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통신계약직노동조합 깃발이 투쟁의 역사속으로 사라지던 날이었다.
세상이 무너질 듯한 절망말고는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이 세상 속에 내가 포함되어 있다는 자체가 싫었다. 그 많은 시간동안 난 뭘 했나, 무엇을 위해 싸운 걸가? 이런 생각들이 물밀 듯이 몰려왔다. 500여일 이상 싸웠으면 투쟁이란 게 몸에 익숙할 만도 한데도 한편으로는 여전히 낯설게만 느껴졌던 뭔가가 있었다. 어쩌면 그런 것들이 투쟁의 종말을 앞당겼는지도 모른다.
또 한편 미안한고 안타까운 존재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우리와 함께 연대해온 동지들이었다. 마음과 몸으로 진정 우리의 투쟁에 함께 했던 동지들에겐 투쟁의 끝이 희망하던 대로 되지 않아 어쩌면 우리들보다 더 안타까웠으리라. 우리 투쟁의 의의를 알고 쏟아 부었던 열정을 이제 또 다른 투쟁으로 옮겨가 불길이 번지게 하고 있으리라 믿는다.
투쟁을 마무리하고 1년이 지났지만 나는 뭔가 좋은 변화를 느끼지는 못하고 있다. 대부분의 기억이 아물지 않은 채 가슴 속 깊이 박혀있다. 다른 동지들도 마찬가진가 보다. 가끔 한숨쉬며 들이키는 소주잔 속에서 그때의 떠오르는 기억속 상처를 발견하곤 한다. 투쟁의 상처가 아물기에는 1년이 짧은 것일까. 어쩌면 변하지 않은 현실 때문일지도 모른다. 투쟁이 마무리되고 난 뒤 일상으로 돌아갔지만 기다리고 있는 것은 생활고와 고용불안이다. 이젠 자신이 처한 현실을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는 듯 하다. 어쩌겠나 살아남기 위해서는 진득한 인내로 이겨낼 수밖에. 하지만 긴 투쟁으로 혼자가 아닌 여럿이 헤쳐나가야 한다는 것을 배웠고 그게 지금의 답답함을 이겨내는 유일한 무기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총회도 끝나고, 이후에 청산위 활동의 기간이 있었다. 그리고 청산위 활동이 끝나고 지역마다 대표를 두어 회의체를 구성했다. KT와의 소통구조를 갖기 위한 것이다. 담당자 한 명이 처리해야 할 일이 많았다. 한통계약직노조 투쟁을 계승해야 한다는 내면적 부담을 안은 채, 또한 우리를 바라보는 주위의 시선 역시 무시할 수만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기나긴 투쟁을 전개하고 도급노동자로 돌아간 현장이 우리 동지들을 환영할 리는 없었다. 그리고 동지들도 예전같이 그저 일만하는 기계가 아닌지라 사소한 시비가 늘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이제는 우리들이 일할 때 겪는 불합리한 일들에 대해 이야기하곤 한다. 거기에는 이 사회의 불평등이 그대로 배어있다. 때론 지금 우리 처지에 그나마 사소한 시비를 해결하는 데 노사합의서 한 장이 도움을 주기도 한다. 517일간 싸워서 얻은 게 겨우 그거냐며, 휴지조각이라고 말하는 이도 있을 것이지만 KT가 부리는 횡포를 막는 데는 그나마 효과가 있는건 사실이다. 울며 겨자 먹기지만 말이다. 정말 안타까운건 오죽 어려우면 그 놈의 합의서가 효과를 내고 있는가 하는 현실이다.
지금 KT는 또다시 계약직을 6월말부로 전원 해고한다고 예고하고 있다. 그들이 계약직 노동자들에게 할 수 있는 것은 해고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는 모양이다. 2000년 말 7000명의 계약직 노동자를 대량해고 하더니 또다시 대량해고를 준비하고 (전국의 전화국마다 4~5명 이상 계약직 노동자가 있다), 그 해고된 계약직 노동자들을 도급업체에서 고용하라 한다. 개통 건수에 따라 급여를 받는 노동자가 되라는 것이다. 죽어라 일해 하루하루 개통 건수를 많이 늘려야 받는 돈이 올라가는 "건당" 노동자인 것이다.
어떻게 하면 잘 살 수 있을까. 엉망인 사회에 맞서 당당히 싸워야만 한다는 것은 잘 알고 있다. 얼마전 시청 앞에서 가졌던 미선/효순이 추모제를 보았다. 여기서 느낀 것은 대중의 자발적 각성과 대중적 행동이라는 것이 이 사회에 얼마나 큰 변화를 불러올 수 있는지에 대한 가능성이었다.
나는 바란다. 밑바닥 노동자로 살아가면서 겪는 불평등한 구조를 바꾸고 평등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우리가 자각하고 행동하길 바란다. 나도 그 중의 한 명이라고 스스로에게 말하면서 오늘 또 쓴 소주를 들이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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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운재 | 한국통신계약직노조 백서발간위원회 팀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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