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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풀어쓰는 노동용어

 

 

크런치 모드

 

 

임용현 • 전국불안정노동철폐연대 상임집행위원

 

 

 

크런치 모드(Crunch Mode)는 소프트웨어 및 디지털콘텐츠 분야에서 프로젝트의 마감을 앞두고 집중적·집단적으로 업무를 수행하는, 일종의 비상근무체제를 가리키는 은어다. 상품 출시가 임박했을 때 마치 견과류를 으깨듯이 노동력을 갈아 넣는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이 용어는 게임업계에서 신작 게임의 출시예정일을 앞두고 강제 야근, 휴일 반납, 식사시간 제한 등 전 직원에게 강도 높은 노동을 강제한 데서 유래했다. 국내 게임개발업계의 장시간 집중노동 관행은 이미 정평이 나 있다. 게임업체들이 밀집한 지역을 ‘판교/구로의 등대’ 혹은 ‘오징어잡이 배’라고 부르고, ‘하이테크 노가다’라고도 스스로 비하할 정도로 야근과 밤샘 근무가 보편화돼 있다.

 

이와 비슷한 의미로 방송업계에서 주로 사용하는 은어로는 ‘디졸브 노동’이 있다. 디졸브(Dissolve)란 한 화면이 사라짐과 동시에 다른 화면으로 서서히 전환하는 영상기법을 말하는데, 오늘과 내일의 경계조차 희미해질 정도로 밤샘 촬영을 지속해야 하는 상황을 뜻한다. 콜센터 노동자들이 근무 중 화장실을 다녀올 때마다 메신저로 보고하면서 쓰는 ‘화출’(화장실 출발), ‘화착’(화장실 다녀와서 착석)이라는 은어도 극단적인 실적 압박과 성과 경쟁에 놓여 있는 노동자들의 현실을 가감 없이 묘사한다. 마찬가지로 ‘열정페이’, ‘추노’(살인적인 노동강도에 급여를 포기한 채 작업장을 이탈하는 행위)처럼 직무 성격이나 내용에 크게 구애받지 않고 두루 쓰이는 은어들 역시 혹독한 노동통제를 상징하는 자조적인 표현들이다. 

 

크런치 모드에 혹사당하는 노동자의 몸 

 

일터에서 흔히 접하는 단어들 중 이번에 알아볼 표현은 ‘크런치 모드’다. 요즘 게임업계를 비롯한 소프트웨어 및 디지털콘텐츠 분야에서 일상화돼 있다시피 한 이 용어는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널리 통용되고 있다. ‘GTA 5’, ‘레드 데드 리뎀션2’ 등으로 유명한 락스타 게임즈(Rockstar Games), ‘언차티드’, ‘더 라스트 오브 어스’ 시리즈를 만든 너티독(Naughty Dog) 등 블록버스터급 게임 제작사들 또한 발매 직전 시기 강도 높은 크런치 모드 시행으로 악명이 자자하다. 미국 저널리스트인 세라 자페(Sarah Jaffe)에 따르면, 크런치 모드는 2004년 게임개발업체 일렉트로닉 아츠(Electronic Arts)의 한 개발자의 배우자가 ‘공개 편지’로 남편이 몇 주 동안 주당 84시간을 일했다고 항의하며 알려졌다고 한다.

 

국내에서는 2016년 게임개발업체 넷마블의 자회사에서 일하던 20대 노동자의 돌연사(급성심근경색) 원인으로 크런치 모드가 지목되면서 논란이 크게 일었다. 당시 고인은 사망 1~2개월 전인 2016년 9~10월 빌드주간(게임개발 중 중간점검 기간)을 이유로 크런치 모드 상태에 돌입했는데, 10월 첫 주에는 89시간, 넷째 주는 78시간 노동을 한 것으로 드러났다. 주 5일 근무로 계산하더라도 하루 평균 16~18시간에 달하는 살인적인 노동시간이다. 이에 근로복지공단 서울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질판위)는 고인이 발병 전 12주간 불규칙한 야간근무 및 초과근무를 지속했다는 사실에 주목해 “고인의 업무와 사망과의 상당인과관계가 인정된다”며 크런치 모드에 의한 산재를 인정했다.

 

국내에서 과로사를 인정하는 과로의 기준은 주당 52시간 이상의 노동이다(야간노동, 책임의 증가, 육체부하가 높은 업무 등 질적 기준이 하나 이상 초과한 경우). 넷마블 자회사 노동자에 대한 질판위의 과로사 산재 인정은 ‘장시간 노동’뿐만 아니라 ‘불규칙한 노동’이 노동자의 건강을 악화시킨다는 점을 명확히 한 판정이라고 볼 수 있다.

 

한편 이러한 장시간 노동 관행은 일부 게임개발업체에만 국한한 문제가 아니다. 야근과 특근을 쉴 새 없이 반복해야 하는 크런치 모드는 2018년 7월 주 52시간 한도 노동시간제 시행 이후에도 게임업계에서 질긴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다. 한국콘텐츠진흥원이 지난 2023년 1월 발간한 ‘2022 게임산업 종사자 노동환경 실태조사’에 따르면 ‘가장 최근 참여한 프로젝트’에서 크런치 모드를 경험한 종사자는 전체 응답자의 19.1%로 나타났다. 여전히 게임개발업체 소속 노동자 5명 중 1명은 몇 날 며칠 동안 강도 높은 노동을 하고 있는 셈이다. 조사에 따르면 크런치 모드의 평균 지속일은 9.6일, 주 최대 노동시간은 평균 60시간, 하루 평균 20.2시간이었다.

 

몸이 바스러지라 일하는 게임업계 관행의 개선 효과가 여전히 미미한 것이다. 장시간 노동을 규제하기 위한 법제도가 존재함에도 크런치 모드가 암암리에 계속된다는 건 노동시간 규제 흐름을 거스르는 반작용의 힘이 생각보다 만만치 않다는 의미다.

 

그렇다면 크런치 모드, 즉 게임업계 등에 만연한 장시간·압축노동의 원인과 문제점은 무엇일까?

 

포괄임금제 아래 계속되는 공짜 야근 

 

첫째, 장시간 공짜노동을 양산하는 주범으로 꼽히는 ‘포괄임금제’ 문제가 게임업계에서는 아직도 심각하다. 여기서 포괄임금제란 근무 형태나 업무 성격상 추가 근무수당을 정확히 집계하기 어려운 경우 수당을 급여에 미리 포함하는 임금 약정 방식을 말한다. 말 그대로 연장·야간·휴일 수당을 포괄적으로 정해 임금으로 지급하는 것이다. (참고로 근로기준법에는 포괄임금제와 관련된 명문의 규정이 없다. 따라서 법이 정한 제도가 아니라 판례를 통해 그 유효성을 인정받는 제도라는 측면에서 보면 ‘포괄임금약정’이라는 표현이 보다 적실하다 할 것이다.) 원래는 노동시간의 산정이 어려운 화물운송기사, 경비원, 외근 영업직, 프리랜서 등에 적용되고 있었는데, 최근에는 사무직, 생산직, 연구개발직을 비롯해 제조업에도 포괄임금제를 적용하는 사례가 늘어나고 있다. 근무 형태나 업무 성격과 관계없이 오로지 초과수당을 지급하지 않으려는 목적으로 포괄임금제를 악용하고 있는 것이다.

 

포괄임금제 적용 사업장에서는 시간외근로(연장·야간·휴일노동)를 전제하고 있어서 장시간 노동을 당연시하게 된다. 실제로 화섬식품노조 수도권지부 IT위원회가 지난 2023년 4월 정보기술(IT)·게임업체 111곳을 대상으로 한 조사결과를 보면, 84개 회사(76%)에서 포괄임금제가 적용되고 있었고, 이 중 74개 회사(88%)에서 장시간 노동(74개 중 39개 회사는 ‘심각’)에 시달리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때문에 노동자들은 “포괄임금제가 인력 자유이용권처럼 악용되어” 노동자의 시간주권 박탈, 건강권 침해 문제가 심각하다고 토로한다.

 

크런치 모드는 장시간·저임금·공짜노동을 양산하는 포괄임금제라는 토대 위에서 번성한다. 그래서 윤석열 정부의 주 최대 69시간 노동시간 유연화 시도가 여론의 도마 위에 올랐을 때에도 화섬노조 IT위원회 소속 노동자들은 다음과 같이 반대의 목소리를 높인 바 있다. “포괄임금제 폐지 없이 초과 근로를 특정 기간에 몰아서 할 수 있는 제도를 도입한다는 것은 크런치 모드를 전 산업으로 확대하겠다는 것”이라고 말이다.

 

속도전에만 치중하는 게임업체들 

 

둘째, 최근 몇 년 사이 게임을 즐기는 플랫폼이 PC나 게임 전용 콘솔에서 모바일 기기로 무게중심이 이동하고 있다는 점도 무시할 수 없는 원인이다. 과거 온라인 PC 게임은 개발기간이 대략 3~5년 정도였다. 반면 모바일 게임은 게임 어플리케이션 접속만 하면 어디서든 즐길 수 있기 때문에 이용자들의 진입 문턱도 낮아졌고 그만큼 유행 주기도 짧아져서 개발기간도 1~2년 정도로 대폭 줄었다. 유행에 특히나 민감한 모바일 게임의 특성은 이용자들의 피드백을 적극적으로 반영하지 않으면 시장에서 도태될 수 있다는 불안감을 증폭시켰다. 그리고 이는 경쟁의 심화로 나타나게 마련이다. 이렇게 이용자를 끌어들이기 위해 각종 이벤트나 기능 업데이트가 끊임없이 이뤄지는 형편이니 ‘상시 크런치 모드’로 회귀했다는 현장의 아우성까지 들려온다. 이처럼 모바일 게임의 확산 등 게임환경의 변화는 개발자들의 휴식 기회까지 덩달아 앗아갔다.

 

상시 크런치 모드는 노동자를 극한의 상황으로 내몰아 일에 대한 만족감도, 집중력도 동시에 곤두박질치게 만든다. 이는 노동자가 작업한 결과물의 질도 저하시키는 원인으로 작용한다. 출시일에 맞춰 서로가 서로를 베끼는 통에 비슷한 콘텐츠들이 요즘 모바일 게임시장에 난무하는 까닭도 실은 이 같은 구조적인 문제에서 발생한 문제라 할 것이다. 마치 언론인으로서 사명은 온데간데없이 ‘우라까이’(베끼기를 뜻하는 언론계 은어)만 난무하는 인터넷 언론 시장과도 비슷해 보이고, 자재비·인건비 절감과 공기단축에만 매몰돼 날림공사가 판치는 건설 현장과도 비슷해 보이는 문제다.

 

붕어빵 콘텐츠를 양산하는 수익과 속도 중심의 경쟁을 탈피하려면 우선 노동자를 갈아 넣는 크런치 모드의 상시화부터 해제해야 한다. 살인적인 노동강도를 완화하고 고질적인 인력부족을 해결하는 것은 좋은 게임 콘텐츠, 완성도 높은 게임을 만드는 첫걸음이기도 하다. 

 

‘크런치 모드’를 ‘워라밸 모드’로 

 

셋째, 크런치 모드는 신작 게임 출시 직전이나 대형 업데이트처럼 특정 시기에 일이 몰리는 게임업계의 특수성을 노동자 건강권보다 우위에 놓는 사용자의 관행에서 비롯한 문제다.

 

특히 장시간 노동이 미덕으로 내면화된 한국 사회에서는 고질적인 인력부족을 장시간·압축노동으로 메우려는 경향이 산업과 직종을 막론하고 지배적이다. “게임 하나 개발하려면 한 주에 52시간이 아니라 일주일에 120시간이라도 바짝 일하고, 이후에 마음껏 쉴 수 있어야 한다”는 2021년 7월 (대권 주자 시절) 윤석열 대통령의 발언은 이러한 기득권자들의 통념을 대변하는 말이다.

 

개발자들의 열정을 한껏 치켜세우면서 일에 매혹될 것을 끊임없이 독려하는 건 게임업계 사용자들의 오랜 통치 기술이기도 하다. 더욱이 이들은 개방성, 유연성, 창의성, 자율성 같은 온갖 그럴 듯한 말들로 업계의 이미지를 성공적으로 치장해 왔다. 반면 게임을 만드는 노동자들이 끔찍하리만치 혹사당하고 있는 모습은 아주 쉽게 망각된다. 노동자의 몸이 생산량을 맞추기 위해 가동시간과 출력을 최대한 높일 수 있는 기계와 다르다는 점도 의도적으로 무시된다. 결국 크런치 모드란 ‘미션 컴플리트’가 선언될 때까지 언제까지고 쥐어짜기, 몰아치기 노동을 강제하겠다는 것인데, 여기 어디에 개방성, 유연성, 창의성, 자율성이 들어찰 여지가 있단 말일까?

 

다행히 노동자들은 회사가 주창하는 아름답고 희망찬 개념어 대신 구체적인 협력과 연대의 방법을 모색해 나가고 있다. 2018년 9월 3일 국내 게임업계 최초로 출범한 한 노동조합의 창립선언문은 ‘크런치 모드를 워라밸 모드로’ 바꾸자고 동료들에게 제안했다. 이렇게 게임업계 노동자들은 일에 대한 열정과 책임감, 회사에 대한 희생과 헌신을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기로, 죽도록 일하다가 진짜로 죽어 나가지 않겠다고 결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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