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09년 산별노조의 현실과 전망
산별노조가 투쟁을 통해 ‘건설’되지 않았지만 산별은 만들어졌습니다. 산별노조의 건설은 어떤 이에게는 꿈이 실현되는 과정이기도 했지만, 어떤 이에게는 좌절의 경험이기도 했습니다.
단적인 예로 지역에서, 현장에서 투쟁을 만들어나가다 중앙차원에서 직권조인을 하면서 투쟁력을 무너뜨리고, 조합원을 주체화시켜내지 못한 측면도 있었습니다. 또한 그동안 비정규노조에서 독자적으로 스스로의 문제들을 가지고, 모여 이야기 하고 소통하고 투쟁하던 공간들이 산별노조로 옮겨지면서, 산별노조 중앙차원에서 비정규문제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제기 하느냐, 안하느냐에 따라서 각 개별의 비정규노조가 영향을 미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꼭 좌절만은 아닌 것은 산별이 되고 나서 지역별로 미조직노동자들과 함께 하기 위한 흐름들도 생겨났고, 이를 위한 고민도 시작된 곳도 있었고, 그 고민을 현실로 옮기고자 하는 과정은 여전히 진행 중입니다.
그래서 이번호 특집에서는 산별건설이후의 흐름과 현 상황을 이야기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산별은 어떠해야하는 가’에 대해서 다시 한 번 되돌아보고 현 상황을 진전시키기 위한 시동을 걸어보고자 합니다.
■ 09년 산별노조의 현실과 전망 | 양규헌
■ 금속산별노조 이후 지역지부의 활동과 한계 | 정진홍
■ 산별에서 미조직비정규직 조직화 | 류남미 |
전국금속노동조합과 경주지부 출범
2001년 2월 8일 3만 여명의 금속노동자들은 금속산업연맹의 체계를 뛰어넘는 명실상부한 전국 단일노동조합인 산별노조를 출범시킨다. 경주지역은 이미 2000년 말까지 8개 사업장 15,000여명을 구성된 경주지역 중심의 지역 금속노조로 통합을 이뤄 놓은 상태였고, 금속노조가 출범하자 자연스럽게 편입되었다. 10여년 넘게 기업별 노동조합 활동에만 익숙한 노동조합 간부들은 처음 접하는 산별노조 조직체계에 많은 갈등과 혼란을 야기되기도 했지만 산별노조 건설의 주역이란 자부심으로 최선을 다해 조직이 안정되는데 노력하였다.
세광공업지회의 투쟁은 경주지부의 첫 투쟁
위장폐업투쟁의 시작2001년 5월 18일 경주지부 소속 지회인 세광공업지회 ‘다스’(구 대부기공)의 위장계열사로써 노동조합을 없애기 위해 폐업을 단행하였다. 200여명의 노동자가 일하던 중견기업 이었으나 당시 ‘다스’(구대부기공)가 한국노총 소속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계열사가 민주노총에 가입 한다는 것은 다스자본의 입장에서는 상상하기 조차 싫었던 것이다. 다스노동자들에게 민주노조의 불길을 막기 위해 극단적인 폐업을 선택했다.
폐업당시 58명(병역특례병 14명)의 조합원들은 하루 아침에 길거리로 내몰릴 수밖에 없었다. 위장폐업을 분쇄하고 일터로 돌아가기 위한 처절한 투쟁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장기투쟁의 준비 생계비 지원결의
경주지부는 세광공업 위장폐업 투쟁을 사수하기 위해 여러 가지 방법들을 모색하던 중 장기투쟁에서 가장 어려운 부분은 투쟁하는 조합원들의 생계비를 해결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경주지부의 선택은 1,500여 조합원들이 매월 1만원씩 3개월 결의를 하였고 투쟁이 더 길어지자 매월 5천원씩 9개월을 연장하는 결의를 하였다. 그 당시 금속노조 또한 신분보장기금이 있었지만 조합원 생계비까지 지원 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작지만 소중한 지부 전체 조합원들의 생계비 결의는 세광공업 조합원들에게 생계비 이상의 의미를 가졌다. 투쟁을 지부 전체 조합원이 함께 한다는 것이다.
폭력침탈 그리고 지역총파업세광공업 투쟁이 극렬해지자 경찰과 자본은 농성장을 침탈하였다. 그 침탈로 인해 지역의 많은 간부들이 병원 신세를 지게 되었고 지역은 분노하기 시작하였다. 경주지부는 2001년부터 집단교섭 형태로 지역교섭을 진행하였기 때문에 경주지부 전체 조합원이 세광의 문제로 파업에 돌입하였다. 물론 파업을 길게 끌고 갈 수 있는 구조 아니었지만, 주어진 조건에서 자신들의 요구가 아닌 문제로 파업을 성사시켰다. 경주지부가 출범하고 첫 총파업은 아쉬움도 많았지만 단일노조의 저력을 가능케 하는 투쟁으로 기억되고 있다. 지역의 많은 부상자와 10여명의 구속이 발생한 세광투쟁은 끈질긴 300여일 만에 폐업을 철회하고 자본은 새로운 회사를 설립해 남아 있던 26명의 조합원의 고용을 승계하였다.
2003년 지부 집단교섭의 합의
한 걸음 빠른 집단교섭의 정착경주지부는 금속노조에서 가장 빠르게 집단교섭의 형태를 갖추었다. 다른 지역지부에서 집단교섭을 거부하던 자본가들에게, 경주지부에서는 이미 교섭을 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며 하나씩 돌파하기 시작했다. 그만큼 경주지부 집단교섭 합의 내용이 미치는 전국적 파장은 컸다.
경주지부가 만들어지고 먼저 지부에서 상근 할 수 있던 인원이 없었기 때문에 지회의 상근자의 1/3은 무조건 지부로 파견하는 것을 결정하고 실천하였다. 그리고 부족한 상근 인원에 대해 집단교섭에서 요구하고 2명의 지부 상근자를 쟁취하였다. 2명에 대해 임금은 집단교섭에 참석한 사업장이 공동분담 하는 것으로 첫 합의를 이끌어냈다.
2004년 집단 불법파견 진정투쟁
비정규 투쟁의 깃발을 들다 다른 지역도 마찬가지였지만 경주지부사업장 내에도 98년 IMF를 거치면서 사내 하청(비정규직)의 규모가 급속하게 늘어나고 있었다. 고용불안을 느낀 정규직 조합원들은 비정규직이 늘어남에 따라 조직력이 취약해지는 것은 인지하지 못한 채, 비정규직을 자본이 주장하는 고용의 방패막으로 인식하던 수준이었다. 경주지부는 지부 대의원대회를 통해 집단적으로 8개 사업장의 사내하청에 대해 불법파견 진정투쟁을 결의하고 노동부에 진정투쟁을 시작하였다. 공동으로 시작한 불법파견 진정투쟁은 조사하는 것도 3개월이 넘게 걸렸다. 마침내 8개중 7개 사업장 230여명의 사내하청에 ‘불법파견 판정’이 내려졌다. 경주지부가 제기한 불법파견 판정은 이후 현대자동차 사내하청의 불법파견 판정을 받는 데도 좋은 영향을 미쳤다.
불법파견 판정은 받았지만 정규직화로 이어지지는 못해불법파견 판정을 받았을 때만 해도 정규직화의 기대감은 높았다. 하지만 자본의 저항이 만만치 않았다. 불법파견 판정을 받는 데에는 성공하였지만 조합원들의 비정규투쟁 인식을 이끌어내지 못해 집단교섭에서 공통된 합의를 이끌어내지 못했다.
그나마 차선으로 공동합의 한 것은 더 이상 사내하청의 확대를 금지하는 것 뿐이었다. 사업장별로 불법파견 판정을 받았지만 해결 하는 방식은 각각 달랐다. 단계별 정규직화부터 직접고용 그리고 아예 전혀 돌파하지 못하고 불법파견을 인정하는 꼴로 유지되는 곳까지 발생했다. 비정규 투쟁의 높은 벽을 절실하게 실감하게 되었던 2004년 불법파견투쟁이었다.
2006년 다시 불붙은 지부투쟁
경주지부 광진상공지회 투쟁광진상공지회는 조합원 대비 비정규직의 비율이 상대적으로 높고 핵심현장에 여러 형태의 비정규직으로 채워져 있기 때문에 노동조합의 현장 장악력이 점점 힘을 잃어가고 있었다.
노동조합의 조직력을 정확하게 판단한 자본은 마침내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일거리가 줄었다는 이유로 장기근속의 여성노동자들을 ‘강제 퇴직’ 시킨 것이다. 처음에는 희망퇴직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하여 조합과 합의없이 일방적으로 추진하다가 대상자가 나타나지 않자 상대적으로 약한 고리인 여성노동자들에게만 집요하게 사직할 것을 강요하였다. 그 결과 강요에 못 견딘 34명의 여성조합원들은 사직서를 제출하고 말았다. 사측은 남성조합원들에게는 ‘여성조합원들이 나가야 가장의 책무를 담당하는 당신들이 구조조정 안 당할 수 있다’며 현장을 흔들었다. 위축된 현장 분위기와 파업을 해도 비정규직으로 생산에 타격을 입지 않던 광진자본의 활극은 성공 하는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경주지부는 여성노동자에게 부당한 강제사직은 원천무효임을 규정하고 ‘강제사직’ 결정을 철회하지 않으면 지부 총파업에 돌입한다며 맞섰다.
결론은 경주지부는 오후 4시간 총파업 투쟁을 성사시켰고, 그 다음 날 광진자본은 희망퇴직한 여성조합원들 중 희망하는 조합원들은 복직시키겠다며 사실상 강제사직안을 철회하였다. 광진상공지회 투쟁의 의미는 지회의 조직력이 설사 약하더라도 조합원의 고용에 대해서는 지부전체가 책임지고 싸운다는 것을 명확하게 하는 투쟁이었다.
경북일반노조 연대 총파업경주지역에 경북일반노조가 설립되어 활동을 하고 있었다. 지역의 한 대학인 동국대학교에서 청소를 담당하던 여성 노동자들이 일반노조에 가입하였고 동국대학교는 민주노총에 가입한 것을 탐탁지 않게 생각하며 용역업체와 결탁해 40명의 여성노동자들을 ‘계약해지’ 하였다. 평균 나이가 60세가 넘는 고령의 여성노동자들이 감당하기 힘든 집단해고 투쟁은 지역의 연대 없이는 해결될 수가 없었다. 경주지부를 포함한 민주노총 경주시협의회는 동국대학교가 나서 이 문제를 해결하지않으면 지역의 총파업에 돌입한다는 결정을 하였고 실천으로 옮겼다. 투쟁의 결과로 여성노동자들은 다시 일터로 돌아갔고 투쟁은 승리로 마무리 되었다. 경주지부는 지부의 문제를 넘어 지역의 문제로 총파업을 이뤄낸 성과를 남겼다.
2007 ~ 2008년 노동조합 조직화의 봇물이 터지다
경주지부의 안정된 조직력이 지역에 입소문을 통해 퍼져나가자 노동조합을 만들고자 하던 노동자들도 하나둘씩 용기를 내어 금속노조에 문을 두드리기 시작하였다. 2007년은 자본의 방해와 저항으로 산별노조로 전환되지 못한 지역의 2개의 사업장 550여 조합원들이 금속노조로 늦깎이 전환이 이루어졌고, 2007년에만 3개의 신규지회 250여명의 조합원이 경주지부의 가족이 되었다. 08년에도 이 같은 기운이 계속되어 경주지부 최초 비정규직 지회도 탄생하였다. 또 지난 2001년 지역의 뜨거운 투쟁의 중심이었던 당시 한국노총 소속 다스가 21년 어용노조에 종지부를 찍고 금속노조로 조직형태를 변경하게 되었다. 다스의 민주노조 건설은 이명박 정권의 심장에 깃발을 꽂은 통쾌한 승리였다. 이후에도 2개 지회 120여명이 더 조직되는 등 2001년 8개 사업장 1,500명의 조합원으로 출발한 경주지부는 2008년 20개 사업장 3200여명으로 눈부신 조직확대를 이뤄냈다. 다른 지역의 금속노조 조합원수가 정체 또는 쇠퇴하는 경우와 상반되게 경주지부는 조직력 확대로 이어지면서 지역전체에 활기를 불어넣고 있다. 조직력이 확대되고 새로운 젊은 조합원들과 간부들의 출연은 기존의 관성에 젖어 있던 조직들에게 채찍으로 작용하였다.
경주지부의 한계와 발전방향
경주지부는 자동차 부품사가 대부분조선, 철강에 비해 자동차 부품사는 노동조합의 투쟁에 자본들이 대응 할 수 있는 폭이 좁다. 그래서 웬만해서는 노동조합과의 전면전은 선택하지 않는다. 이러한 양질의 토양위에 지금까지 승승장구하며 금속노조로서 9번째 해에 접어들었다. 자동차 부품사가 대부분인 경주지부는 완성차 정책에 따라 좌지우지 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완성차의 결정으로 파생되는 문제들에 대해 연구하고 분석해야 제대로 된 대응이 나올 것이다. 지부 차원에서는 이러한 준비들을 꾸준하게 해야 한다.
쉽게 바뀌지 않는 현장조직력도 확대되고 젊은 피 수혈에 힘을 받은 경주지부이지만, 아직도 가야 할 길이 멀다. 경주지부의 조직력이 강화되는 한편으로는 지회의 현장공동화가 심각해져 가고 있다.
상부 지침만 바라보고 예전 같으면 모두 현장에서 준비하고 실천하던 것들이 지침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조직으로 변질되고 있다. 그리고 횟수로 9년째를 맞이하지만 아직도 기업별 장벽을 넘어서는 것에 대해 망설이고 주저한다. 현장의 비정규직 문제는 아직도 첩첩산중인데 때만 되면 성과급투쟁에만 노동조합의 모든 힘을 쏟아 붓는다. 근속이 오래된 형님 노동자들은 식상한 노동조합 집회보다 웰빙에 관심더 많아 집회 있는 날이면 도망가기 바쁘다. 달라 질듯 하지만 아직 갈길은 멀어만 보인다. 간부들은 예전 선배노동자들보다 공부하는 것을 더 멀리하니 현장조합원들을 제대로 교육하고 조직해내지 못한다. 노동조합 투쟁의 정당성을 알리기보다 지침이기 때문에 투쟁한다는 짧은 말로 조합원들에게 전달자 역할만해서 조합원들이 투쟁에 동참할 수 있을까? 이제 대충해서 노동조합 유지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이명박 정권은 자신의 임기 안에 민주노조를 반드시 없애겠다는 것이 명확해진 이상 정신 제대로 차리지 않으면 지금까지 조금씩 쌓아온 모든 것을 잃을 지도 모른다. 산별노조 처음 출발 할 때의 정신 ‘크게 뭉쳐서 크게 싸우자’라는 것을 잊지 말고 눈에 보이는 것만 쫓지 말고 보이지는 않지만 사회가 필요로 하는 투쟁에 적극 나서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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