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전국불안정노동철폐연대

성명/입장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고통의 근원은 ‘비정규직’이라는 존재 그 자체에서 나오는 것이라는 점이야말로 지난 2~3년간의 비정규직 투쟁이 교시해 준 값지고 뼈아픈 교훈이었다. ‘비정규직’이라는 말은 단지 고용형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비정규직 투쟁의 의의를 정립해야 한다
IMF사태 이후 폭발적으로 분출 성장해온 비정규직 투쟁 과정에서 우리는 (매우 새삼스럽게도) '비정규직 철폐'가 비정규직 투쟁의 요구가 될 수밖에 없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즉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고통의 근원은 ‘비정규직’이라는 존재 그 자체에서 나오는 것이라는 점이야말로 지난 2~3년간의 비정규직 투쟁이 교시해 준 값지고 뼈아픈 교훈이었다. ‘비정규직’이라는 말은 단지 고용형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노동자의 단결을 파괴하고, 노동기본권을 분쇄하며, 자본의 초과착취를 쉽게 만드는, 정치적 의도가 내포된 전략을 의미한다. ‘비정규직’을 용인하는 선상에서 상처들을 치유하는 것이 아니라, 철폐를 지향할 때에야 비로소 운동의 계급적 성격이 분명하게 나타난다.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분쇄의 의미로서 ‘불안정노동 철폐’
‘비정규직 철폐’라는 주장은 우리의 궁극적 지향이 ‘정규직화’가 아니라는 의미를 내포해야 한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작은 요구들조차도 자본과 정권에 의한 폭력적 탄압을 감내해야 하는 상황에서 ‘정규직화’는 아주 절실한 요구일 수 있다. 하지만 정규직화 된 이후 자본에 의한 구조조정과 노동의 불안정화라는 현실에 또다시 직면할 수밖에 없음을 감안한다면 우리의 요구와 지향이 ‘정규직화’에 머물지 않아야 한다는 점은 자명하다.
신자유주의 시대로 돌입하면서, 자본은 더 이상 노동자들을 기업에 종속시키는 방식으로 통제하지 않는다. 자본은 항상적 위기를 경험하고 있기 때문에 안정된 고용보다는 언제라도 짜를 수 있는 ‘유연화된 노동’을 선호한다. 그러하기에 노동자들은 특정 기업에 강하게 종속되지 않고, 자본은 노동자 내부를 경쟁시키는 방법으로 통제력을 강화한다. 언제라도 고용될 수 있는 반실업상태의 비정규직이 깔려 있고, 생존의 위협이 크기 때문에 노동자들은 자기 노동력의 질을 높여서 조금이라도 안정적 일자리를 얻을 수 있도록 자신을 스스로 통제한다. 살아남기 위해 장시간 노동을 하고, 노동력 재생산을 위한 시간조차도 자본을 위해 자기 돈을 들여 사용한다. 그렇다면 ‘정규직 노동’은 과연 안정적인가? 물론 이 시대 이 나라에서 ‘안정적 고용’이란 정규직이건 비정규직이건 상관없이 말그대로의 허구, 비현실에 불과함은 자명하다. 또한 그러므로 우리 투쟁의 지향이 다시 기업 종속적 통제구조로 돌아갈 것을 향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비정규직 문제의 핵심을 (불평 부당한)비정규직 고용형태의 남용에서 찾기보다는 고용과 노동조건 전반을 불안정하게 만드는 자본의 ‘불안정노동화 전략’에서 찾고자 한다. 지금 비정규직 노동자 문제의 핵심은 정권과 자본의 구조조정 전략 자체와 맞닿아 있다. 최근의 구조조정 전략은 정리해고, 정규직의 비정규직화와 같은 직접적 공세 이외에도 외주․분사․아웃소싱 등의 간접적 구조조정, 성과급․연봉제 및 변형근로시간제 등의 질적 구조조정을 전방위적이고도 일상적으로 진행하는 것이다. 여성관련 근기법 개악, 노동시간단축을 명분으로 하는 근기법 개악, 비정규노동자 대책논의 등 최근 가시화되고 있는 노동법 개정논의는 이러한 구조조정 전략을 법제도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한 흐름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비정규직 노동자의 문제는 단순히 정규직 노동자에 비해 차별받는 ‘주변부 노동자’ 혹은 ‘미조직 노동자’의 감축과 보호의 문제가 아니라, 일자리 전반의 불안정화, 노동조건 전반의 하향평준화, 노동기본권 일반에 대한 부정이라는 ‘노동의 불안정화’전략에 대항한 투쟁으로 인식되어야 한다.
더욱이 노동의 불안정화에 공격당하는 노동자들에는 중층적인 하청구조에 의해 착취당하는 영세사업장 노동자, 성별분업 및 차별구조에 억압받는 여성노동자, 이주노동자, 실업자, 장애인들이 있다. 정규직/비정규직, 여성/남성, 장애인/비장애인, 내국인/외국인, 취업자/실업자등의 다양한 분할선들이 중첩되면서 노동의 불안정화는 더욱 심화되고 있다. 대부분의 장애인 노동자가 영세사업장 노동자이고 계약직이라는 사실, 실업자는 대개 영세사업장이나 비정규직으로 재취업된다는 사실, 여성의 80%이상이 비정규직이라는 사실은, 비정규직화에 한정되지 않고 노동의 불안정화라는 관점에서 신자유주의 시대 노동운동에 임해야 함을 보여준다.

계급적 연대의 복원
‘비정규직 철폐’라는 우리의 요구는, 정규직과 비정규직이라는 자본의 분할을 인정하지 않고 노동자들의 계급적 연대를 다시 복원하겠다는 의미를 담아야 한다. 자본은 노동자들의 집단성을 부수고, 개별경쟁을 강화하며, 노동자들 사이에 위계를 만들기 위해서 분할을 시도한다. 특히 정규직과 비정규직 사이의 위계를 강화하기 위해 다양한 관리전략을 함께 진행한다. 정규직들에게 허위의식을 심어놓고, 비정규직들에게는 각종 차별로 무력감을 증폭시킨다. 정규직 노동자들이 비정규직을 차별하는 모습은 자본의 전략에 정규직 노동자들이 얼마나 깊숙하게 포섭되어 있는가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이런 자본의 관리전략과 분할을 넘어 노동자들의 집단성을 재구축하고, 노동자의 계급적 연대를 실현하는 것이 바로 ‘비정규직 철폐’이다.

기존 노동운동의 대응방식은 혁신되어야 한다
비정규직 철폐투쟁은 구조조정반대투쟁의 맥락 속에서 강화되어야 할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우리 노조운동은 비정규직 문제를 별개의 문제로 생각하고 대응해왔다. 우선 노조운동진영은 1995년 민주노총 건설로 일정하게 안정된 교섭제도와 임금 및 노동조건을 유지하고 강화하려는 전략에 집착해왔다. 이러한 전략은 이미 1980년대에 자본주의 위기가 가시화되고 2차 대전 이후 안정화된 제도적 배열이 잠식되자 많은 서구의 노조들이 사용했던 전략이다. 이러한 제도유지전략에서 가장 손쉽게 취하는 것이 상층의 정책적, 정치적 능력을 강화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상층 협상력은 영원히 유지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특히 협상력의 기반이 되는 조직확대가 주요한 정책 수단으로 된다. 위기에 처한 노동조합운동이 조직을 확대함으로써, 기존의 제도와 교섭력을 유지하고자 시도해 온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접근은 노동대중의 권리를 일련의 제도개선요구로 치환시킴으로써 권리와 권리를 맞바꾸는 형태의 협상을 용인하게 되는 치명적 약점이 있다. 1997-8년 노동법 개정과 노사정합의를 통해 민주노총의 합법화와 정리해고제․근로자파견제․변형근로제를 맞바꾸게 된 과정은 바로 이러한 약점을 극명하게 드러내 준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비정규직 조직의 제도적 장애를 없앤답시고 비정규직 보호입법을 요구하는식의 대응은 자칫 노동조합 조직률 확대에만 급급해하며, 종국에는 정규/비정규직 노동자의 기본권 자체를 파괴하는 방향으로 나갈 위험을 안고 있다 할 것이다. 실제로 올해 초 있었던 복수노조 금지와 전임자 임금지급의 맞거래에 대해 민주노조운동에 몸담고있는 많은 이들이 이 문제를 애써 외면하려 했다. 반면 정규직의 정리해고를 줄이기 위한 주5일근무제가 전체노동자의 노동조건 악화로 이어진다는 것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는 너무나 작았었던 것이 사실이다. 이같은 현실은 기존의 노사제도 유지에만 집착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결과를 초래하게되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하반기 들어 민주노총이 비정규직 장기투쟁사업장 문제보다는 비정규직 보호입법 쟁취에 힘을 실는 것은 그래서 더욱 우려스런 흐름이다.
비정규직 문제에 대한 기존 노조운동의 또다른 경향은 일종의 '숙련형성 전략'이었다. 이는 노동자들 스스로가 생산성을 높임으로서 자신의 서비스에 대한 대체불가능성을 확보하여 임금수준을 높이거나 고용안정을 확보해나가자는 전략이다. 이러한 '숙련형성'전략은 노동자의 권리가 위협받는 경우 노동계급 상층이 손쉽게 선택하는 실용적 전략이었다. 비정규직들이 투쟁속에서 [비정규직 철폐]외엔 대안이 없음을 깨달을 때, "비정규직을 쓸 이유가 없는 직종(지속적이고도 고숙련을 필요로하는)에 대한 비정규직화는 잘못된 것이다. 그러나 세계적 조류 속에서 비정규직화 전부를 부정할 순 없다."라고 주장하는 목소리는 높아져갔다. 그래서 업종 자체가 비정규직화한 특수고용직 노동자들은 정규직화를 주장하기 보다는 법제도 개선을 통한 권익보호쟁취에 힘써야 한다고 하였다. 파견, 용역같은 간접고용 또한 제도 자체의 철폐는 불가능하고, 합리적 필요성이 있는 업무에만 도입되고, 간접고용 노동자의 권익을 보장할 수 있도록 법제도를 개선하자는 주장들이 있다. 그렇다면 어떤 업무까지가 비정규직화되어선 안될 업무이며, 비정규직화 되어도 좋은 업무란 무엇인가. 그 기준을 둘러싸고 정권 및 자본과 함께 노사정위 안에서 논의하자는 주장은 구조조정과 비정규직화의 현실을 무시한 것이다. (정규직이든 비정규직이든) 노동자에 대한 구조조정이 추진되는 기준은 '노동의 응집된 대응이라는 타격을 입지 않고 구조조정을 어느 범위까지 할 수 있는가'이다. 소위 경쟁력 강화가 세계적 조류인 이 시대에, 자본은 어디까지가 합리적인 구조조정의 범위인가 따위를 생각하지 않는다. 합리적인 구조조정의 범위, 합리적인 비정규직화의 범위는 머릿속에서 만들어낸 환상이자 착각일 뿐이다. 이러한 전략은 숙련과 비숙련이라는 허구적인 구도로 노동자 계급을 분할하는 효과만 가져올 뿐이다. 또한 이러한 전략은 고숙련에 기반한 산업적 팽창의 국면에서만 나름의 유효성을 가질 뿐이고 현재와 같이 기존의 주도산업이 정체를 겪는 자본의 위기국면에선 역사적 유효성을 상실한다.
따라서 우리가 분명하게 인식해야 할 것은, 일정한 실리주의적 지향 속에서 기존의 전형적 투쟁형태와 전형적 조직형태를 유지하려는 전략은 지금의 경제위기에선 실현불가능하며, 그것이 지속적으로 스스로의 발 밑을 허물고, 실패를 반복되게 만든다는 엄중하고도 냉혹한 현실이다.

계급적 입장을 확고하게 하면서 현실의 과제를 풀어나가자
계급적 입장을 확고히 한다는 것은 연대의 원칙을 확고히 하는 것이다. 정규직과 비정규직 사이에 만리장성을 쌓는 그 어떤 시도도 반대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반대가 우리의 현재 한계를 정당화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비정규직 철폐투쟁에서 해결해야할 무수한 문제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구조조정의 여러 양태들 속에서 나타나는 불안정노동화의 양상에 대한 구체적 이해, 조직화 방안에서 초기업단위 노조 조직화가 갖는 의미와 한계들을 구체화하면서 이후 비정규직 노동자 조직화의 유력한 가능성을 만드는 것, 노동기본권 쟁취의 구체적 전술과 기획을 마련하는 것, 정규직 노동자들을 설득하고 조직하는 의미있는 안을 마련하는 것, 비정규노동조합의 생존을 위한 가능성을 최대한 높이는 것, 비정규노조운동을 일반화하기 위한 기획을 마련하는 것 등 우리 앞에 놓인 구체적 과제들은 매우 많다. 이런 과제는 투쟁의 경험을 공유하고, 일반화할 수 있을 때 더욱 현실에 근접하게 해결될 것이다. 때로 우리는 원칙과 현실을 분리시켜서 이런 과제들을 아주 편의적으로 해결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그런 유혹을 떨치고 계급적 입장의 기반 위에서 우리 앞의 구체 과제들을 풀어나갈 때 비정규철폐투쟁은 더욱 풍부해질 수 있을 것이다.

투쟁의 성과를 축적할 수 있는 주체를 확보하고, 조직을 만들어가자
비정규직들의 선도적 투쟁 과정에서 헌신적으로 비정규 투쟁을 지원하고, 비정규직을 조직했으며, 그 투쟁을 벌여왔으며, 이제 그 투쟁을 노동운동의 중요한 문제로 승인하고 함께 하고자 하는 동지들이 광범위하게 축적되어 있다. 그 동지들이 정규직 현장이건, 비정규직 투쟁광장이건, 단체이건 정치조직이건, 민주노총 등 상급단체에 있건 그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비정규직 철폐투쟁을 전체 운동의 과제로 만들고, 자신이 속해있는 공간에서 이 투쟁을 실현하고, 그 투쟁의 성과들을 공유해서 모두의 것으로 만들고, 그렇게 일반화된 내용에 기초해서 비정규직 투쟁에 대한 전국적인 기획에 힘을 쏟아갈 모든 동지들이 ‘함께’ 모이는 것이다. 그 힘을 바탕으로 불안정노동철폐운동의 전진을 이루자.


위로