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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드배치 아픔 그 이후에

손소희 (지역사회노동자운동지지모임, 철폐연대 회원)

 

2 [출처 장진영].JPG

[출처: 장진영]

 

 

눈물 젖은 ‘동지가’

 

커다란 화물차의 뚜껑이 열려 무대가 되었다. 무대에 설치된 음향장비의 쩌렁쩌렁한 소리가 아름다운 들판 소성리의 산천에 울린다. 무대 위에선 평사단(평화를 사랑하는 예술단)이 “들어라 양키야” 몸짓공연을 하고 있었다. 집회대오 맨 앞줄에 자리를 지키고 앉았던 소성리 부녀회 임순분 회장을 선두로 소성리 엄니(어머니의 경상도 사투리 발음)들이 하나둘 무대 앞으로 나선다.

지난 9월 7일 사드배치 완료 이후, 9월 16일 소성리에서 제5차 평화행동이 열렸다. 전국에서 달려온 연대자들이 소성리 길목을 가득 메워 앉았다. 무대에 오른 임순분 회장님은 말씀하셨다. “며칠 동안 우리 주민들은 서로 얼굴만 마주치면 울었습니다. 한밤중에 자다가 사드가 들어오는 꿈을 꾸고 맨발로 마을회관 앞까지 뛰어나오고, 사드 막아야 한다고 자다가도 벌떡 일어났습니다. 수면제를 먹고 자야했습니다. 하지만 이대로 좌절하고 눌러 앉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저희 손을 잡아주신다면 이제 긴 싸움을 준비하려고 합니다. 사드 철거되는 그날까지 1년이든 2년이든 긴 싸움 준비해서 사드 뽑혀나갈 때까지 싸울 것입니다.”

 

7월 29일에 문재인정부는 느닷없이 ‘사드 4기 추가 배치’를 발표했다. 그날부터 소성리는 사드가 언제 들어올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시달려야 했다. 매일 살얼음판을 걷는 심정으로 신음소리조차 마음대로 낼 수가 없었다. 정권이 바뀌면 사드 못 들어오게 할 수 있다고 믿었다. 소성리 엄니들은 탐탁지는 않았지만, 문재인정부가 사드 못 들어오게 시간을 벌어줄 거라는 약간의 기대감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문재인정부는 끝끝내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우리에게 전해왔다. 다음날 청와대로 향했다. 소성리 엄니들은 청와대를 경호하는 경찰들과 경호원들에게 문전박대를 당했다. 소성리 엄니들과 성주주민들은 문재인정부는 믿지 않기로 했다.

우리 마을은 우리가 지키는 수밖에 없다고 굳게 약속했다. 마을을 지나 진밭재로 올라가는 길목을 철통같이 지키기로 했다. 매일 밤마다 소성리마을 길목을 지키기 위해 모여서 시간을 보냈다. 텔레비전을 설치해서 성주촛불의 실시간 방송을 보기도 했다. 초전투쟁위(소성리는 성주군 초전면 소재지이다. 초전면투쟁위를 의미하며, 사드배치 이후 성주주민대책위로 확대재편했다.)도 소성리 마을로 올라와 경계근무를 섰다. 소성리 평화지킴이로 나서준 연대자들이 있어서 소성리 엄니들의 마음을 위로 해주었다.

그리고 밤마다 모인 소성리 엄니들은 노래를 배우고 연습했다. “임을 위한 행진곡”은 매일 불러서 가장 잘 부르는 노래가 되었다. 1년 가까이 소성리 마을을 지키면서 우리가 함께 부른 노래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로 모임을 마무리했다. 그리고 사드 배치가 완료된 날 이후 소성리 엄니들은 “동지가”를 배웠다.

사드가 들어오던 지난 9월 6일~7일, 스무 시간 남짓 사드를 막기 위해서 온몸을 던져 싸웠던 사람들을 소성리 엄니들은 보았다. 비록 사드를 막지 못했지만 생사를 함께했던 사람들을 동지라고 불렀다. 그날 이후 우리 모두 “동지가”를 불렀다.

제5차 평화행동 무대 위에서 임순분 회장님의 말씀이 끝나자 소성리 엄니들과 소성리 평화모임(성주주민들의 자치모임) 사람들은 모두 “동지가”를 소리 높여 불렀다. 마이크를 입에 대고 첫 소절을 부르자, 규란엄니의 눈에는 어느새 눈물이 글썽거린다. 사드배치가 완료되던 그날을 떠올리며, 국가공권력의 무지막지한 무력 앞에서 좌절하지 않고 끝끝내 사드가 철거되는 날까지 싸워가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나 사드를 막아내지 못한 설움과 엄청난 폭력을 당한 흔적이 쉽사리 지워지지 않을 것 같다.

 

 

사드를 저지하기 위해 꾹꾹 눌러 만든 주먹밥!

 

정부는 사드 4기 추가배치를 앞둔 하루 전에 통보하겠다고 친절히 안내해 주었다. 문재인정권의 친절한 행정서비스에 사드를 반대해왔던 성주주민들은 더욱 분노가 치밀었다. 8월 말까지 배치하겠다던 사드는 시일만 끌면서 차일피일 미뤄지고 있었다. 발표내용이 번복되기만 바랐던 하루하루가 지나갔다.

임순분 회장님은 긴박한 상황을 대비해 밥을 어떻게 할지 고민이었다. 급작스럽게 사드가 들어오면 마을 부녀회가 밥하는 데에 매달려있을 수가 없다. 사드를 막기 위해 몰려드는 연대자들에게 라면만 먹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지난 1차 사드배치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소성리로 들어오는 모든 길을 경찰병력으로 다 차단해서 개미새끼 한 마리 못 들어가게 했었다. 주문 배달은 일체 불가능했다. 주먹밥을 만들자고 했다. 잔멸치와 김가루를 미리 준비해서 상황이 급박해지면 밥만 해서 주먹밥과 라면을 먹으면 되지 않겠냐고 의논했다.

 

매주 수요일이면 소성리에서 집회를 한다. 9월 6일 소성리 수요집회를 하루 앞두고 소성리종합상황실은 최대한 많은 사람들이 소성리로 모여 달라고, 사발통문을 돌리듯 여기저기에 긴박한 호소문을 띄웠다. 사드가 들어올 확률이 매우 높다며 긴급소집을 시작한 거다. ‘양치기소년’이 되더라도 어쩔 수 없었다. 소성리로 들어오면 나갈 생각하지 말고, 사드배치를 막기 위해 싸울 준비를 해서 들어와 달라고 호소하는 수밖에 없었다. 소성리 수요집회를 마치기가 무섭게 마을도로를 점령했다. 도로 한 가운데에 차량을 박아놓았다. 그 사이사이로 사람들이 자리를 잡고 연좌농성이 시작되었다.

 

소성리 마을회관 부엌에는 커다란 김가루 봉지가 열려 있었다. 밥솥 가득한 흰쌀밥을 커다란 대야에 퍼낸다. 참기름과 깨소금을 뿌리고 잔멸치를 쏟아 부었다. 뜨거운 밥을 한 주먹 쥐고 동글동글 말아서 김가루 속에 던지면 한쪽에선 김가루에 발라서 종이컵에 주먹밥을 한 개씩 담는다. 사람이 얼마나 올 지 알 수 없지만, 사드가 오기 전에 최대한 많이 만들어놓아야 밤새 배곯지 않고 싸울 수 있다는 생각에 손에 화상을 입는 줄도 모르고 주먹밥을 만들었다.

그 순간에도 나는 틈틈이 sns에 “곧 사드배치가 임박해오니 소성리로 달려와 달라”는 메시지를 띄웠다.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소성리로 달려가고 있다는 답변을 보내왔다.

소성리로 들어오는 길목이 막히기 시작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경찰이 막아서인 줄 알았다. 초전투쟁위 사람들이 소성리로 올라오는 길목인 용봉교에 트랙터와 농기계를 쌓아서 길목을 차단했다는 거다. 경찰들도 길을 막았다. 경찰들은 곧 물리력을 동원해서 끌어내려고 조치를 취하겠지만 최대한 시간을 끌어야 했다. 그때부터 길목이 막히면 돌아가지 말고 사드가 들어오는 길목이니까 그 자리에서 막고 싸워달라고 부탁했다. 사드가 들어올 만한 길목을 경찰이 차단하는 것은 사드반대 세력들을 막는 것이지만, 우리가 차단한 것은 사드가 못 들어오게 막는 것이 되었다.

 

경찰버스가 마을로 들어오지 못하자 야광벌레 같은 경찰병력이 걸어서 소성리 마을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미 들어온 병력이 어마어마한데, 끝이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경찰병력은 소성리로 들어오는 마을 도로마다 차량을 막고 선 우리 대오들을 해산시키기 위해 물리력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트랙터와 농기계 들을 치우기 시작했고, 차량을 파손하면서 치워댔다. 우리 대오는 결사항전 했지만 불가항력이었다. 밤 11가 넘도록 버텨내다 걸어서 소성리로 합류하기 시작했다. 아랫마을의 저항은 소강상태가 되어갔다. 소성리 마을 도로도 곧 경찰병력 침탈이 임박해왔다.

소성리 도로에는 군데군데 차량을 세워놓았다. 그 사이사이 사람들은 팔과 팔, 깍지를 끼고 앉아서 버텼다. 경찰들의 침탈이 시작되었다. 경찰은 조명을 환히 밝히며 우리의 시야를 어지럽혔다. 군홧발 소리가 요란스럽게 땅바닥을 뒤흔들었다. 주차된 차량 너머에 기독교 기도소와 언론인 기자실로 사용하던 천막들이 덜컹덜컹거린다. 눈부신 조명에 사물을 분간할 수 없지만 바닥이 용솟음치는 군홧발 소리는 밟히는 대로 모든 걸 다 파괴해 버릴 것 같이 위협적이었다. 천막들은 다 무너졌다. 다행히 컨테이너는 건사했다.

사람들의 비명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귀가 찢어질 지경이었다. 경찰들이 바로 코앞까지 다가왔다. 스크럼을 짜고 도로를 막고 있는 우리 곁에서 상황을 지휘하는 이가 “도로에 세워둔 차는 그냥 주차된 차가 아닙니다. 운전자와 바깥에 서 있는 사람 사이에 팔과 팔을 연결해 놓았습니다. 차가 움직이는 순간 아주 위험해질 수 있습니다. 이 차를 지켜주십시오” 라고 한다. 내가 앉아있는 자리의 뒤편 자동차 운전자의 팔이 알루미늄 물질의 긴 통으로 바깥의 사람과 연결되어 있었다. 위험천만한 상황이란 걸 인지한 순간 더욱 긴장되었다. 이 자리를 사수하지 않으면 누군가 희생될 수도 있겠다는 두려움과 책임감이 동시에 일었다. 우리 모두 미친 듯이 “사드배치 결사반대”를 외쳤다. “폭력경찰 물러가라”를 목이 터져라 외쳤다.

경찰들은 남자들을 인정사정없이 발을 잡고 끌어냈다. 옆의 한 남자는 온몸이 땅바닥에 질질 끌려갔다. 그 꼴을 보고도 붙잡아주지 못하고 눈물만 흘리며 지켜봐야 했다. 엄청난 국가공권력 앞에 우리는 너무나 무기력하게 당하고만 있었다. 내 옆의 한 여성은 끌려 나가지 않기 위해 발버둥을 쳤지만, 사지를 다 들려나갔다. 내 차례가 되어서 여러 명의 여경에게 끌려나가야 했다. 밤새도록 끌려나오고, 또다시 도로로 들어가 길을 막아서 지키기를 반복했다.

동이 트는 순간까지 사드를 막기 위해 쉼 없이 저항했다. 모두가 날밤을 꼬박 새워 싸웠지만 어마어마한 경찰병력 8,000명을 뚫고 사드를 막는다는 것은 불가항력이었다. 다음날인 9월 7일 아침 8시 10분경 사드발사대 4기가 철벽같은 경찰병력의 호위 속에서 소성리 마을 도로를 지나갔다. 밤새 싸움에 지칠 만도 한 주민들과 연대자들은 마지막 순간까지 경찰병력을 뚫어보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런 노력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사드발사대와 사드운영 장비가 모두 롯데골프장 부지로 들어가 버렸다.

사드가 들어간 후 마을은 폐허더미로 변해 있었다. 우리 측 백여 명이 다치고 입원했다. 차량은 서른 대가 파손되었다. 소성리 마을 앞에 설치되었던 기도소 천막과 연대자들의 쉼터 천막들이 모조리 파괴되었다.

사드배치의 절차적‧민주적 정당성을 그토록 강조했던 문재인정부의 야만과 폭력이 다 드러난 스무 시간이었다. 우리에겐 공포와 두려움의 스무 시간이었고, 아름다운 들녘 소야(소성리의 옛 이름)의 산하는 통곡의 시간이었다. 분노와 저항의 시간은 이보다 훨씬 더 길었고, 우리의 고통은 이보다 훨씬 더 깊었다.

모든 것이 끝났다고 말하는 이는 없었다. 다시 추스르자고 했다. 초전투쟁위의 김윤성 부위원장은 “우리는 절대로 지지 않았습니다. 사드를 막아내지 못했다고 승리하지 않은 게 아닙니다. 저 어마어마한 경찰병력에 대항해서 날밤을 지새워 싸웠습니다. 주민들 뿐 아니라 전국에서 수많은 연대자들이 달려와서 함께 싸웠습니다. 최선을 다해서 싸웠으니까 이건 우리 승리입니다. 앞으로 계속 싸울 수 있다는 희망을 오늘 본 겁니다. 절대로 체념하거나 실패했다고 생각하지 맙시다.” 라며 울고 있는 우리 모두를 다독여주셨다.

새벽녘에 sns를 통해서 소성리 소식을 접한 옛 성주주민이 새벽을 가르며 머나먼 해남땅에서 소성리로 달려왔다. 지친 사람들의 굶주린 허기를 달래주기 위해서 김밥을 사들고 왔다. 물도 다 떨어지고 먹을 게 없었던 터였다. 김밥 한 줄씩 나눠들고 꾸역꾸역 먹었다.

 

눈물이 마르지 않는다. 밤이면 소성리 주민들은 약속이나 한 듯이 소성리 마을 길목을 지키러 나오신다. 앞으로 미군들 절대로 마을 앞으로 못 지나다니게 철통같이 길목을 지켜야겠다고 다짐이나 하신 듯이 말이다. 사드장비 들어갔으니까 미군부대 지으려고 공사장비도 들어갈 거라면서 그것도 절대로 못 들어가게 막을 거라 하신다. 사드배치가 완료되었다고 모든 게 다 끝난 게 아니라는 것을 소성리 엄니들이 행동으로 말씀하신다.

 

 

사드 아픔 이후, 철거하는 날까지 가자

 

사드 아픔 이후 첫 금요일 평화모임을 했다. 밤새워 싸우지 못했던 성주주민들이 미안하고 애석한 마음에 고생한 사람들 기운 북돋아주는 음식을 준비하였다. 논에서 직접 키운 자연산 미꾸라지로 추어탕을 끓이고, 좋은 약재로 돼지고기를 삶아서 수육을 대접했다. 성주주민들은 심신이 지쳐 있지만 모여서 좋은 음식을 나누고 힘내자고 했다. 힘내서 소성리 마을을 함께 지키자고 했다.

때마침 ‘십시일반 밥묵차’의 유희씨가 힘든 일을 치룬 소성리주민들에게 밥을 지어주시겠다며 달려왔다. 시간도 되기 전에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한다. 음식을 하는 손은 더욱 분주하다. 나누는 손도 분주해졌다. 사람들은 옹기종기 모여서 음식을 나눴다. 소성리 마을회관 앞은 북적거렸다. 배주(막걸리종류)를 준비해 온 분 덕분에 반주도 할 수 있었다. 소성리 엄니들이 힘을 냈으면 하는 사람들의 작은 소망이 이뤄진 듯 보였다.

평화모임에서는 9월 6~7일 스무 시간 동안의 사드저지 전투에 대한 소회를 나누었다. 사람들은 그 험난한 과정에 서로에게 힘이 되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서로를 의지하면서 그 긴 시간을 싸웠다. 우리가 “동지가”를 불렀던 이유다. 평화모임을 마치고 나자 임순분 회장님은 “오늘 평화모임을 하길 참 잘 한 거 같아요. 마을 할매 몇 분은 이제 살 희망이 없다면서 체념하고 있었어요. 사실 할매들이 끝났다고 마음을 내려놓으면 사드 이거 계속 싸우기 힘들어지지요. 아무리 초전투쟁위가 열심히 한다고 해도 마을에서 가장 앞장서서 싸웠던 할매들이 자포자기하면 얼마나 힘들어지겠어요. 그래도 오늘 평화모임 한다고 사람들 북적거리면서 이렇게 정성스럽게 음식도 준비해주니까 할매들 마음에 위로가 많이 된 거 같아…… 오늘 잘 한 것 같아요.” 하신다.

우리에게 억척같아 보였던 소성리 엄니들 가슴 한 편의 깊은 슬픔을 차마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것 같다. 우리가 흘린 눈물로 우리의 아픔을 다 씻어내고, 우리의 슬픔을 다 닦아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사람들이 함께한다는 것이 힘이고 희망이란 것을 분명히 깨달을 수 있었던 시간들이다. 스무 시간 동안을 견뎌내고 버텨냈던 사드저지 투쟁, 소성리 엄니들은 잘 알고 계시기에 연대는 소중하다. 그리고 사드가 철거되는 날까지 다시 힘을 내자고 “동지가”를 힘차게 불렀다.

 

 

사드배치 아픔 그 이후에_손소희-질라라비201710.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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