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에서 빌딩에서 공장에서 어디서든 만날 수 있으나 우리의 시야 밖에 있었던 노동자들이 바로 시설관리 노동자들이다. 보일러 및 전기설비를 담당하는 시설관리노동자의 경우 80년대부터 조직화되기 시작했으나, 경비 미화일을 하는 노동자들은 고령이라는 이유 때문인지 조직화 사례가 드물었고 사회적인 관심을 받지도 못했다. 그러다가 비정규직 투쟁이 주요한 사회 문제로 등장하면서 경비나 미화업무를 담당하는 시설관리노동자들의 투쟁이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특히 2000년 노조를 결성하고 43일간 파업을 전개해서 임단협을 쟁취했던 서울대시설관리노조의 투쟁은 시설관리노동자들의 문제를 부각시키는데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서울대시설관리노조의 투쟁은 학생운동에 있어 '대학 내 노동유연화 문제'에 대한 새로운 문제의식을 심어 주었고, 이는 이후 여러 대학에서 대학 시설관리노동자에 대한 실태조사와 조직화 사업을 벌이는 시작이 되었다. 대학구조조정의 최대의 희생양인 대학시설관리노동자들에 대한 이러한 관심을 바탕으로 해서 전국불안정노동철폐연대는 '2002년 불안정노동철폐, 노동권 생활권 쟁취를 위한 공동투쟁' 사업의 하나로서 대학시설관리노동자 공동 실태조사 사업을 진행하였다.
실태조사 사업의 경과
4월 18일부터 26일까지 진행된 실태조사에는 수도권 6개 대학(덕성여대, 서강대, 외국어대, 고려대, 항공대, 동국대), 지역 3개 대학(한림대, 전남대, 한남대) 학생들이 참가하였다. 각 대학에서의 실태를 표본조사함으로써 대학시설관리노동자의 전반적인 노동실태를 확인하고자 하였다. 이 조사사업에는 민주노총 여성연맹, 전국시설관리노조, 학생 단위가 함께 공동사업팀을 꾸려서 조사사업의 기획, 실태조사팀 교육을 함께 하였다. 학생실태조사팀은 5-10명 정도의 경비, 미화노동자들을 만나 보았고 이를 바탕으로 각 대학 시설관리노동자의 실태를 정리할 수 있었다. 실태조사 결과는 4월 27일 '대학 내 노동기본권 쟁취를 위한 대학시설 관리노동자,학생 공동결의대회'에서 발표되었다. 집회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이 날 집회에는 서울대시설관리노조 위원장님이 참석하여 대학 시설관리 노동자들의 열악한 현실을 알리고 조직화의 필요성을 주장하였다. 비록 조직된 대학시설관리노동자들이 너무 적어 서울대시설관리노조만 참석하였지만 이후 학생들과 노동자들의 공동투쟁의 시작이 될 수 있는 소중한 자리였다. 이 날 학생들은 미화노동자를 나타내는 하늘색 머릿수건을 한 채 집회를 하고 선전전을 해서 명동 거리를 지나는 시민들의 눈길을 끌었다. 아래는 실태조사 결과를 간단히 정리한 것이다.
저임금 노동의 온상인 대학
조사 결과에 따르면 국립대 사립대 할 것 없이 대학 구조조정이라는 이름 아래 시설관리 노동자들에게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심각하게 구조조정이 진행되었음이 드러났다. 9개 대학 모두 이전에 직영이었던 경비나 청소업무가 계약직이나 일용직, 용역직과 같은 비정규직 형태로 전환된 것이었다. 이러한 전환은 이미 80년대 말부터 시작되었는데 경제위기 직후 더욱 가속화되어 아직까지 직영 노동자가 일하는 곳은 대학본관, 연구동같은 곳뿐이다. 덕성여대에는 직영 노동자들도 계약직인데 이마저도 올해부터 간접고용(용역직)으로 전환하려 한다. 더 나아가 부산대처럼 전자경비시스템을 도입하면서 대대적인 정리해고를 시작하려는 곳들도 많다. 전남대의 경우 인원을 줄인 상태에서 경비노동자들에게 이 일 저 일을 다 시키려다보니 이들에게 컴퓨터를 비롯한 여러 가지를 배우도록 강요하고 있다. 인원삭감의 결과가 고령의 경비노동자들에게 이런 형태의 부담으로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간접고용 형태로 전환되다 보니 이들은 최저임금을 간신히 넘기는 수준의 저임금과 중간착취에 시달리고 있다. 9개 대학 미화노동자들의 임금은 월평균 51만 3천원이고, 최저 47만원(실수령액은 437270)이다. "하루 일당으로 계산했을 때 만 오천원은 너무 하지 않느냐. 일당 2만원 수준이라도 되면 만족하겠다."는 것이 미화노동자들의 공통된 바램이었다. 가장 열악한 대학의 경우 최저임금에 못 미치기도 했고 전반적으로 최저임금 기준을 약간 웃도는 수준에 불과하였습니다. "나이든 사람이라 약값이며 이 것 저 것 드는 것이 많은데 이 돈으로 어떻게 사느냐", "85년도에 임금이 42만원이었는데 15년 동안 3만원 오른 것이 말이 되냐?"는 전남대 미화노동자들의 목소리는 이들의 저임금 실태를 보여주기에 충분했다. 경비노동자의 경우 9개 대학 평균 임금이 월 637500원이고, 최저 60만원이었다. 미화노동자에 비해 높은 임금이나 전부 24시간 맞교대 근무를 한다는 점을 생각하면 결코 높은 임금이 아니다. 심지어 외국어대의 경우 남성 미화노동자가 야간 경비까지 해야 하기 때문에 36시간 연속 근무를 해야 할 정도이다. 뿐만 아니라 야간노동에 대한 야간수당, 연장근로수당 또한 전혀 받지 못하고 있다. 하루 12시간 일하고도 일당 2만원 밖에 안되는 것이 대학 경비노동자들의 현실이다.
노동기본권의 사각지대인 대학 시설관리노동자
9개 대학 시설관리노동자들 중에서 근로계약서를 작성하거나 그 계약서를 보관하고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고려대 시설관리노동자의 경우 임금 내역조차 모른 채 통장으로 입금되는 월급의 총액만을 알뿐이라고 한다. 고용관계에서의 불평등이 이렇게 심하다보니 대학 시설관리노동자들은 자신의 권리가 무엇인지도 알지 못하거나, 안다해도 어떠한 문제제기도 할 수 없는 상황이다. 근로계약서가 없다보니 무엇이 계약해지 사유에 해당하는지, 나의 권리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이때문에 더욱 용역회사와 대학본부의 눈치를 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또한 용역업체가 고용보험, 산재보험, 의료보험, 국민연금에 가입했느냐는 질문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노동자들이 '모른다'고 답변하였다. 이는 용역업체에서 각종 보험료 명목으로 공제하고 있으나 실제로 보험료를 납부하는 것인지 아닌지조차 노동자들이 확인할 길이 없는 상황임을 보여준다. 실제로 이렇게 노동자들의 월급에서 보험료를 공제해 놓고 납입하지 않다가 그대로 부도가 나는 용역업체도 많다. 연월차 휴가를 자유로이 쓸 수 있느냐는 질문에 대해서 대부분 '써 본적이 없고 도저히 눈치보여 쓸 수 없다'는 답변을 하였습니다. 산재가 발생하면 자비 부담으로 처리하거나 용역업체에서 공상처리하는 경우가 반반이었다. 이는 대학시설관리노동자가 산재보험이라는 공식적인 제도의 보호를 전혀 받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늙어서 다치기나 한다고 해고당할까봐 다친 걸 숨기는 경우도 보고되었다. 서강대에서는 산재를 당한 노동자가 용역업체에 보상을 요구하면 바로 해고당하니까 대학 본부에 직접 호소한 경우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서강대는 그저 용역회사의 책임으로 넘길 뿐이었고 노동자는 제대로 된 보상을 받지 못했다고 한다.
용역업체를 앞세운 대학의 노동착취
실태조사를 하면서 학생들은 영세사업장도 아닌 수천 수만 명의 학생이 다니는 대학교에서 이런 노동착취가 일어날 수 있는지 새삼 분노했다고 한다. 겉으로는 지성의 전당이라는 권위를 내세우면서도 안으로는 노동자들을 쥐어짤 대로 짜내려는 것이 한국 대학들의 모습인 것이다. 용역업체라는 방패막이를 세워 놓고 시설관리노동자들에 대한 노동착취를 수수방관, 조장하는 것이 한국의 대학들이다. 대학들은 시설관리노동자들에 대한 통제권은 맘껏 행사하면서(청소업무 지시, 업무상태 감독지시 등이 용역업체와 대학본부 양쪽에서 나오고 있다는 조사결과가 나옴) 이들에 대한 노동법상의 책임은 회피하려고 용역업체를 중간에 끼워 놓았다. 이러 목적으로 용역업체를 도입하다보니 용역업체가 중간에서 노동자 몫의 임금, 퇴직적립금을 얼마나 횡령하는지에 대해서 대학본부는 신경쓰지 않는다. 그저 노동자들을 값싸고 편하게 부려먹을 수 있게만 한다면 용역업체의 중간착취가 아무리 심해도 관여하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대학들의 속셈 때문에 한국의 대학에는 대단히 기묘한 고용형태가 생겼다. 매년 용역업체가 바뀌어도 그 학교에서 일하는 미화, 경비노동자들은 바뀌지 않는 것이다. 덕성여대에서 10년 이상 일한 노동자는 계속해서 덕성여대에 있었지만 매년 용역업체가 바뀔 때마다 소속만 바뀌었다고 한다. 똑같은 노동자가 똑같은 장소에서 계속 일을 하는데 소속업체만 바뀌는 불합리한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따라 노동자들은 한 학교에서 몇 년씩 일해도 1년마다 재계약되기 때문에 근속에 따른 수당, 퇴직금상의 이익을 전혀 받지 못한다.
이후의 과제로 고민되는 것들
1. 위와 같은 조사결과를 접하면서 학생들은 대학이 이미 용역이라는 비정규직 고용형태를 통한 이윤추구에 혈안이 된 노동착취 기업으로 전락하고 있음을 확인하였다. 학생들의 이러한 항의에 대해 대학 본부들은 " 학생들에게 더 많은 서비스와 혜택을 주기 위해서 비용절감이 필요하다."라고 핑계를 대지만, 교육서비스의 효율성과 질 향상이라는 명목 아래 노동기본권의 박탈, 노동착취가 진행되어선 안 된다는 것은 명확하다. 설령 비정규직 노동자들에 대한 착취를 통해 보다 나은 교육 서비스가 나올 수 있다하더라도 이는 부당하고 부패한 현실 위에 세워진 공허하고 위선적인 교육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또한 당장 학생들 옆에서 이뤄지는 신자유주의적 노동유연화, 노동착취에 반대하는 싸움을 하는 것이 곧 학생들에게도 들이닥칠 자본의 공격에 대항하는 새로운 싸움을 가능케 할 것이기 때문이다.
2. 실태조사팀 학생들이 가장 곤란했던 경우는 시설노동자 스스로가 " 나이들어 이렇게 돈받으면서 일할 수 있는 것도 고마울 뿐이다."라고 말할 때였다고 한다. '장년/노년층 노동은 무능력하다, 청소 및 경비업무는 가치없는 쉬운 노동이다'라는 잘못된 사회인식이 이들 스스로 자신의 노동에 대해 평가절하하도록 만든 것이다. 이러한 인식은 저임으로 부려먹으려는 자본의 의도에 부합하면서 청소나 경비업무가 대표적인 저임금 직종이 되는데 영향을 미치고 있다. 따라서 대학시설관리노동자의 문제를 제기하고 조직함에 있어 '무가치한 쉬운 노동은 없다, 어떤 노동을 하든 인간다운 생활은 보장되어야 한다'는 것이 중요한 내용적 근거가 되어야 할 것이다. 노년, 장년층 노동자라는 이유만으로 발생하는 터무니없는 저임금이나 해고는 생산적 복지 체제하 빈곤층 고령 노동자의 문제를 다시금 인식시켜준다.
3. 대다수가 여성인 미화노동자에 대한 생활실태조사 결과, 작업장에서의 노동 외에도 하루 2-5시간의 가사노동을 하고 있으며 이로 인한 육체적, 정신적 피로에 시달리고 있음이 드러났다. 또한 왜 이 직종에 취업했느냐는 질문에 대해서는 응답자의 대부분이 ' 취업이 어려운 데 그나마 취업이 쉬운 곳이라서'나 '일찍 퇴근하여 집안 일을 하기 편한 일이라서'라는 답변을 골랐다. 이는 식당 주방, 파출부, 미화원같은 저임금 노동이 아니면 취업할 데가 없으면서 이중의 노동에 시달리는 (중장년층)여성 노동자의 현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번 실태조사 사업은 각 학교에서 조사결과를 선전함으로써 노동유연화 문제에 대한 대학 내의 관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었고, 한 학교의 경우 조직화 사업으로까지 이어지는 성과를 낳았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실태조사 사업 과정에 이미 조직된 대학시설관리노동자들이 참여해서 교육, 조사사업을 함께 진행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이후의 조사사업에서는 상급단체뿐이 아니라 실제 조직된 대학시설관리노동자들이 함께 하는 기획이 된다면 더욱 좋을 것이다.
대학 내 노동기본권 쟁취를 위한 대학시설관리노동자, 학생 공동요구안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 앞에서 대학 또한 예외가 아니었고 이에 따라 대학시설관리 노동자들은 용역직으로의 전환, 임금삭감 등의 위협을 당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번 9개 대학 공동실태조사를해 드러난 현실은 예상했던 것보다 더 심각한 피해가 있음을 보여주기에 충분했다. 대학내 시설관리 부문을 용역업체에게 완전히 넘겨버림으로써 노동자들은 고질적인 저임금과 중간착취에 시달리게 되었다. 24시간 맞교대 근무를 하고도 60만원 조금 넘는 임금을 받는 경비노동자, 학교 구석구석을 청소하고도 50만원의 임금을 받는 미화노동자의 현실은 인건비 절감아래 도입하는 용역업체가 저임금을 구조적으로 양산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현실은 '교육 서비스의 질 향상'과 같은 어떠한 수사로도 덮어둘 수 없는 부당하고도 불합리한 것이다. 따라서 이번 조사에 참가한 9개 대학 학생들은 대학시설관리 노동자들의 노동기본권 문제가 학생들의 이해와 대립되는 것이 아님을 명확히 선언하고자 한다. 대학시설관리 노동자들의 투쟁은 노동하고 생활하는 인간으로서의 보편적인 기본권을 위한 투쟁이며, 연령/직종의 차이를 이유로 한 신자유주의적 노동착취에 반대하는 투쟁이므로 이에 마땅히 학생들도 함께 할 것을 결의한다.
공동요구안
하나, 저임금, 무권리 상태를 강요하는 용역업체를 없애고 시설관리노동자들에게 안정적인 직접고용을 보장하라.
하나, 현재 일어나고 있는 용역업체의 중간착취에 대해 대학은 직접 나서서 문제를 해결하라.
하나, 최저임금 수준을 받고 있는 청소미화노동자들에게 인간다운 생활을 할 수 있는 적정한 임금 수준을 보장하라.
하나, 건강권을 위협하는 경비노동자의 24시간 맞교대, 36시간 맞교대 제도를 즉각 개선하라.
2002.4.27
대학 내 노동기본권 쟁취를 위한 대학시설관리노동자, 학생 공동결의대회 참가자 일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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