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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아가는 이야기

 

 

호각을 불며, 사고를 치자

: 울산과 구미의 동지들을 만나러 떠난, 호각의 여행기

 

 

고태은 • 철폐연대 후원회원, 호각 활동가

 

 

 

내 곁의 민주노조가 사라졌다는, 호각 소리

 

지난달 민주노총 총파업이 있었다. 당시 행진을 하다가 함께 걷던 투쟁사업장 동지들이 경찰과 부딪히자 지부로부터 하지 말라고 저지당하는 장면을 목격했다. 나와 그 동지들은 경찰과 싸우는 게 익숙한 상태였다. ‘비정규직 이제그만 1100만 공동투쟁’이나 금속노조가 주관하는 1박 2일 투쟁 때마다 노숙을 금지한다는 윤석열의 말 한마디에 법도 어긴 채 폭력을 휘두르는 경찰과 싸워 왔으니까. 우리가 경찰에 항의하고, 경찰의 불법적 행위를 촬영하자 상급단체 간부들은 동지들을 ‘원래 그런(문제를 만드는) 사람들’ 취급하며 불편해했다.

 

그날 마음에 불이 났다. 경찰보다도 동지라 믿었던 노동조합 사람들에게 화가 났다. 나의 동지들이 현장에서 느껴 왔을 답답함과 무력함이 느껴져서 더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해고자, 비정규직 투쟁하는 노동자들이 삶을 걸고 싸울 때 조직의 관례와 규칙을 먼저 이야기하는 상급단체에 학을 떼던 그 마음과 연결되어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나와 동지들은 말없이 지회 깃발을 내려 가방에 넣고 나머지 일정에 참여했다.

 

다른 동지에게서 “오늘 민주노총이 선 넘는 투쟁을 하기는 했네요. 경찰과의 전선이 아니라 동지들에게 선을 넘는 투쟁이지만…”이라는 말을 들었다. 농담에 웃을 여력이 없었다. SNS에서 같은 문제의식을 많이 보았다. 모두가 다른 장면을 보았지만 같은 감정을 느꼈다는 것에 안도해야 할지, 더 절망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던 중에 김선호 동지에게 먼저 모임 제안을 받았다. 그것이 바로 ‘민주노조를 깨우는 소리, 호각’이었다.

 

처음부터 호각이라는 모임명까지 정했던 것은 아니었다. 심지어 시간에 쫓기며 급히 정했는데, 다수가 ‘호각’을 골랐다. 앞에 붙인 ‘민주노조를 깨우는 소리’는 이훈 동지의 제안이었다. 동지들이 ‘민주노조를 깨우는 소리, 호각’이라는 모임명을 부를 때면 내 곁의 민주노조가 사라졌다는 경고음을 부는, 호각 소리처럼 느껴지는가 보다. 동지들의 민주노조에 대한 진심과 상심을 들을 수 있는 이름을 가진 모임이 됐다.

 

자신의 현장에서 만난 나의 동지들

 

이번 현장 간담회들이 그랬다. 호각 멤버인 변주현 동지는 현대중공업 사내하청지회 선전부장이고, 서진ENG 해고노동자다. 벌써 3년 넘게 해복투 중이다. 동지가 8월 18일에 ‘조선하청 조직화 20주년 투쟁결의대회’가 있다며 울산 일정을 공유해 주었다. 나야 울산 가서 동지들 만나는 게 좋으니 열 일 제치고 갔지만, 정로빈 동지는 여름휴가를 다 쓰고, 이훈 동지는 노트북을 들고 다니며 일정에 함께했다.

 

기왕 울산에 가는 김에 현장 동지들의 투쟁 이야기를 듣는 자리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호각 이름으로, 현대자동차 비정규직지회와 현대중공업 사내하청지회에 간담회를 요청했다. 변주현 동지가 있는 현대중공업 사내하청지회도 흔쾌히 일정을 잡아 주었고, 현대자동차 비정규직지회에도 간담회에 이어 저녁식사까지 함께하자고 먼저 제안해 주셨다. 덕분에 문화제가 있기 하루 전, 기대를 안고 현대자동차 비정규직지회 동지들을 만났다.

 

현대자동차 비정규직지회 동지들은 현대자동차 비정규직의 조직과 투쟁의 역사, 2·3차 하청 노동자들이 겪는 열악한 노동조건 등을 상세히 설명해 주었다. 현대 자본이 현대자동차 경영 과정에서 벌이는 책임 회피의 악질적 방법들이야 간간이 들어 왔지만, 그 결과로 양산된 비정규직 일자리, 이를 넘어 2·3차 하청 노동자들의 낮은 임금과 열악한 노동환경은 노동안전과도 직결된 문제였다. 세상이 바뀌어도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삶은 여전히 지나간 시대 어느 순간에 잡혀 있다는 게 답답하게 느껴졌다. 그런데도 포기하지 않고 싸우는 노동자들이 대단해 보였다.

 

 

8. 본문사진1.jpg

2023.08.17. 현대자동차 비정규직지회와의 간담회. [출처: 고태은]

 

 

현대중공업 사내하청지회와의 간담회에서는 지회의 20년 역사와 현재 당면한 투쟁 이야기를 들으며 새롭게 알게 된 것이 많았다. 중공업 현장에서는 선주민 노동자들 간에 있었던 하청노동자에 대한 불인정, 노동조합의 어용화 속에 인정받지 못했던 열사투쟁, 하청노동자의 미조직화 문제 등이 이제 이주노동자 문제로 확산되어 있었다. 이주노동자들은 정해진 공간을 벗어나지 못하고, 열악한 임금에 여러 수수료를 뜯기고 여권까지 빼앗겼다. 일터에서 가장 열악한 노동자의 노동조건이 개선되어야만 모두가 더 좋은 노동을 하게 된다는 말에 깊이 공감하는 시간이었다.

 

사실 두 사업장 모두 ‘비정규직 이제그만’ 일정 때마다 자주 보았던 곳이었고, 이미 내 마음속에 ‘동지’였다. 집회 때 함께 행진하고 경찰에 뜯겨 나와 빛 공해 속에 노숙하고, 다른 투쟁사업장에 함께 연대하며 여러 자리에서 이야기를 해 왔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현장의 이야기를 듣는 것은 아주 새로웠다. 자신의 현장에서 느끼는 고민들을 안고, 다 함께 싸우는 투쟁이나 연대자로서 함께하는 투쟁에도 진심으로 같이하는 동지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뜨거웠다. 그리고 외부에서의 투쟁과 자신의 현장 투쟁 사이에서 고민이 많은 동지들의 어려움도 느껴져서 마음이 무겁기도 했다.

 

호각을 불자, 우리 ‘동지’들을 위하여

 

두 번의 간담회를 하며, 우리 이름으로 냈던 성명서를 쓸 때 호각 동지들과 줄마다 단어마다 고치며 나누었던 이야기를 회상했다. 비판해야 할 사례들을 보며, 나는 정규직 노조가 부끄러움과 수치심이 없다는 것에 분개했다. 그러나 이번 두 번의 간담회는 현장에서 비정규직 문제를 노동조합 운동으로 돌파하는 비정규직 활동가들에게 정규직 노동조합의 횡포는 태생적인 고통임을 깨닫게 했다. 비정규직 운동 20년 안에 정규직 노동조합이 비정규직을 인정하지 않고, 열사를 외면하고, 앞길을 막으며 ‘이 이상은 가지 말라’고 외친 일이 너무도 흔했다. 그래서 부끄럽지 않았구나, 수치심을 가지지 않았구나를 느끼자, 나까지도 이를 바꾸기 위해 싸워야겠다며 더 결의를 다지게 됐다.

 

그래서 나는 이 간담회에 ‘민주노조를 깨우는 소리, 호각’으로 가서 다행이라고도 생각했다. 이전 인권단체에서나 기록자 동료들과 했던 간담회 때에는 듣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많이 들었다. 나의 고민이나 걱정도 보다 선명해졌다. 현차비 간담회에서는 호각이라는 모임에 대하여 관심이 많다며 질문도 많이 주고받았는데, 이처럼 현장의 동지들이 보고 듣고 느끼는 문제들을 현장을 넘어 다른 현장으로, 이를 감지하지 못하는 중앙으로 확장해 가는 것이 호각의 역할이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조선하청 20년사 문화제를 끝으로 울산 일정을 마치고, 우리는 구미 한국옵티칼하이테크로 이동했다. 폐업투쟁을 하는 13명의 노동자들이 있는 곳에서 호각의 첫 토론회를 했다. 짧은 토론회에서 나눈 고민들은 ‘민주노조’라는 단어로 다시 연결되었다. 갈 길이 멀고, 답답할 때가 있겠지만 그곳에 함께했던 이들이 함께 만들어 가야 한다는 것을 느끼는 순간들이 소중했다. 오후부터 예정되었던 ‘현장투쟁 복원과 계급적 연대 실현을 위한 전국노동자모임’에 참석하면서 더욱 그랬던 것 같다. 공장을 지키는 노동자들의 투쟁 결의에 13명의 주체가 결정한다면 언제든 구미로 달려와 연대의 전선을 만들겠다는 연대자들의 진심에 동했다.

 

 

8. 본문사진2.jpg

2023.08.19. 호각의 첫 활동으로 투쟁하는 옵티칼 노동자 곁에서의 토론회 후,

연대 현수막을 걸다. [출처: 변주현]

 

 

호각은 7명의 활동가들이 모여 있다. 시민단체, 개인 활동가, 현장과 중앙사무처까지 자신들의 현재도 다르다. 정치적 입장도 다르다. 그런 우리가 모임 방향을 논의하는 자리에서 ‘사고 치자’는 이야기를 나눴다. 나는 우리가 치는 사고가 세상을 균열 내기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우리가 좋아하는 민주노조 운동을 앞서 걸어온 동지들을 위해서 치는 사고이기도 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번 울산과 구미 일정은 내게, 그 사고가 현장 동지들을 위한 사고이기도 하면 좋겠다고 다짐하게 했다.

 

분노로 시작한 모임이 활동으로 전환되는 순간에 서 있다. 다시 서울로 돌아와 이 글을 쓰며 동지들과 함께, 호각을 불며, 사고를 치는 그런 길을 상상한다. 좋은 동료가 있으니, 멀리 가겠구나 하는 안도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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