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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13|12|2003
껍질을 벗을 날에

:: 2004-01-01   조회: 4666

곧 눈이라도 내릴 것 같이 잿빛구름이 하늘을 무겁게 한다.
칠깡통 안에서 타오르는 장작불에 손을 쬔다. 한겨울로 가는 길. 잎을 죄 떨구고 속살을 훤히 드러낸 나무에서 옹이를 보았다. 가지가 잘린 자리에 나무는 더 단단한 흔적을 남긴다. 살아남으려면 바깥을 향한 부분은 단단해야 한다. 등에 무거운 집을 진 거북이처럼.
그새 한해가 다 가고 있다. 벼랑에 내몰린 근로대중의 처절한 싸움은 오늘도 멈추지 않는다. 얼마 전 자결한 노동자 장례식장에서 그를 추모하는 한 노동자는 이렇게 절규했다.
"나는 정말 자본주의가 싫어요."
국가는 어려서부터 반공을 주입했지만, 노동으로 살아가면서 그 국가가 얼마나 교활하고 가증스러운가를 뼈저리게 배운다. 하여 일하는 사람들의 세상을 이 지상에 세우기 위해, 인류 보편적 가치인 고루 잘사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가난한 사람들은 더욱 단단한 껍질을 갖는다.
오늘 아침 신문을 보니 남한에 집 없는 사람이 전체 가구의 반 정도 된단다. 서울의 강남에 사는 이들은 평균 3채씩 집을 갖고 있다고 한다. 그곳에 구룡마을이 있다. 아무나 살 수 없다는 '도곡동고층아파트' 그늘 아래 움막들이 빼곡이 들어 선 무허가 판자촌이다. 행정상으로는 주민등록도 되지 않는, 현행 법으로는 존재하지 않는 마을이다. 서울의 강남땅인 탓에 이곳에 사는 이들에 대해 곱지 않은 시각도 있다. 장차 큰 이권을 노리는 사람들이라고 단정짓기도 한다. 행정당국의 철거 조치도 숱했다. 99년 6월에는 불이 나서 170가구가 전소되고 이재민 450여명이 생기기도 했다. 60년대 중반 서울 청계천 뚝방의 판자집들을 철거하는 과정에서 엄청난 불이 난 적이 있었다. 서울시가 고의로 낸 불이라는 소문도 있었다. 구룡마을 주민들도 그것을 제일 경계한다. 자신들을 지키기 위해 외지인의 출입에 바짝 주의를 기울인다. 마을초입에 세워진 자치회관과 솟대처럼 세운 장대에 걸린 확성기들은 비상동원의 상징이다. 순번을 정해 마을입구에 보초도 세운다. 외부를 향해 부드러울 수 없는, 단지 살아남기 위해 딱딱하게 껍질을 만든 마을이다.
흐린 겨울날만큼이나 무거운 걸음으로 또 한해를 보낸다. 하지만, 좌절하지 말아야 한다. 껍질을 벗고 하늘을 향해 날아오르는 매미처럼, 일하는 사람들도 따뜻한 세상을 만나 본디 그 부드러운 마음을 맘껏 터트릴 날 왜 없겠냐.
서동석 |


  :: [사진] 그림 속의 행복, 현실 속의 고단함 2003/1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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