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용불량자와의 만남
내가 신용불량자를 만난 첫 계기는 그들과 관계된 일 때문이 아니었다. 순전히 나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진행된 지난 2004년 3월경 진행된 민주노총 부산 본부 앞 일반노조 비리 고발자 박효석 제명철회와 비리진상규명을 위한 노숙농성(내가 속한 일반노조의 사무실이 부산본부 안에 있어서다)에서부터 시작한다. 나는 이때 어줍지 않은 수배자의 생활도 같이 하고 있던 신분이었다.
농성 첫날밤 조합원 한명과 잠을 자는데 새벽녘에 소란스런 발자국 소리를 들으며 잠을 깼다. 순간 경찰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으나 모른 척하고 계속 누워 있었는데 발자국 소리만 어지러울 뿐 이었다. 한참 시간이 지난 후 침낭을 살짝 들춰보니 아주머니도 지나가고 아저씨도 지나다녔다. 새벽 3시 30분, 보아하니 경찰도 아닌 것 같고 민주노총 조합원도 아닌 것 같은 같았다.
누굴까? 무슨 일일까? 웬 사람들이 이런 이른 시간에 왔을까? 한편으론 자신이 우스웠다 괜한 긴장이 그랬다. 이후 계속 사람들이 많아지고 시끄러워 우리는 잠자는 것을 포기했다. 민주노총 부산본부가 이사한 이 곳 2층에 신용회복위원회가 새들어 있었던 것이다.
이들과의 만남은 농성을 끝내는 50여 일간 계속되었다. 새벽에 모이기 시작하던 사람들이 시간이 지나자 그 전날 10시부터 9시부터 기다리기 시작했다. 전날부터 2층 계단부터 시작해서 1층 로비 까지 꽉 메운 사람들 계단을 오르내리가 힘들 정도로 사람들이 많았다. 이유는 신용회복위원회에 접수하기 위해서였다. 문은 오전 8시 30분에 열렸는데 말이다.
문제의식의 발생
나는 50여 일간의 농성 중에 밤에 잠이 안 오고 심심하면 2층으로 내려가서 이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자리엔 항상 조금의 술과 안주가 있었다. 아직 추위가 채 가시지 않아서도 그랬고 기다림의 시간이 너무 길어서도 그랬을 것이다. 나도 조합원들이 놓고 간 반찬이며 술을 서로 부조하기도 했다. 매일 매일 사람들이 바뀌었고 사연들도 다양했다.
나는 내일도 해결하기 벅찬 현실 이었지만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왜 이런 일이 발생했는가? 이 사람들이 이 자리에 오기까지 무슨 일들이 있었는가? 그때부터 나는 신문과 인터넷을 통해 소위 신용불량자들에 대한 기사를 주위 깊게 보기 시작했고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이전에는 무심코 흘려버리던 많은 일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수많은 자살 뒤에 빚이 있었고, 범죄와 가정파괴 뒤에도 빚이 있었다. 끝없는 가난. 신용불량 400만과 신용회복위원회, 경제난은 나에게 이렇게 다가왔다.
파산지원연대의 조직
조금씩 성장했으나 구체적으로 이들과 함께 할 어떤 수단과 방법이 없었던 시간이 계속되었다. 또 우연한 기회가 내게 다가왔다. 나는 나의 제명철회문제가 부산본부의 공청회와 복권 권고가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일반노조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음으로 인해 법적 소송을 생각하고 있었고 변호사를 만나 의논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변호사로부터 "효석씨 제명문제도 급하겠지만 신용불량자들의 문제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물음을 듣고 나는 "심각하다고 생각하긴 하는데 무슨 방법이 있습니까?" 하고 물어보니 파산법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파산법이 복사된 용지를 내게 주었는데 이 변호사가 지금 파산 지원연대에서 같이 일하고 있는 노성진 변호사다.
나는 파산법을 찬찬히 읽어보고 좋다고 했다. 사실 나도 이런 저런 사정과 고민을 말하며 파산도 신용불량자들의 문제를 해결해나가는 한 방법일 수 있겠구나 하고 막연한 생각을 가지게 되었고 주위의 사람들에게 의견을 묻기 시작했는데 결과는 거의 절망에 가까웠다.
이유는 '도덕적 해이'였다. "자기가 잘못해 빚을 졌는데", "차라리 빌리지나 말지", "빚진 것은 갚아야 돼", "쓸데없는 일 하지 말고 제명문제나 신경 써라"는 이야기였다.
이 모든 말속에 깊숙이 배여 있는 '도덕적 해이'는 파산지원연대의 출범을 위한 발기인 모집에서부터 우리를 괴롭혔고, 당사자인 신용불량자에겐 더할 나위없는 멍에였다. 이 한마디에 400만 신용불량자들이 가족까지 치면 1천500만이나 되는 민중들이 무장해제 당하고 아무런 대항 수단 없이 죽어나가고만 있었고, 신자유주의의 폐해를 지적하며 빈곤의 세계화, 자본의 세계화를 반대하는 진영에게 까지 이 '도덕적 해이'는 깊숙이 전염되어 있었다. 엄청난 자본의 이데올로기를 대변하는 이 '도덕적 해이'라는 한마디의 위력을 실감치 않을 수 없었다.
늦어지는 소책자의 발간
우리 파산지원연대는 소책자를 발간하기로 하고 그 발간작업을 11월부터 기획했으나 지금까지 내어 놓지 못하고 있는데 이유는 순전히 나 때문이다. 내가 신용불량의 문제가 과연 개인의 문제 때문인지 사회적 문제인지 밝히는 글을 적어야 하는데 아직 마무리가 되지 않았다.
이유는 간단하다. 나는 대부분의 내용을 다른 사람이 쓴 글을 다 베꼈는데 한 가지를 베끼지 못했다. 신자유주의에 대해서도 글이 다 있고. 가난한 문제에 대한 글도 있고, 구조조정에 대한 글도 있고, 자본의 세계화에 대한 글도 다 있는데, 유독 이 신자유주의의 직접적인 피해 당사자인 민중에 대한 이야기 - 가난의 직접적인 당사자, 자본의 세계화의 피해자, 구조조정의 피해자, 실업과 비정규직문제의 당사자 - 그 구체적인 대상인 신용불량자 400만과 가족까지 1천만 명이 넘는 사람들의 고통에 대한 연구, 조직화에 대한 연구 글이 하나도 없는 것이다. 부끄럽게도, 너무 부끄럽게도 그 마무리 글로 참조할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어 아직 마무리 하지 못했다.
신용불량자와 비정규직문제
'파산학교'를 통한 상담과정에서 나는 이들의 고용구조에 대해 한 가지 발견하게 되었는데, 신용불량자라 하더라도 먹고는 살아야 하는데 먹고살자면 취업을 해야 하고 취업을 해서 4대 보험을 내면 채권단에서 임금 가압류가 들어오니 한달 많이 벌어야 100만원 내외의 현재의 임금체계 하에서 채권단에 반 빼앗겨 버리면 남는 건 차비와 밥값도 안돼는 현실에서, 이들은 스스로가 일당제 노동자가 되고, 스스로 4대 보험 등 최소한의 노동자로서의 권리마저도 포기하는데 이들의 숫자가 400만이나 된다. 정규직 밑에, 비정규직이 있고, 그 밑에 400만 신용불량자들의 노동이 있다.
정부에서 비정규 입법을 이야기하고 있는 이 시기에 스스로 이런 노동자로 전락해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이 노동자들을 빚을 진 이유만으로 이런 말도 안돼는 천형을 받아들이는 것을 용납해서 되는 일인가? 나는 이제 정당하게 정규직, 비정규직의 문제에 400만 신용불량자들의 노동도 같이 다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파산지원연대는 지난해 11월 5일부터 매주 금요일 파산학교를 부산에서 진행하고 있고 지금은 발기인 합쳐 140여명의 회원들이 모여 활동을 하고 있다. 파산학교는 2005년 내내 진행할 것이고 당연히 파산의 전면적인 대중화를 위해 노력할 것이다.
그리고 신자유주의와 자본의 세계화에 대한 분명한 반대가 정당하면 '도덕적 해이'에 덧씌워진 우리의 인식이 우선 전환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도덕적 해이'의 장벽(자본의 이데올로기)에 가로막힌 구체적 대중과의 만남이 이루어 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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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효석 | 금융피해자 (신용불량자) 파산지원연대 공동대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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