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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14|01|2004
근로복지공단 비정규직노조 투쟁

:: 2004-02-12   조회: 5035

이용석 열사 무덤 앞 유리함에는 41일간의 파업 투쟁의 흔적과 성과가 고스란히 담겨있다. 유리함에 들어있는 단체협약서, 머리띠, 파업투쟁 일기 등은 근로복지공단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이 투쟁을 통해 무엇을 얻었는지를 보여준다. 열사의 죽음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한 성과이겠지만 앞으로 지켜봐 달라는 아쉬움과 결의가 엿보인다. 열사 이용석이 비정규직 투쟁의 상징이 된 것에 그치지 않고 파업 과정에서 단련된 조합원들이 비정규직 노동자로 자신을 인식하게 된 것이 이 투쟁의 가장 큰 성과일 것이다.
그렇다면 비정규직 노동자의 죽음과 41일간의 투쟁으로부터 노동운동은 무엇을 남기고 평가해야 하는가. 근로복지공단 비정규직노조(이하 '근비노조') 투쟁은 개별 사업장의 문제가 아니라 '이용석열사 정신계승, 비정규직 철폐' 투쟁이어야 했다. 때문에 그 의의를 살리는 투쟁이었는가에 대한 평가는 근비노조 뿐만 아니라 전 노동운동이 함께 해야 할 문제이다. 예기치 않게 발생한 상황이고 당사자인 근비노조의 조직력도 약하다는 어려움이 있기는 했으나 노동운동 진영이 비정규직 투쟁을 적극적으로 받아 안지 못한 것에 대한 변명이 될 순 없기 때문이다.  

Ⅰ. 노조 결성에서 파업 돌입까지

근로복지공단 비정규직 실태

근로복지공단에는 740명의 계약직, 100명의 일용직, 360명의 어린이집 계약직 교사가 있다. 전체 3600명 중 비정규직이 1200명에 이르는 것이다. 노동부가 김락기 의원에게 제출한 2003년 국정감사 자료에 따르면 노동부 산하기관 중 근로복지공단만이 유일하게 비정규직 비율이 30%대에 이른다. 비정규직 규모공단이 설립된 95년 당시만 해도 비정규직은 거의 없었는데 98년 실업대책사업을 실시하면서 비정규직을 100명 정도 채용한 것이 그 시작이었다. 99년 고용보험 적용 및 징수업무가 공단으로 이관되고 2000년 산재보험이 전 사업장으로 확대되는 등 공단 관할 사업이 늘어나면서 비정규직이 급증하기 시작했다. 업무가 늘어난 만큼 인원이 충원되어야 하는데 예산이 없다는 이유로 정규직 채용을 늘리지 않고 비정규직 증원으로 대신했기 때문이다. 공단에서 발주한 연구용역 결과 최소 700명 이상의 인력 증원이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렸다고 하나 노동부는 한 해 평균 20-30명 수준의 인원 증원을 허용할 뿐이었다. 계약직은 1년 기간제이고, 일용직은 3개월인데 계약 기간이 짧을 뿐 상시적으로 필요한 업무를 하며 계약직의 업무와도 거의 다르지 않다.
비정규직은 내부제한 경쟁시험을 통해서 정규직으로 채용될 수 있다. 채용 규모는 해당 년도 정규직 신규채용 인원의 절반 정도로 10명에서 30명 정도의 규모이다. 1년 6개월 이상 근속해야 응시자격을 갖는다.    

임금은 정규직의 60% 수준이며 복리후생비인 교통비, 중식보조비, 효도휴가비, 특근매식비, 업무추진비, 장기근속수당, 가족수당, 자녀학자금보조, 사망시 위로금, 피복비, 직원대출은 비정규직과 상관없는 이야기이다. 비정규직이 받고 있는 임금은 인건비가 아니라 사업비 중 일용잡급 항목으로 편성돼있어 정기적인 인건비 상승분의 혜택을 전혀 받지 못한다. 인건비와 잡급은 그 전제가 다르다. 인건비는 사람에게 지급하는 비용이기 때문에 부차적으로 업무 추진비나 출장비, 복리후생비 등 사람이 써야하는 돈이 함께 지급되지만, 잡급은 말 그대로 잡비이므로 그 주체가 사람이 아니다. 비정규직들이 받는 임금은 물품비이므로 사람이 받아야하는 복리 후생비나 업무 추진비같은 것을 책정할 수 없다.  

정규직은 공단 본부에서 직접 채용하여 배치되는 반면 비정규직은 각 지사나 본부 단위에서 개별적으로 채용, 배치된다. 비정규직의 채용, 인사가 각 지사의 관리자들에 의해 주먹구구식으로 이루어지다 보니 전혀 투명하지도 객관적이지도 않다. 비정규직 입장에선 미운 털이 박히면 언제든 관리자의 재량으로 불이익을 당할 수 있다는 점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3개월이나 1년마다 재계약을 한다는 점도 굴레로 작용하며, 근무평정 결과 연속 2회 또는 총 3회 이상 하위 10%에 해당돼도 재계약 거부 사유라는 비정규직관리세칙 내용 또한 비정규직에게 압박이 된다. 근무평정은 정규직 전환 시험 성적에서 25%를 차지하기 때문에 근무평정 1위를 받기 위해 관리자에게 잘 보이기 경쟁을 하게 만들기도 한다. 실제로 근무평정 및 재계약 문제는 파업 시기 투쟁대오를 동요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노조 결성에서 파업 돌입까지

근로복지공단엔 한국노총 소속의 정규직노조가 있는데, 규약상 조직대상에 비정규직도 포함되기 때문에 독자노조 설립시 복수노조 논란이 벌어질 가능성이 있었다. 비정규직 측에선 노조 가입을 받아주거나 규약을 변경할 것을 요구하였다. 소수 대의원의 문제제기가 있었으나 압도적인 표차로 규약을 변경하는 것으로 대의원대회에서 통과되어 정규직과 비정규직 사이의 불신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노조가 결성되는 데에는 노동부직업상담원노조 사례가 많은 영향을 미쳤다. 직업상담원노조는 2002년 12월 노조활동시간 보장, 성과급 7억원 지급, 2003년 고용안정 등을 뼈대로 하는 단체협약을 체결했으며, 2003년 10월엔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만57세까지 자동갱신을 보장하고 사업비 내 기타직 보수로 돼 있는 보수항목을 2005년부터 '인건비’내 기타직 보수로 전환을 추진하기로 하는 단협을 체결하였다. 근비노조에서 열사 분신 이전 제출한 단협안 역시 57세 정년보장, 1년 단위 계약 자동갱신, '사업비'에서 '급여항목 인건비'로의 전환을 요구하고 있어서 직업상담원 단협 내용에서 영향 받았음을 알 수 있다.

결성 7개월만에 840명 중 670명이 조직되어 높은 조직률을 보였으나 조직력은 높지 않았다. 전국 47개 지사에 조합원이 흩어져 있어서 집단적이고 통일적으로 움직이기에 쉽지 않았고 아직까진 소수 집행간부 중심으로 노조활동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게다가 공단측에서 노조를 인정하지 않다보니 노조 활동에 제약이 컸다. 공단 본부는 비정규직은 해당 지역본부에서 채용, 관리하기 때문에 공단 이사장이 아닌 각 지역본부장교섭이 교섭당사자라며 교섭을 거부하였다. 결국 교섭당사자 문제 관련하여 중노위에 쟁의조정 신청을 한 결과 7월 24일 "교섭당사자로서 사용자는 법인인 근로복지공단"이라는 결정이 나온다. 마지못해 교섭에 나온 공단측은 임금은 권한 밖의 일이며 노조의 요구안에 대해 절대 불가라는 입장만을 보였다. 실권이 없는 관리자들만 나와 불성실하게 교섭에 임했으며, 교섭 석상에서도 비정규직의 차별은 당연하다는 언사 등을 행해왔다. 소수의 집행간부 중심으로 복수노조 문제, 교섭 상대방 문제, 불성실 교섭 문제 등을 해결하는 것만으로도 버거워하는 상황이었다.
  
공단측에서 노조를 철저히 무시하는 가운데 파업 투쟁을 조직하기 시작했으나 돌입 시기를 둘러싼 논쟁이 계속되었다. 공단은 노조의 조정신청과 동시에 노조 분열을 목적으로 시험 일정을 앞당겨 발표하고 이에 따라 노조 내부에서는 파업돌입 시기에 대한 치열한 논쟁이 시작되었다. .
비정규직에게 주는 특혜인 시험을 일부러 거부할 필요는 없고 시험 이후로 파업 시기를 잡자는 의견이 제기되었기 때문이다. 정규직 전환 시험과 관련된 논란은 이후 파업 투쟁 과정에서도 계속된다치열한 논쟁 끝에 노조는 현재 조직력을 볼 때 시험 전에 돌입하든 그렇지 않든 참가율에 큰 차이는 없다는 판단 아래 10/26 전국비정규노동자대회에 맞춰 파업에 돌입하기로 결정하였다. 10/27 공단 앞 집중집회와 3일간의 수련회를 통해 조직력을 강화한다는 목적으로 최소 3일에서 최대 6일 정도의 시한부 파업전술을 사용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10.26 전국비정규노동자대회에서 이용석 열사가 분신하면서 이 파업은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상황이 된다.

Ⅱ. 전체 비정규직 투쟁으로 확장되지 못하다

1. 파업 투쟁의 목표를 둘러싼 혼란

분신 직후인 10월 27일 근비노조는 총파업에 돌입했으며 전국에서 470여명의 조합원이 집결하였다. 그러나 집결한 조합원들은 분신이라는 상황에 당황스러워 하면서 이 파업이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해 불안감을 감추지 못했다. 분신 당일 근로복지공단 본부 진입을 시도하다 경찰과 대치하기도하고 많은 연대 단위들이 모여드는 것을 보며 더욱 불안해하였다. '제발 학생은 오지 말라고 해라', '우리끼리 하고 싶은데 왜 자꾸 모여드는지 모르겠다'는 반응이 많았다. 당사자인 조합원들이 이 투쟁의 의미를 확실하게 정리하지 못한 상태에서 무기한 총파업에 돌입할 수밖에 없는 급박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공단 앞 노숙 농성장에서는 '인간적인 도리로 버티고 있지만 1주일을 넘길 수 없다'는 말이 흘러나오곤 했다. 노동운동 세력이 열사의 분신과 근비 파업을 이용한다는 불신, 파업을 장기화시키려 한다는 불안감도 빠지지 않았다.
때문에 초기에는 이 투쟁의 의의와 목표에 대해 설득하고 동의를 끌어내는 것이 가장 큰 과제였다. 급박한 상황 속에서도 근비노조는 10월 31일 임시총회를 통해 투쟁의 목표와 방향에 대해 재정립하고자 하여 '정규직화 쟁취, 분신에 대한 공식 사과 및 대책 마련'을 임단협 요구안으로 결의하였다. 이전의 임단협 요구가 상징적인 것이었던 반면 열사의 분신을 통해 공공부문 비정규직 문제의 심각성이 드러난 상황에서 정규직화를 요구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정리하였다. 이후 노조에서는 정규직화 관련하여 '7급직을 신설하여 현 비정규직 전원을 정규직화하자'는 안을 내놓는다. 7급직제 신설안은 재정부담이 적고 비정규직 전원의 정규직화가 가능하다는 점에서 채택되었다.

2. 시험거부투쟁의 의미를 살리지 못하다

아쉬운 것은 임시 총회에서 투쟁 요구를 확인했으나 그에 걸맞은 투쟁 계획이 제출되지 못했고 조합원들 사이에서 충분히 논의되지 못했다는 점이다. 이런 문제는 내부제한경쟁시험 거부투쟁에서 극명히 드러났다. 11월 9일로 시험 날짜가 확정되고 예년에 비해 합격자 규모가 커지자 파업 때문에 아까운 기회를 놓치는 것이 아니냐는 불안감이 퍼졌다. 노조는 다수의 응시자가 합법적인 파업 때문에 응시할 수 없으므로 시험을 연기할 것을 요구했으나 공단은 강행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이에 조합원 토론을 통해 시험을 거부하고 저지할 것을 결의하였으나 구체적인 저지 전술에 대해선 논의되지 못하였다. 파업 불참자를 포함한 비정규직들에게서 시험거부 서명을 받고 11월 7일 기자회견을 통해 시험거부 입장을 표명하였다. 시험장 진입 투쟁이 거론되기도 했으나 시험장 앞에서 시작 시간 전에 선전전을 하는 것으로 정리되었다. 시험을 저지하지도 못했을 뿐만 아니라  그 부당성을 사회적으로 알려내는 데에도 실패하였다.
내부제한경쟁시험 거부투쟁은 공공부문 비정규직 문제의 모순을 사회적으로 폭로할 수 있는 중요한 투쟁이었다. 공단은 업무가 늘어남에 따라 인원도 늘려야 함에 불구하고 예산부족, 정원동결이라는 이유로 정규직 채용 인원을 1년에 많아봤자 70∼80명 선으로 터무니없이 적게 책정하였다. 그리고 절대적으로 부족할 수밖에 없는 인력은 계약직, 일용직 채용을 통해 해결하였다. 이것이 8년만에 공단 내 비정규직이 12배 증가한 비결이다. 필요인원조차 삭감하고 마는 공공부문 구조조정 정책에 따라 비정규직이 급속히 증가했고 노동조건은 더욱 나빠져 갔다. 내부제한경쟁시험은 비정규직의 불만을 무마시키고 관리하는 효과적인 수단이다. 1000여명 중에서 기껏해야 38명이 선택되기 위해 비정규직끼리 피터지게 경쟁하게 만드는 수단이다. 2003년 정규직 공채 경쟁률은 300대 1에 달하였다. 때문에 내부제한경쟁시험 경쟁률이 훨씬 낮으며 정규직 채용 인원 중 절반을 계약직에 할당하는 것 또한 근로복지공단에만 있는 특혜성 조치라고 인식되었다. 비정규직 스스로 모순이 아닌 특혜라고 인정하다보니 대부분 정규직 전환시험에 매달리게 된다. 공단의 비정규직 양산 정책에 대해 집단적으로 대응하기보다는 개별 노동자간 경쟁을 통해서 비정규직 문제가 해결될 수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계약직이 정규직으로 옮겨간 자리를 메우기 위해 또 계약직을 뽑아야 하므로 비정규직의 규모는 절대 줄어들지 않는 악순환을 낳을 뿐이다. 또 내부제한경쟁시험은 공단의 비정규직 양산 정책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제기를 막고 극소수만이 정규직으로 이전하는 통로를 만듦으로써 비정규직을 관리하는 효과가 있다. 마땅히 정규직으로 채용해할 인원을 비정규직으로 채용하며 차별한 것에 대해 정부가 책임져야 한다는 인식은 파업대오에서도 부족하였다.  

실제로 시험거부 여부를 둘러싸고 파업 대오에는 큰 혼란이 벌어졌다. 과연 노조가 사법처리를 무릅쓰고 시험을 무산시킬 수 있느냐라는 의구심 속에서 상당수의 조합원들은 시험을 보기 위해 파업 대오에서 이탈하였다. 정규직화가 노조의 요구라면 시험을 통한 정규직화도 막아선 안 된다는 것이 그들의 논리였다. 시험거부투쟁이 갖는 의미가 충분히 공유되지 못했다는 것은 시험 저지 실패 후 조합원의 반응에서 분명하게 드러났다. 시험을 보지 않고 남아있던 조합원들은 실제로 시험을 무산시킬 수 있느냐 여부에만 촉각을 세웠고 시험장 앞에서의 소극적인 선전전을 보면서 노조가 거짓말을 했다는 실망과 불신을 보였다. 전 조합원의 관심이 집중된 사안인 만큼 시험거부 투쟁의 목표가 무엇이며 그 목표를 위해 어느 정도 수위로 투쟁을 결의해야 하는지 논의됐어야 했다. 시험 무산이 불가능하다면 어떻게 시험장으로 사회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투쟁을 할 수 있는지 논의해야 했다. 그러나 조합원들은 시험 무산이 가능하다는 막연한 환상을 갔고 있다가 시험 당일 날에서야 구속을 각오하고 무산시킬지, 선전전을 하고 물러날 지에 대해 결정할 것을 요구받았다. 양극단의 선택지 사이에서 시험저지 포기 외에 선택할 것은 없었고 조합원들은 선택을 강요당했다고 느꼈다.
정부에서 강경진압 엄포를 놓던 상황에서 실제로 시험을 저지할 수 있었는가, 노동자 대회 당일 날 수백, 수천 대오를 조직하여 시험을 저지하는 것이 가능했는가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수백 명의 비정규직 노동자가 정규직 전환시험 거부를 선언하고 파업투쟁을 하는 것은 공공부문 비정규직 양산 정책의 모순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다. 열사의 죽음이라는 현상뿐만 아니라 왜 분신했는지 그 원인을 보여줄 수 있는 중요한 계기가 시험거부투쟁이었음에도 기자회견과 소극적인 선전전 외의 대응을 하지 못했다. 시험거부투쟁은 전체 비정규직 문제, 공공부문 비정규직 문제 해결을 요구하는 투쟁이라는 목표를 갖고 조직됐어야 했다. 비정규직 투쟁의 중요한 계기로서 집중해야 할 사안이므로 근비노조 조합원의 상태는 변명이 될 수 없다. 근비투쟁을 전체 비정규직 투쟁, 공공부문 비정규직 투쟁으로 확장시키고자 하는 기획과 노력이 누구에게도 없었던 것이다.    
      
3. 기획과 의지의 부재 속에서 확장되지 못한 투쟁


근비노조는 임시총회에서 정규직화 쟁취라는 투쟁요구를 결의하였다. 정규직화 쟁취는 결국 정부의 비정규직 정책에 대해 문제제기 하고 사회적으로 폭로하는 투쟁을 조직할 때에 가능한 요구였다. 근비노조의 파업으로 인해 공단 업무가 마비되지 않는 상황에서 파업대오를 유지하는 것만으로는 정부의 정규직화 안을 끌어내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근비투쟁에서 그 누구도 전체 비정규직 투쟁, 공공부문 비정규직 투쟁으로 확장시키고자 하는 기획을 하지 못하였다.
열사정국 당시 근비투쟁은 민주노총 총파업 집회 결합, 공단 앞 집회 그리고 교섭 중심으로 단선적으로 배치되었다. 이는 민주노총 투쟁 일정에 맞추는 것을 넘어서 비정규직 투쟁으로서의 확장시키려는 자체적인 기획이 없었기 때문이다. "노동탄압 분쇄, 손배가압류 철폐만 나오고 왜 우리 문제는 얘기 안 하냐"는 조합원들의 항의는 열사투쟁이 비정규직 문제를 부각시키는데 한계적이었음을 보여준다. 오히려 정권은 10월 29일 3개 부처 담화문을 통해 공공부문 비정규직 문제 해결안을 내놓겠다는 발빠른 대응을 하고, 전체 공공부문 비정규직 대책이 나오기 전까지 근로복지공단 비정규직 대책도 내놓을 수 없다고 압박하였다.

11월 12일 있었던 민주노총 마지막 총파업 집회 이후로 근비투쟁은 노동부, 청와대, 총무이사 집, 이사장 집 앞 선전전 중심으로 일정이 배치된다. 수많은 연대 단위가 공단 앞에 왔으나 이런 일정 속에선 집회참석이라는 수동적 역할만 할 수 있을 뿐이었다. 근비노조 조합원들과 연대단위가 간담회 등을 통해 이 투쟁의 의미에 대해 함께 소통하고 논의하는 시간이 거의 없었다는 점 또한 단적인 예이다. 각 지역 공단 앞 항의 집회를 통해 근비투쟁을 전국적 사안으로 만들려는 실천도 없었다. 근비투쟁에 1억이 넘는 투쟁기금이 모인 것은 전체 비정규직 문제를 대표하는 상징적인 투쟁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투쟁은 끝까지 근비노조만의 투쟁이었을 뿐 전체 노동운동이 함께 기획하고 실천하는 비정규직 철폐투쟁이 되지 못했다.          
이는 근비노조의 미약한 조직력이나 공공연맹의 탓만으로 돌릴 순 없는 문제이다. 비정규직 투쟁에 대한 운동진영 전체의 고민과 기획이 부족함이 여실히 드러났다. 당시 운동진영의 대응을 보면 현재의 노동운동이 정규직노조 중심이다 보니 조직노동자와 직결된 문제인 노조탄압분쇄 투쟁은 나름대로 진행되었지만 아직 투쟁주체조차 미약한 비정규직 투쟁은 부각되지 못했다. 부산투본, 대구투본이 지역에서 투쟁의 구심으로서 역할을 한 반면 서울투본은 저녁집회 주최 및 선전전 외에는 거의 움직이지 못했다. 서울지역이라는 특성상 노동탄압분쇄 범대위로 모든 단위가 집중했기 때문이기도 하나 '이용석열사정신 계승 비정규직 철폐투쟁'의 구심으로 만들어진 서울투본이 무력화된 것은 치명적이었다. 근비투쟁을 비정규직 투쟁으로 확장시키기 위해 다양한 노조, 단체 등이 모여 논의하고 공동 실천하는 틀거리 자체가 없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비정규직 노조조차 이 투쟁의 주체가 되지 못했다. 2003년 여름부터 비정규직노조들은 비정규직노동자의 공동투쟁을 준비하면서 10.26 집회를 성사시켰다. 그러나 막상 열사의 분신 이후에는 민주노총 총파업을 현장에서 열심히 조직하자는 것 외에 아무런 실천도 결의하지 못하고 흩어졌다.

Ⅲ. 근비투쟁이 남긴 성과와 고민 지점

1. 임단협의 체결

가장 큰 성과는 더 이상 비정규직을 확대하지 않는다는 단협 내용이다. 내부제한경쟁시험을 없애지는 못하였으나 비정규직을 확대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정규직 채용 인원을 늘리는 효과를 낳을 수 있다. 또한 2년 이상 계약직은 3년 단위로, 1년 이상 일용직은 6개월 단위로 계약 기간을 늘리고 재계약 거부사유를 줄여서 일정 부분 고용안정성이 나아졌다. 계약직 결원 채용시 일용직을 우선 채용하도록 노력하기로 하였으며 각종 후생복리, 휴가휴직을 정규직 수준으로 쟁취하는 성과를 냈다. 노사 동수의 비정규직제도개선위원회를 통해 정규직 전환, 비정규직 차별 해소에 관한 계획을 수립하고 필요시 보충협약을 체결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제도개선위 활동이 노조의 정책 대안 생산 및 투쟁과 병행되지 않으면 무용지물이 될 수 있다.
공단의 2004년 비정규직 운영 방안을 보면, 계약직, 일용직 결원의 경우 반드시 파트타이머, 파견을 통하여 보강하겠다 하여 비정규직을 더욱 심각하게 확대시킬 것으로 보인다. 계약직 결원시 일용직으로 충원하도록 한다는 단협에도 정면으로 배치된다. 이번 임단협은 가장 열악한 조건에 있는 일용직의 요구를 더욱 배려한 단협이라는 점에서 모범이 된다. 그러나 앞으로 상시적으로 필요한 업무에 일용직이라는 기만적인 고용형태로 채용하는 것 자체를 금지하고 최소한 계약직으로라도 즉각 전환할 것을 요구하는 투쟁이 필요하다. 문서수발, 비서업무 등 소위 단순업무라 할지라도 지속적으로 필요한 업무인 이상 일용직으로 채용하는 것을 비정규직 노조에서 용납해선 안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여성 집중사업장임에도 불구하고 법정 내용 이상의 여성노동자 관련 내용이 없다는 점은 아쉬운 부분이다.

2. 조직적 성과

신생노조이다 보니 근비노조 조합원들은 교섭 상황에 일희일비하는 모습을 보였다. 교섭 진행 상황에 따라 농성장 분위기나 파업 대오 규모가 영향을 받았다. 11월 26일 교섭대표단이 교섭장소에서 강제로 들려나오자 이에 대응하기보다는 "불필요하게 강경 투쟁을 하여 교섭을 포기한다"는 반응이 나올 정도였다. 그러나 41일간의 투쟁 과정에서 조합원들은 비정규직 노동자로서의 자기정체성을 갖고 단련되었다. 파업 투쟁 이전의 근비노조가 소수 집행부 활동 중심의 노조였다면 수십 명의 단련된 조합원들이 받쳐주는 조직이 된 것이다. 파업 이후 지역 모임 뿐 아니라 지역간 교류도 진행될 정도로 조합원으로서의 정체성이 잡히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다른 노동자들 특히 비정규직과의 연대의식이 형성되었다. 파업 이전 대의원, 지부장조차 직업상담원을 제외하곤 다른 비정규직 투쟁을 몰랐으나 비정규직 투쟁을 전사회적인 문제로 인식하게 되었다. 특히 노동부 직업상담원노조의 경우 한국노총 소속임에도 적극적으로 결합하면서 공공부문 비정규직 노동자로서의 연대의식을 나누었다. 근로복지공단이 산하 기관이다 보니 노동부로부터의 낙하산 인사가 많은 편이다. 때문에 직업상담원노조 사례에 힘을 얻으면서도 노동부 업무가 공단으로 이관될 때 직업상담원 인력도 내려올 수 있다는 경계의식 또한 강하였다. 그러나 이번 투쟁을 계기로 해서 같은 노동부 산하 비정규직이라는 연대의식이 강해졌다.
정규직 노조와의 관계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문제이다. 투쟁 및 교섭의 과정에서 근비노조는 정규직노조와의 실질적 연대를 하기 위한 노력을 하였다. 그러나 투쟁과 교섭의 진척과정에서 정규직노조와의 연대보다는 갈등이 커졌고 정규직노조의 실질적 지원은 없었다. 때문에 공단은 정규직노조와의 형평성 문제 및 예상되는 반발 때문에 요구안을 들어줄 수 없다며 발뺌하기 일쑤였다.  

3. 공공부문 비정규직 문제 관련한 시사점

공공부문 비정규직 문제는 공공부문 구조조정의 필연적인 결과이다. 무조건적인 인원삭감은 비정규직의 확대를 낳고, 무제한적인 확대를 위해 비정규직 인건비를 사업비로 책정하게 된다. 비정규직 인건비가 사업비로 책정되면 사업 축소, 폐지 등을 이유로 한 구조조정이 언제든 가능해진다.  때문에 공공부문 구조조정을 강제하는 각종 법령, 지침 등이 비정규직 투쟁에 큰 제약이 된다. 근비노조 교섭 과정에서 공단은 노동부에 380명 추가 채용을 요청했으나 노동부에서 승인을 보류했다, 임금 3% 인상안이 기획예산처에서 의결되어 국회의결 절차를 남겨두고 있기 때문에 더 이상의 임금 인상이 불가능하다고 주장하였다. 때문에 노동자의 생존권, 평등권의 문제를 고려하지 않고 진행되는 구조조정을 뒷받침하는 법, 제도에 대한 문제제기 및 투쟁이 필요하다.

최근 공공부문 비정규직 투쟁이 활발히 벌어지고 있다. 각 지자체 상용직노조, 환경미화노조, 장애인콜택시노조, 방송사 비정규노조 등 곳곳에서 공공기관으로서의 책임을 요구하며 투쟁하고 있다. 사실 노무현정권은 취임 초기부터 비정규직 문제 중에서도 공공부문 비정규직에 대한 실태조사 및 대책 마련을 지시한 바 있다. 공공 비정규직 대책관련하여 정부 입장이 나올 것으로 예상되는 바 운동진영에서의 공세적인 대응 계획이 필요하다. 근로복지공단의 04년 비정규직 운영 계획이나 산업안전관리공단에서 계약직을 파견으로 전환하는 것을 보면 파견, 파트타이머 중심으로 비정규직을 계속 확대한다는 정부의 구상이 보인다. 민원실 중심으로 도급화한다는 계획도 수 년 째 나오고 있다. 상시 사용 계약직에 대해선 내부제한경쟁시험을 통해 단계적으로 정규직전환 허용하면서 관리할 것으로 예상된다. 노동자들의 투쟁을 통한 집단적 문제해결보다는 계약직 내부의 경쟁을 통한 관리, 통제가 계속 되는 것이다. 간접고용을 확대시킴으로써 비정규직을 확대시키려는 정부 정책을 막기 위해 공공부문 비정규직 주체들의 공동 투쟁이 필요하다. 근비노조와 직업상담원노조가 그 투쟁의 중심이 될 수 있다. 또한 공공부문 비정규직 조직화 사업이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집중취재팀 | 전국불안정노동철폐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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