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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정규직 투쟁 돌아보기

 

 

재능교육교사노조 33일의 파업1)

 

 

엄진령 • 전국불안정노동철폐연대 상임집행위원 

 

 

 

한라중공업 사내하청 투쟁과 함께 최초의 비정규직 투쟁으로 꼽히는 것이 바로 재능교육교사노동조합(현 전국학습지산업노조 재능교육지부, 이하 ‘재능교육교사노조’)의 조직과 투쟁이다. 1999년 11월 7일 9명이 모여 노동조합을 설립했고, 12월 17일 특수고용 최초로 노동조합 설립신고필증을 교부받았다. 신자유주의가 본격적으로 확산되기 시작하던 시기, 최초의 비정규직 투쟁의 하나로 꼽히며, 33일의 파업을 통해 노동조합을 쟁취했고, 또 특수고용 최초로 단체협약을 체결한 노동조합이다. 하지만 사실 이때는 한국에서 ‘비정규직’ 문제나 특히 ‘특수고용’ 문제는 잘 알려지지 않았던 시기였다. 근로계약 대신 ‘위탁계약’을 체결했지만 그것이 근로계약인 줄 알았던 노동자들이 다수였고, 이들이 노동조합을 결성하고 투쟁에 나섰을 때 회사는 ‘개인사업자’라며 노동자로서의 지위를 부정했다. 노동자이면서도 노동자가 아닌 것처럼 위장된 고용에 붙여진 ‘특수고용’이라는 말은 이 노동조합의 조직과 투쟁에서부터 촉발된 다수 특수고용 노동조합의 결성이 운동의 흐름을 형성하면서 사회화된 용어이다. 

 

“그때는 특수고용이란 말이 없고, 그냥 개인사업자였죠. 위탁계약직 이렇게도 얘기하지 않고 그냥 개인사업자. ‘너희는 노동조합 만들 수 없대’라고 하면서 개인사업자라서, 사업자번호가 다 있어서 못 만든다고 이야기를 했었어요. 그때 알았던 거죠. 좀 충격이긴 했었죠. 우리가 그렇게 분류가 되는 거구나 하고. 사실 위탁계약서를 써도 그게 위탁계약서인지 근로계약서인지 몰랐고, 이 회사는 이런 걸 쓰나 보다 이렇게 생각을 했던 거죠.” (여민희) 

 

재능교육노조(정규직 노조)의 조직과 학습지 교사들의 연대 

 

당시 학습지 업계는 1998년 기준으로 50여 개 업체가 시장에 진출해 있었고, 그 가운데 대교, 재능, 구몬, 웅진 등이 이른바 빅4로 불리며 학습지 시장을 나누어 지배하고 있었다. 이 회사들은 IMF외환위기 시기 대부분의 출판업체가 무너진 것과는 대조적으로 유초등학생을 중심으로 시장이 확대되면서 상당한 호황을 누리고 있었다. 당시 업계 2위를 차지하고 있던 재능교육 역시도 1997년 276억, 1998년 234억이라는 높은 당기 순이익을 올리고 있었다. 그러나 이면에는 IMF외환위기를 핑계로 한 노동자 쥐어짜기가 존재했다. 재능교육은 IMF를 핑계로 정규직에 대해 2년간 임금 및 승진, 승급을 동결하고, 격주휴무제를 폐지하고, 상여금을 삭감하는 등 노동조건을 계속 하락시켰다. 그에 맞서 먼저 지국장들을 중심으로 한 정규직 노동조합(이하 ‘재능교육노조’)이 결성되었다.2)

 

재능교육노조가 결성되자 회사는 즉각 노조 탈퇴공작을 시작했다. 병원에 입원한 조합원에게까지 찾아가 탈퇴서 제출을 강요하기도 했고, 십여 차례 교섭에도 불성실하게 응했다. 결국 재능교육노조는 1999년 10월 26일 전면파업에 들어가게 된다. 파업을 앞두고 지국장들은 경력이 오래된 교사들에게 파업에 들어가게 될 것을 사전에 알렸고, 학습지 교사들은 선임계장을 중심으로 모임을 갖고 재능교육노조의 파업과 관련한 내용을 공유했다. 학습지 교사들이 노동조합으로 뭉치게 되는 시작은 여기서부터다. 재능교육노조에의 연대에서부터 시작해 독자적인 노동조합 설립으로 가는 시작이 열렸다. 

 

“어느 날 국장님이 저를 부르더니 파업을 할 것 같다고 했어요. 재능교육노조 이야기를 하고, 회사가 너무 부당한 게 많아서 노조를 만들었고, 국장들이 다 파업을 할 거라고 이야기를 하면서, 선생님들 잘 챙겨 줬으면 좋겠다고. 그때 제가 수원에서 일했었는데, 지구에 7~8개 정도 지국이 있었어요. 모든 지국의 선임계장들이 모이는 자리에서 국장님들이 다 파업을 나간다고 하는데 어떻게 할 거냐 이런 이야기를 나눴어요. 당연히 같이 도와줘야지 그랬고. 그래서 파업 들어가고 나서 저희 지국에서는 대체 근무자가 왔을 때 교사들이 막기도 했었어요. 나가라고, 우리 국장님 돌아오기 전에는 아무도 못 들어온다고 하면서 일주일 정도 대체근무를 막았었어요.” (여민희) 

 

민주노총 서울본부에서도 십여 명의 학습지 교사들이 모였다. 지국장들의 추천을 통해 명단을 확보한 것으로 짐작되는데, 모인 이들은 당시 지국에서 오래 근무한 선임계장 중심이었다. 이 모임에서 교사들은 재능교육노조의 투쟁에 대한 입장, 그리고 학습지 교사들이 겪고 있는 차별적인 노동조건에 대한 이야기를 내어놓기 시작했다. 노동조합 결성에 대한 이야기까지 나아가지는 않았지만, 학습지 교사들이 움직여야 회사에 타격을 줄 수 있다는 인식을 공유했다. 

 

“우리는 지국장과 거의 같은 일을 하는데, 그들은 정직원이고, 우리는 비정규직이고. 그래서 차별이 있는 부분들. 급여에서도 우리는 퇴직금도 없고, 일하는 조건들에서 부당한 것들에 대해 이야기를 했었어요. 그때는 우리도 노조를 만들자 이렇게까지는 안 했었고, 지국장들이 나가 있는데, 우리가 수업을 하고 있으면 회사에 결정적인 타격이 없다, 그러니 지국장들이 교사들이 뭔가 움직여야 회사로서는 타격이 있을 것이라고 이야기가 됐죠. 지국장들의 입장에서는 우리가 도와줬으면 했던 것 같아요. 다 같은 노동자 아니냐.” (이은숙) 

 

당시 민주노총 서울본부는 노동조합 조직화에 힘을 쏟고 있었고, 특히 재능교육을 전략조직사업장으로 하여 학습지 업계의 노조 조직화에 주력하고 있었다. 서울본부의 학습지 교사 조직화를 위한 모임은 그 이전부터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구체적인 자료로 확인되지는 않지만 1999년 7월 재능교육교사노조 건설을 위한 초동주체를 만들기 위한 모임이 있었던 것으로 확인된다.3) 이러한 조직화 시도가 재능교육에서 실물화된 것은 정규직 노조의 조직과 파업, 그리고 그 과정에서 교사의 조직화 필요성이 대두되면서 정규직이 학습지 교사 조직화를 지원하게 되는 과정이 존재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재능교육노조는 각 지역별로 최고참 교사 중에서 노조 결성의 의지를 가질 만한 사람들을 민주노총 서울본부에 소개하거나 직접 설득했고, 이들이 모여 재능교육교사노조의 발기인이 된다. 

 

재능교육교사노조의 출범과 곧 이은 회사의 탄압 

 

9명의 발기인으로 출발한 재능교육교사노조는 이후 파업 과정에서 천 명이 넘는 규모로 확대된다. 이에는 그간 부당한 조건에 불만을 갖고 있던 교사들의 동조, 그리고 전국으로 뛰며 노동조합을 조직한 9명의 해고자가 있었다. 재능교육노조 파업 중 투쟁을 지지하는 교사 9명이 파업집회에서 발언을 하게 된다. 당사자들은 정확히 기억을 하지 못하는데, 민주노총 서울본부 대의원대회 자료에서는 11월 6일 11시에 재능교육노조와 교사의 연합집회를 대학로에서 진행한 것으로 확인된다. 그리고 11월 7일 재능교사노조가 출범했다. 9명의 발기인이 모여 노조를 결성하고 다음 날인 11월 8일 중부지방노동사무소에 설립신고서를 제출했다. 그러나 회사는 곧바로 노조를 탄압하기 시작했다. 재능교육노조 파업에서 지지 발언을 했던 9명에 대해 곧바로 해고통보를 하고, 인터넷과 ‘재능교육 소식지’ 등을 통해 노조를 비방하기 시작했다. 

 

“토요일 혜화동인가에서 집회를 하기로 했는데, 교사들이 나와서 지지한다는 발언을 해 줬으면 좋겠다고 했어요. 단순한 마음에 개인적으로 큰일이라고 생각은 못 하고, 지국장이 나가 있으니까 잘 해결되었으면 좋겠다는 의미였죠. 9명이 나가서 어느 지국 누구 계장, 뭐 이렇게 소개를 하고, 지국장님들이 하는 일 지지한다, 옳은 일을 한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발언들을 했었죠. 그런데 하고 났더니 바로 다음 주에 회사에서 계약 해지를 했죠.” (이은숙)

 

해고된 9명은 노조활동에 적극적으로 나서게 됐다. 회사는 발언자 9명을 노조발기인으로 착오하고 해고했는데, 오히려 이로 인해 노조는 조직화를 위해 전면에서 뛸 수 있는 노조활동가 9명을 얻은 셈이 되었다. 사실 회사는 해고한 9명에 대해 곧바로 태도 변화를 통해 없었던 일로 무마하려 했으나, 이미 권리를 위해 나선 노동자들은 물러서지 않았다. 개별로 연락해 다시 출근하면 된다며 은근슬쩍 넘어가려는 회사의 행태에 오히려 분노는 커졌다. 노동자들은 곧바로 복직에 응하기보다 제대로 절차를 밟아서 원직복직을 시행할 것을 요구하는 한편 전국을 돌며 투쟁을 일선에서 조직하는 역할에 치중했다. 

 

“너무 부당하다고 생각했죠. 우리가 회사에 해를 끼친 것이 아닌데. 그래서 계약해지 철회를 요구하고 법적으로 구제받을 수 있는지 상담받으러 다니고, 수업은 못 나가고요. 각 지국에 이 상황을 알려야 한다고 생각해서, 해고된 교사들이 각 지국을 돌아다니면서 우리 상황이 이렇다 하고 알렸어요. 지국장들은 파업 중이고, 우리는 지지했다는 이유로 해고됐다는 것을 알렸고, 또 지국장들 파업과는 별개로 우리에게 주어진 환경들도 좋은 것이 아니다, 사실 우리가 더 조합이 필요하다, 이런 이야기들을 하고 다녔어요. 오래된 계장들 위주로 모임도 많이 했고. 수업을 거의 9시, 10시에 마쳐요. 밤에 모여서 토론하고, 방향도 논의하고 한 거죠. 지방에도 많이 다녔어요. 교사들이 수업 끝나고 모이면 가서 설명하고 노조를 만들어야 하지 않겠냐. 그런 얘기들을 했죠.” (이은숙) 

 

“11월 정도에 노동조합 사람들이 왔어요. 선임계장들 모임이 있었는데, 그 자리에 국장님들도 몇 분이 계셨고. 거기에 노동조합 사람들이 왔었어요. 그때 아마 발기인들이 몇 군데를 돌아다녔던 것 같아요. 발언했다고 해고했고, 그래서 노동조합을 만들었고. 우리가 노동조합을 만들 수 있고, 같이 했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했어요. 그래서 바로 그때, 그러면 같이해야죠, 이렇게 얘기했던 걸로 기억해요. 집회를 한번 같이 나가 보자는 것부터 시작했어요.” (여민희) 

 

재능교육교사노조에 대한 회사의 대응은 두 가지 방향에서 이루어졌다. 집회 발언자들에 대한 해고가 강경책이라면 한편으로는 회유책도 펼쳤다. 노동조합이 창립보고대회 및 민주직장 쟁취를 위한 결의대회를 가졌던 11월 13일에는 ‘근로조건 개선방침’을 발표해 교사들을 위한 제도개선위원회, 고충처리위원회, 사무환경개선위원회를 출범시키기도 했다.4) 그러나 회유책은 보여 주기일 뿐 가장 주된 대응은 학습지 교사는 노동자가 아니기에 노조를 설립할 수 없고, 따라서 재능교육교사노조는 불법단체라는 선전이었다.

 

 

7. 본문사진.jpg

서울본부 제12호

출처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오픈아카이브

생산자 :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서울지역본부. 1999.11.19.

기증자 : (재)전태일 재단 

 

 

폭발적 조직화의 배경이 된 열악한 노동조건 

 

회사가 개선방침을 회유책으로 내놓을 만큼 교사들의 노동조건은 열악했다. 받은 급여의 20%, 30%를 회사에 다시 내는 일들도 비일비재했고, 특히 회원감소에 따른 책임을 오롯이 교사에게 전가하는 수수료 제도는 교사들의 저임금으로 직결되었고, 그를 막기 위한 대납으로 가짜회원들이 늘어났고, 이는 교사들에게 큰 고통일 수밖에 없었다. 

 

“가짜회원이 늘 문제인데, 지금도 그렇지만 예전에도 가짜회원이 많았거든요. 수수료 받을 때가 되면 플러스, 마이너스를 해서 플러스를 하게끔 만드는 거예요. 계산기를 두들겨 줘요. 교사들에게 유리한 것처럼, 2만 5,000원 들어오고, 2개를 하면 5만 원이니까 실질적으로 대납을 하더라도 나쁜 건 아니야, 이런 식으로 계산을 해 주는 거예요. 관리자들이.” (여민희) 

 

“실적으로 수수료를 받잖아요. 기본급은 없고. 그래서 예를 들어 그 당시에 수수료가 35% 정도 되었고, 회원이 증가하면 2만 5,000원을 주는 식이었는데, 회원이 감소되면 한 건당 2만 5,000원을 빼 가는 거예요. 그런데 회원이 이사를 가서 그만두기도 하고, 아이들이 다쳐서 그만두기도 하고, 내 잘못이 아닌 일들로도 회원 감소는 일어나거든요. 그러니까 열심히 하는 것과 무관하게 마이너스 급여가 찍히는 사람들이 생기는 거예요. 그러면 그 당시 말로, ‘가방 놓고’ 도망가는 사례가 생기는 거죠. 그래서 관리예치금이라는 것도 있었어요. 입사할 때 150만 원 보증금을 내고 들어왔어요. 가방 놓고 가는 사람의 마이너스 급여를 관리예치금에서 회사가 빼 가는 거죠. 노동조합을 만들고 서로 이야기를 나눠 보니까 제도상의 문제가 정말 많았던 거예요. 우리가 정말 대우를 못 받고 있구나라는 것도 그제야 알게 됐던 거죠.” (여민희)

 

관리예치금제도는 이후 첫 단체협약에서 없앴다. 이때 공정거래위원회에서도 11월 20일, 회원감소 시 삭감규정, 관리예치금, 계약해지 등의 내용을 담은 재능교육의 관리교사위탁계약서 및 부속약관에 대해 불공정약관이라는 결정을 내리고 삭제 또는 수정하라는 주문을 내린다. 이에서는 계약만료 또는 해지 시 관리예치금 반환 시기를 최장 2개월로 규정한 것이 교사들에게 불리한 조항이라는 점, 순증에 대한 수당은 판매촉진을 위한 회사의 인센티브로 볼 수 있지만, 과목 수 감소에 대한 책임이 반드시 교사에게 있는 것도 아니고 그에 대해 회사는 전혀 책임을 지지 않는 제도로 교사들에게 부당한 조항이라는 점, 계약해지 사유가 광범위하게 규정되어 있고, 교사가 원해서 그만둘 경우 45일 전에 통보하도록 한 기간설정도 지나치게 교사에게 불리하다는 점 등을 지적했다.5)

 

이런 노동실태로 인해 노동조합에 대한 반응은 클 수밖에 없었다. 재능교육노조가 투쟁을 하고 있었지만 그것이 교사들의 노동조건을 바꿔 주리라고 생각하지는 않았고, 스스로의 권리를 지키는 노동조합이 필요했다. 회사가 탄압할수록 노동자들은 더욱 힘을 내서 맞섰고, 조직화에 더욱 힘을 붙였다. 그렇게 결집되기 시작한 재능교사노조는 9명에서 시작해 1,000명을 넘기 시작했고, 파업이 종료되던 연말에는 2,000명 가까운 수가 되어 있었다. 

 

“집회를 갔는데 회사에서 셔터를 다 내려놓았더라고요. 그래서 우리가 왔는데 왜 문을 닫아 놓았냐, 문을 열라고 당겼는데, 본사에서 소방호스로 교사들한테 물을 뿌린 거예요. 너무 속상해서 막 울었어요. 내가 열심히 일을 한 회사가 어떻게 나한테 이렇게 할 수가 있나 싶었고, 오후에 수업을 해야 하는데 물을 맞고 나니까 너무 화가 나서 못 가겠더라고요. 그래서 교재 좀 돌려 달라고 다른 교사들한테 부탁하고, 일부는 남아서 연좌농성을 하듯이 버텼어요. 그때부터 정말 이래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해서 막 조직을 하러 다녔죠. 다른 지역을 찾아다니면서 같이 노동조합 하자고 조직하고 그랬어요.” (여민희) 

 

33일의 전면파업, 핵심은 노동자성 문제 

 

첫 수업거부는 11월 17일에 있었다. 부당해고 된 9명의 원직복직, 노조인정 및 성실교섭, 그리고 회사가 일방적으로 내세우는 제도개선 방침이 아니라 노사 동수의 제도개선분과위원회 구성을 요구했다. 그리고 드디어 11월 29일 재능교사노조는 전면파업에 나섰다. 이미 1,278명이 파업찬반투표에 참여할 정도로 노조의 규모는 성장해 있었고, 그 가운데 1,147명의 찬성으로 노조는 도곡동 사옥을 거점으로 해 총파업 투쟁에 돌입했다. 총파업 투쟁의 요구는 △ 위탁계약서 폐지, △ 관리예치금 반환 및 폐지, △ 노조 인정, △ 해고자 원직복직 등이었으며, 이에 더해 재능교육노조의 인정 및 협상타결도 함께 내 걸었다. 이어 다음 날인 11월 30일에는 부산지사를 점거하고 투쟁2본부를 구성, 파업이 장기화될 조짐이 보이는 12월 8일에는 투쟁본부 체제로 전환하였다.6) 

 

“해고자들이 움직일 수 있는 시간이 되니까 9명이 많은 일을 맡아서 했었어요. 그때 정직원들은 도곡동 본사를 거의 점거하고 있었던 상태라서 거기 같이 있기도 하고. 우리도 노조를 해야 한다고 사람들을 만나고 다녔고. 그런데 일을 하는 상태에서는 저녁 늦은 시간이라야 만나니까 그 상태로는 뭘 할 수가 없더라고요. 그래서 일단 파업을 하자, 그렇게 된 거죠. 회사에 우리의 요구를 보여 주자 그랬던 거죠. 지국장 파업보다 교사들의 파업이 훨씬 큰 영향력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고, 일주일 정도만 파업을 해도 큰 타격일 거라고 봤어요. 일주일 정도 하면 회사에서 답변이 있겠지 생각했는데, 그게 33일을 간 거죠. 우리도 회사가 그렇게 버틸지 몰랐던 거고, 회사도 우리에게 놀랐던 거고.” (이은숙) 

 

33일이나 이어질 것이라고 회사도 노동자들도 몰랐던 파업. 그 핵심은 ‘노동자성’의 문제였다고 생각된다. 노동조합을 만들던 초기부터 민주노총 서울본부 등 상급단체에서는 이에 대한 우려를 가졌고, 그에 대응하기 위한 법적 논리를 준비했다. 당시 민주노총 법규국, 공인노무사, 그리고 민변 등을 통해 학습지 교사의 노동자성을 주장하는 의견서들이 제출되었다. 회사는 재능교육교사노조에 대한 유언비어를 유포하는 한편7) 노동자가 아니라 노동조합을 할 수 없다는 내용을 선전했다. 

 

“당시에 재능 정규직 쪽에서 이야기하기를 (학습지 선생님들은) 계약이 일반적인 근로계약이 아니다, 사업자등록 다 돼 있고, 그래서 쉽지 않을 것이라는 이야기를 했었어요. 그래서 학습지 교사들은 설립신고증이 잘 안 나올 수 있다는 거, 안 나올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것을 미리 알았죠. 우리 방침은 노동조합은 조합 설립신고증 가지고 싸우는 게 아니고 현장의 힘으로 싸우는 거니까 최대한 조직해서 파업 박고 가자. 그래서 주체들한테도 처음부터 아예 노동조합설립신고증도 안 나올 가능성도 높다고 했고. 그리고 정규직 노조를 통해서 회사 규정을 이따 만큼, 온갖 규정을 갖다 놓고 3박 4일 정도를 다 뒤졌죠. 그래서 교사와 관련된 규정이 있는 거를 다 찾아내 가지고 그거 가지고 의견서를 만들어서 내고, 서울지방노동청 점거 농성도 하고 이러면서 한 달 만에 설립신고증이 나왔죠.” (인터뷰, 한혁)8) 

 

“노동조건들을 이렇게 저렇게 바꿔 달라고 얘기했지만, 그것보다 큰 틀은 정직원으로 전환하라는 것이었죠. 세부적인 요구들이 있었지만 정규직이 되면 바뀌는 조건들이니까. 늘 구호가 ‘비정규직 철폐’. 회사에서는 위탁계약도 아니고, 개인사업자라고 했어요. 개인사업자니까 노동자 집단이 아니라 하나하나 낱낱이 회사-개인 관계이지 직원이 아니다, 그러니까 보너스도 퇴직금도 뭐도 없는 거라고. 그런데 우리는 회사가 지시하는 대로 늘 정시에 출근하고, 교육도 받고, 조회도 하고, 빠지면 안 되고. 개인사업자면 그렇게 안 해도 되는 거잖아요. 세세한 규정들이 내려오고 지켜야 하고 안 지키면 불이익도 있고, 다 그렇게 했으면서 결정적일 때는 개인사업자라고 하는 거죠.” (이은숙) 

 

노동조합을 쟁취하기 위한 투쟁 

 

전국으로 조직하기 위해 뛰어다니는 과정과 회사에 맞서 싸우는 파업투쟁집회와 농성, 그리고 당시 과천에 있었던 노동부를 상대로 한 투쟁이 동시에 진행되었다. 도곡동에서는 밤샘농성을 하고, 혜화동 본사를 중심으로 집회를 이어갔다. 과천 노동부 집회도 수없이 진행했고, 설립신고증 교부가 지체되면서 지청을 점거하는 투쟁도 진행했다. 노동자라는 사실 자체를 회사가 부정하고 있었기에, 파업에 들어서서 설립신고필증이 나오기까지 파업의 절반 이상은 노동부를 상대로 한 투쟁이 중요하게 배치될 수밖에 없었다. 

 

“필증이 그렇게 중요하다고 생각을 못 했었어요. 필요해서 노조를 만들겠다는 신고를 냈는데, 왜 그걸 반려하지? 우리는 이렇게 나와 있는데, 모든 조건이 우리는 노동자인데 왜 아니라고 하지? 그런 생각을 했었죠. 그런데 그때 서울본부 분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비정규직 중에서 이렇게 선제적으로 파업을 하고, 대규모로 나온 단체는 없었다, 처음이다, 그러니까 노동부에서 놀란 것 같다고 했어요. 그래서 필증을 내주면 다른 곳도 계속 생길 테니까 노동부가 고민을 하는 거다 이런 설명을 해 줬고. 그래서 과천 노동부 집회를 많이 했었어요. 노동부를 압박하고, 우리가 이렇게 많이 나왔다는 걸 보여 주려고. 혜화동에 한 번 가면, 과천은 두세 번씩 가는 식으로 했었어요.” (이은숙) 

 

“회사가 개인사업자라고 했는데, 그때는 크게 불안하지는 않았었어요. 왜냐면 사람들이 일단 많았어요. 파업에 참여하는 조합원들이 1,500명 이렇게 되고, 집회를 할 때도 많을 때는 2,000명씩 이렇게 나왔어요. 그리고 저희가 수도권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지역을 많이 갔어요. 지역에서 가서 집회를 하고 조직하고, 선전하고 하는 걸 타격을 간다고 했었는데, 많이 갔어요. 수도권 사람들이 대전도 가고, 광주도 가고. 버스 차량 빌려서 내려가서는 교회 같은 데를 빌려서 자면서. 한 지역을 가면 그쪽을 타깃으로 몇 개 지국을 도는 거예요. 선전전하고 우리가 지금 파업하고 있으니까 같이 하자, 이런 설명을 하고. 그게 너무 신나는 일이었죠. 그러면 서로 가입을 하겠다고 하고, 지역에서 계속 연락도 오고, 그러니까 너무 신나잖아요. 그래서 노조를 할 수 있다는 것도 우리는 의심하지 않았어요. 노동자성 이런 문제보다는 당연히 되는 거 아니냐는 생각이었고. 우리 필증이 되게 늦게 나왔는데, 그것도 되게 억울하다고 생각했어요. 당연히 나와야 하는 건데 왜 안 주냐, 어디서 맞춰 오냐 그랬던 거죠.” (여민희) 

 

11월 8일 제출한 설립신고에 대한 답은 한 달을 훌쩍 넘겨 12월 17일에야 받을 수 있었다. 너무 기뻤던 노동자들은 노조설립신고필증을 3,000여 장 복사해서 교사들에게 배포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해 마지막 날인 12월 31일 우선협상안에 대한 찬반투표 결과 71% 찬성으로 파업이 마무리되었다. 

 

“회원들한테 돌아갈 수 있다는 게 더 기뻤어요. 그동안 수업을 못 해서 계속 회원들에게 교재만 돌렸거든요. 드디어 수업을 할 수 있구나 하는 게 너무 좋았죠. 교재를 돌리면서 사탕 같은 거 사서 교재마다 다 넣어서 돌리고, 손편지 써서 돌리고, 크리스마스 주간에도 다 카드 써서 교재랑 같이 보내고 그랬거든요. 교사들 대부분이 그랬을 거예요. 우리 노동조건 때문에 파업을 했지만, 이제 정말 돌아가도 되는구나라는 것에 더 기뻤던 것 같아요. 파업을 하고 단체협약 체결하고, 그것으로 바뀐 제도들은 돌아와서 체험을 하면서 진짜 좋아졌구나 이렇게 뒤늦게 느끼게 된 거고요.” (여민희) 

 

투쟁 이후, 그리고 33일 파업투쟁의 의미와 현재 

 

누구도 예상 못 했던 33일간의 파업 이후 노동조합은 더 단단하게 서게 된다. 그리고 학습지산업노조가 결성되고, 다른 직종에서도 개인사업자로 위장된 노동자들의 노동조합 설립이 이어졌다. 그러나 3,700여 명까지 확대되었던 재능교육교사노조는 회사의 탄압을 이기지 못하고 이후 급격히 위축되는 시기를 겪게 된다. 이후로도 노동자냐 아니냐는 법적 시비는 노동조합을 끊임없이 흔들었고, 회사의 노조 탈퇴공작이 이제는 함께 싸웠던 정규직 노동자들을 이용해 몰려 들었다. 33일의 파업이 끝나기 전 파업을 마치고 먼저 복귀했던 지국장들은 교사들의 파업 해제를 종용하기도 했고, 회사는 교사들의 탈퇴서를 얼마나 받아 내는지를 가지고 지국장들의 고과를 매겼다. 연서명처럼 이름만 나열된 탈퇴서가 몰려 들었다. 그러나 회사의 계속되는 부당노동행위에 대해 검찰에서는 노동자가 아니고, 그래서 노동조합도 아니기에, 단체협약을 체결했어도 단체협약이 아니라며 회사의 불법행위를 방조했다. 그런 회사 측의 탄압으로 결국 재능교육노조는 사라졌고, 재능교육교사노조는 전국학습지산업노조 재능교육지부로 재편해 학습지 전체의 투쟁으로 확산하려 했지만 반전의 기회는 쉽게 마련되지 않았다. 해결되지 않는 노동자성 문제는 회사가 휘두를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무기였고, 노동자들의 투쟁에는 계속된 걸림돌일 수밖에 없었다.

 

그 투쟁 속에 동지들을 잃기도 했다. 재능교육교사노조 위원장으로서 민주노총 특수고용대책회의 첫 의장을 역임하기도 했던 정종태 동지가 위암투병 끝에 2005년 2월 세상을 떠났고, 재능교육교사노조의 발기인 중 한 명으로 법규부장을 맡았던 이지현 동지 역시 암투병 끝에 2012년 1월 세상을 떠났다. 법규부장을 맡았던 이지현 교사는 민주노총 서울본부 간부를 만나는 자리에서 다른 비정규직 노동조합에 비해서 특수고용은 할 수 있는 것이 없어서 답답하다는 속내를 털어놓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조합원들 앞에서는 오히려 웃으며 할 일이 없어서 편하다고도 하고, 경찰과 부딪칠 때는 상급단체 활동가들에게 듣고 배운 이야기로 경찰들에게 큰소리를 치기도 했다고 한다. 해고자로 세상을 떠야만 했던 이지현 동지의 복직은 2007년 단체협약과 임금개악에 맞선 투쟁이 수년간 이어지며 장기화되는 가운데도 끝내 놓을 수 없는 노동조합의 요구였다.

 

지난 1999년의 33일간의 파업의 의미를 비정규직 운동사에서는 한국 사회에 ‘특수고용’이라는 고용형태의 문제를 처음으로 알려 낸 투쟁, 특수고용 노동조합의 조직 확대의 시작이 된 투쟁 등으로 새기고 있다. 그런데 그것만으로는 뭔가 부족하다고 느껴지는 것은 이들의 투쟁이 20여 년의 시간을 넘어 아직도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에서 비정규직이 확산되던 시기 최초의 투쟁으로 일어나, ILO기본협약이 비준되고 특수고용 노동자들의 노동조합이 당연한 것이 되기까지 20여 년의 긴 시간을 버텨 왔다. 초기의 비정규직 노조 대부분이 세워지고 사라지는 것을 반복했던 것이 비정규직 투쟁의 역사이기도 한 만큼, 그 가운데 수많은 곡절을 겪으면서도 버티고 견뎌 내어 남아 있는 노조이기에 귀하다. 이들은 앞으로도 노동조합으로 존재하며 학습지 교사들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고자 애쓸 것이다. 그리고 플랫폼, 프리랜서 등으로 더 넓어지는 불안정노동에 맞선 싸움의 한쪽에 늘 함께 서 있을 것이다. 특수고용의 문제를 처음으로 알려 낸 노동조합 결성과 33일의 파업 투쟁의 의미는 이들의 투쟁이 이어지는 만큼 계속 새롭게 새겨져 나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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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인터뷰에 응해 주신 여민희, 이은숙 님께 감사드립니다.

2) 학습지 업계에는 1987년 이후 설립된 노동조합들이 있었지만 유의미한 활동을 이어가지 못하고 90년대 후반에는 대부분 휴면노조화된 상태였다. 이는 노동조합을 탄압하는 한편, 정규직으로 고용하고 있던 학습지 교사들을 비정규직화했던 결과이기도 하다. 재능교육 역시 마찬가지로 1989년 설립된 노동조합이 있었지만 활동을 하지 않는 상태였다. 그래서 1999년 6월 새롭게 설립된 재능교육노조는 서울지방노동위원회에서 휴면노조 해산 결정을 받아 낸 후 8월 4일에 설립신고필증을 교부받게 된다.

3) 김진억, 특수고용노동자 조직‧투쟁 평가와 향후 과제, 비정규노동 16호, 한국비정규노동센터, 2002.11, 21쪽.

4) 재능파업에 교사 합세 ‘파업 확산’, 미디어오늘, 1999.11.18.

5) 공정거래위원회 전원회의, 의결 제99-228호, 사건번호 9811약일2018, (주)재능교육의 관리교사위탁계약서 및 부속약관상 불공정약관조항에 대한 건, 1999.11.20.

6) 전국학습지산업노동조합 홈페이지, 재능교육지부 연혁 참조.

7) 그 시기 투쟁 사례를 다룬 글에서는 “민주노총에서 보름간 생쌀을 먹으며 훈련받은 사람들이 노동조합을 결성했다”는 흑색선전을 했다고 밝히고 있다. (비정규직 투쟁사례 분석 토론회 자료집, 민주노총, 2002.3.14.)

8) 비정규직 노동운동사-주제사(민주노총 총서 051), 민주노총, 2017, 3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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