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소작료를 주고 농사짓는 사람은 없다. 더러 자기 땅이 없던가 또는 부족하여 남의 농토를 빌려 그곳에 작물을 심는 이들은 있다. 이들은 농토의 주인에게 자신이 지은 작물의 일부를 주는 경우는 있지만 이것은 소작료가 아니라 땅을 빌려 쓴 고마움의 표시에 그친다. 우리 사회에서 실질적으로 소작료가 없어지기 시작한 때는 아마 70년대 들면서가 아닌가 싶다. 이때쯤 한국사회는 농업의 희생을 바탕으로 독점자본의 초과이윤을 보장하기 위해 추진했던 공업위주의 정책이 정착단계에 이른다. 농촌은 피폐해지고 도시화는 급속하게 이루어졌다. 당연히 남의 땅을 부쳐먹는 삯으로 고율의 소작료를 물던 시대도 점차 저물어 갔다. 대신 도시의 지주들은 더 많은 부를 누리게 되었다.
관료들의 착취가 극심하던 조선조 말에서 일본의 식민통치를 겪던 시절에 지주들은 무려 7, 8할의 소작료를 매겼다. 땡볕에 등짝이 벗겨지며 농사를 지어놓으면 지주들이 소작료로 소출의 태반을 걷어가고 관료들이 죽은 사람까지 들먹이며 세금으로 걷어갔다. 너무 가혹하다고 하소연하면 그나마 부쳐먹던 땅을 빼앗아 버려 아예 굶어 죽게 하던가 무슨 죄목이든 걸어 가차없는 치도곤을 내렸다. 지주가 곧 염라대왕이며 관료들은 저승사자에 다름 아니었다. 지주와 소작농이라는 봉건적 사회관계는 현대에 들어서도 근근히 존속하다가 산업화의 진전으로 사라졌다.
그런데 봉건적 착취의 형태인 지주와 소작농의 사이에는 마름이라는 중간관리자가 있었다. 이 마름의 출신성분은 분명 소작농 또는 머슴이지만 그의 존재는 지주, 양반의 하수인으로써 소작농, 머슴을 다스리는 위치에 있었다. 어느 경우에는 지주대신 소작권을 행사 하든가 봉건질서를 흩트리는 피지배계급을 잡도리하기도 하였다. 자신을 고용한 지주의 안녕을 위해 마름은 지주보다 더 가혹하게 소작농에게 매질을 가하였다. 마름의 뒤에는 지배계급이라는 든든한 배경이 있고 반면 지배계급은 충실한 마름이 있어 자신들이 손에 피를 묻히지 않아도 된다. 이렇게 보면 얼핏 둘 사이에는 적당한 이해관계가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지배계급의 일방적 이득만 있을 뿐이다. 지배계급의 고상함과 여유로움을 유지하는데 있어 예나 지금이나 마름과 같은 존재가 반드시 필요하다. 이 마름이라는 존재로 인해 피지배계급은 투쟁의 대상에 혼동을 일으킨다. 당장의 눈앞에 있는 가해자에 대해서만 분노를 가지게 되다보면 그 뒤에서 갖가지 호사를 누리는 진짜 착취자를 잊게 된다. 이런 점을 굳이 학습하지 않아도 오랜 역사를 통해 마치 본능처럼 이어받은 지배계급은 언제 어디서나 이런 형식의 지배, 뭐 전문용어로는 '분할통치'라고 하던가, 좌우지간 이런 통치를 통해 그네들의 영화를 지속하고 있는 것이다.
소작농이 없어지니 당연히 마름도 사라졌다. 그러나 지주가 자본가로 되고 소작농이 임노동자로 된 현대 자본주의에 마름도 그 이름과 형식만 달라졌을 뿐 여전히 지배계급의 중간관리자가 되어 우리들 근로대중의 고통을 가중시킨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 곁에 마름은 어떻게 그 모습을 보이고 있는가? 이런 물음에 대해 즉각 답을 하기 전에 우리 사회는 어떻게 마름을 양성하고 있는가 부터 살펴봐야 한다. 꽤나 유명한 사람의 권위를 빌어 우리가 사는 이 사회를 진단하면 이렇다. 참고로 지금으로부터 약 160년 전의 글인데도 어쩌면 지금 우리의 현실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지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경쟁이 현대 자본주의사회를 지배하고 있는바, 이것은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의 가장 완전한 표현이다. 생활을 위한, 생존을 위한, 모든 것을 위한 투쟁, 따라서 다급해진 경우에는 생사문제를 건 투쟁이 단지 사회의 여러 계급 사이에서 전개될 뿐만 아니라 그 계급 내 개개인 사이에서도 벌어진다. 모두가 서로 다른 사람의 방해가 되는 사람을 모두 밀어 제치고 자기가 대신하여 그 지위를 차지하려고 한다. 자본가가 서로 경쟁하듯 노동자도 서로가 경쟁한다. 수공업노동자는 언제든 규모가 갖추어진 공장의 노동자가 되려고, 실업자는 취업자에 대해, 또는 저임금노동자는 임금이 높은 노동자를 상대로 경쟁하여 그들을 배제하려고 한다. 그런데 이 노동자 상호간의 경쟁이야말로 지금 상황에서는 노동자에게는 최악의 국면이지만 자본가들은 근로대중을 공격하는 가장 날카로운 무기로 된다. 노동자는 조직을 만들어 노동자 상호간에는 경쟁을 하지 않도록 노력한다. 반면 자본가들은 또한 이 결사에 대해 격노하여 이에 타격을 가하고 승리의 개가를 올리는 것이다.' (엥겔스, [영국에서의 노동자계급의 상태] 중에서)
근로대중은 생존을 위해 자신의 인격까지 저버려야 할 때가 비일비재하다. 늘 생활이 절박한 지경에서 허덕여야 한다. 그러다 보니 단지 생존을 위해서 근로대중끼리도 다퉈야 한다. 민중의 권리를 확보하기 위한 집회일지언정 그 집회로 말미암아 하루 벌이를 망치는 노점상의 불만은 곧 눈앞의 근로대중에게 퍼부어지기 십상이다. 직장을 잡지 못한 이들은 취업을 위해 더 많은 시간과 돈을 들여 영어를 배우고 자격증을 따고 해외연수까지 간다. 그렇게 직장을 잡은 사람들은 실업자를 향해 '거칠고 힘든 일은 하지 않는다'고 터무니없는 비난을 가한다. 자신의 밥줄을 지키기 위해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피눈물나는 싸움에는 참으로 냉정하게 외면한다. 이런 현상이야말로 자본가로서는 '손도 대지 않고 코 푸는 격'이 아니고 무엇인가? 한국통신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손으로 조직의 깃발을 내릴 때 자본가들은 얼마나 쾌재를 불렀겠는가?
예전 봉건제적 사회관계에서 마름이라는 존재는 명료하고 단순했다. 하지만 현대 사회에서 마름은 다양하거니와 정작 마름의 역을 수행하는 당사자도 자신은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착각한다. 작년이던가?, 공기업의 민영화를 저지하기 위한 정부, 자본가와 벌이던 협상이 결렬되어 마침내 중앙의 결정을 받아 단위사업장은 이미 속속 파업에 들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그 순간 중앙은 결렬된 협상의 내용을 살짝 고쳐 마치 노동계쪽의 이해를 반영된양 파업을 유보한다고 발표하였다. 전혀 예기치 않은 중앙의 수작에 전 노동계가 일대 혼란에 빠졌고 어쩌면 87년 이후 참으로 소중한 감동을 일궈낼 수 있는 기회가 무산되었다.
마름은 무엇인가? 지배계급이 자신의 세련된 통치를 위해 마련한 인격화된 중간관리체제다. 그럼 마름은 누구인가? 피지배계급출신이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망각하고 지배자의 하수인이 되어 일신의 안위를 누리는 자이다. 계급에서 일탈된 자로써 지배계급이 구사하는 통치의 도구가 되어 근로대중의 설움을 가중시키는 자이다. 그네들은 민중의 결사를 방해하고 노동자의 꿈을 짓밟는다. 어느 곳에서는 노골적으로 구사대의 모습을 띄고 나타나는가 하면 어느 때는 자신의 속셈을 감추고 노동해방의 기수인양 나타난다. 차라리 노골적인 모습이면 계급의 적으로 파악하기 좋지만 기회주의자가 되어 노동운동진영에 교란을 가져오는 자는 사실 알아채는데 시간이 걸린다.
우리는 마름을 내세운 자들이 누구라는 것쯤은 잘 안다. 하지만 우리 주위에 출몰하는 마름의 실체를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은 쉽지 않다. 아니 어느 때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마름으로 될 수 있으니 정신 바짝 차려야 할 것이다.
※ 필자 서동석은 1954년 서울에서 태어나 건국대 경제학과를 졸업했다. 70년대 구로공단 등지에서 현장노동자로 있었고 80년대 중반부터 민중불교운동연합 등 단체에서 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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