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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풀어쓰는 노동용어 

 

 

블랙리스트

 

 

임용현 • 전국불안정노동철폐연대 상임집행위원

 

 

 

“국가와 자본은 ‘권리 찾기 투쟁’에 나섰던 노동자들이나 그들을 도왔던 사람들의 명부를 작성하여 비밀리에 배포하였다. 그것은 이른바 ‘블랙리스트’라고 불렸다. 블랙리스트는 명부에 이름이 올라간 노동자들이 다른 공장에서 일을 하지 못하게 하는 살생부(殺生簿)였다.” - 『전노협 1990~1995』 중에서. 

 

블랙리스트는 주의나 감시가 필요한 인물이나 단체를 적은 명부를 말한다. 국내에서는 1972~1978년 동일방직 인천공장 여성노동자들의 민주노조 사수 투쟁에서 블랙리스트가 처음 등장했다. 엄혹했던 군부독재 시절 국가는 노동자들의 기본권을 용인하지 않았다. 노동현장에서부터 민주화의 열망이 타오르는 것을 어떻게든 잠재우려 했다. 그래서 이 시기에는 정권과 자본의 결탁 아래 병영적 현장통제와 어용노조의 발호가 극심했다. 남성 중심의 동일방직 어용노조에 민주파가 당선됐을 때 사측은 물론 정권도 이를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정보기관의 사주로 회사에 친화적인 인물들이 민주파 집행부를 와해시키기 위해 ‘인분’까지 투척하는 등 갖은 만행을 저질렀고, 회사도 조합원 124명을 무더기 해고하며 어용세력을 도왔다. 이후 어용노조는 동일방직 해고 여성노동자들의 명단이 첨부된 블랙리스트를 한국노총 산하 각 분회에 발송해 어용노조 사업장에 다시는 발을 붙일 수 없도록 틀어막았다. 

 

동일방직 민주노조 사수 투쟁 

 

블랙리스트에 등재돼 처음 해고된 사례 역시 동일방직 노동자들이었다. 동일방직 해고자들은 생계를 잇기 위해 수도권 일대 사업장을 전전해야만 했다. 이들은 한일방직(인천 학익동), 대한모방(서울 영등포구) 등에서 입사한 지 2주~4개월 만에 다시 공장 밖으로 쫓겨났다. 이렇게 동일방직 출신 노동자들이 겪은 블랙리스트에 의한 해고 사례는 1979년 말까지 32건에 달했다.

 

동일방직 민주노조 사수 투쟁 이후 블랙리스트는 기업이 노동자를 회유·협박하거나 해고하는 수단으로 적극 활용되기 시작했다. 이는 일터에서 민주주의와 기본권을 지키기 위해 나섰던 노동자들을 솎아 내기 위한 목적이 다분했다. 실제로 1970~80년대 블랙리스트는 노동운동은 물론 민주화 시위에 가담한 전력이 있는 활동가들, 해고노동자들의 재취업을 봉쇄하기 위해 경찰, 보안사, 안기부 등이 작성하여 각 사업장에 전국적으로 배포된 것이었다. 블랙리스트에 오른 이들은 취업 자체를 거부당하거나 일방적인 해고 통보를 받는 등 생존권을 깡그리 박탈당했다.

 

최초의 블랙리스트는 어용노조 간부(한국노총 섬유노조 위원장 김영태)가 직접 만들어 산하 노조에 돌리는 방식이었지만, 이후에는 민주노조운동의 부상을 두려워했던 국가권력이 자본과 결탁하면서 더욱 광범위하게 작성·유포됐다. 1980년대 초중반의 블랙리스트는 전두환 정권 주도로 수집·작성·배포됐다. 여기에는 125개 사업장의 해고자 681명, 복직자 60명, 재취업자 57명 등에 대한 신상 명세가 일목요연하게 담겨 있었다. 당시 전두환 정권은 집권 중반기 들어 ‘유화 정책’을 폈는데, 이는 수년간 취업 기회를 차단당했던 민주노조운동 주체들로서는 더할 나위 없는 기회였다. 동일방직, 청계피복, 원풍모방 출신 해고자들이 중심이 되어 ‘한국노동자복지협의회’가 1983년 3월 결성됐고, 이후 민주화운동청년연합, 한국가톨릭노동청년회 등과 함께 대대적인 블랙리스트 철폐운동을 전개했다. 1980년대 대중적인 흐름으로 일어난 블랙리스트 철폐운동은 노동운동을 탄압하는 정권과 자본에 맞서 노동자의 기본권을 옹호하는 싸움이었다. 그럼에도 블랙리스트에 의한 해고는 여전히 사라지지 않은 채 오늘날까지도 일터 곳곳을 서슬 퍼렇게 물들이고 있다.

 

 

2. 본문사진1.jpg

“동일방직 부당해고근로자는 복직되어야 한다” 동일방직복직투쟁위원회·동일방직해고근로자복직추진위원회 성명서, 1978. [출처: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사료관 오픈아카이브] 

 

 

취업방해 금지 조항 

 

민주노조운동을 뿌리 뽑겠다는 정권과 자본의 의지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다. 블랙리스트에 의한 해고는 ‘불온세력’이라는 사회적 낙인과 배제, 강제해고와 취업거부, 그로 인한 생계위협 등 이루 말할 수 없는 신체적·정신적 고통을 수반한다. 이러한 이유로 근로기준법 제40조에서는 블랙리스트 작성 금지를 다음과 같이 명문화하고 있다. “누구든지 근로자의 취업을 방해할 목적으로 비밀기호 또는 명부를 작성·사용하거나 통신을 하여서는 아니 된다.”

 

여기서 ‘누구든지’란 사용자와 노동자뿐 아니라 고용노동부, 경찰 등 수사기관이나 정보기관, 지방자치단체 등의 공무원을 비롯한 ‘제3자’ 역시 취업방해를 해선 안 된다는 점을 분명히 한 것이다. 다음으로 취업방해 금지는 ‘근로자’의 취업을 방해하는 행위여야 한다. 이때 근로자는 동법(근로기준법)상의 근로자여야 하며, 특수고용·플랫폼·프리랜서 노동자에 대한 취업방해 행위는 이에 포함되지 않는다. 노동자의 권리가 취약할수록 블랙리스트를 비롯한 사용자의 불법행위도 더욱 기승을 부린다는 사실을 우리는 익히 알고 있다. 한편 ‘비밀기호 또는 명부’란 노동자의 취업 관련 사실, 사회적 신분이나 노조활동 등의 이력이 기재된 정보를 말하는 것이고, 이를 ‘작성·사용하거나 통신’을 한다는 것은 곧 블랙리스트 정보를 우편 서신(전자우편 포함)이나 전화 등을 통해 주고받는 행위를 일컫는바 명백한 취업방해 행위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문서 등으로 자료화된 형태가 아니라 ‘구두’로만 해당 정보를 공유했더라도 그 사실을 입증할 수 있다면 역시 취업방해에 해당한다. 여기까지가 취업방해를 구성하는 객관적 요건이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그다음이다. 취업방해행위(근로기준법 제40조 위반죄)는 ‘목적범’으로, 취업방해라는 목적을 갖고 행하면 결과가 발생하지 않더라도 범죄가 성립한다. 바꿔 말하면 사용자가 구직자의 경력조회를 채용 전 인사평가를 위한 기초자료로 활용했을 경우엔 취업방해라고 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즉 사용자의 취업방해 의도가 명백할 때라야 비로소 법을 위반한 것으로 우리 법은 판단하고 있다. 우리 법은 채용 시 참고 목적으로 명부를 작성해 사용하는 행위는 사용자의 인사권에 관한 고유 권한으로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노동자 입장에서 본다면 이러한 사용자의 행위가 취업방해 목적으로 블랙리스트를 작성하거나 배포하는 위법한 행위인지 쉽사리 알 수 없다. 그와 관련한 객관적인 증거를 수집·확보하기가 굉장히 어렵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블랙리스트 논란에 연루된 기업들 대부분은 관련 사실을 부인하거나 정당한 인사평가 절차였다고 주장한다. 최근 블랙리스트 파문을 일으킨 쿠팡 또한 관련 보도가 처음 나온 당시에는 “출처 불명의 허위·왜곡 보도”라는 입장을 냈다가 후속보도에서 블랙리스트의 존재가 연이어 폭로되자 “직원에 대한 인사평가는 회사의 고유 권한이자 안전한 사업장 운영을 위한 당연한 책무”라고 밝히는 등 사건의 본질을 흐리는 데 줄곧 힘을 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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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2.20. 쿠팡 블랙리스트 사건 당사자를 비롯한 노동·인권단체 관계자들이 민주노총에서 쿠팡을 규탄하는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출처: 노동과세계 송승현]

 

 

노동3권을 빼앗긴 조선소 하청노동자들 

 

이처럼 블랙리스트에 의한 취업 제한 및 해고 문제는 근래 들어서도 잦아들 줄 모르고 있다. 블랙리스트가 좀체 근절되지 않는 대표적인 현장으로 조선소를 빼놓을 수 없다.

 

한진중공업 영도조선소의 ‘마지막 해고자’였던 김진숙은 1981년 대한조선공사(한진중공업 전신)에 국내 최초의 여성 용접공으로 입사한 뒤 1986년 어용노조를 비판하는 유인물을 배포했다. 당시 대공분실까지 끌려가 모진 고문을 당했던 그는 이 기간 ‘무단결근’ 했다는 이유로 징계 해고됐다. 이후 블랙리스트 족쇄를 벗고 명예복직을 쟁취하기까지 무려 37년이란 시간이 걸렸다. 이는 비단 김진숙 개인만의 문제도 한진중공업 한 사업장만의 문제도 아니었다.

 

불법적인 다단계 고용구조가 고착화된 조선소 현장은 하청노동자들의 권리의식이 자라나기 어려운 환경에 놓여 있었다. 이러한 고용구조는 원청 사용자들이 조선소를 무법천지의 아수라장으로 만드는 데 크게 일조했다. 특히 2010년대부터 조선업 블랙리스트 문제는 더욱 심각해졌다. 이 시기 조선업 불황이 본격적으로 도래하자 원·하청 자본은 가장 열악한 하청노동자들에 대한 임금삭감과 우선해고 등 구조조정 공세를 거침없이 펼쳤다. 현대중공업(현 HD중공업), 대우조선(현 한화오션), 삼성중공업 등 이른바 ‘빅3’ 조선소에서는 노동조합 활동을 빌미로 사내하청 노동자 중 특정 인원을 고용승계와 재취업에서 배제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원청인 빅3가 하청업체를 통해 간접고용한 노동자들이 조선소에서 일하기 위해서는 출입등록 절차가 필수적이다. 블랙리스트에 오른 하청노동자의 경우에는 이 출입등록이 원청으로부터 거부되는 것이다. 게다가 블랙리스트는 기업 내부 전산망을 통해 기록, 관리, 갱신이 이뤄지기 때문에 외부에 유출될 가능성도 현저히 낮다.

 

결국 노동조건 하락과 고용불안이 가중되는 상황에서도 하청노동자들은 ‘살아남기 위해’ 침묵을 선택할 수밖에 없게 된다. 블랙리스트에 대한 두려움으로 노조 할 권리를 포기해야 하고, 일터에서의 존엄과 안전조차 보장받지 못하는 게 조선업 하청노동자들의 현실이다. 

 

제2의 블랙리스트 철폐운동을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은 뭔지 모를 기시감 같은 걸 강하게 느낄 것이다. 지금 쿠팡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 조선소의 모습과 전혀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쿠팡 물류센터 노동자나 택배 노동자들 또한 조선소 하청노동자들과 마찬가지로 불안정한 고용상태에 놓여 있다. 조선산업과 물류산업에서 일용직, 하청, 특수고용 등으로 일하는 불안정노동자들은 언제든지 일터에서 쫓겨날 수 있다는 불안감에 시달리면서 극심한 노동강도와 열악한 노동환경 등을 감내할 수밖에 없는 처지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블랙리스트의 존재는 해당 노동자의 생계 박탈만이 아니라, 사용자의 위험작업 강요나 부당한 지시에 맞서 문제 제기하고 권리를 찾아 나갈 동료 노동자들의 용기마저 앗아 간다. 그런 점에서 블랙리스트는 노동3권을 침해하는 반헌법적 행위이자 일터의 민주화를 가로막는 중대한 걸림돌이다.

 

1978년 동일방직부터 2024년 쿠팡에 이르기까지 기업들은 노조파괴와 노동통제, 구조조정의 수단으로 블랙리스트를 작성·사용해 왔다. 군사정권이 직접 노조파괴를 획책했던 그때에 비해 ‘정당한 인사권 행사’라며 불법적인 블랙리스트를 버젓이 감싸는 지금이 그나마 더 낫다고 얘기할 수 있을까. 블랙리스트를 통한 노동현장에서의 공안통치 정국은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되고 있다. 어쩌면 지금이야말로 제2의 블랙리스트 철폐운동을 광범위하게 만들어야 할 때가 아닐까.

 

 

 

[참고자료]

 

* 김영수·김원·유경순·정경원, 전노협 1990~1995, 한내, 2013.

* 인천민주화운동사(4편)-블랙리스트 철폐투쟁, 인천신문, 2006.11.02.

https://www.incheonnewspaper.com/news/articleView.html?idxno=6879

* 조선소에도 블랙리스트 존재하는가?, 거제타임라인, 2017.09.29.

http://www.gjtline.kr/news/articleView.html?idxno=4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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