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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풀어쓰는 노동용어

 

 

유보임금

 

 

임용현 • 전국불안정노동철폐연대 상임집행위원 

 

 

 

건설현장 불법행위를 근절하겠다는 정부 입장이 나온 후 건설노조에 대한 압수수색과 구속영장 남발이 한동안 이어졌다. 그 결과 일상적인 노조 활동은 공갈 및 협박, 금품 갈취 행위로 둔갑했고, ‘건폭’이란 누명을 쓰고 옥살이를 한 조합원들이 속출했다. 이처럼 정부가 노동조합을 불법행위의 온상으로 지목하며 뭇매를 가했지만, 건설현장에는 여전히 사라지지 않는 불법행위가 있다. 바로 유보임금, 일명 ‘쓰메끼리’ 문제다. 쓰메끼리는 손톱깎이라는 뜻의 일본어 츠메끼리(爪切り, つめきり)에서 온 말로, 유보임금을 가리키는 건설현장 은어다. 손톱 깎듯 임금을 잘라 준다는 의미로 쓰이고 있다. 다시 말해 임금을 제때 주지 않고 일정 기간이 지난 후 지급하는 것을 유보임금이라고 부르는데, 이 같은 유보임금 관행은 임금체불로 이어지게 마련이다. 그래서 건설노동자들은 유보임금을 상습적인 임금체불의 시작으로 본다. 운수가 지극히 사나운 일부 노동자들만의 문제라면 또 모르겠는데, 건설현장에서 유보임금이 뿌리내린 지는 상당히 오래됐다. 먼저 건설현장의 상황부터 알아보자. 

 

임금의 정기지급 원칙 위배 

 

임금은 노동을 제공한 달에 받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건설현장에서는 그렇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예를 들어 임금 정산일이 매달 말일인 경우 3월 한 달(3월 1일~3월 31일) 동안 일한 대가를 4월이나 5월 들어서야 받는 상황이 걸핏하면 벌어지는 것이다. 정부가 그토록 좋아하는 ‘법과 원칙’대로라면, 공사를 시작한 첫 달부터 월급은 그달 말일에 지급돼야 한다. 하지만 매번 두세 달씩 임금을 밀려서 받는 게 현실이다 보니, 건설노동자 상당수는 유보임금을 ‘어쩔 수 없는 일’로 여기곤 한다. 건설현장은 각각의 공정을 전문적으로 수행하는 건설사들이 투입되어 일을 마치고 나면 철수하는 과정을 거치는데, 이때 유보임금을 해결하지 못한 건설노동자들 중 눈 뜨고 코 베이는 일들이 허다하게 발생한다. 밀린 임금을 받을 때까지 쩔쩔매고 기다리는 동안 업체가 갑자기 폐업하거나 사업주가 종적을 감춰 버리기 때문이다.

 

이렇게 임금을 제때, 제대로 받지 못한다면 노동자는 생활고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 그래서 건설노조는 사업주의 고의·상습적인 유보임금 지급 관행에 대해서는 근로기준법상 임금체불과 동일하게 간주해 처벌한다는 고용노동부 행정해석을 지난 2012년 지속적인 현장 투쟁을 통해 이끌어 내기도 했다.

 

사실 건설노조의 이 같은 문제제기를 차치하더라도 유보임금은 현행법상 ‘임금의 정기지급원칙’에 위배되는 엄연한 불법이다. 근로기준법 제43조(임금 지급)에 따르면, 임금은 ‘통화(통용되는 화폐)’로 ‘직접’ 노동자에게 그 ‘전액’을 ‘매월 1회 이상 일정한 날짜를 정하여’ 지급해야 한다. 다만 단체협약이나 기타 법령에 의거해 노동자와 합의했다면 임금의 일부를 공제하거나 통화 이외의 것으로 지급할 순 있다. 그런데 건설현장 내 유보임금은 당사자 간 합의가 아닌, 사업주의 일방적인 조치에 의해 임금 지급을 지연하는 관행이라는 점에서 임금체불과 하등 다를 바 없다.

 

 

2. 본문사진.jpg

2010.09.14. 건설현장 유보임금 실태 폭로 기자회견. [출처: 노동과세계]

 

 

임금체불 ‘범죄’가 난무하는 건설현장 

 

“건설현장 불법행위를 집중단속해 뿌리 뽑겠다”는 정부의 강력한 의지에도 불구하고, 유독 유보임금과 그로 인한 체불임금이라는 망령은 지금 이 순간에도 건설현장을 맴돌고 있다. 유보임금도 체불임금이라는 점에서 당연히 근절돼야 하지만, 유보임금은 정부의 적극적인 행정감독이 불능 상태에 빠지면서 공식 통계에서 제대로 집계조차 되지 않고 있다.

 

이 같은 현실을 감안하더라도 건설현장의 임금체불 문제는 매우 심각한 상황이다. 정부 발표에 따르면 2023년 임금체불액은 1조 7,845억 원으로 전년도 대비 체불액은 32.5%, 체불 노동자 수는 16.0% 증가한 수치로 역대 최대 규모다. 이를 업종별로 보면 제조업 30.5%, 건설업 24.4%, 도소매·숙박업 12.7% 순이다. 특히 업종별 임금체불에서 건설업이 차지하는 비중(24.4%)은 2023년 12월 기준 전체 취업자 중 건설노동자는 7.8%에 불과하다는 점을 보더라도 그 심각성을 알 수 있다. 전체 임금체불에서 건설업 비중은 2020년 17.6% → 2021년 19.4% → 2022년 21.7% → 2023년 24.4%로 조사돼 매년 꾸준히 상승한 것으로 나타났다.

 

건설업 임금체불 개선 대책이 해를 거르지 않고 발표되고 있는데도 오히려 문제가 심화되고 있다는 건, 애초 정부 대책이 근본적인 처방과 거리가 멀다는 뜻이다. 지난해 9월 추석 명절을 앞두고도 “임금체불 예방과 청산, 근로자 생계 안정을 위해” 고용노동부 기획감독이 한 차례 실시됐다. 정부는 명절 전 4주간 체불청산 집중지도기간을 운영해 “2023년 추석 명절 체불임금 1,062억 원 청산으로 17,923명 권리를 구제”했다고 발표한 바 있다. 체불임금 청산을 위한 한시적 대책만으로도 이처럼 눈에 띄는 성과가 나온 것이 정부는 제법 자랑스러운 모양이다. 하지만 이는 광범위한 임금체불을 해결할 예방대책이 아니라 전형적인 ‘땜질식 처방’에 불과하다. 정부 통계로도 임금체불이 계속 늘어나고 있다는 건 사용자들이 불법을 저질러도 별다른 처벌이나 규제를 받지 않는 현실을 뒷받침하는 지표다. 

 

정부의 근본적인 대책 부재 

 

임금체불 사업주는 근로기준법에 의거해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3,000만 원 이하의 벌금형에 처해질 수 있다. 문제는 임금체불이 피해자가 가해자의 처벌을 원치 않을 경우 형사처벌을 할 수 없는 ‘반의사불벌죄’에 해당한다는 점이다. 원래 임금체불을 반의사불벌죄로 두게 된 까닭은 사용자에게 합의 동기를 제공해서 체불임금의 청산 가능성을 높이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사용자들이 경제적인 궁핍에 내몰린 노동자들의 처지를 악용해 체불 금액의 일부만 지급하겠다고 약속하는 등 합의를 종용하는 사례가 많아 오히려 부작용만 심해졌다는 게 관련 전문가들의 공통된 견해다. 임금체불에 대한 반의사불벌죄 폐지를 비롯해 고의·상습적인 임금체불 사업주에 대한 경제적 제재 강화 등 실효성 있는 대책 마련이 절실한 상황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뿐만 아니다. 특히 건설현장의 만성적인 유보임금과 체불임금은 다름 아닌 ‘다단계 하도급 구조’에 기인한다. 다단계 하도급 구조가 어떻게 유보임금 문제로 이어지는지 이해하려면 먼저 건설업 수주계약 과정부터 들여다봐야 한다. 건설업은 조선업과 더불어 대표적인 수주산업으로, 발주처의 주문을 받은 시공사가 생산 활동(건설공사)에 착수한다. 공사를 따내기 위한 시공사들의 입찰 경쟁은 출혈적인 저가 수주로 직결되고, 이는 공사대금에서 ‘곶감 빼 먹듯’ 이익금을 확보하려는 건설업자들과 브로커들이 활개 칠 유인을 제공한다.

 

발주처-원청(대기업 종합건설사)-하청(전문건설사)-재하청(도급팀)-건설노동자로 이어지는 불법 다단계 하도급 구조가 건설현장을 ‘중간착취 지옥도’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이렇게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하청의 재하청’ 구조 속에서는 ‘단가 후려치기’도 거듭된다. 결국, 하도급 단계를 거칠수록 하락하는 공사금액은 자재비와 인건비(건설노동자 임금)의 동반 하락을 부추기고, 이는 다시 임금 지급의 지연과 체불 가능성을 더욱 높이는 것이다.

 

다단계 하도급 구조하에서는 산업재해가 발생했을 때 어느 단계에서 책임이 있는지 가리기도 쉽지 않다. 이는 부실시공을 초래해 시민 안전을 위협할 뿐만 아니라 건설노동자의 안전도 위협한다. 이에 더해 실업과 단기간 취업을 반복해야 하는 건설노동자의 만성적인 고용불안 문제는 유보임금처럼 부당한 처우에 대한 당사자의 문제제기 또한 어렵게 만든다. 중층적인 고용관계를 통해 사용자 책임을 잔뜩 흐려 놓고 노동자의 권리마저 손쉽게 지워 버린 셈이다.

 

유보임금의 연원은 일본인들이 강제노역에 동원한 민간인들을 붙잡아 두려고 한 일제 강점기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때는 군대의 총칼이 유보임금을 횡행케 한 무기였다면, 이제는 불안정한 고용구조 자체가 유보임금을 확산하는 토대가 되고 있다. 오늘날 불안정한 고용구조로 인한 유보임금 및 체불임금은 비단 건설노동자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그런 점에서 지난해 임금체불액의 74.1%가 30인 미만 사업장에서 발생했고, 이주노동자 체불임금액이 매년 1,000억 원에 달한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유보되는 임금의 문제는 불안정노동자들의 유보된 권리와 밀접하게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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