇴’에 대한 논의들이 많다. 관련한 서적들과 토론도 즐비하다. 그러나 그것보다는 우리 스스로의 민주주의에 대해 점검, 또는 새로 부수고 지어야하는 것 아닐 까? 노동조합과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 많은 진보적이라고 하는 사회단체 내에 당연히 민주주의가 있을 거라는 상식은 막상 뜯어보면 모두의 ‘착각’인 것이다. 코비 투쟁의 사례를 점검한 이유는 - 바로 우리가 간과한 사소한 ‘차별’과 생략해버린 ‘민주적인 운영’이 어떤 결과를 낳느냐는 것을 알기 위해서다. 우리 안의 민주주의를 지키는 것, 그것은 차별없는 세상을 만들기 위한 지극히 기본적인 뼈대인 것이다.







1) 전국증권산업노조 해고해임사태 : 산별노조에도 불구하고 고질적인 병 - 기업별 정규직 노조의 조합주의 한계 - 에서 비롯된 사태였다. 코비가 장기간 투쟁을 하면서 증권노조 대부분의 재정과 상근간부 4명의 인력이 코비에 들어갔다(이 맥락은 곧 관료주의에 영향을 받은 코비 집행간부 축출로도 이어진다). 처음 지부를 증권노조에 가입시키기 전부터 이 흐름은 존재했었는데, 산별노조의 이념을 지향한 일부 간부들과 기업별 조합주의를 대변하는 간부들 사이에 갈등이 존재했다. 그리고 코비 쟁의가 발생하자 쟁의대책위가 꾸려져 여성간부 3명과 당시 위원장이 올인했다. 증권노조 각 지부에서는 코비의 처절한 투쟁과 주변 동지들의 헌신적인 조직으로 재정적, 마음적으로 아낌없이 지원을 해주었다. 잠시 동안 그렇게 증권노조는 각 이해관계를 넘어서 비정규직 문제로 하나가 되었다. 그러나 파업이 장기화 되자, 몇몇 지부에서 코비 투쟁에 대한 회의론과 함께 증권노조에서 처리하지 못한 몇 가지 사업들을 이유로 들면서 그 화살을 코비 투쟁에 헌신하고 있던 여성 간부들에게 돌렸다. 나머지 증권사 지부를 위해 또 다른 상근간부 3인이 활동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분들에게는 모든 면죄부가 주어졌다. 평소 산별지향과 노사화합-조합주의 기치의 기업별 노조의 한계를 벗지 못한 지부들과 이해관계가 상충했던 상태에서 코비투쟁이 진행되는 동안 많은 지부장들은 조합주의에 동조하게 되었다. 그리고 여성간부 2인은 명백한 표적수사로 인해 해임과 해고를 겪었다.(이유는 위원장 권위 침해와 비정규 여성 프로젝트비용을 횡령할 ‘가능성’이 있었다는 것이었다) 부끄러운 것은 코비가 자신들의 투쟁에 헌신적으로 결합했던 여성간부들의 축출에 암묵적으로 동의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료주의와 기업별 조합주의를 주변에서 보고 배운 코비 주축 간부들이 같은 방식으로 지부를 운영한 것이다.


2) 강종면 폭행사건 - 증권노조 전 위원장이던 강종면은 2008년 3월부터 코비 지부장과의 친분을 앞세워 집행간부를 모아놓고 증권노조 파견3인에 의한 무리한 투쟁 때문에 사태가 악화되었다면 축출을 요구했다. 또한 연맹대책위로 위임된 교섭권을 본인이 위임해야한다면서 사측과 비공식 채널로 지부와 아무 상의 없이 접촉하였다. 투쟁 평가와 전술, 운영방식 등에서 반대의견을 낸 나는 물리적 폭행을 당하고야 만다(전치 2주). 사태 발생 후 연루된 지부간부들의 반응은 ‘정인열이 맞을 짓을 했다, 나쁜 년이다’고 하는 등 2차, 3차 가해자로 전락했다.


3) 노동조합은 노동자의 군대이므로 민주적 의사결정이 필요없는 지부장의 전권으로 가야한다고 주장


4) “11명 직접고용시까지 최우선 과제로 삼고 대처한다” (2008년 12월말 65명만 직접고용 합의하면서 동시에 결의한 사항). 그러나 이후 실무협의에서 지부의 핵심 교섭위원이 이를 뒤집고 절차상으로도 문제없게 조직하여 여론을 장악한다. 2009년 2월 28일 끝내 결정된 사항은 “65명 선복귀 결정, 남은 11명은 사장 말을 믿는다” 였다. 다수에 의한 소수자의 희생 강요는 이 날 폭력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우리는 미복귀자 중 공동 입장을 발표할 동지의 이름을 연명한 성명서를 총회 몇일 전 발표했다. 조직에 요구했던 사항은 “남은 1달의 기간이 있으니 11명 복귀에 대한 조직적 노력을 해달라”, “2009년 7월 이내 복귀를 전제로 사장의 구두 약속을 녹취로 남기고 조합원에 공개한다”, “사측이 불이행할 경우 모든 조합원은 8월1일부로 쟁의행위에 들어간다.”, “위 조건을 만족하지 못하면 근로자존재지위확인소송 취하가 불가능하다” 등 이었다. 그러나 집행부와 나머지 조합원들은 이를 모두 거절했다. 먼저 복귀하는 65명 자신들의 호봉제는 꼭 사수해도 11명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못하겠다였다. 다만, 먼저 복귀하고 사측이 약속 이행 안하면 2009년 8월 1일 파업하겠다는 각서를 썼다.




정인렬 | 전 증권노조 부지부장, 현 작은책 일꾼


  :: [질라라비] 노동자 민주주의란 어떠해야 하는가 2009/09/30
  :: [질라라비] 자유민주주의 공화국 뒤집기 2009/09/30
  :: [질라라비] 민주노총의 사회연대전략 비판 2009/09/15

 

△이전글: 학교 현장의 불안정노동 확산, 무엇이 문제인가?
▽다음글: 노동자 민주주의란 어떠해야 하는가

Copyright 1999-2025 Zeroboard / skin by 전국불안정노동철폐연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