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한통계약직 투쟁의 의미
○ 비정규직 철폐와 구조조정 저지를 위한 투쟁이 주체의 의지와 조직력으로 세워졌던 투쟁
한국통신 계약직 노동조합의 투쟁은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중에서도 핵심부문인 공기업 민영화 과정에서의 7000명 대량해고로 시작된 구조조정 저지투쟁이었다. 김대중 정권은 2002년까지 한국통신 민영화 완료를 목표로 형식적인 공공성마저 내팽개친 채 공기업의 막대한 이윤을 사적자본에게 넘겨 자본의 위기를 극복하려 안간힘을 쓰고 있었고, 명예퇴직에 이은 구조조정이 바로 계약직 노동자들에 대한 대량해고, 이어 예고되고 있는 것이 114 분사였다. 약한 고리인 비정규직 노동자, 여성노동자들에 대한 해고와 분사로부터 시작되는 구조조정은 한국통신 전면적 구조조정의 전초전이었다. 또한 한국통신 계약직 노조의 투쟁은 불안정한 고용계약으로 저임금 장시간 노동을 강요받아온 이 땅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절박한 요구인 비정규직 철폐투쟁으로서의 중요한 의미를 가졌다. 구조조정 과정에서 해고 0순위, 언제나 해고의 위협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기에 기본적인 단결권조차 제약당해 온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노동기본권 쟁취를 위한 투쟁이었던 것이다. 517여 일의 투쟁 과정에서 한국통신 계약직 투쟁의 의미는 이미 한 단위사업장의 투쟁을 넘어선 전체 구조조정저지, 비정규직철폐, 김대중정권퇴진 전선으로 성장 발전되었다.
우리는 비정규직 투쟁에 있어 한국통신 계약직 투쟁의 위상이 98년도 정리해고 저지 투쟁전선에서의 현대자동차와 만도투쟁의 위상과 같다고 평가해왔다. 당시 이 단위사업장의 패배를 단지 두 사업장의 패배라 이야기하는 사람은 없었다. 우리가 이미 알고 있다시피 이는 자본에 맞서는 이 땅 노동전선 자체의 후퇴였고, 이후 우리는 계속적인 정리해고 투쟁에서의 무력감을 맛보아야만 했다. 그래서 한국통신계약직 노조의 투쟁 역시 그만큼의 중요한 위상을 지닌 것이었다. 비정규직 투쟁의 상징이자 가장 전투적인 투쟁을 몸소 실천했던 한통계약직 노조의 투쟁은 비정규직 투쟁 전선의 최선두에 서 있었고, 우리가 이 투쟁을 엄호하고 확산시키지 못한다면 그것은 한 단위사업장의 승패를 떠나 비정규직 전선의 후퇴이며 현시기 정규직 비정규직 할 것 없이 자본에 대한 노동의 대응력 자체를 허물어뜨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비정규직 투쟁에 있어 승리의 경험이 너무나 절실했다. 우리는 그 승리의 경험을 한통계약직투쟁을 통해 얻고자했다. 비정규직 철폐투쟁과 구조조정 저지투쟁의 자기위상을 주도적으로 결의했던 한통계약직노조, 스스로의 투쟁을 단위사업장의 문제로 국한시키지 않고 연대투쟁의 모범을 창출했던 한통계약직노조, 선도적인 대중투쟁 감행으로 검증된 투쟁의지를 바탕으로 하고 있는 한통계약직노조, 그리고 그 결의가 자기동력과 튼튼한 조직력으로 뒷받침되는 한통계약직노조의 투쟁이기에 이 투쟁의 승리를 바탕으로 비정규직 투쟁 전선을 강화하고 비정규 장기투쟁사업장의 승리를, 현 시기 노동운동전선 전체의 강화를 이뤄내고자 했던 것이다.
○ 민주노조운동진영 내의 치열한 반성적 평가가 요구된다.
한통계약직 노동자들의 정규직화 쟁취투쟁으로의 명확한 목표설정과 선도적인 대중투쟁 감행으로 검증된 투쟁의지는 비정규직 투쟁의 전진을 가능케했다. 우리는 그만큼의 기대를 가지고 한통계약직 투쟁을 함께 만들고 진전시켜 왔다. 그러나 비정규직 투쟁의 희망 한통계약직 투쟁의 결과는 가슴 아픈 상처로 남겨졌다. 흩어진 조합원들은 투쟁 과정에서의 상처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일상을 살아가고 있다. 공기업인 한국통신을 향한, 정부를 상대로 하는 무리한 싸움을 감행했다는 왜곡된 평가만이 주체들의 패배감을 돋구고 있고, 한통계약직 투쟁의 승리를 통해 승리의 경험을 얻고자 했던 장기투쟁사업장들은 더욱 어려운 싸움을 앞두고 있다. 과연 무엇이 이 투쟁의 전진을 가로막았는가? 비정규직 운동에 대한 관심은 사실상 거품이었다는 사실이 증명되고 있는 현 시점에서 비정규 운동을 고민하고 있는 민주노조운동진영내 반성적 평가는 얼마나 치열한 고민 속에서 제출되고 있는가? 스스로의 투쟁을 비정규직 철폐투쟁으로 위치짓고 투쟁한 1년짜리 신생노조, 자생적으로 조직된 투쟁에 비정규직 철폐투쟁의 선봉이라는 큰 위상을 부여하고서 민주운동진영은 얼마나 실질적 연대전선을 구축했는가? 그리고 한통계약직 투쟁의 이러한 결과에 어떠한 고민으로 답하고 있는가?
민주노조운동에 있어서 비정규직 투쟁은 아직 홀대를 벗어나지 못했다. 한통계약직 조합원들은 대자투쟁에서, 발전투쟁에서 현장지휘본부를 꾸리고 일선에서 투쟁을 지도하고 있는 민주노총 지도부들을 왜 한통계약직 투쟁에서는 만나볼 수 없는지 이해 할 수 없었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노조가입을 악의적으로 방해하고 비정규직의 대량해고를 용인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114조합원들의 투쟁의 의지는 직권조인 등 반노동자적 행태를 일삼는 한통정규직노조가 왜 여전히 연맹 내의 자기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는 지 이해할 수 없었다. 구속을 결의한 점거투쟁이라는 극한의 투쟁을 결의할 수 밖에 없는 절실함이 왜 좌익모험주의로 취급되는지 이해 할 수 없었다. 민주노총이, 공공연맹이, 민주노조운동이 한통계약직 조합원들에게는 투쟁을 밀어갈 희망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이런 속에서 정규직화 쟁취 요구는 현실 불가능한 요구였다고, 좌익모험주의적 투쟁은 위험하다고, 한 단위사업장에서의 비정규직 투쟁은 해도 안된다는 왜곡된 평가만을 껴안고 갈 것인가?
○ 비정규직 철폐투쟁과 구조조정 저지투쟁은 만나지 못했다.
결론적으로 비정규직 철폐투쟁과 구조조정 저지투쟁의 결합을 이야기했던 우리는 이 결합을 현실화시키는 데 실패했다. 한통계약직노조는 도급반대, 114분사 저지투쟁 등 한국통신 구조조정 저지투쟁을 승리로 이끌기 위한 헌신적인 투쟁을 전개해 왔다. 그리고 우리는 한통계약직노조로 하여금 구조조정 저지투쟁의 전선을 스스로 설치하도록 그렇게 노조를 조직했다. 그러나 한통계약직 투쟁을 중심으로 한 구조조정 저지전선은 한번도 만들어지지 못했다. 대우자동차 구조조정 저지투쟁에서도, 114분사 저지투쟁에서도, 공기업사유화 저지투쟁에서도 한통계약직 투쟁은 주목받지 못했다. 과연 구조조정 저지투쟁과 비정규직 철폐투쟁은 과연 함께 결합될 수 없는 다른 축의 투쟁이었는가? 구조조정 저지투쟁에 있어서 비정규직의 문제는 또다시 부차적 문제, 아직 때이른 문제였는가? 결국 비정규직 철폐투쟁과 구조조정 저지투쟁은 만나지 못했다. 두 가지 투쟁의 본질이 하나라는 사실은 연대요청서 속, 선전물 속의 공문구로 남고 말았다. 구조조정의 본질이 노동유연화, 노동유연화의 핵심이 비정규직화라는 사실에 모두가 동의하고 있지만 그 투쟁을 실질화시키지는 못했다.
Ⅱ> 시기별 투쟁 평가
1. 법외노조에서 파업투쟁 돌입전까지
○ 비합법 비정규독자노조로서의 힘겨운 출발
한통계약직 투쟁은 시작부터 큰 한계를 감수하고 갈 수밖에 없었는데, 이는 바로 정규직 노조와의 관계문제였다. 정규직노조의 문제는 한통계약직노조 투쟁에 있어 항상 걸림돌로 작용했고, 그 한계는 결국 투쟁의 시작부터 마무리시기까지 계속 한통계약직 투쟁의 발목을 잡는 역할을 하게 된다.
2000년 2월 한통계약직협의회가 결성된 이후, 3월 2일 한통계약직협의회와 한통정규직노조간 면담, 3월 13일 노조가입을 위한 1차공문 발송, 3월 22일 2차 공문발송에도 불구하고 한통정규직노조는 계약직노동자들의 노조가입을 승인하지 않았다. 정규직과 비정규직간의 위화감을 해소하지 못했다, 단협상 비정규직에 관련합의안이 없으니 독자적으로 설립해도 무방하지 않느냐, 비정규직들에게까지 희생자 구제기금을 적용하기 힘들다는 등의 이유였다. 정규직 노조의 세차례에 걸친 계약직노동자들에 대한 노조가입거부조치로 인해 계약직 노동자들은 2000년 3월 31일 한통정규직노조와는 별도로 한통계약직 독자노조를 설립했다. 그러나 정규직노조 규약상 비정규직노동자까지 조합원 가입범위에 포함시키고 있어, 한통계약직노조는 한통정규직노조의 조합원이 되거나, 한통정규직노조의 규약을 개정해야만 합법적인 노조활동이 가능할 수 있었다. 한통계약직노조는 이 속에서 결국 비정규직노조 독자노조의 길을 택했고, 정규직노조에 규약변경을 요구하며 복수노조금지조항으로 인한 비합법노조라는 쉽지 않은 출발을 하게 된다.
여기서 우리는 한통계약직노조가 선택한 독자노조설립이라는 판단이 이후 어떠한 결과를 전제하고 있는 것이었는지에 대해 판단할 필요가 있다. 어용정규직노조와의 관계 속에서 계약직 노동자들이 택할 수 있는 길은 두 가지이다. 그것은 정규직노조에 규약변경을 요구하고 독자적 비정규노조를 설립하는 길과 정규직노조에 대한 계속적인 압박을 통해 조합원으로의 승인을 쟁취하는 길이다. 한통계약직노조는 전자의 선택을 했고, 집배원 비정규 노조는 후자의 선택을 했다. 한통계약직노동자들은 정규직노조와의 관계 단절 속에서 독자노조로서의 어려움을 겪었고, 집배원노동자들은 정규직노동자 노동조건을 위한 희생물이 되었다. 하기에 물론 한통계약직노동자들의 선택에 있어 어떠한 길이 옳았다는 것을 평가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 그러나 독자노조 설립이 현실과 맞부딪혔을 때 이 선택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는 면밀히 짚고 넘어가야 한다. 비정규 독자노조의 설립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정규직노조에 대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 이는 정규직노조와 명확한 선을 긋고 출발하는 것이자, 이후 정규직노조와의 관계에 있어 실질적 진전, 공동투쟁의 가능성이 그만큼 좁아지게 된 것을 의미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실제 계약직 노조는 독자노조 설립 이후 정규직노조에 그 어떠한 지원도 요구하지 못했고, 구조조정 저지 투쟁 과정에서 역시 함께할 수 없었다.
○ 노조합법화투쟁
비합법 독자노조로서의 조직화의 길은 그리 순탄하지 못했다. 한국통신은 구조조정 방침과 계약직 관리지침상의 2년초과근무금지 규정을 이유로 5월 31일 대전 2년 이상 근속자에게 해고통보(8월 말 3개월짜리 재계약, 재계약 거부로 4명 해고자 발생)등 재계약거부를 남발하였고, 이에 노조가 반발하자 1-2개월 단위로 계약 연장 조치로 반발을 봉합해 나갔다.
이에 계약직노조는 투쟁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는 계약직노조의 합법화가 전제되어야 한다는 문제의식 하에 노조합법화 투쟁에 매진했다. 계약직노조는 9월 30일 한통노조 대의원대회에서 규약개정 건을 심의할 것을 정규직 노조에게 약속받았으나, 규약개정 건은 377명중 242명으로 2/3를 넘지 못해 부결되었다. 10월 11일 임시대대에 와서야 규약개정 처리가 이루어짐으로써 계약직노조협의회 설립이후 8개월만인 10월 14일에 와서야 한통계약직노조는 합법적인 노동조합으로서 설립신고 필증을 발급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11월 말, 12월 말 대량해고를 눈앞에 두고 있었던 계약직 노조가 합법화 문제에 매진했던 당시의 방향성에 대해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거친 고민이기는 하지만, 합법화투쟁이 당장의 대량의 정리해고를 앞두고 있던 노동자들에게 가장 절실한 문제였던 것인지, 어차피 현장에서 떨구어져 투쟁을 진행할 수밖에 없었던 계약직노조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합법적파업과는 무관하게 투쟁을 조직하는 데 매진했어야 하는 것은 아니었는가 하는 것이 그것이다. 당시 노조합법화보다 조합원들의 전국 조직화에 중점을 두고 정리해고 투쟁을 준비해 들어갔다면 좀 더 강고한 조직력을 가진 투쟁, 사업장에서 밀려나기 전에 위력적인 파업투쟁을 감행 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가능성을 조심스레 타진해 본다.
○ 합법화 이후도 계속되는 노조탄압 , 구조조정을 빌미로 한 7000명 대량해고
그러나 노조 합법화 이후 사측의 반격 역시 만만치 않았다. 10월 12일 9인(8인 중앙 간부)에 대한 징계 해고 통보, 10월말 11월초 대전지역 조합원들에 대해 2인 파면, 16인 해고, 정직 9명, 감봉 7명, 경고 4명 등 38명에 이르는 징계결과 발표로 노조활동에 직접적인 압박을 가해오기 시작했다. 이에 노동조합은 전화국별 출근투쟁에 돌입하고 11월 11일 중앙노동위원회에 쟁의조정 신청을 접수했다. 그러나 계약직 노동조합은 11월 24일 중앙노동위원회 조정회의에서 회사측의 성실교섭 및 조정기간중 불이익 금지 합의에 기반하여 15일 조정기간 연장에 합의, 12월 12일까지로의 기간연장에 손을 들어주었다.
그러나 한국통신은 성실교섭은 커녕 해고를 남발하면서 교섭의사 없음을 직접적으로 표명해왔다. 전체 계약직 10,000여명 중 7,000여명을 줄인다는 방침 하에 조정기간 중이었던 11월 30일자로 1,000여명 계약 해지, 12월 31일자로 6,000여명 계약 해지를 통보해왔다. 서울 114, 370여명 내용증명으로 해고통보 (12월말), 서울 국제전화국 27명 전원 해고통보 (12월말), 부산 114, 50명 해고통보 (12월말), 청주 계약직 전원 해고통보 (12월말), 충북 제천 10명 해고통보 (12월말), 전북 계약직 전원 12월23일자로 해고통보, 부산 계약직 350명 전원 11월30일자로 해고통보, 대구 계약직 전원 12월28일자로 해고통보, 대전114 29명 12월31일자 해고통보, 대전충남 계약직 전원해지통보를 자행했다. 이에 계약직노조는 11월 25~27일 투표율: 75.4%, 찬성율 91% 로 쟁의행위를 결의하였다. 12월 12일 조정기간 만료시기가 다가왔고 중노위는 사측의 책임이 너무 크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직권중재에 회부하지 않고 조정안도 제시하지 않은 채 종료 결정을 내려, 이에 따라 노조는 12월 13일부터 합법적인 파업에 돌입할 수 있었다.
○ 구조조정 저지투쟁과 비정규직 철폐투쟁의 분리
비정규직노동자들에게 배타적인 태도를 보이는 정규직노조의 행위는 언제나 비정규직 투쟁을 가장 어렵게하는 요소로 등장한다. 정규직노조의 공동투쟁의 거부로 인해 별도의 비정규직노조 설립은 정규직 노조가 이미 획득하고 있는 자본과의 대등한 교섭력을 전혀 활용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 또한 언제든 계약해지, 재계약거부 등의 형태로 현장에서 쉽게 내몰릴 수 있는 불안정성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안정적인 노동조합활동과 투쟁이 어려울 수밖에 없는 비정규직노동자로서의 존재조건을 극복하기 어려움을 의미한다. 더군다나 현장에서 분리되어 나온 해고투쟁이 맞물릴 수밖에 없는 한통계약직 노동자들의 상황 속에서 독자적인 투쟁을 진행할 수밖에 없었던 객관적인 현실은 정규직노조의 외면이 만들어낸 치명적인 어려움이었다.
이는 또한 정규직노조가 구조조정 저지투쟁으로서 한통계약직노조의 투쟁을 사고하지 못했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정규직노조는 구조조정과정에서 1차적으로 밀려난 계약직문제에 투쟁의 동의를 모아나가지 못함으로 인해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함께하는 위력적인 한통구조조정 저지투쟁으로 상승 발전해야 할 길을 왜곡시켰다. 이 과정은 이후 114분사저지투쟁에서도 마찬가지의 양태로 드러나면서 한통계약직노조의 투쟁과 함께 맞물린 투쟁을 조직하지 못하게 된다. 이 한계는 정규직노조가 구조조정 저지 전선에 스스로 파열구를 만드는 양태로 반복되어 나타나게 된다.
2. 파업투쟁돌입부터 3.29까지
○ 합법적 파업돌입, 정규직노조에 대한 또 한번의 상처
조합원 1200명을 조직하고 쟁의조정을 거쳐 12월 13일 합법적으로 파업투쟁에 돌입한 한통계약직노조는 700여 노동자들의 파업시작과 함께 즉각적인 1차 상경투쟁에 돌입했다. 1차 상경대오 500여명은 12월 13일부터 15일까지 3일간의 상경투쟁을 진행한 후 각 지역별 순회투쟁을 벌이며 파업을 조직했다. 당시 한통정규직노조 역시 한국통신 구조조정에 대한 조합원들의 불안감과 투쟁의 의지에 밀려 12월 18일 오전 9시를 기해 전면파업에 돌입하게 된다. 일방적 인력감축(3,000여명) 철회 / 전기통신법 개악 등 민영화 반대 / 2000년 단체협약 이행 등을 요구하면서 명동성당에 2만여 조합원들이 결집했고, 투쟁의 대오는 강고하게 유지되었다. 이에 한통계약직 노조는 한통정규직노조에 공동투쟁기구 구성을 제안하고, 명동성당에서도 공동투쟁을 호소하는 유인물을 계속해서 뿌렸으나, 한통정규직노조의 반응은 미온적이었다. 지역 순회투쟁을 진행하며 계약직 노동자들의 파업 동참을 조직하던 한통계약직노조는 다시 한통정규직노조의 파업에 연대파업을 결의하며 19-20일 2차 상경투쟁을 조직한다. 그러나 900명의 계약직노조원들은 명동성당 입구에서 정규직노조와의 연대투쟁을 거부당한 채 명동성당에서 발길을 돌려 고려대학교로 자리를 옮길 수밖에 없었다.
○ 혹한의 추위를 딛고 진행된 노숙투쟁 - 계약직노조의 조직력과 민주성의 극대화
계약직노조는 다시금 대오를 추스리고 12월 27일부터 3차 상경투쟁에 돌입, 28일 기습 본사점거투쟁을 진행했다. 그러나 공권력에 의해 무자비하게 끌려나올 수밖에 없었던 조합원들은 이날부터 본사앞 노숙농성투쟁에 돌입한다. 계약직조합원들은 침낭과 비닐 한 장에 의지해 본사앞에 몸을 뉘였고 혹한의 추위는 계속되었다. 추위를 우려한 지도부가 30일 지역 귀향결정을 내리지만, 조합원들의 반발은 거셌다. 지도부의 귀향결정을 번복하고 조합원들 스스로의 논의를 통해 결정할 것을 요구했다. 각 지역별 분임토의가 활발히 진행되는 가운데, 본사 앞 노숙농성은 본조와 서울본부를 중심으로 계속 진행키로 하고 지역대오는 1월 2일부터의 즉각적인 4차 상경투쟁을 결의하며 귀향 재결정을 내리게 된다. 이러한 노조 민주성의 발현은 이후 3·29 점거투쟁과 같은 고강도투쟁을 조합원 전원이 함께 결의할수 있는 기본적인 토양으로 작용하게 된다.
1월 2일부터 16박 17일에 걸친 4차 상경투쟁이 시작된다. 400여 조합원들의 본사 앞 노숙농성은 강고하게 이어지지만 폭설과 혹한을 동반한 기상이변은 상상 이상이었고, 노숙농성 과정에서 충남본부 이동구 동지가 쓰러져 반신마비 상태에 이르르게 된다. 혹한의 투쟁과 정규직노조의 냉대를 견디면서도 대오는 굳건하게 유지되었다. 본사 앞 노숙농성과정 공권력과의 상시 대치과정 속에서도, 당시 콘테이너 설치 등 고강도 투쟁을 벌여나가고 있던 이랜드 투쟁의 연대투쟁을 통해서도 조합원들은 조금씩 단련되고 있었다. 조합원들의 이러한 결의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쟁점화가 이루어지지 못하는 가운데 노조는 선도투의 필요성을 느끼고 1월 15일 1차 한강대교 아치 고공농성을 진행한다. 1월 17일, 총파업 36일만에 사장과의 면담이 이루어지지만 별다른 합의지점을 도출하지 못하고 18일 지방본부별 귀경결정을 내린다. 지역별 거점 투쟁이 진행되는 가운데 1월 30일 5차 무기한 상경투쟁에 돌입한 계약직노조의 본사 앞 노숙투쟁은 계속 이어진다.
투쟁의 전망에 대한 논의는 고강도 투쟁에 대한 고민으로 이어졌고, 이후의 계획은 점거투쟁을 실제화시키기 위한 계획 속에 배치되어 간다. 동일한 맥락에서 한통계약직노조는 3월 6일-9일(3박 4일) 전국 순회투쟁에 돌입하기로 한다. 당시 대우자동차 투쟁을 중심으로 한 구조조정 저지전선이 설치되어 있어 전국적 연대투쟁 전선의 확대와 사회적 쟁점부각에 일정정도의 어려움이 예상되었던 것이 사실이지만, 계약직 노조는 조합원들의 투쟁역량 강화, 미참여 조합원 조직화 및 조직정비의 자기목적성을 가지고 전국순회투쟁에 돌입, 광주의 캐리어노조 등 투쟁하는 지역단위의 비정규노조의 투쟁에 함께 하면서 조직 강화라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다. 조합원들의 사기는 고양되었고, 스스로를 비정규직 투쟁의 주체로 세워가고 있었다. 노동조합의 조직력과 민주성이 극대화되었던 시기, 이랜드와 대우자동차 투쟁의 헌신적인 연대 투쟁을 통해 단련되었던 시기, 파업돌입 이전에도 현장투쟁으로 기본을 다져왔던 한통계약직 노조는 조합원들을 투쟁의 주체로 세우기 위한 기본과정을 건너뜀 없이 기초부터 탄탄히 만들어가고 있었다. 순회투쟁 이후 조직력있는 점거투쟁 준비가 실제화된다. 조합원들의 사기는 충분히 고양되어 있었고, 여러차례의 분임토의를 통해 그것을 자기 스스로의 결의로 받아들였다. 동지를 믿고 조직을 믿고 승리의 확신을 가지고 점거투쟁은 그렇게 준비되어 나갔다.
노조 초기단계에서 현장투쟁으로 단련된 투쟁력, 집행부의 귀향결정을 조합원들의 손으로 뒤집을 만큼의 노조민주성, 본사앞 상경 노숙투쟁과정 일상적 긴장상태의 유지가 만든 노조의 규율, 상시적인 공권력과의 대치 속에서 만들어진 전투성, 혹한의 추위를 견뎌내는 과정속에서 획득한 동지애와 자신감, 정규직화 쟁취투쟁이라는 투쟁기조의 명확함, 자기투쟁에 국한되지 않는 연대투쟁 등 파업 초기단계에 획득된 소중한 경험들은 이후 강고한 한통계약직 투쟁이 가능할 수 있는 기본 토양을 만들게 된다. 우리는 파업 초기 단계의 중요성을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음을 이미 알고 있다. 한통계약직노조가 이 때 상경투쟁이 아닌 지역거점투쟁을 택했더라면, 대학교에 안정적 거점을 마련하는 방식을 택했더라면 한통계약직투쟁에서 보여진 비타협성과 전투성은 가능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한통계약직 투쟁에 있어 파업 초기에 형성된 조건들이 의미하는 바는 가히 크다. 이 시기가 517일간 진행된 전체 투쟁을 작동하기 만든 실질적 자기동력이었음을 확인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작업일 것이다.
○ "비정규직 철폐와 한통계약직 노조 투쟁승리를 위한 공동투쟁위원회"의 결성
2월 2일부터 한국통신계약직노조 투쟁지원대책위 건설을 위한 회의가 6차례에 결쳐 진행되었다. 소집권자, 상황실장, 정책팀, 교육문화팀, 법률팀, 재정팀으로 체계를 구축하고 "비정규직 철폐와 한통계약직 노조 투쟁승리를 위한 공동투쟁위원회"(이하 공투위)로 명칭을 확정, 3월 14일 발족식을 진행했다. 연대단위들은 한국통신 계약직 노동자들의 투쟁이 구조조정에 저항하는 비정규직들의 투쟁임에 착목했다. 구조조정의 희생자인 비정규직들이 구조조정 투쟁 전선에 나서고 있음에 주목하면서, 이를 통해서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함께 하는 온전한 구조조정 저지 전선을 만들어낼 수 있게 되었다고 평가했다. 한국통신 계약직 노동자들은 구조조정 저지, 비정규직 완전 철폐·정규직화를 목표로 내걸고 투쟁을 진행해오고 있고 투쟁 과정에서도 매우 헌신적이고 흔들림없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고 비정규직 투쟁의 선도적 역할을 해야 한다는 노동조합 내부인식도 형성되어 있음에 주목했다. 공투위는 ① 한국통신 계약직 노동조합 투쟁 지원대책위원회는 투쟁의 비정규직적 성격에 주목해서 독자적인 활동을 하는 단위가 되어야 한다 ② 지원대책위원회가 독자적인 사업계획을 갖고 움직이더라도 이것이 한국통신 계약직 노동조합의 투쟁과 긴밀하게 연관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자기 역할을 정립하고 비정규직 투쟁과 한통계약직노조투쟁의 승리를 위한 공동의 행보를 결의해 나갔다.
이는 한통계약직노조의 투쟁이 구조조정 분쇄, 비정규직 철폐 투쟁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문제의식을 가진 운동진영의 공동의 투쟁결의가 제출되고 확인되는 과정이었음을 의미한다. 이제 한통계약직노조의 투쟁이 단위사업장 차원의 투쟁이 아니라 이 땅 노동운동에서 구조조정 저지투쟁과 비정규직 철폐투쟁의 자기위상을 획득하는 과정으로서의 의미를 가진다. 공투위의 건설과정은 대우차 공투본에 이은 공동의 논의와 결정, 공동집행이라는 명실상부한 공동투쟁질서를 건설하고, 투쟁단위와 지원단위로 분리되어 진행되었던 이전의 연대질서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했다는 점에 있어 진일보함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이후 투쟁의 진행과정에서 확인되겠지만 한통계약직노조의 투쟁지원으로만 국한되지 않는 사업체계를 가지고 독자사업을 진행하겠다는 계획은 시기가 지남에 따라 노조의 투쟁지원이라는 측면으로 머무는 모습으로 반복되어 나타난다.
3. 3.29 투쟁
○ 3.29투쟁을 가능하게 한 요인
한통계약직 조합원 198명이 첩보작전을 방불케하는 조직적 움직임을 통해 경찰의 감시망을 뚫고 전화국에 진입한다. 조합원 모두가 사수대, 한명 한명이 모두 전사로서의 자기책무를 다했다. 노동자들의 도발에 허를 찔린 경찰도, 지리산에서 수련회를 진행하고 있던 한통 노사협력팀도 한달음에 내달려올 수밖에 없었다. 3.29투쟁이 실제 결행될 수 있었던 과정은 무엇이었을까. 198명에 달하는 조합원들의 자발성과 일사불란함은 어디에서 연유한 것일까. 구속 6명, 불구속 62명, 나머지 전원이 즉심-특히 여성조합원들 대상으로 10일간의 구류를 선고받고도 그 투쟁을 이어갈 수 있는 힘이 과연 무엇일까. 법외노조로 출범한 한통계약직 노조는 파업투쟁 돌입 이전에도 대전지역 해고자가 발생했을 때 달려가 몸을 던져 투쟁했다. 현장투쟁을 통해 단련된 힘은 초기노조의 기풍을 만들었고, 이 기풍은 파업 돌입 이후에도 투쟁적인 노조로서의 물러섬 없는 투쟁을 가능케 했다. 희대의 혹한과 폭설을 견뎌낸 자신감, 일상적인 공권력과의 투쟁, 집행부의 결정을 뒤짚는 조합원들의 자발적 움직임은 3.29 점거농성을 조직적으로 준비해 가는 것을 가능케 했다. 자기 투쟁에 국한되지 않는 전국순회투쟁을 통한 단련, 수차례의 분임토의를 통해 모아나갔던 결의, 이러한 준비과정을 통해 198명의 조합원은 점거투쟁을 실행할 수 있는 전사들로 성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노조민주성과 조직력이 극대화되었던 시기, 한통계약직 투쟁의 한 획을 긋는 3.29 점거투쟁(일명 골뱅이투쟁)은 그렇게 성사될 수 있었다.
○ 3.29 투쟁의 의미
가장 먼저 3.29 투쟁은 점거투쟁이라는 선도투를 대중투쟁으로 상승시킨 투쟁으로서의 의미를 지닌다. 이와 같은 전술은 조합원 한 명 한 명의 결의를 간부결의 수준으로 끌어올릴 수 있을 때만이 실행가능한 투쟁이었으며, 실질적인 조직력과 동지들에 대한 신뢰가 없다면 실행 불가능한 투쟁이었던 것이다. 많은 장기투쟁사업장에서 투쟁의 사회화를 위해, 사측에 압박을 가하기 위해 선도투를 주요한 투쟁전술 중 하나로 배치한다. 그러나 이는 결의되는 몇몇 인자에 의해 결행되고, 이들의 큰 희생을 통해 투쟁의 사회화를 꾀한다. 그러나 이러한 선도적인 투쟁이 대중투쟁으로 결행되는 순간, 이는 노동자 대중의 자발적 자기의지에 의한 현장탈환 투쟁으로서의 의미를 갖게 된다. 마땅히도 돌아가야 할 현장을 노동자들의 힘으로 점하는 순간 현장은 노동자들에 의해 장악되는 것이다.
또한 3.29는 현장에서 밀려난 비정규직노동자들이 자본의 이윤사이클을 타격하기 위해서는 극한의 투쟁을 전개할 수밖에 없음을 증명하는 것이기도 했다. 해고통첩을 받고 현장에서 밀려난 상황이기에 파업투쟁을 통한 타격이 유효하지 않는 상황에서, 교섭석상에 사측을 불러다 앉히는 것조차 힘겨운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취할 수 있는 투쟁의 방식은 구속을 결의한, 목숨을 결의한 투쟁일 수밖에 없음은 필연적 귀결지점일 수밖에 없다. 3.29를 통해 우리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서 찾을 수 있는 전투성과 건강함은 그 존재조건 속에서 연유함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었다.
3.29 투쟁을 통해 한통계약직 노동자들은 스스로의 투쟁의 결의로 연대투쟁 전선의 확장을 시도했다. 그간 대우차 투쟁으로 쏠려있던 운동진영 내의 무게중심이 3.29 투쟁을 통해 한통계약직투쟁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대우차 연대를 이유로 한통계약직 투쟁에서 보이지 않았던 학생들이 한통계약직 투쟁에 착목하기 시작했다. 계약직 노동자들은 스스로의 투쟁의 의지를 보임으로 인해 한통계약직 투쟁의 의미를 운동진영 내 쟁점화해냈다. 3.29투쟁은 이후 연대의 폭을 넓히고 한통계약직 투쟁을 비정규직 철폐투쟁의 상징적 투쟁으로 자리매김하는데 결정적 계기로 작용한다.
○ 3.29투쟁 평가
3.29투쟁에 있어 가장 주되게 평가되어야 할 바는 우리 모두가 329투쟁의 의미에 대해 얼마나 인식하고 있었는가 하는데 있다. 당시 많은 연대대오들이 대우차 정리해고 투쟁에 전력투구하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한통공투위도 건설 초기 제 역할을 아직 잡아나가고 있지 못했고, 공투위에 참가하고 있는 단위들 역시 한통계약직 투쟁에 온전히 집중하고 있지 못했다. 공투위 내에서도 보안에 강박당해 3.29투쟁의 결행과 이에 대한 엄호전선 구축에 대한 구체적 논의는 소수의 고민으로 머물렀고 전체공투위 차원에서 검토되고 공유되지 못했다. 그러한 가운데 공투위 소집권자의 예상치 못했던 연행사태로 현장지휘체계는 완전히 무너졌고, 이후 공투위는 상황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우왕좌왕할 수밖에 없었다.
운동진영에서 3.29투쟁의 의미에 대해 함께 공유하고 있지 못했던 바는 3.29투쟁의 외곽엄호대오의 수준에서도 명확히 드러난다. 물론 D-day의 불투명함으로 인해 2박 3일을 함께 움직여야 외곽엄호가 가능했던 쉽지 않은 구조였다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주체들이 보여준 투쟁의 수위에 비해 연대단위의 준비과정은 미흡했다. 기획회의를 통해 공투위가 공투위 내부조직화, 공공연맹이 기타단위 조직화라는 역할을 나누어 맡기는 하였으나 공투위는 자기 역할을 공투위 내부조직화로 스스로 축소시켰고, 공공연맹의 기타단위 조직 역시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 결과 한통계약직 노동자들은 눈발을 맞으며 쓸쓸하게 끌려 나올 수 밖에 없었다. 공투위의 자기 역할이 바로 연대대오 조직을 위해 발로 뛰고, 점거투쟁이후 확산의 계획을 잡아내는 것이었지만, 공투위 역시 노동조합과 함께 진입전술만 집중하고 여타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
사실 이보다 더 중요했던 것은 3.29이후 이 투쟁의 의미를 어떻게 확산시킬 것인가에 대한 계획의 수립이었다. 그러나 투쟁의 준비과정에서 확산의 계획은 사실상 전무했고 3.29이후의 상황은 이 국면을 어떻게 수습할 것인가의 문제로 국한되어버렸다. 329이후 공투위에서 이후 투쟁을 잡아내려 했지만 동력은 점검되지 못했다. 이 투쟁의 의미들을 확장해 내고, 전체 전선을 어떻게 설치해야 할 것인가의 주도적인 고민이 부재한 상황에서 10여일간의 구류를 살고 나온 조합원들을 추스리는데 한달 이상을 소비해야 했다. 이는 전체 점거투쟁 준비과정에서 이 투쟁의 의미가 명확히 공유되지 못했었다는 것을, 상급단체와 공투위의 역할이 무엇인지 명확히 잡아내지 못한 것을 의미한다. 주체들의 투쟁의 의지를 뒷받침 할 수 있는 상급단체 차원, 운동진영 내 공동의 고민과 계획은 제출되지 못했고, 이는 주체들의 강고한 투쟁의 의지에도 불구하고 3.29투쟁을 고립시키는 데 가장 큰 몫을 담당하게 된다. 이후 투쟁은 남은 조합원들의 면회투쟁, 양천서 항방과 선전전, 1회적인 대우차 공투본과의 연대집회 등으로 대체되어 버렸다. 공공연맹 차원의 확산계획 역시 공공연맹주최의 규탄집회를 한번 조직하는 것이 전부였다. 구속을 결의하고 진행된 계약직 노동자들의 투쟁에 대한 확산을 책임져야 할 상급단체와 운동진영의 역할은 그것으로 끝나버렸다.
계약직노조는 치밀한 준비과정을 통해 전화국 점거라는 쉽지 않은 투쟁을 실행하는데 성공한다. 하지만 계약직노조 역시 3,29 준비과정에서 이후 계속되는 투쟁을 이끌어나갈 2선 집행부에 대한 고민은 크지 않았다. 한번의 점거투쟁으로 모든 것이 해결될 수 있다는 기대는 버려야 함을 조합원들에게 각인시켰음에도 불구하고, 준비과정에서 고민의 축은 전화국 진입전술로 치우쳐 있었다. 점거투쟁의 성사여부에 치우친 준비과정 속에서 2선의 지도력을 구축하는 문제는 심도있게 고민되지 못했고, 이는 점거결행일 이틀전에 2선집행부가 결정되는 과정을 통해서 드러난다. 준비과정에서 점거 이후 투쟁방향에 대한 선고민 부재는 이후 수습과정을 더욱 지난하고 힘들게 만든다.
계약직 조합원들은 점거농성 과정에서 보여준 일사불란한 진입과정과 묵비권 행사 속에서 서로에 대한 신뢰를 많이 쌓아갔지만, 결의에 비해 별다른 성과를 볼 수 없었던 조합원들의 평가지점은 연대대오에 대한 섭섭함, 파괴전술의 사용여부로 국한되어 진행되었다. 그리고 이에 대한 명확한 평가지점이 지적되지 못하는 가운데 점거투쟁은 절대화되었고 그로 인한 한편의 부담감이 지배적으로 작용하게 된다. 또 한 축으로는 조합이 할만큼 했는데 결과가 없다는 패배의식 속에 이후 조직적 퇴각론이 등장하는 데 하나의 계기점으로 작용하게 된다.
4. 114분사저지투쟁
○ 114분사저지투쟁 경과
4월 14일 114안내협의회는 한국통신의 114분사계획에 발맞추어 114분사저지투쟁위원회로 전환한다. 5월 3일 114를 비롯한 12개 사업분야의 분사화계획을 사내방송을 통해 발표하고 기습적인 이사회개최를 통해 분사화 계획을 날치기로 통과시킨다. 이에 대해 114정규직노동자들은 즉각적인 총파업투쟁을 조직하고, 한달이 넘는 분당본사로비 점거농성에 돌입하게 된다. 그러나 이동걸 집행부는 114 노동자들의 투쟁의 요구에도 불구하고 투쟁의 의지를 보이지 않았다. 쟁발 결의를 위해 조직된 5월 12일 대의원대회는 중본의 입지를 살리기 위해 현장간부들의 요구로 취소된 것처럼 만들었고, 대의원대회 취소로 인해 쟁의발생 결의는 무산된다. 쟁발결의도 없이 돌입한 파업투쟁은 합법적인 투쟁으로 인정되지 못하였고 114 노동자들의 파업투쟁은 무단결근으로 처리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악조건 속에서도 예상과 달리 114정규직노동자들은 500여명이 넘는 대오를 강고하게 유지하며 투쟁을 만들어간다.
정규직 노조 이동걸 위원장은 6월 20일, 근무지 이탈투쟁(파업투쟁)이 14일을 경과하는 시점에 민동회 회원인 김재규에게 직무대행직을 임명하고 중앙상집과 지역 상집의 총 사퇴를 표명하는 성명서를 발표한다. 첫 성명서에서는 무단결근 15일로 사규상 해고가 가능해지는 이 시점을 조합원들에게 알리는 것이 위원장의 역할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는 언급과 함께, 지도부가 제시한 투쟁과 교섭의 병행을 조합원들에게 설득시키지 못하고 있는 상황 속에서 조합원들이 희생을 감수하고서라도 끝까지 투쟁하겠다면 직무대행체계로 그 뜻을 이어가라는 내용이었다. 그 날 저녁 다시 이동걸이 띄운 글에서는 위원장 일신의 건강문제로 잠시 쉬다 올 것이니, 그 기간동안 직무대행을 믿고 따를 것을 당부하는 내용으로 뒤바뀌어 있었다. 이 웃기는 한판 쇼는 결국 이동걸위원장이 중본에서 쟁의행위를 선언하지 못한 상황에서 114 분당대오가 근무지 15일 이상 이탈로 해고가 눈앞에 온 시점에 책임을 면피하고 그 책임을 민동회에 떠넘기고자 하는 의도였던 것이다.
계약직 노동자들은 5월 8일 초반부터 공동투쟁을 제안하고 적극적으로 연대의 의사를 밝혔으나, 이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14 정규직들은 계약직 노조와의 연대에 소극적이었고 오히려 투쟁의지 없는 이동걸에게 거는 기대가 더 컸다. 그러나 계약직 노동자들은 헌신적인 연대투쟁을 진행하였고, 그 과정에서 114조합원들과의 투쟁속 신뢰를 만들어갈 수 있었다. 김임규비대위체제로 돌입하면서 한통계약직노조는 114 정규직 노동자들과 함께 114계약직 조직화를 위한 전국 거점투쟁에 돌입하고 114 계약직 노동자들 조직화에 나선다. 114계약직 노동자들이 투쟁에 동참하면서 계약직노조 조합원으로 가입하고 정규직과 계약직 공동투쟁의 성과가 나타나게 된다. 5월 25일 전국투쟁소식을 보자. 대전, 5월 25일 한통계약직과 114정규직 전화국에서 연설 /100여명의 계약직 노동자들이 계약직노조에 전원 가입/ 정규직과 계약직은 하나임을 선언하는 감동적인 마무리 집회, 대구 한통계약직과 114정규직들 정문진입시도 /114계약직 합류해서 함께 몸싸움 /40여명의 114노동자들이 계약직노조 가입 /정규직과 계약직이 함께 114앞에 천막 노숙투쟁 전개, 광주, 부산, 집단폭행에 대해 사과를 받아내는 등 지역에서부터 정규직과 비정규직 노동자간의 공동투쟁을 만들어갔다. 114정규직 노동자들과 한통계약직 노동자들이 함께 114 계약직을 조직하면서 투쟁은 상승곡선을 그려나갔다. 투쟁이 상승곡선을 그려가던 중 예상했던 바와 같이 5월 31일 이동걸 위원장은 복귀를 선언한다. 직대체계를 해지하면서 농성해산 명령을 내리고 정규직노조 지부장에 부서장까지 500여명이 구사대로 돌변하여 분당본사 114 파업대오의 강제해산을 종용한다. 114 파업대오는 계란을 던지며 격렬하게 저지하였고, 그 과정에서 청경투입으로 폭력사태가 발생, 많은 여성 조합원들이 부상을 당하는 사태까지 발생하게 된다.
그러는 가운데 6월 5일 수원지법 성남지원에서 114분사효력정지가처분신청이 받아들여졌다. 구조조정특별위원회에서 성실히 협의한다는 합의를 어기고 긴급이사회 통과로 결정된 분사화에 대한 효력정지 처분이 내려진 것이다. 이는 114분사저지투쟁의 정당성을 법적으로 인정받는 기회였고, 투쟁의 고삐를 다시금 당길 수 있는 판결이었다. 그러나 효력정지가처분신청이 나온 4일만인 6월 9일 이동걸위원장은 어처구니 없게도 114정규직과 아무런 협의 없이 직권조인으로 114분사화건에 대해 합의한다. 이후 김임규 직대체제는 김임규비대위로 출범, 투쟁을 이어나가게 된다. 드디어 6월 13일 역사적이고 감동적인 첫 공동투쟁 "114분사철회를 위한 한통노동자 총단결 총투쟁 결의대회"가 성사된다. 이는 6월 11일 114계약직 총파업을 조직, 230여명을 파업투쟁에 합류시킨 한통계약직 노동자들의 공동투쟁의 성과였다. 그러나 역사적인 공동투쟁 사흘만인 6월 16일 김임규 비대위는 공공연맹 양한웅 수석부위원장을 매개로 한 사측과의 협상의 자리에서 이동걸 집행부와 별 차이없는 합의안에 도장을 찍고 계약직노조와의 공동투쟁과는 무관하게 114투쟁을 일방적으로 마무리하게 된다. 농성대오는 새내기 모임을 중심으로 한 약간의 반발은 존재했으나, 큰 무리없이 해산, 복귀했고, 함께 투쟁했던 계약직노조의 허탈감은 컸다. 구조조정 저지투쟁에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함께하는 가운데 이뤄갔던 투쟁의 성과는 제대로 평가되지 못했다.
○ 114 분사저지투쟁위원회 평가
구조조정 저지투쟁의 온전한 승리를 위해서는 분명히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공동투쟁이 전제되었어야 했지만, 114투쟁 역시 그러한 상으로 조직되지 못했다. 5월 3일 전격적으로 파업투쟁에 돌입한 114분사저지투쟁위원회는 정규직 노동자들만을 대상으로한 파업투쟁을 진행했다. 당시 114 계약직 노동자들 역시 극도의 고용불안을 느끼고 있었지만 투쟁의 주체에서 배제당한 계약직 노동자들은 그들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파업 파괴세력으로 위치지워질 수밖에 없었다. 파업투쟁은 파괴력을 지니지 못했고, 투쟁의 주체들은 또다시 분리되었다. 한통계약직 노조는 5월 8일 114 분사 저지를 위한 공동투쟁을 한통정규직 노조에 제안했지만 실제 별 진전을 이루지 못했고, 계약직노조의 일방적 연대는 또다시 반복되었다. 114 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의 열기에 투쟁을 정리하고 싶어도 정리 할 수 없었던 이동걸위원장이 김임규 직무대행을 위원장 직대로 임명하면서 계약직노조와이 공동투쟁의 문이 열리는 듯 했으나, 김임규 직대체제 역시 계약직과의 연대에 소극적인 것은 마찬가지였다. 비대위가 꾸려지고 투쟁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계약직노조가 각 지방본부별 114번호안내국 조직화를 위한 지역투쟁을 진행, 114계약직 노동자들을 조직, 상경시켜 투쟁의 전기를 마련했고 그 성과로 6월 13일 정규직과 계약직과의 역사적이고 감동적인 첫번째 공동투쟁이 진행되기도 하였으나, 사흘만에 김임규 비대위는 다시 사측과의 합의를 통해 114문제를 계약직노조와의 공동투쟁과는 무관하게 일방적으로 마무리했다. 114 계약직 노동자들이 스스로 힘겹게 결의한 총파업투쟁은 투쟁에 있어 어떠한 성과와도 연동되지 못한 채 묻혀졌고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함께하는 위력적인 총파업투쟁은 결국 조직되지 못했다. 정규직노조에서 비정규직 노동자를 끌어안고 투쟁하지 못한 객관적 한계는 결과적으로 114분사저지투쟁의 실패라는 결과로 귀결될 수밖에 없었다.
○ 민주동지회 평가
민주동지회가 비록 현장 내 한계적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114분사저지투쟁에서만은 명확한 관점을 견지하면서 대안세력으로 자리매김했어야 했다. 계약직노조와의 공식적인 연대를 천명하고 114분사저지투쟁을 정규직과 계약직 노동자들의 공동의 투쟁으로 돌파해나가야 한다는 문제의식을 가지고 정규직 내에 영향력을 확대해 나갔어야 했다. 투쟁기간동안 민동회로서는 자체 일정보다는 114결정단위에서 함께 토론하고 결정하여 집행하도록 결합해왔지만 민동회와 직대체계 사이의 공식적 논의테이블을 가지고 상집을 조직적으로 강제하지 못했다. 114분사저지투쟁의 부담감, 계약직노동자들과의 연대에 있어서의 부담감 모두 충분한 실력으로 무장되지 못한 민동회에게 114투쟁에서 전면화된 투쟁의 주체로 나서는 것을 주저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민동회가 자신의 조직적 입장과 방침을 명확히 세우고 투쟁을 조직하지 못하는 사이 직대체계는 분사철회라는 기본적인 입장마저 세워내지 못한 채 이동걸 집행부에게 휘둘리게 된다. 민동회는 직대체계를 통한 노동조합의 전반적 장악에 실패하고 명확한 자기입장을 투쟁으로 세워내지 못한 과정은 이후 민동회에 대한 사측의 전방위적인 탄압에 조직력이 극도로 약화되는 과정을 방어해낼 수 없게 만들었다.
○ 직대체제 평가
이동걸체제의 면피용 권력이양으로 직대체제는 '직대의 권한과 114파업대오' 외의 현장동력이 부재한 상황에서 출범하게된다. 직대체제는 114독자투쟁으로 방향을 잡았을 뿐 조합원 전체에 대한 전반적인 장악력을 행사해내지 못했다. 그런 상황으로 분사화 철회에 대한 강력한 의지나 계약직 노조와의 전면적인 공동투쟁계획 역시 잡아가지 못했다. 직대체제의 분사'철회'가 아닌 '유보'를 골간으로 한 교섭 요구안은 114정규직 일부(새내기모임-95년도 입사자 중심)로부터도 비난을 받았고, 이러한 기본적 입장 속에서 직대체제는 이동걸 집행부와 큰 차이를 보이지 못했다. 이에 이견을 제출했던 새내기 모임 역시 신명희 여성국장의 절대적인 영향력을 극복하지 못하고 대안세력으로 세력화하지 못했다. 결국 대안세력의 애매한 입장정립 속에서 이동걸 집행부와 직대체제 사이에서는 복귀후 교섭이냐, 성과없는 복귀불가의 차이가 있었을 뿐이었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직대체계는 계약직노조가 제출한 1) 114분사철회를 목적으로 한다 2)114계약직들의 당면현안을 쟁취한다 3)교섭은 단일화하고 가능한 일괄타결로 한다 4)한통계약직노조문제의 해결을 제기하고 적극 결합한다. 5)분사철회 이후 한통계약직노조의 연대지원을 결의한다 6)한통문제의 해결을 위한 공동대책기구를 건설한다는 공동투쟁요구안도 수용하지 못했다. 명확한 자기위상과 투쟁의 집중점을 잡지 못했던 직대체제는 이동걸의 복귀선언 이후 무기력감에 휩싸여 크게 동요했고, 불분명한 위상을 가졌던 비대위체제 역시 얼마안가 어떠한 성과도 남기지 못한 채 일방적으로 사측과의 합의를 거쳐 전권을 다시금 이동걸에게 내어주게 된다.
○ 공공연맹 평가
114계약직 투쟁과 한통계약직투쟁의 흐름을 묶어 공동의 투쟁 흐름을 형성했어야 할 책임을 가진 주체는 바로 공공연맹이었다. 그러나 연맹에서조차 철저히 두 투쟁을 분리사고함으로써 각각의 투쟁이 고립되도록 만들었다. 연맹 내 담당자간 의견조차 일치를 보지 못하였고, 올바른 투쟁의 성격과 투쟁의 전선을 만들어가야 할 상급단체에서 이러한 역할을 해내지 못한 것은 114분사저지투쟁에 있어서나 한통계약직투쟁에 있어서 연맹에서 가장 크게 평가받아야 할 지점이라 할 것이다. 이는 공동투쟁을 결의하고 조직했던 한통계약직노조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일방적으로 이루어졌던 마지막 비대위체제의 합의과정에서 보여졌던 공공연맹의 깊숙한 관여에서도 명확히 드러난다.
또한 문제가 되는 것은 이동걸 집행부에 대한 공공연맹차원의 태도였다. 공공연맹은 이동걸의 느닷없는 직대임명과 복귀선언, 조합원들의 의지와는 명확히 동떨어진 직권조인에 대한 어떠한 징계도 언급하지 않았다. 또한 분사철회투쟁에 대한 명확한 입장도 제출하지 않았다. 이는 단위노조를 지도하는 상급단체로서의 위상과 역할이 달린 문제였다. 그러나 공공연맹은 투쟁에 대한 명확한 입장과 원칙을 강제해 내지 못하고 연맹 내 최대 조합원 수를 보유하고 있는 콧대높은 어용노조 한통정규직노조의 눈치를 보는데 그쳤다.
○ 한통계약직노조 평가
계약직노조는 114분사저저투쟁에 헌신적 연대를 진행했고, 그 과정에서 각 지역 114 출근저지 투쟁 등을 통해 114계약직노동자들의 투쟁을 조직해냈으며 지역거점 투쟁을 통해 각 지역 비정규직 투쟁의 흐름을 일구었다. 114분사저지투쟁이 시작되자마자 계약직노조는 5월 5일 조합원 총회를 통해 17일간의 지역거점투쟁을 결의한다. 한국통신 계약직 투쟁 전국화/ 지역에 산재한 대오 재조직화 / 중간간부의 역량강화/ 114, 민동회와의 현장으로부터의 연대투쟁/ 지역연대투쟁으로 5말6초 시너지효과 창출을 목표로 서울/ 대전/ 대구/ 부산의 4개 거점에서 천막농성을 기본으로 114선전전, (목)전국동시다발집중집회 등을 진행한다. 이 과정에서 114정규직들조차 책임지려하지 않았던 114계약직 노동자들을 계약직노동자들 스스로가 조직하고 결국 계약직노동자들의 파업투쟁, 정규직노동자들과의 공동투쟁까지도 끌어내는 성과를 거두게 된다.
그러나 계약직 노조에게 구조조정 저지투쟁에 대한 자기목적성이 처음부터 존재했던 것은 아니었다. 계약직노조는 12월 13일 파업 돌입 이후에도 전국적으로 114 전담반을 편성하여 조직화에 힘썼지만, 114 계약직 노동자들은 계약직 노조로 조직되고 투쟁하는 것을 회피해왔다. 이에 대한 계약직노조 조합원들의 불만은 114분사저지투쟁의 연대에도 그대로 드러났고, 수차례의 교육과 분임토의 등을 거친 이후에야 연대투쟁을 결의할 수 있었다. 당시 사측은 정규직 구조조정을 완전히 마치고 나면 다시 신규채용을 할 것이고, 그 때 계약직 노동조합 조합원들을 정규직으로 전환시켜줄 수도 있다는 이데올로기를 유포시키며 공동투쟁을 가로막았고, 초기 조합원들에게 있어 작지 않은 영향력을 끼쳤던 것도 사실이다. 일단 114공동투쟁으로 투쟁계획과 전망을 잡았으나, 계약직노조에서 114분사저지투쟁 속에서의 명확한 자기목표설정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정규직노조 직대의 불분명한 태도로 인한 혼란, 이전 투쟁에서 함께 하지 않았던 114동지들에 대한 조합원들의 정서, 114계약직을 정규직파업 마무리까지 과연 책임지고 갈 수 있을지에 대한 의구심 속에서 투쟁은 목적의식적으로 조직되고 배치되지 못했다. 그 속에서 114투쟁에 대한 입장을 내리는데 한동안 머뭇거릴 수 밖에 없었고, 한동안 114계약직 조합원들에게 전적동의서 거부투쟁외에 다른 지침 내릴 수 없었던 과정 역시 존재한다.
정규직 비대위가 분사철회투쟁을 접고 업무에 복귀한 이후 조직된 114 계약직 노동자들의 투쟁 동력은 급격히 감소했고, 복귀 조건으로 KIS(분사되는 회사)로 갈 경우의 고용승계, 노동조건 개선, 노동조합 활동 보장등을 114계약직의 요구조건으로 내걸었다. 114계약직 노동자들은 1년, 6개월의 고용계약서를 쓰고 복귀했지만 계약직노조가 150여 114 계약직 조합원들의 고용보장에 있어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다. 결국 대구와 대전 정도만 체계를 갖추고 내부 현장투쟁을 하기로 결의하고 업무에 복귀했지만 현장투쟁은 실제 가능하지 않았다. 당시 계약직 노조에서는 규약을 변경해서 도급이나 분사 노동자도 끌어안고 가는 것에 대한 적극적인 검토가 이루어졌다. 많은 논란이 정리되지 않은 채로 마무리되었지만 분사된 114조합원들까지 끝까지 책임지고자 하는 문제의식 속에서 제기된 비정규통신 산별노조로의 전환에 대한 문제의식은 높이 평가해야 할 부분이라 할 수 있겠다.
○ 공투위 평가
공투위는 한통 구조조정에 대한 명확한 입장은 존재했으나 그만큼의 실천을 조직하지는 못했다. 분사철회 투쟁에 대한 당위성은 있으되, 공투위 차원의 독자계획을 제출하지 못하고 노동조합이 잡아놓은 투쟁일정(114 출투와 집회 등)에 단순결합하는 수준 이상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초기 한통 구조조정에 대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출발했던 공투위였던 만큼, 114 구조조정저지투쟁에 있어서만큼은 독자적 자기계획을 가지고 갔어야 했다. 이는 초기 건설되었다가 작동되지 못했던 정책팀의 가동과 독자적 실천계획이 적극적으로 고민되고 배치되었어야 했음을 의미한다. 공투위에서 정규직과 계약직과의 공동 행보 및 정규직 현장조합원과의 연계가 중요함을 공통적으로 인식했지만 이 문제의식을 현실화시키는데는 많은 한계들이 존재했다. 결국 연대단위의 현장 진입, 공투위 단위들의 분당지지방문을 조직하여 연대감을 확대하는 게 필요하다는 정도의 논의와 실천계획 수준으로 그칠 수밖에 없었다.
또 한편으로 당시 한국통신 114분사 철회와 성차별적 정리해고 및 비정규직 노동자 생존권 확보를 위한 공동대책위원회가 독자적으로 구성되었다. 이 공대위는 한통계약직노조와의 공동투쟁에 대한 문제의식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었고, 이에 한통공투위가 적극적으로 개입하고자 했으나 실제적 개입이 가능하지 않았던 객관적 상황이 존재한다. 결국 한통정규직과 한통계약직과의 공동투쟁을 만드는 것에 대한 민중운동진영 내의 입장과 실천에 있어서도 통일되지 못하는 과정 속에서 정규직과 계약직 노동자들의 공동투쟁을 이끌어 낼 수 있는 마지막 가능성마저 상실되고 만다. 이 공대위의 경우 114의 문제를 성차별적 정리해고의 문제, 여성노동자들의 문제로 축소시켰고 이 과정에서 계약직 노동자문제와 연동된 구조조정 저지투쟁으로서의 투쟁의 위상은 쟁점화되지 못했고 결국 공동투쟁의 단초는 만들어지지 못했다.
○ 공동투쟁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은 무엇인가.
당시 한통에서의 114 분사 강행은 한통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공동의 투쟁이 벌어질 수 있는 정세적 조건을 만들고 있었다. 그리고 주체적 조건을 보더라도 정규직 투쟁주체들과 비정규직 투쟁주체들 모두 투쟁의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는 공동투쟁의 필요성과 공동투쟁의 실행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주·객관적 조건에도 불구하고 왜 이 정규직과 비정규직은 공동투쟁으로 만나지 못한 것일까. 거친 고민이지만 대중조직으로서의 노동조합이 조직대 조직으로 만나 공동투쟁을 논하기에 앞서 활동가 수준에서 대등한 논의가 선행되었어야 했다. 양자가 만나는 공식적인 테이블의 구성과 공동의 요구안의 정립, 공동의 투쟁계획 수립은 조직대 조직으로 만나 공식적인 논의를 통해 진전시키기 어려운 문제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각 조직 내부의 활동가들의 문제의식이 먼저 교류되고 합의되면서, 공동투쟁을 현실화시키는 구조는 어떠한 것인지, 제기할 수 있는 방식은 어느 것이 효과적인지, 공동투쟁의 수위는 어디까지 실제 가능한 것인지 꼼꼼히 분석하고 이를 각 조직 내 실현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었어야 한다고 본다. 이러한 구조는 앞으로도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공동투쟁을 고민하고 있는 단위에 있어 반드시 고려되어야 할 것으로, 실제 공동투쟁을 가능하게 만드는 구조는 정규직 비정규직 내부 활동가들의 문제의식의 합의를 통해 공동투쟁을 현실화시키는 과정인 것이다.
5. 노동자대회(2차투쟁준비)까지
○ 2차 투쟁이라는 투쟁전망의 앙상함과 계속적인 결의와 유예의 반복
114분사저지투쟁에서 정규직 노동자들에게 다시 한 번의 배신감을 맛보아야 했던 한통계약직 노조는 분사합의 이후 투쟁방향을 명확히 설정하지 못하고 2차 점거투쟁이라는 앙상한 전망만을 붙들고 투쟁을 이끌어가야 했다. 게다가 6월 말이면 그간 지급되었던 고용보험도 모두 끝나는 시기, 조합원 개개인들이 심한 재정압박에 직면하게 되는 상황이었다. 투쟁이 6개월을 넘어서면서 특히 기혼 조합원들을 중심으로 가중되는 압박은 컸다. 따라서 6월 말에 많은 조합원이 이탈할 것이라고 보는 것이 대체적 견해였고 조합원들 역시 어려움을 호소해왔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는 가운데 계약직노조는 7,8월 투쟁 방향을 파업대오의 조직력 강화를 통한 2차 투쟁을 예비하는 것으로 초점을 맞춘다. 규율, 질서, 긴장감 유지를 위해 지역본부 체계를 해소하고 조체계로 재편성하고 조직체계를 단일화해 나간다. 주 1회 계약직노조 사측압박전술을 원칙으로 하고 비정규직 투쟁사업장을 모아 공세적 지형을 만들어나가고자 했다.
7월 25일 계약직노조는 불성실한 경총과의 4차 교섭을 결렬시키고 투쟁을 선포한다. 2차 결사항전 돌입태세를 갖추고 8월 전조합원 상경지침에 따라 8월 15일 조합원들은 총상경을 결의하고 8월 17일 2차 점거투쟁 선언 기자회견 및 목동전화국 집중집회를 진행한다. 8월 19일 결의를 다지기 위해 투쟁 방향을 논의하는 1박2일 수련회를 약 120명의 조합원들이 모인 가운데 진행했고 당시 연맹과의 간담회에서 조합원들은 연맹이 계약직노조 투쟁사안을 책임있게 받아안고 투쟁하기를 요구했으나 책임있는 답변을 얻지 못했다. 당시 비정규직공동투쟁이 투쟁승리공대위를 중심으로 진행되고 있던 시기, 한통계약직노조는 이에 적극적으로 개입해 들어가면서 그 어떤 사업장보다도 헌신적으로 연대하면서 스스로의 투쟁을 세워나갔다. 비정규 투쟁사업장의 공동투쟁 속에서 의원회관 옥상 농성 등 단계적 선도투 배치하면서 9월 2차 점거투쟁을 준비해 들어갔으나, 9월로 예정되어 있던 점거투쟁은 불행히도 9.11테러사태로 인해 테러집단으로 집중포화될 가능성 속에서 부득이하게 연기될 수 밖에 없었다.
또다시 한달 이상의 기간 전망을 잃은 노조는 추석을 맞이하여 전 조합원들을 지역으로 다시 내려보낼 수 밖에 없었다. 9/17~10/8 목적의식조차 부재한 지역투쟁을 마치고 10월 8일 상경을 통해 다시금 2차 투쟁 준비기를 맞게 된다. 공투위 역시 2차투쟁준비위로 노조와 체계통합, 실질적인 준비를 진행해 나갔다. 10월 31일 국회본회의장 기습농성 등 단계적 상승곡선을 그리면서 11월 11일 전국노동자대회와 10일 노동자대회전야제를 D-day로 상정하고 준비태세에 돌입했다.
주객관적 요인에 의해 2차 투쟁은 결의되었다 유예되는 과정이 반복되어 나타났다. 114투쟁이 마무리되어지는 6월 말부터 노동조합은 별다른 자기전망을 내올 수 없었고, 2차투쟁의 결의를 내세우면서 사실상 대오를 묶고 세우면서 유지해왔다. 이 과정에서 2차 투쟁의 결의로 투쟁의 긴장감이 일정정도 유지될 수 있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계속되는 2차 결사항전의 선포와 유예는 조합원들에게 2차투쟁만이 살길이라는 왜곡된 인식을 낳게 했고, @투쟁은 어느새 결행만 되면 문제가 해결되는 절대화된 투쟁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또 한편으로는 2차 결사항쟁을 압박용으로 상정하고 최대한 교섭으로 이 문제를 풀려는 시도 역시 함께 진행되게 된다. 10월 중순 간부들 선에서 그리고 비공식적인 교섭자리에서 종지주제에 대한 이야기가 대두되기 시작했고, 결국 2차 투쟁의 마지노선은 실질적으로 종지주제로 맞춰지게 된다.
○ 한통계약직노조 투쟁의 전국화
계약직노조 - 지역투쟁의 흐름 만들어냄
7월 1일부터 15일 상경할 때까지 2주동안의 한통계약직 지역투쟁은 조직적으로 준비되고 결행되었다. 지역으로 귀향하기 전 각 지방본부별 계획이 제출되었고, 그 계획에 따라 움직이는 각 지역본부의 투쟁 일정은 인터넷을 통해 매일매일 총화되었다. 한통계약직 지역투쟁 대오는 민주노총 총파업투쟁 흐름 속에서 지역연대투쟁을 활발히 진행하였고, 서울본부는 단병호위원장 명성 사수대 활동을 통해 전체투쟁을 만들고 사수하는데 일익을 담당했다. 계약직노조는 이러한 지역투쟁 과정에서 각 지역 별 비정규직 투쟁의 문제의식을 환기시키고, 실제 지역투쟁의 흐름을 활성화시켰다. 각 지역 공투위와 함께 지역투쟁을 활성화하고 비정규직 투쟁을 전국적으로 확산시켜 내는 구심으로 자리했던 과정이었다. 한통계약직노조의 투쟁이 있었기에 비정규직투쟁을 전국화하고 이후 지역별 비정규직 투쟁의 활성화를 도모할 수 있었던 것이다.
공투위 - 전국화 계획]
공투위는 전국사업장이라는 한통계약직노조의 특성을 받아안아, 또한 이 투쟁의 승리는 투쟁의 확산과 전국화를 통해서만 승리할 수 있다는 문제의식을 가지고 투쟁의 전국화를 목적의식적으로 도모해 나갔다. 참가단위 중 전국적 질서를 가지고 있는 단위들에서 지역 내 초동주체를 형성해내고 중앙공투위와의 지역간담회를 진행하는 등 각 지역별 공투위를 건설하는 계획을 세우고 이를 집행해나갔다. 이미 형성되어 있던 부산 지원단 이외에도 7월 대전 공투위 구성, 대구민중연대 차원으로의 사업집행 결의, 11월 전북공투위 구성 등 공투위의 전국적 자기질서를 구축해나갔다. 이 단위들은 한통공투위해소 이후에도 이후 대구비정규공대위, 전북불안정노동철폐연석회의, 불안정노동철폐 대전지역 연대회의 등으로 변화발전하면서 비정규직 문제에 대한 지역적 자기고민을 이어나가게 된다. 한통계약직투쟁과 공투위의 전국화 노력이 비정규직투쟁의 전국화에 하나의 단초를 제공한 셈이다.
○ 공투위 2차 투쟁의 실질적 준비태세 돌입
공투위는 매주 목-금 1박 2일의 전면결합 등 노동조합과의 접촉면을 넓혀가려는 시도를 진행한다. 2차 투쟁을 예비하는 의미로 공투위와 노조간의 결합력을 최대한 높여내기 위한 지지방문, 조합원 힘주기 프로그램 등으로 투쟁대오의 사기를 진작시키기 위한 노력을 수행해 나간다. 공투위는 2차 점거투쟁을 앞두고 329투쟁의 평가를 통해 2차투쟁은 반드시 대중적 일정을 맞춘 점거가 되어야 한다/ 당일은 물론이고 그 후 일주일에서 한 달까지도 적극적인 집회와 대응일정을 잡아야 한다/ 민동회의 내부 선전을 통해 계약직의 고립을 막는 것이 중요하다/ 목동전화국 앞 2차항전 결의대회에 민주노총과 연맹 참석 안 된 것 관련하여 2차 결의대회를 재조직하여야 한다/ 점거투쟁과 관련하여 현재의 팀 체계를 실질적인 지원팀이 되도록 체제정비를 해야 한다 등의 문제의식을 정립하고 실질적인 준비태세에 돌입한다.
공투위에서는 계약직 노조의 2차 투쟁을 앞두고 하반기 정세를 어떻게 주도해 나갈 것인가에 대한 책임있는 논의를 진행하기로 하고 책임있는 계획의 집행을 위해 7월 대표자회의를 소집하고 공투위 체계의 재편 및 강화를 꾀한다. 팀별(집행)체계를 안정화시키고 공투위의 확대 강화를 꾀하는 것, 하반기 노동법개악과 공기업 구조조정의 정세 속에서 비정규직문제를 최대한 부각시켜 내는 흐름을 만들고 그 속에 한통계약직 투쟁이 위치지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겠다는 판단에서 2차 투쟁에서의 공투위의 위상과 역할을 명확히 잡아냈다. 엄호조직팀 구성과 운영을 공투위 역할의 가장 핵심적인 축으로 상정하고 폭넓은 연대 단위 조직화계획 입안과 실행에 돌입한다.
또한 공투위에서는 2차 점거투쟁을 앞두고 폭넓은 사회적 연대망을 조직해야 할 필요성 속에서 1000인실천단을 구성하게 된다. 이는 정권과 자본의 역이데올로기 공세에 대응할 수 있는 폭넓은 연대망을 구축하고 역이데올로기 공세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고자 하는 문제의식과도 맞닿아있었다. 1000인실천단 구성은 투쟁의 외연을 확대하려는 공투위의 문제의식 속에 배치되었고, 이후 투쟁에 있어 한통계약직 투쟁을 풍부하게 만드는 하나의 주체로 자리하게 된다.
6. 노동자대회 2차투쟁의 유예
○ 예상치 못한 2차 투쟁의 유예
2차 점거투쟁을 준비하면서 계약직 조합원들은 산개투쟁에 돌입한다. 투입조 30여명은 모처에 대기하면서 2차 투쟁진입을 준비하고 있었다. 연대대오는 노동자대회 전야제를 위해 숭실대에 모여 한통계약직노조의 2차 투쟁을 엄호할 자기계획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11월 10일 새벽 2차투쟁이 결행되기 바로 전날 계약직노조는 2차 점거계획을 돌연 유보한다. 그 이유는 사측에서 교섭의 의지를 밝혔다는 것. 종업원지주제를 골자로 한 교섭안에 대해 사측이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연맹과 노조핵심간부들은 투입조의 한 축을 차지하고 있던 간부들과의 논의과정을 통해 투쟁 유보결정을 내렸고, 여타의 간부들과 조합원들은 이를 통보받을 수 밖에 없었다. 10일 저녁 만반의 준비를 하고 숭실대에 모인 조합원들과 연대대오들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고, 예정되어 있던 한통계약직 투쟁 엄호를 위한 독자 결의대회는 앙꼬없는 찐빵과 같은 형태로 1000여명의 노동자 학생들의 참여 속에 힘없이 치뤄졌다.
○ 무엇이 한통계약직 투쟁을 멈추게 하였는가.
초기부터 한통계약직 노조는 자기투쟁에 국한되지 않는 투쟁의 의지를 보이면서 모범적으로 연대해 왔지만, 상급단체, 그리고 정규직노조와의 관계에 있어서는 언제나 실망감과 상실감만을 맛보아야 했다. 1750명 정리해고로 야기된 대우차 투쟁이 벌어졌을 때, 민주노총 지도부는 전조직적 결의를 다해 대우차투쟁을 엄호하고 부평을 넘어선 전국적 투쟁으로 확산시켜갔다. 그러나 구조조정과정 7000명이라는 초유의 대량해고 사태에도 불구하고 한통계약직투쟁에 대한 민주노총과 공공연맹의 태도는 한번도 그만큼의 적극성을 표명한 적이 없다. 심지어 1년여의 투쟁이 진행되는 동안 민주노총 중앙위원회차원의 안건으로조차 한번 상정되지 못하였고, 투쟁사업장에 대한 책임은 해당 연맹에서 담당하는 것으로 맡겨졌다. 한통계약직노조가 선도적인 투쟁을 준비하고 엄호를 요청하려 상급단체의 문을 두르릴 때도 '모험주의적 투쟁방식', '부담가는 사업장' 이상의 취급에서 더 나아가지 못했다. 연맹에서의 태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투쟁방향을 논의하는 수련회 자리에서, 공공연맹 대의원대회에서 한통 조합원들은 연맹이 한통계약직 투쟁을 받아안고 투쟁하겠다는 결의를 밝혀주길 기대했다. 그러나 그 기대는 충족되지 못했다. 정규직화 쟁취는 사실상 불가능하고 이는 우리가 모든 사활을 걸고 준비했던 3.29의 성과 없음으로 입증된 것이다, 이후의 투쟁은 민주노총과 공공연맹의 협조없이는 가능하지 않다는 이야기를 6개월여에 걸쳐서 해왔다. 연맹이 신생노조에 행사하는 영향력이 작지 않은 것이라 했을 때, 연맹의 이러한 입장이 힘빠지고 지쳐가고 있던 간부들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던 것 역시 사실이다.
또한 민주노총 대의원대회의 계속적인 무산과 유예는 하반기 민주노총이 한통계약직 노동자들의 투쟁을 엄호, 확산시켜줄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무너뜨렸다. 민주노총 대의원대회가 무산되는 회의장에서 한통계약직 조합원들은 울분을 참지 않았고, 집으로 돌아가는 대의원들의 뒤에서 "강고한 하반기 투쟁으로 비정규직 철폐! 정규직화 쟁취하자!"를 목이 쉬도록 외쳐댔다. 공공연맹 대의원대회에 사전집회를 예정하고 있던 한통계약직 노조는 한통 정규직노조의 협박 - 계약직노조의 사전집회 진행시 대의원대회 불참선언- 에 집회를 취소하는 사태에까지 이르르게 된다. 그러나 민주노조운동이 한통계약직 동지들에게 보여준 것은 함께 투쟁해 나갈 것이라는 믿음과 기대보다는 비정규직 투쟁에 대한 홀대와 거품뿐인 관심과, 투쟁의지 없음에 대한 실망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또한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 조합 내부에서 이미 고개를 들고 있었던 피해최소화 논리였다. 2차 투쟁을 준비해가는 과정에서 가장 주요한 쟁점은 2차 투쟁을 대중투로 배치 할 것이냐 선도투로 배치할 것이냐의 논점이었다. 329투쟁의 결과 이미 3억 2천만원이라는 손배가 이미 청구되어 있었고, 2차 투쟁으로 인해 추가로 벌어질 손배문제는 조합에 있어 가장 큰 부담으로 작용했다. 60여명에 달하는 불구속자들의 문제 역시 조합에게는 부담감으로 다가왔다. 조합원들에게 평생 빨간줄, 빚더미를 안길 수는 없다는 것, 간부들을 중심으로 그 책임을 안고가야 한다는 것이 조합 간부들의 주된 의견이었다. 그 결과 2차 투쟁은 전체 조합원들이 함께 결행하는 대중투가 아니라 30여명의 진입조가 결행하는 선도투로 준비될 수 밖에 없었다. 피해최소화 논리가 등장한 순간, 이미 2차 투쟁의 결행은 쉽게 흔들릴 수 있었고 사측은 종지주제 입장을 통해 이 국면을 잘 활용할 수 있었다.
우리는 한통계약직 동지들은 지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민주노조운동이 보였던 모습에도 불구하고 스스로의 투쟁의 의지를 넓히고 또다시 모든 것을 포용하고 전진해 나가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간 운동진영의 무관심과 무기력함에 지쳐있던 계약직노조는, 피해최소화 논리가 이미 투쟁의 방향속에 내재되어 있던 계약직노조는 2차투쟁 결의시의 엄호대오 형성 가능성, 투쟁의 확산가능성에 물음표를 던지며 투쟁을 유보하기에 이르른다.
○ 계약직노조 투쟁에 있어 2차투쟁 유예의 의미 : 투쟁에서 교섭으로의 전환--> 현실적 목표의 대두
그러나 그간 민주노조운동의 행보가 계약직노조로 하여금 믿음을 줄 수 없었다는 것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계약직노조의 2차 투쟁 유예라는 지도부의 결정이 조합원들의 의지와도 무관하게 투쟁을 급격하게 끌어내리는 계기점으로 작용했다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다. 계약직노조 조합원들이 11월까지 근 1년여의 투쟁을 진행하는 동안 가정파탄, 재정적 어려움, 건강 악화 등 아픔과 어려움이 존재했던 것은 사실이었으나, 당시 130여명의 조합원들이 잠수투쟁에 동참하여 2차 투쟁의 의지를 밝히고 있었다. 조합원들은 30여명의 투입조가 따로 꾸려져 있다는 사실도 알지 못한 상황에서 자기의지로 2차 점거투쟁 진입을 결의하며 잠수투쟁에 동참하고 있었다. 이러한 과정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듯이 조합원들의 2차 투쟁에 대한 의지는 분명한 것이었다. 그러나 조합원들이 함께 결의하고 만들어 왔던 2차 투쟁은 조합원들의 투쟁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유예되고 투쟁의 목표 역시 선택의 여지없이 전환되어 버렸다.
조합원들의 의지와 무관하게도 2차 투쟁의 유예는 바로 한통계약직노조의 투쟁이 투쟁국면에서 교섭국면으로 급격하게 전환한 것을 의미한다. 정규직화 쟁취라는 굳건한 목표를 대체하는 현실적 목표가 대두되기 시작한 것이다. 종업원지주제라는 카드 한 장에 2차 투쟁을 유예할 수 있었던 과정은 노조가 정규직화 쟁취라는 기조를 포기하고 현실적인 대책을 찾기 시작한 것을 의미한다. 이는 이미 한 측면으로 점거투쟁이 실제 투쟁을 결의하고 조직해 나가는 과정이라기보다 사측의 교섭을 끌어내는 압박용 수단으로 활용되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 노조 민주성 파괴의 구조화
이 때부터 정규직화 쟁취라는 초기 목적성과 현실적 타협점 속에서의 괴리가 발생하기 시작한다. 계약직노조는 연대단위와의 상반된 입장 때문에, 조합원들의 투쟁목표 상실을 우려하여, 정규직화 쟁취라는 대외적 기조를 포기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 내용상으로 이미 투쟁의 기조는 현실적 목표를 중심으로 변화된 상태였고, 한통계약직 간부들은 이러한 괴리 속에서 대중적으로 조합원들과 함께 논의하기보다는 간부들 소수의 논의로 논의틀을 국한시켜나간다. 조합원들과 함께 논의하고 결정하는 열린 논의구조보다 파업대책위의 선판단을 내린 이후 파업대책위의 선판단을 조합원들과 연대대오에게 설득하는 형태로 나아갔다. 조합원들은 대상화되고, 연대대오들은 의미를 못찾고 떨어져 나갔으며 노조 조직력은 약화될 수 밖에 없었다.
노조의 민주성은 노조운영원리를 넘어서는 노조의 핵심적인 생존기반이라 할 수 있겠다. 하나의 투쟁이 하강곡선을 긋게 될 때 가장 먼저 파괴되는 것이 노조 민주성이고, 이러한 노조 민주성의 파괴는 노조의 투쟁을 조기 종식시킬 수 밖에 없는 더욱 왜곡된 구조로 몰아가기 마련이다. 2차투쟁의 유예를 결정했던 간부들과 조합원들간의, 그리고 간부내에서도 핵심 간부와 비핵심간부간의 심각한 괴리 현상은 이때부터 전면화, 그리고 구조화되기 시작한다. 간부 속에서 핵심간부가 생겨나고 정보는 핵심간부로 집중되었으며, 비핵심간부들의 수동적 성향은 더욱 강화되어 갔다.
○ 연대대오와의 관계설정의 문제
당시 노동자대회를 향한 계획은 계약직노조 독자의 계획으로만 준비되고 있지 않았었다. 2차투쟁의 준비과정에서는 분명히 329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사전 준비단계에서부터 계약직노조와 공투위와의 공동질서를 꾸리고 전 운동진영에의 연대를 적극적으로 호소했다. 공투위 각 단위에서는 인자를 파견, 2차 투쟁을 전 운동진영의 공동전선으로 만들어가기 위한 다방면의 준비들을 함께 해 나갔다. 이에 2차투쟁 준비과정에서 많은 투쟁사업장과 운동단위들이 한통계약직 투쟁을 엄호, 확산할 것을 힘차게 결의하였고, 한통계약직 투쟁의 확산을 통한 한통계약직 투쟁의 승리와 더불어 하반기를 투쟁의 정세로 만들어나가고자 했다. 그러나 계약직노조의 일방적인 2차투쟁 유예결정으로 인해 계획했던 흐름은 무산되었고, 예상못한 결과를 일방적으로 통보받은 연대대오들은 허탈해할 수 밖에 없었다.
계약직 노조는 스스로의 투쟁에 대해 스스로 결정할 권리를 이야기했다. 투쟁의 주체는 한통계약직노조였고 노동조합의 판단으로 2차투쟁은 결행될 수도, 유예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2차 투쟁은 329투쟁의 준비과정과는 질적으로 다른 투쟁이었다. 한통계약직노조와 공투위는 광범위하고도 수위높은 연대를 요청하면서 그만큼의 책임 역시 가지고 있었다. 스스로의 투쟁을 통해 당시 어렵게 투쟁하고 있던 장기투쟁사업장, 하반기 투쟁을 준비하고 있던 제반 운동단위와의 공동의 투쟁을 결의한 것이기도 했다. 하기에 운동진영 내 합의를 모으고 공동의 결의를 이끌어내는 과정에서 한통계약직노조는 스스로의 투쟁의지를 하반기 투쟁을 열어제끼는 국면의 계기점으로 위치시켰고 연대대오는 한통계약직노조의 투쟁의지를 믿고 이후 자기계획들을 수립하고 있었던 것이다.
7. 노동자대회 이후 도급수용총회까지
○ 투쟁 기조의 변화
11월 10일 새벽, 2차투쟁에 대한 유보결정을 내린 계약직노조 집행부는 13일 총회를 소집하고 교섭안에 종업원지주회사 안을 포함할 것인가 여부를 가지고 논의를 진행했다. 계약직노조는 종지주제를 파업대책위의 결정사항으로 하여 조합원들을 설득시켰고 그 결과 77:40으로 종지주제 안을 가결시킨다. 사측에 16일 순차적인 정규직화와 종업원지주회사 양자를 골자로 한 구체적인 요구안을 전달하고 20일까지 사측의 답변을 요구하되, 사측에서 답변이 없을 시 다시금 정규직화 쟁취라는 기조를 분명히 한다는 전제 하에서였다. 노조요구안에는 △계약직노동자들을 위한 종업원지주회사 설립 및 최소 5년간 1년에 7천만원 이상의 계약보장 △파업기간중 밀린 임금(1인당 평균 4천만원) 지급 △양천, 목동전화국 투쟁시 제기된 3억2천만원 손배철회 △농성과정에서 사망한 조합원에 대한 업무상 사망재해 인정 △등급제에 따른 임금지급과정시 부당하게 축소된 임금부족분 보상 등이 포함되었다.
11월 13일 조합원 임시총회를 통해 가결된 종업원지주제는 지정했던 시간내 사측의 반응이 없자 10일만인 11월 23일 조합원 임시총회를 통해 폐기된다. 사측이 최후 교섭의 가능성을 열어둔 23일 12시까지 안을 받지 않았기에 13일 총회에서의 전제대로 계약직 노조는 기존의 종지주제를 포함한 교섭안을 철회하였으며, 교섭창구를 닫고 다시금 2차 점거투쟁과 같은 수위로 투쟁에 돌입할 것을 결의했다. 총회 실력행사를 불사하겠다는 결의를 가지고 머리띠를 묶었던 조합원들은 정규직화 쟁취라는 자기목표를 다시금 되찾았다는 기쁨에 머리띠를 풀고 환호했다. 그러나 종지주제 폐기 결정으로 투쟁의 기조가 외연적으로 정규직화 쟁취로 다시금 정립되었더고 해도 사실상 정규직화 쟁취 기조는 포기된 것이었다. 사측이 종업원지주제 안을 먼저 제기할 경우 어떻게 하겠느냐는 질문에도 '조합원들에게 가장 필요한 방향으로 갈 것'이라는 애매한 대답만이 제출되었다. 투쟁계획이 교섭여부에 죄지우지되지 않게 만들어야 한다는 이유로 투쟁과 교섭의 명확한 분리가 선포되었지만, 이 결정은 교섭에 대한 판단이 투쟁의 흐름과 무관하게 교섭단의 판단에 전적으로 맡겨지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후 교섭은 철저히 교섭의 방식으로 진행되었고, 이에 대한 정보는 소수의 핵심간부들에게만 공유되었으며 함께 논의하지 못하는 사안으로 구조화된다.
○ 무기력했던 공투위
공투위에서 간부간담회를 요청, 진행했지만 노동조합의 명분과 실리라는 잘못된 논의구도를 바꾸어 내지는 못했다. 간부들은 현시기 한 단사의 투쟁으로 정규직화 쟁취 기조를 실현시키는 것이 불가능함을, 조합원들의 지친 상태가 심각함을 주된 이유로 한 계약직노조 파업대책위의 분명한 입장을 고수해나갔다. 공투위는 종지주제에 대한 명확한 반대입장을 고수하고 있었지만, 그것을 어떠한 방식으로 풀어나가야 할 지에 대해서는 이견이 존재했다. 정규직화쟁취가 포기된 시점에서 공투위를 해체를 불사하고 조합원들을 직접적으로 만나나가야 한다는 의견과, 최대한 노조 간부들을 설득해 내고 현재 위기상황을 노조와 함께 극복하고 끝까지 함께하는 것이 공동투쟁의 바른 상이라는 판단이 엇갈렸다. 결국 연대책임을 지고 끝까지 노조와 함께 가는 길을 택했지만, 정규직화 쟁취기조가 포기된 11월 노대때부터 사실상 공투위가 자기 이름을 가지고 할 수 있는 역할은 없었다. 이후 공투위는 도급논의와 4월 정리시기까지 계속되는 무기력감을 맛보아야했다.
이 당시 조합 내의 의견 역시 합치되지 못하고 있었다. 파업대책위 성원 내에서도, 조합원들 사이에서도 투쟁의 기조와 목표에 있어 나름의 이견이 충돌하고 있었지만, 위기상황인만큼 조합으로 단결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그 차이를 봉합해 나가고 있었다. 파업대책위내 다른 이견을 가진 간부들은 조합의 기본적인 입장을 따라 침묵했고, 이견을 가진 조합원들 역시 세력화되지 못하고 불만세력으로 남았다. 이견그룹은 조직적으로 세력화하지 못했고 여타 조합원들의 신뢰를 얻어내지 못했다. 공투위 역시 2선 집행부와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분열주의자로 낙인찍히지 않기 위해 스스로를 자제시켰다. 종지주제 총회에서 반대표를 던졌던 40명의 동지들, 총회때 머리띠를 묶고 투쟁기조의 분명함을 요구했던 동지들을 이견그룹으로 묶어 세우지 못했다. 이 때 노조대 연대단위와의 대립전선이 아니라 조합 내 조합원들의 이견들이 자연스레 논의되고 충돌하는 가운데 새로운 대안세력이 창출될 수 있도록 내부를 조직했더라면 한통계약직투쟁의 모습은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이 과정에서의 이견그룹의 세력화 실패는 이후 마지막 총회때의 부결투쟁의 조직주체, 이후 노조재건의 조직주체들을 만들어 내지 못하는 결과로 이어지게 된다.
○ 내용없는 민주노조사수와 도급수용의 맞바꿈
1월 17일부터 파업대책위의 발의로 도급 수용을 포함한 향후의 조직전망과 투쟁목표에 대한 논의가 진행되었다. 1월 18일 공청회를 통해 노동조합 간부들은 조합원들에게 현장복귀를 통한 민주노조사수를 통한 도급수용을 설득하고자 했다. 현실적 조합의 상태와 여건을 직시해야 한다는 것, 최악의 상태를 막아야 한다는 것, 조합원들이 다 쓰러질 때까지 싸울 수는 없다는 것, 중요한 것은 조직보존이며 한통계약직노조 조합원들이 함께 갈 수 있는 방식을 고민해야 한다는 것이 그 근거였다. 계속되는 본부별 분임토의와 조합원 전체 토론회, 설문조사 과정을 통해서도 조합원들의 입장은 하나로 모아지지 못했다. 공투위 역시 내부 이견으로 하나의 단일한 안을 제출하지 못했다. 공투위는 17일 있었던 공투위회의에서 이에 대한 입장을 하나로 모으지 못한 관계로 한통구조조정이 본격화될 예정이니 구조조정 투쟁까지 한번 더 싸워보자는 의견과, 노동조합의 의견을 존중하며 현장복귀에 대한 대응을 지금부터 해나가자는 두 가지 의견이 조합원들에게 동시에 제출되었다.
여기서 계약직노조 내부의 논쟁지점에 대한 확인이 필요하다. 외연적으로는 "정규직화기조의 유지"냐 "도급수용"이냐로 드러났던 조합원들의 의견은 사실 다양한 스펙트럼을 가지고 있었다. 정규직화기조의 유지를 주장하는 사람들 중에는 정규직화 쟁취를 실질적 자기목표로 장단기적 투쟁을 조직하자는 의견과, 정규직화 요구를 내걸어야 연대대오도 떨어져나가지 않고 더 많은 것을 따낼 수 있다는 입장과, 차라리 때려박고 끝내야지 도급가서의 민주노조 사수는 불가능하고 그럴 의지도 없다는 의견이 공존하고 있었다. 도급수용을 주장했던 경우 역시 현재부터 현장복귀 이후를 고민하면서 민주노조사수의 목적성 하에서 도급을 수용하자는 입장과 돈받고 치우더라도 이 투쟁을 이제는 어떻게든 끝내야 한다는 의견이 공존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입장의 차이는 정규직화냐 도급이냐의 논점 속에서 명확히 드러나지 못했다. 그 속에서 정규직화 쟁취를 위해서는 싸우더라도 도급가서 조직화는 절대 못한다고 못박는 강성조합원들, 돈받고 치우더라도 이 투쟁을 어쨌든 정리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간부들과 조합원들의 입장의 문제점은 명확히 평가되지 못했다.
무엇보다 가장 큰 문제는 도급 수용의 가장 큰 전제인 조직적 현장복귀를 통한 민주노조사수의 실제 상이 부재하다는 사실이었다. 조직적 현장복귀를 통한 민주노조사수의 주체는 확인되지 못한 상황에서 민주노조사수는 언명으로만 외쳐졌다. 실제 도급으로 현장에 복귀했을 때의 조직주체형성의 문제, 조직틀의 문제 등은 장기적인 고민의 영역으로 남겨져 있었다. 현장복귀 이후의 대응은 그 어디에서도 고민되고 논의해서 합의된 바 없는 상태에서 임기응변으로 조합원들에게 전달되었고, 도급복귀 이후의 결의가 실제 확인되지 않는 상황 속에서 내용없는 민주노조사수만이 외쳐질 뿐이었다.
○ 현안문제 해결이라는 애매한 투쟁기조로 정리
이러한 논의구도 속에서 투쟁기조에 대한 합의는 도출되지 못했고, 결국 '현안문제 해결'이라는 모호한 표현으로 정리되었다. 투쟁기조는 파업대책위의 논의를 통해 다음과 같이 작성되었고, 총회때 조합원들에게 제출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다음은 한국통신계약직노동조합 조직전망과 투쟁목표 결정사항이라는 문서를 발췌한 것이다.
1. 현안문제 해결로 교섭을 집중한다.
현안문제는 우리투쟁에 대한 제도적 보장과 금전적 보상을 포함한 정당한 투쟁의 대가임을 의미한다. 단, 고용안정에 대한 측면들은 이것들(현안문제)에 대한 집중을 통해 극대화시킬 수 있는 방안으로 접근한다.
2. 현재의 '정규직화 쟁취·생존권 사수' 투쟁기조를 유지한다]
노동(고용)형태에 대한 요소들은 전술적인 측면으로, 현안문제 해결의 극대화를 위한 일환으로 배치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때문에 정규직화 투쟁기조는 여전히 우리투쟁에 있어서 유의미한 목표이다.
3. '투쟁없이 쟁취없다'는 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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