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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풀어쓰는 비정규운동

 

 

긱 노동이란 무엇인가?

 

 

장귀연 • 노동권연구소 소장

 

 

 

긱(gig)이라는 단어의 유래

 

요즘 ‘긱 노동’, ‘긱 이코노미’라는 말이 종종 쓰이고 있다. 여기서 ‘긱’은 영어 단어인 ‘gig’이다. 영어 사전에서 gig을 찾아보면 “1. (대중음악가, 코미디언 등의) 공연. 2. 임시로 하는 일”이라고 되어 있다. 두 의미가 서로 큰 관련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데, 사실은 유래가 있는 말이다.

 

1920년대 미국에서 재즈가 막 뜨기 시작할 무렵, 술집 거리에 무명의 재즈 음악가들이 모여들곤 했다. 술집 주인들은 거리의 음악가들을 즉석에서 불러들여 하룻밤 공연을 하게 하고 삯을 주었다. 호응이 좋으면 며칠씩 계속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반대로 재수가 없으면 선택을 받지 못하고 길에서 트럼펫을 불어야 했을 것이다. 이렇게 하룻밤 술집에서 공연하는 것을 당시 속어로 긱이라고 했다. 말하자면 무명 음악가들의 애환을 담은 말이다. 이러한 유래를 가진 단어의 의미가 확장되어, 하루 또는 며칠 초단기로 일하는 것을 긱이라고 부르게 되었던 것이다.

 

그 광경을 상상해 본다. 땅거미가 내릴 때쯤 트럼펫이나 색소폰을 든 음악가들이 나타난다. 길모퉁이에서 구슬프게 울려 퍼지는 블루스 음계. 하늘의 어둠이 짙어지면 거리의 술집들이 하나둘 불을 밝힌다. 술집 주인이 나와서 어깨를 치고, 따라 들어가는 음악가에게는 하룻밤 연주할 공간과 하루 먹고살 수 있는 돈이 주어진다. “내일 또 와 주게”라는 말을 듣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해 재즈를 연주한다. 연주자의 흥을 실어 밤새도록 즉흥적으로 연주되는 구슬픈 또는 신나는 선율과 리듬이 이 상상의 광경에 흐르면서 제법 낭만적인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사실 긱으로 일하는 음악가들은 대개 하루하루 절박한 사람들이었다. 나중에 유명해진 재즈 음악가들도 나오기는 하지만, 이때는 지금처럼 연예 산업이 발달한 시대도 아니었다. 긱이라는 단어가 상징하는 하루살이 삶은 그리 낭만적이게만 볼 수는 없다.

 

재즈 음악을 빼면 이런 광경은 1920년대 미국이 아닌 곳에서도 언제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다. 새벽 인력 시장의 풍경도 매우 비슷하다. 땅거미 지는 검푸른 하늘 대신 동트기 전의 검푸른 새벽하늘 아래, 오늘 하루 선택되고 더 운 좋게는 며칠 갈 수 있는 일감을 찾아 서성이며 기다리는 사람들. 이것이 긱 노동자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간단히 말해, 긱 노동을 순우리말로 바꿔쓰면 바로 ‘날품팔이’이다.

 

긱 노동, 플랫폼 노동, 프리랜서 노동

 

이렇게 유래가 깊은 말이 근래 갑자기 부상한 이유는 정보통신 기술의 발전 때문이다. 디지털 플랫폼이 생기면서 플랫폼에 등록해 놓으면 일감이 생길 때마다 호출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긱 노동을 하는 것이 매우 용이해진 것이다.

 

하지만 전형적인 긱 노동의 풍경은 디지털 플랫폼의 시대에도 크게 다르지 않다. 길에 오토바이를 세워 놓고 열심히 핸드폰을 들여다보는 음식배달 라이더들, 밤을 밝히는 술집 거리 불빛 아래서 서성이는 대리기사들. 1920년대 미국 술집 거리에 모여들었던 재즈 연주자들의 모습과 그대로 겹쳐진다. 노동 플랫폼의 발달로 한 세기 전 긱 노동의 풍경이 더욱 광범위하게 재현되고 있는 것이다.

 

요즘에는 이렇게 긱 노동이 주로 디지털 플랫폼을 이용해서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에 ‘플랫폼 노동’과 ‘긱 노동’을 거의 같은 말로 쓰고 있다. 엄격하게 어의(語義)를 따지면, ‘플랫폼 노동’은 (디지털) 플랫폼을 통해서 일거리를 구해 일하는 것이고, ‘긱 노동’은 앞에서 설명한 유래대로 초단기 일을 하는 것을 지칭하니, 사실 뜻은 다르다. 디지털 플랫폼을 이용하여 단기 일감이 아닌 정규직 일자리를 구할 수도 있다. 최근에는 ‘플랫폼 노동’이란 용어를 노동 플랫폼을 통해 고용계약이 아닌 프리랜서 방식으로 단기 일감을 구하는 것에 사용하는 것으로 어느 정도 개념 정리가 되었지만, 플랫폼 노동이란 말이 나오기 시작했던 몇 년 전만 하더라도 ‘사람인’이나 ‘알바천국’ 같은 곳에서 정규직/비정규직 일자리를 구하는 것도 플랫폼 노동에 포함하기도 했다. 다른 한편, ‘긱 노동’을 하기 위해서 반드시 노동 플랫폼을 이용할 이유는 없다. 인력사무소 같은 전통적인 방식도 있고 인맥으로 구할 수도 있다. 다만, 디지털 플랫폼으로 긱 노동이 워낙 활성화되고, 플랫폼을 통해 긱 노동을 하게 되는 경우가 대다수를 차지하게 되자, 마치 동의어처럼 사용하는 것뿐이다.

 

플랫폼 노동이라고 하면 가장 흔히 음식배달 라이더나 대리기사 같은 경우를 떠올리기는 하지만, 이렇게 즉시 호출을 받아 일하는 것만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청소, 수리, 각종 형식의 문서 작성, 디자인, 프로그래밍, 번역이나 통역, 이런저런 분야의 레슨, 법률 상담 등 다양한 직종에서 일감을 구하는 사람들과 일할 사람을 구하는 측이 플랫폼을 통해 중개되고 있다. 말하자면, 프리랜서 또는 자기 영업장을 갖고 일하던 자영업자들도 이제 디지털 플랫폼을 이용해서 일거리를 구하는 경우가 적지 않게 되었다. 그리하여 다양한 직종의 ‘프리랜서 노동’이 ‘플랫폼 노동’과 등치되기도 하고, 심지어 ‘프리랜서 노동’을 ‘긱 노동’이라고 혼용하여 부르기도 한다.

 

‘프리랜서(freelqncer)’라는 말도 유래가 있는데, 서양 중세 시절 ‘자유롭게(free)’ 용병 계약을 맺고 싸움에 나가 돈을 벌던 ‘창잡이(lancer)’에서 비롯되었다. 엄밀하게 정의한 용어를 써야 하는 노동법 등에서 사용되는 말은 아니다. 그러나 통상 프리랜서라고 할 때는 고용계약을 맺지 않고 개인사업자로서 계약을 맺고 일하는 경우를 지칭한다. 고용계약을 맺고 일을 시키면 해고, 임금, 노동시간 등 노동조건에 대해서 노동법을 준수해야 하지만, ‘프리랜서 노동’은 그렇지 않다. 그런 의미에서 프리랜서 노동은 사용자에게 ‘자유’를 주는 방식이다. 반대로 프리랜서로 일하는 노동자의 입장에서도 일하는 시간이라든지 일하는 방법에서 사용자의 지시를 따르지 않고 알아서 하거나, 한 사용자만이 아니라 여러 사용자와 동시에 계약을 맺고 자기 시간과 방식에 맞춰 일하는 식의 ‘자유’를 가질 수 있다. (원칙은 이러한데, 사실상 사용자가 시키는 대로 일하는 ‘무늬만 프리랜서’이면서도 사용자에게만 노동법을 안 지켜도 되는 ‘자유’를 주는 경우도 적지 않으니, 이것을 비정규직 운동에서는 특수고용이라고 부른다.) 어쨌든 프리랜서 계약이 반드시 초단기 계약일 필요는 없다. 계약 기간이 1년일 수도 있고 몇 년일 수도 있다. 반면, ‘긱 노동’은 유래에서 보듯이 원래 매우 단기적인 임시 일을 지칭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긱 노동이 모두 프리랜서처럼 고용계약이 아닌 사업자 간 계약 방식으로 수행되는 것도 아니다. ‘일용직 고용’은 긱 노동이라고 할 수 있지만, 세금이나 사회보험 등 제도적으로 분명히 ‘고용된 노동’으로 간주하는 것이 많다.

 

결론적으로 ‘긱 노동’과 ‘플랫폼 노동’, ‘프리랜서 노동’은 어의(語義)상 각각 다른 뜻을 가진 단어들이다. 플랫폼 노동은 디지털 플랫폼을 통해 중개되는 노동을 지칭하고, 프리랜서 노동은 고용계약의 조건보다 더 자유로운 사업자 계약을 맺어 일하는 것을 가리키며, 긱 노동은 단기 일거리를 잡아 일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저 디지털 플랫폼을 이용하여, 고용계약이 아닌 프리랜서 방식으로, 긱 노동을 수행하는 경우가 많을 따름이다.

 

‘긱 이코노미’ 사회

 

이처럼 각각 다른 의미의 단어들이 마치 유사한 말처럼 혼동/혼용되는 이유가 무엇일까. 이 현상이야말로 노동이 극도로 불안정화된 현재 사회 모습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즉 고용계약을 하지 않는 프리랜서 노동이든, 디지털 플랫폼으로 중개되는 플랫폼 노동이든, 매우 단기의 일을 한다는 뜻인 긱 노동이 되어 버리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최근에는 오히려 이러한 극도의 노동 불안정성을 찬양(?)하는 듯한 얘기들이 나타나고 있다. 전형적인 한 예를 들어보자. 매일일보 2022년 12월 22일 “‘긱 이코노미’ 시대가 왔다”라는 제목의 기자칼럼이다. 이 글은 윤석열 정부가 노동시장 개편을 위해 구성한 미래노동시장연구회가 지난 문재인 정부에서 시행한 ‘주 52시간 노동시간 상한제’를 폐지하고 유연화해야 한다는 내용의 권고문을 낸 지 열흘 후에 쓰여졌다(그리고 주지하다시피 정부는 곧 이를 채택하여 소위 ‘주 69시간 노동시간 개편안’을 발표했다). 그래서인지 노동시간 논란에 대해 얘기하는 것으로 글을 시작한다. 노사 간에 입장 차가 있다는 것을 말하고 나서 “실제 현장의 근로자들은 노사 합의 하에 최대 60시간까지의 근무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고 갑자기 그야말로 아무 근거 없이 주장한다. “근로시간 감소에 따른 임금 하락은 악순환의 고리로 이어질 수 있다. 줄어든 임금을 올리기 위해 최저임금을 올리면, 물가 인플레이션을 불러온다. 결국 물가 인상으로 임금이 부족한 현상이 다시 재발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전국경제인연합의 통계 분석을 들어 “줄어든 임금을 메우기 위해 ‘투잡’을 결정한 이들도 많다”고 한다. 여기까지가 “‘긱 이코노미’의 시대가 왔다”는 것을 얘기하기 위한 서론이다. 그다음부터 끝까지 인용해 보자. “투잡 시대의 도래는 사회가 ‘긱 이코노미’에 도달했음을 의미한다. 긱워커는 업무단위, 수수료 등이 정해진 상태에서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단기 임시 노동자를 의미한다. 뉴워커라고도 불린다. 프리랜서는 본인의 역량, 경험 등을 상품화해 사업자와 협의하는 과정을 거쳐 업무를 진행하는 1인 서비스 비즈니스라는 점에서 노동의 유형을 따로 분류할 수 있다. 단순히 투잡이라는 개념을 적용하면 배달, 운송, 이벤트 스태프 등 단순 일자리를 떠올린다. 하지만 긱워커는 이러한 수준을 넘어 고도의 지식과 전문기술을 요하는 경우도 포함할 수 있다. 기업들이 정식으로 근로계약을 체결하지 않고, 상황별 필요로 하는 인력을 적기에 투입할 수도 있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데이터라벨링이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데이터라벨링은 인공지능(AI) 서비스나 제품을 개발할 때 내부 데이터에 이름을 붙이고 정의를 내리는 작업을 뜻한다. 일반 대중이 참여할 수 있는 데이터 라벨링 외에도 ‘의학’ ‘법률’과 같이 관련 지식을 가진 사람이 작업을 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 관련 지식 또는 실무 경험이 있는 사람이 필요한 경우도 긱워커를 사용하기에 적합하다. 아직 국내 정서상 긱워커에 대한 인식은 낮은 수준이다. 하지만 지속적으로 서구화되는 노동 환경은 결국 긱 이코노미를 불러왔다. 근로시간 감소에 기존 임금을 유지하기 위한 긱워커도 늘어나는 추세다. 이와 발맞춰 긱워커의 입지가 채용 시장에서도 올라갈 전망이다. 바야흐로 긱 이코노미의 시대다.”

 

이 기자도 긱 노동과 프리랜서 노동을 제대로 구분하지 않고 쓰고 있다. 게다가 ‘뉴워커’라는 의미 없이 공허한 단어(‘new’는 그저 ‘새롭다’는 뜻일 뿐이니)를 갖다 쓰면서 뭔가 새 시대의 노동인 것처럼 그럴싸하게 포장한다. 그리고 긱워커는 단순 일자리뿐 아니라 “고도의 지식과 전문기술을 요하는 경우도 포함”한다고 추켜세운다. 대표적인 사례로 데이터라벨링을 드는데, 데이터라벨링은 긱 노동 중에서도 가장 극단적인 것으로 거의 분, 초 단위로 건당 일을 하는 작업이다. “바야흐로 긱 이코노미의 시대”라고 단언하면서 “아직 국내 정서상 긱워커에 대한 인식은 낮은 수준”이지만 “지속적으로 서구화되는 노동 환경”에 “긱워커의 입지가 채용 시장에서도 올라갈 전망”이라고 칭송하다시피 끝맺고 있다.

 

기자가 보기에 긱 이코노미가 긍정적인 이유는 “기업들이 정식으로 근로계약을 체결하지 않고 상황별 필요로 하는 인력을 적기에 투입”할 수 있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지점은 노동자들이 긱 노동을 하는 이유를 “근로시간 감소에 기존 임금을 유지”하기 위해서라고 해석하는 것이다. 주 52시간 노동시간 상한제 폐지를 얘기하면서 시작한 글이다. 몸을 갈아가며 장시간 노동을 감수하거나, ‘정규적인’ 장시간 노동을 제한하려면 낮은 임금을 받고 그것을 벌충하기 위해 긱 노동을 하면서 역시 장시간 노동을 하라는 얘기다. 글 자체는 아주 긍정적인 분위기로 쓰여 있는데, 노동자의 입장에서 행간을 보면 협박을 당하는 것과 다름없다.

 

이외에도 일일이 예를 들 수는 없지만 많은 언론 글들에서 긱 이코노미에 찬사를 보내는 글들을 볼 수 있다. 원하는 시간에 유연하게 근무할 수 있고, 조직 문화에 신경 쓰지 않아도 되고, 다양하게 경력을 쌓을 수 있어 이른바 MZ세대가 긱 노동을 선호한다고 한다. 또는, 이제는 긱 이코노미의 시대라서 긱 노동을 하거나 준비하지 않는 사람들은 시대에 뒤처진 것처럼 이야기한다.

 

어안이 벙벙한 노릇이다. ‘날품팔이’를 ‘긱(gig)’이라는 영어 단어로 바꾸면 ‘힙’해지거나 ‘간지’나는 것처럼 생각하는 걸까. 애초에 긱이라는 영어 단어도 그렇게 긍정적인 의미가 아니었다. 우리말의 ‘날품팔이’처럼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불안정노동자들의 애환을 담은 말이었다. 그런데 어느새인가 의미가 전도되어 ‘뉴 워커’라며 마치 새 시대의 선도적인 노동자처럼 포장하고 있다.

 

하지만 MZ세대든 아니든 날품팔이로 일하고 싶어 하는 노동자가 있을까? 대개는 정규적인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서 어쩔 수 없이 하거나, 또는 위 인용한 글에서도 말하듯이 임금이 너무 낮아 그것을 벌충하려고 힘들게 투잡을 하는 경우일 것이다. 노동자의 입장에서는 안정적인 고용과 임금을 보장하는 일자리가 없어서 내몰리는 현상인데, 마치 우리 사회가 나아갈 긍정적인 방향인 양 말하고 있다. 원래 의미를 전도하고 전취하고 있는 것이다.

 

눈속임에 혼동하지 말고 정확하게 말해야 한다. 긱 이코노미 사회란 안정적인 고용과 임금의 일자리가 없어지고 노동자들을 날품팔이로 몰아내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자본이 원하는 방향일지언정, 노동자들에게는 우리 사회가 그 길로 가지 못하게 저항하고 막아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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