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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풀어쓰는 비정규운동

 

 

‘포괄임금약정 금지’가 필요한 이유

 

 

박성우 • 공인노무사,

직장갑질119 야근갑질특위 위원장/민주노총 서울본부 노동법률지원센터 센터장

 

 

 

장시간 공짜노동의 주범 - 포괄임금약정

 

2022년 기준 한국의 연간 실 노동시간은 노동자 1인 평균 1,915시간으로 OECD 가입국 중 5위다. 중남미국가를 제외하면 1위다. 세계 최장 노동시간 국가 중 하나인 한국의 실 노동시간 단축을 어렵게 만드는 원인 중 하나는 ‘포괄임금약정’이다(흔히 ‘포괄임금제’라 부르지만, 법이 정한 ‘제도’가 아님을 강조하는 취지에서 포괄임금약정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자 함).

 

포괄임금약정이란 연장근로수당을 비롯한 각종 법정수당을 실제 근로시간에 상관없이 미리 일정금액으로 정하여 기본급에 포함하거나, 기본급과 구분은 하나 일정액의 고정수당으로 지급하는 임금약정을 말한다. 전자를 정액급제, 후자를 정액수당제라고도 한다. 예를 들어, 하루 10시간 일하기로 하고 월급을 300만 원으로 정했다면 정액급제 포괄임금약정, 월급을 기본급 220만 원과 시간외근로수당 80만 원으로 정했다면 정액수당제 포괄임금약정이라 할 수 있다. 참고로 고용노동부 조사결과(「기업체노동비용조사 시범조사」, 2017.5.31.) 기준 상용노동자 10인 이상 기업체에서 포괄임금약정을 도입한 곳은 무려 52.8%에 이른다.

 

포괄임금약정은 일단 시간외근로를 전제하고 있으니 노동자의 야근이 당연시된다. 또 미리 정한 야근시간보다 더 일하면 추가로 수당을 지급해야 하지만 그런 사업장은 매우 드물다. 결국 포괄임금약정에 포함된 야근시간은 형식적인 것이 되어 실제로는 사실상의 ‘무제한 야근’이 이뤄지는 한편 그에 따른 추가 수당은 그대로 체불임금이 된다. 이렇게 포괄임금약정은 장시간 노동과 공짜노동의 주범이 되는 것이다.

 

판례의 입장

 

포괄임금약정은 근로기준법에 아무런 근거 규정이 없다. 즉, 법정 제도가 아니라 노동자와 사용자 간 계약을 통해 이뤄지고 이를 법원이 판례를 통해 인정해 온 것이다(1992년 대법원 판결문에 처음 포괄임금제라는 용어 등장). 그러니 먼저 당사자 간 포괄임금약정 합의가 있었는지 여부부터 따져 볼 필요가 있다. 그런데 대법원은 연장근로에 대한 합의는 연장근로를 할 때마다 할 필요는 없고 근로계약 등으로 미리 약정하는 것도 가능하다고 해석하고 있다(대법원 1995.2.10. 선고 94다19228 판결). 대개 입사 시 동의를 안 하면 채용이 안 되니 어쩔 수 없이 동의를 하게 된다. 또는 입사 후 임금체계나 근무시간 변경 시 역시 사용자의 우월적인 지위 하에서 동의가 강요된다. 따라서 장시간 노동을 전제하는 포괄임금약정 합의 자체가 노동자의 실제 의사와는 무관하게, 대체 그 유효기간이 언제까지인지도 알 수 없는 상태로 성립 가능하다는 문제부터 지적되어야 한다.

 

포괄임금약정에 대한 사회적인 문제의식이 커지자, 2010년 대법원은 포괄임금약정의 가장 중요한 유효요건을 밝히는 판결을 하게 된다. “근로시간의 산정이 어려운 경우가 아니라면 달리 근로기준법상의 근로시간에 관한 규정을 그대로 적용할 수 없다고 볼 만한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근로기준법상의 근로시간에 따른 임금지급의 원칙이 적용되어야 할 것이므로, 이러한 경우에도 근로시간 수에 상관없이 일정액을 법정수당으로 지급하는 내용의 포괄임금제 방식의 임금 지급계약을 체결하는 것은 그것이 근로기준법이 정한 근로시간에 관한 규제를 위반하는 이상 허용될 수 없다.”(대법원 2010.5.13. 선고 2008다6052 판결) 즉, ‘근로시간의 산정이 어렵지 않은 경우’에 행해진 포괄임금약정은 무효라는 것이다. 결국 근로시간의 산정이 어려운 예외적인 경우가 아닌 대다수 노동자들에게는 원칙적으로 포괄임금약정 자체가 유효할 수 없다고 보아야 한다. 참고로 직장갑질119가 2023년 3월 직장인 1,0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포괄임금약정을 체결한 응답자 중 87.8%는 자신의 업무가 ‘근로시간 산정이 어렵지 않다’고 답했다.

 

 

5. 본문사진.jpg

2023.02.06. 직장갑질119 야근갑질, 계약갑질, 원청갑질, 젠더폭력, 5인 미만 등

5대 노동개혁 과제 발표. [출처: 참세상]

 

 

고용노동부의 태도

 

고용노동부는 위와 같은 판례의 입장과는 달리, 실제 임금체불 사건에서 포괄임금약정의 유효 여부를 먼저 판단해야 할 때 근로시간의 산정이 어려운 업무인가를 중요한 판단기준으로 삼지는 않는 처리행태를 대체로 보이고 있다. 한편, 지난 2017년 10월 문재인 정부에서 고용노동부는 「포괄임금제 사업장 지도지침」을 만들었다(고용노동부는 초안이었다고 함). 판례의 입장대로 “포괄임금제는 근로시간 산정이 어려운 경우에 한하여 예외적으로 인정 : 근로시간 산정이 어렵지 않으면 합의가 있어도 무효”라는 내용이 핵심이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그러나 어떤 이유에서인지 발표를 하지 않고 폐기해 버렸다.

 

윤석열 정부의 고용노동부는 기획감독을 실시하고 포괄임금 오·남용 신고센터를 마련하는 등 2023년을 포괄임금 오·남용 근절 원년으로 삼겠다는 설레발을 치고 있다(고용노동부 보도자료, 2023.2.13.). 그러나 정부의 이른바 ‘주 69시간제’ 법 개정 추진(「근로시간 제도 개편방안」)에 대한 여론의 반발을 무마하려는 물타기 아니냐는 세간의 의혹은 차치하더라도 보다 근본적인 한계가 확인된다. 우선 일정시간에 대한 연장근로수당을 미리 고정액으로 약정하는 경우는 ‘고정OT수당제’라 부르면서 포괄임금약정과는 다른 것으로 구별하고 있다. 즉, 고정OT수당제는 근로시간의 산정이 어렵지 않더라도 유효하며, 단지 사전에 정한 시간보다 더 연장근로를 하면 그만큼 수당(체불임금)을 더 주면 되는 단순 임금체불 문제일 뿐이라는 것이다. 판례가 포괄임금제라 칭하는 대상을 고용노동부가 좁게 해석하는 것에 이론적으로는 일리가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태도는 현실의 포괄임금약정(그것이 판례가 말하는 포괄임금제이건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포괄임금제이건)의 심각한 문제점을 도외시하고 보다 근본적인 대안 마련을 어렵게 한다.

 

포괄임금약정 자체를 법으로 금지해야

 

여전히 ‘주 52시간제’라는 잘못된 용어가 횡행하고 있지만, 근로기준법은 한국이 주 40시간 노동제 국가임을 천명하고 있다. 따라서 주 40시간을 초과하는 연장근로는 특별한 사정이 있는 경우에 예외적으로 행해져야 함이 타당하다. 나아가 근로기준법은 연장근로를 당사자 간 합의 하에서만 주 12시간을 한도로 더 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포괄임금약정은 노동자의 동의라는 연장근로의 필수 요건을 무력화하고 사실상의 강제근로를 만들어 내고 있다. 또한 법정 기준근로시간 내에서 소정근로시간과 그에 대한 기본임금을 정하고 이후 연장근로 등이 실제 발생하면 그에 따른 시간외근로수당을 지급하는 것이 근로기준법상 임금지급의 원칙이다.

 

근로기준법에서 정한 근로시간과 임금산정에 대한 원칙을 무너뜨리고 장시간 노동, 공짜노동을 유발하는 주범인 포괄임금약정은 법으로 금지해야 한다. 혹자는 포괄임금약정이 법정 제도가 아닌데 금지(폐지)하자는 주장은 오히려 포괄임금약정을 제도로 오해하거나 지위를 격상시켜 줄 우려가 있다고 한다. 계약자유의 원칙상 당사자 간 합의한 임금산정방식을 법으로 금지할 수는 없다는 주장도 있다. 사전에 정한 시간을 초과하는 연장근로를 했을 때 그만큼 추가 수당을 주도록 법을 준수하게 하면 되는 문제일 뿐이라는 입장도 있다. 미리 정한 연장근로시간을 채우지 않아도 고정액의 연장근로수당을 다 지급하는 사업장(주로 대기업)도 많아 포괄임금약정을 금지하면 오히려 고정수당의 저하를 가져오므로 노동자에게 불리할 수 있다는 의견도 있다.

 

모두 현실의 심각성을 제대로 모르는 탁상공론이라고 생각된다. 포괄임금약정이 현장에서 작동하고 있는 가장 심각한 모습은 포괄임금약정이 체결되어 있다는 자체만으로 사용자가 시키면 시키는 대로 무조건 연장근로를 해야 하고 얼마나 더하건 추가 수당은 없다는 인식이 하나의 사회적 관행처럼 이미 깊은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것이다. 단순히 오·남용 규제나 안일한 준법지도 수준으로는 현실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본다. 연장근로는 예외적으로 불가피한 때에 그때그때 노동자의 동의하에 실시하도록 하고 그렇게 실제 연장근로를 한 시간만큼 사후적으로 연장근로수당을 지급하도록 하는 것이 ‘근로기준법이 정한 근로시간에 관한 규제와 근로시간에 따른 임금지급의 원칙’을 올바르게 구현하는 것이다. 따라서 포괄임금약정은 법으로 금지해야 한다. 근로시간 산정이 어려운 예외적인 업무라면 현행 근로기준법이 마련하고 있는 다양한 유연근로시간제도를 활용하면 된다. 이미 2020년 11월 발의된 정의당 류호정 의원안을 비롯해서 현재 4건의 포괄임금약정 금지 법안이 국회에 제출되어 있으나 심의조차 이뤄지지 않고 있다. 조속한 입법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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